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소개 및 글

회원마당

작가소개 및 글

작가 저서

사진 자료실

이달의 회원작품

정두경

Author
Admin
Date
2009-03-16 13:19
Views
7886

 정 두경

정두경씨-사진.jpg

 

 

 

* 전남 나주 출생

* 광주 무양중학교 교사

* 워싱톤 문인회원

 

***************************************************************************************************************

 

 

충무공 이순신 (1545~1598)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장군의 우국충절과 외로운 정서를 읊은 시조이다.  오늘날 내우외환의 위기 상황에서 애국 애족의 대명사로 온 겨레의 태양으로서 존경 받는 공의 생애를 탄신 461주년을 맞아 다시 조명해 보는것이 구국의 진로와 지표로 확신 하기에 뜻 깊은 일로 생각된다.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님의 업적과 인간상이 날로 새롭게 높이 평가되고 있음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욱 밝아지는 불빛처럼 나라의 어려운 현실과 미래를 밝혀주는 등대가 되기 때문이다.

           순신은 청빈하고 엄격한 선비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때 부터 글과 무술을 즐겼고 지도력과 지능이 탁월한 꼬마 대장으로서 명성을 떨쳤으며 곧은 성격과 정의감이 강한 소년기를 거쳐 비록 뒤늦은 관군 진출이 었지만 실망과 후회없는 성실한 노력과 능력으로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뜻을 이루었다.

           그는 군 생활중 직속 상관인 서익의 부당한 청탁에 단호히 거절한 청백한 정의의 용장으로서 본임을 다 했으나 이로 인한 파직에도 원망하지 않고 본인의 의무를 다한 관대 하고 대범한 군인으로서 존경을 받았고 원균의 시기와 질투에 의한 모함과 중상으로 죽음의 위기에서도 백의종군으로 희생적인 위국 충성과 구국의 대열에서 책무를 다 하였다.

           세 차례의 모함 중상에 의한 부당한 파직의 역경 속에서도 원망과 실망없는 재기로 나라 지킨 백의 장군!  임진왜란의 싸움터에선 필생즉사(必生卽死), 필사즉생(必死卽生)을 좌우명으로 지피지기면 백전백승(知彼知己면 百戰百勝)을 기본 전술로 한 학익전법(鶴翼戰法)을 구사하여 전승무패로 적의 해상 격퇴와 진로를 차단 함으로써 나라와 겨레를 구한 전과는 실로 전 세계 전사에 없었던 일로 오죽하면 적국인 일본 제독, 도고헤이 하찌로, 까지 세계 해전사의 영웅인 영국의 넬슨보다 더 위대한 명장으로 추앙한 사유는 넬슨은 국가에서 마련된 모든 전투 장비로 영웅이 되었지만 순신은 손수 무에서 유를 창출하여 전승한 영웅으로 높은 평가를 했다고 한다.

           명량 해전(1597)에선 불과 12척의 전함으로 10배가 넘는 133척의 왜 적함을 격퇴한 전과는 ‘소수는 다수의 적을 상대 할수 없다’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의 뜻을 무너뜨린 전술과 용맹을 겸비한 위대한 지도력과 부하에겐 가족같은 사랑과 정을 베푸는 덕장이기도 하다.

           7년간의 기나긴 난중일기에 하루도 빠짐없는 나라와 노모님 걱정으로 효심이 지극한 공이었지만 가까운 거리의 어머님을 3년간 뵙지 못했고 위독한 부인의 병고에도 나라의 위급을 우선하여 찾지 못한 공사를 엄격히 구분한 희생과 멸사봉공의 정신!  많은 공적으로 승진 함에도 자랑과 자만이 없는 겸손하고 고매한 인격자!  정도(正道)라면 반드시 실천하는 언행일치의 성실한 인간!  선견지명(先見之明)과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지혜로 외적의 침공에 대비 평소 군비를 정돈 하였고 세계 최초의 철갑 거북선을 창제한 지성과 창의성!

           국왕의 의주 피난으로 인한 국정 공백때는 둔전제 실시로 군량미확보와 군비대책은 물론 피난민 구호에 이르기까지 힘을 다 하였고 해로 ‘통행첩’제도로 간첩

활동을 봉쇄 조국을 수호하고 안정시킨 불멸의 공적은 공의 위기 관리 능력과 영도력을 알수 있으며 능하신 필재와 시조의 사설에도 구국과 호국의 시름밖에 없는 그 님!

           당쟁의 와중에 가진 모략과 중상에도 초연 하였고 이러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와 강한 의지력, 자립과 근면성, 분별력과 민주정신은 자연인으로서도 명실공히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이룬 원만한 인격자임을 알수 있다.

           그 뿐 아니라 능력과 믿음이 많았기에 수 많은 피난민이 그의 뒤를 따랐고 진실과 덕망을 쌓았기에 공을 맞이하는 환영과 전송의 행렬이 수 십리를 이루었다니 실로 백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위대한 지혜와 덕성을 겸비한 민족의 성웅이요 지도자임을 새삼 절감케 한다.

           이와같이 님께선 기본 원칙 위에서 수세에서 공세로!  열세에서 강세로!  위기를 기회로 만든 그 능력!  이 모든것은 오늘날 우리에겐 정치와 사업경영에서부터 가정과 개인에 이르기 까지 모델과 귀감이 됨을 강조 하고자 한다.

