작가 소개 및 글
회원마당
작가소개 및 글
작가 저서
사진 자료실
이달의 회원작품
박현정

미국 캘로포니아 라데라 랜치 거주
2018년 미주 한국일보 문예공모전 시부분 입상
2019년 워싱턴 문학 신인문학상 수필부분 입상
2019년 미주 아동문학 신인상 동시부분 입상
2020년 미주 한국일보 문예공모전 수필부분 입상
제25회 워싱턴문학 신인문학상 수필부문 가작
도시락의 시간
박현정
새벽 3시 30분, 어김없이 눈을 떴다. 1층 부엌으로 내려갔다. 창문을 열었다. 밖은 아직도 까만 보자기를 덮어쓰고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다. 캘리포니아도 이제 겨울이라고 제법 얼음 같은 바람이 분다.
압력 밥솥 뚜껑을 열었다. 물에 푹 담가 두었던 현미와 콩들이 얼굴을 빼꼼히 내민다. 밤사이 물을 먹고 통통해진 얼굴들이 귀엽다. 물을 좀 더 붓고 뚜껑을 덮어 가스 불을 켰다. 잠시 후 압력솥에서 칙칙폭폭 소리가 난다. 고슬고슬한 밥 냄새가 퍼진다.
이렇게 아침밥을 준비하고 도시락을 싼 건 결혼하고부터였다. 벌써 16년이 되었다. 엄마가 해 주는 밥만 먹던 내가 다른 이를 위해 아침밥을 하고 도시락을 만드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오늘 아침은 또 뭘 해서 주나? 점심으로 어떤 걸 만들지? 거창한 음식을 하는 것도 아닌데 늘 고민이 된다. 우리 엄마는 그 많은 도시락을 어떻게 싸셨을까?
엄마는 새벽마다 도시락을 7개나 준비하셨다. 고등학교 다니는 큰언니, 작은언니가 각각 2개씩, 나와 여동생, 남동생이 1개씩이었다. 각기 다르게 생긴 플라스틱 도시락통과 반찬통이 군대의 행군을 보는 듯했다. 멸치볶음, 콩장, 어묵볶음, 콩나물, 시금치, 김치 볶음이 대표 주자들이었다. 하지만 같은 반 친구 수경이 것은 달랐다. 분홍색 코끼리 보온 도시락이었다. 비엔나소시지 볶음, 돈가스, 메추리가 들어간 장조림으로 “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게도 특별한 것은 있었다. 엄마는 항상 밥 위에 계란 후라이를 얹어주셨다. 다른 반찬은 없냐고 물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래도 가끔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 이후에는 좀 달라졌다. 롯데 살로우만 햄이나 백설 불고기 햄이 반찬통에 들어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참치캔을 통째로 도시락 가방에 넣어주셨다. 참치캔은 특히 내가 좋아했다. 엄마가 들기름에 구운 김에 계란 덮은 흰밥을 얹고 그 위에 참치와 볶음김치를 올려주면 화룡점정이었다.
나는 짝꿍 승희랑 화요일, 2교시 수학이 끝나면 도시락을 미리 먹었다. 머리에서 쥐가 나는 시간이었으니 에너지가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 지당한 말씀이라고 깔깔거렸다. 다음 시간이 예쁜이 가정 선생님이니 왜 냄새나게 밥 먹었냐고 혼날 일도 없었다. 쉬는 시간 10분. 그 안에 도시락 한 개쯤 먹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밥과 반찬을 꼭꼭 씹어 먹는다는 것은 사치였다. 희한한 것은 엄마의 도시락은 아무리 빨리 먹어도 체하는 법 없이 소화가 잘 되었다.
까불이 희경이는 수업 시간에도 도시락을 까먹었다. 김에 밥을 싸서 입에 쏘옥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그녀는 수업 시간에 몰래 먹는 도시락이 제일 스릴 넘치고 맛있다고 했다. 친구들은 희경이에게 반칙이라고 놀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항상 한문 시간에만 도시락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한문 선생님은 냄새를 맡지 못하셨다. 한번은 뿡뿡이 인숙이가 수업 시간에 방귀를 뀐 적이 있었다. 군대 화생방 수준이었다. 반 아이들이 코를 막고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은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냐고 하셨다. 비염 때문에 코만 킁킁거리셨다. 선생님은 눈도 무척 나쁘셨다. 두꺼운 뿔테 안경은 그냥 눈이 나쁘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용도로 쓴다고 봐야 했다. 거기다 낼모레면 정년퇴직을 하시는 분이셨다. 그런 분 시간에 스릴 운운하는 것은 반칙이 아닌가?
나와 친구들은 한 달에 한 번 특별식을 해 먹었다. 짝꿍 승희가 집에서 양푼 그릇을 가져오고 내가 엄마표 맛 고추장을 가져오는 날은 완벽한 비빔밥을 만나볼 수 있었다. 기름집 딸내미 은이가 아침에 갓 짠 참기름을 한 병 통째로 들고 오는 날은 갈비찜이 와도 이길 수 없었다. 그날만큼은 평범한 반찬들이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점심을 가져오지 않는 아이들도 걱정 없었다. 도시락 뚜껑 하나 빌려서 밥을 한 숟가락씩 얻으러 다녔다. 그러면 두 공기는 족히 나왔다. 그것도 귀찮은 아이는 포크 숟가락만 들고 다니면서 반 친구들의 도시락을 습격했다. 친구들의 핀잔은 애교로 여기는 것 같았다. 골라 먹는 재미를 놓치는 건 정말 어리석은 짓 일 테니 말이다.
엄마에게 우리들 도시락 7개를 어떻게 싸셨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는 힘든 줄 몰랐다고 하셨다. 그저 따뜻하게 지은 밥을 자식들에게 먹이고 정성을 들였다고. 엄마가 해 준 밥 먹고 아프지 말라는 간절한 마음뿐이었단다. 잠을 못 자서 고단해도 그때가 정말 좋았단다.
나에게 주변 사람들이 말한다. 저녁에 미리 마련해 두면 편하지 않느냐고. 뭐 하러 일찍 일어나느냐고. 나도 그 정도는 안다. 하지만 아침 일찍 정성스럽게 아침밥과 도시락을 준비하는 시간은 소중하다. 어느새 나는 엄마를 닮아버렸다. 그래서 부부싸움을 한 다음 날도 아침밥과 도시락을 준비한다. 그동안 미운 마음은 버리고 정성만 담는다. 전날, 우리가 싸웠다는 것도 잊고 남편이 조용히 말한다. 콩나물국이 시원하고 얼큰하다고. 어제 점심으로 먹은 치킨 샌드위치도 맛있었다고. 고맙게 잘 먹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