         만일 장군이 아니었다면 어느 누가 임진년 국란을 극복하고 아니면 이 나라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풍전등화의 지난 조국의 운명!  또한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임란전과 유사한 안으로는 양분된 이념의 갈등과 끝이 보이지 않는 부정부패 밖으론 일본의 독도 야욕과 반성없는 역사 왜곡, 잠꼬대 같은 중국의 고구려 영토 야욕 등 이런 현실속에서 충무공의 지혜와 덕망, 리더십을 겸비한 영도자의 출현을 갈망하고 온 국민은 공의 얼과 정신을 사표삼아 실천하는 국민이 될때 오늘의 난국을 돌파 하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한다.

 

 **************************************************************************************************************

Total 1

  • 2009-07-24 11:07

    ************************************************************************************************************************************

                                         
                                                
    한글 : 훈민정음  (訓民正音)

    <?XML:NAMESPACE PREFIX = O />

     

     

    라 말이 중국과 서로 달라 중국 문자인 어려운 한자로서는 서로 뜻을 통할 수 없고 이를 배울 수 없는 백성들은 하고싶은 말이 있어도 이를 적는 쉬운 글자가 없어 그 뜻을 나타내지 못하니 나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새로 스물 여덟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널리 쓰기를 바라노라.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소리” (훈민정음) 서문에 창제 동기와 그 취지를 밝히고 있다.

                 대인과 옥동자의 출산은 큰 진통과 난산이 수반된다고 하였던가,        성군 한글대왕 세종께서 창제하신 훈민정음도 결코 순산 아닌 큰 고통과 수난속에서 탄생하였으니 사대 모화사상의 학자 신하들의 반대와 냉소 가운대에도 오직 굽힘없는 겨레 사랑 일념으로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를 주축으로 한 우리글 연구기관을 집현전과 정음청에 설치 외롭게 추진하여 얻은 우리 한글이 전세계 문자 가운대 가장 쉽고 과학적이며 독창적인 문자로 자랑스럽게 여기는것도 대왕의 가장 큰 불멸의 업적으로 역사는 기록 하고 있다.

                 훈민정음과 세종대왕의 첫 작품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는 조선 창업의 공을 기리고 찬송하는 노래로서 백성에게는 건국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홍보하는 의도로 사료되오며 가장 오래된 책으로 알려 있고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은 석보상절을 통한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고 소헌왕후의 명복을 기원하는 노래로서 고려 국교인 불교 사상을 무마하고 포용하는 뜻이 담긴것으로 보이며 억불숭유 정책을 국시로 삼았던 이조시대 부처의 공을 숭모 한것은 왕후에 대한 지극한 추모와 독자적인 신앙으로 보아진다.  이 외에도 고려사와 석보상절의 작품이 기록에 남아있다. 

                 우리 문자가 없던 예전에는 중국 문자인 한자를 사용 했으나 너무 어려워 양반층에 국한된 귀족 문자로 일부 상류층에만 유통되었으며 이후 삼국시대 신라 설총이 창안한 이두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로 이 또한 어려워 주로 중류층에서 통용된 문자로 한정되었고 우리 고유의 문자 훈민정음은 사대 모화사상의 그늘에서 빛을 보지 못 했으니 일반 부녀자 승려 천민이 사용하는 문자로 이른바 계층적 문자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우리 문자의 별칭으로는 낮은 표현으로 속된 문자라는 언문(諺文), 부녀자 승려 일반 천민층이 사용 한다는 암클, 한자는 진문에 반하여 한글은 가짜글이란 호칭으로 냉대와 외면을 당했으며 두음이 합하여 하나의 소리를 낸다는 반절(反切) 이라고도 불렸다. 

    우리 글자의 별칭이 말 하듯 파란만장의 역경이 훈민정음 반포 (1446, 세종 28) 이후 이조 말엽까지 지속 되다가 갑오경장 (1894) 이후 한문과 이두 한글 혼용을 효시로 1895년에 비로소 학교와 관청이 동시에 사용 하였으며 이와 함께 실학사상과 근대화의 물결 기독교 천주교 전래로 인한 인쇄술 발달과 함께 한글의 보급이 크게 진전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크다, 바르다, 으뜸가다, 한나라)의 뜻을 가진 을 접두어로한 한글의 명칭은 1900년대 한글 운동으로 이를 민족 문자로 자리잡은 주시경 선생에 의해 창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한글 최초 신문으로 독립신문과 제국신문이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이후 일제때의 한글 말살 정책으로 또 한번의 홍역과 시련을 겪은 우리 민족의 고유문자 한글 559주년을 맞이한 이때 살펴야 할 점은 보석인들 버려두면 제 빛을 발산할까.  보배로운 우리 글자 갈고 닦아 빛낼 주체 그 몫은 우리 국민 아니던가.

     

     

    *참고 훈민정음(자모): 28   (현재 사용: 24)

     

    <자음> (닿소리) , , , , , , , , , , , , , , , ό, ō  (17)         

    현재 사용 (14)

     

    <모음> (홀소리) , , , , , , , , , ,   (11)            현재사용 (10)

     

    *현재 사용하지 않는 자모 (4)  , , ό, ō 

    **************************************************************************************************************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