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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둘러 말하기와 시치미 떼기로서의 시
<한국동서문학 2018년 여름호 시 계간평>
에둘러 말하기와 시치미 떼기로서의 시
박남희
시는 산문과는 다르게 말하기 방식에서 일반적으로 직설법을 피한다. 그것은 현대시가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사유와 상상력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은 늘 단순하고 관습적인 범주에 머물러 있어서 새로운 인식의 차원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시를 쓸 때 비유법을 사용하거나 반어나 역설 등 아이러니의 화법을 사용하는 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직설법으로는 이를 수 없는 고도화된 시적 공간을 창출해내어 새로운 인식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지칭할 때 그 대상은 언어에 의해서 존재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인간이 언어로 지칭한 모든 대상이 기표와 기의, 즉 시니피앙(signifiant)과 시니피에(signifié)의 구조를 가지고 하나의 기호와 의미가 일대 일의 대응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는 일상적인 글에서는 그 의미가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시어로 사용될 경우에는 여러 가지 시적 상황에 따라 의미가 변용되어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은유나 아이러니의 화법을 통해서 구현되는 에둘러 말하기와 시치미 떼기이다.
지난 호에 발표된 시들을 살펴보면 에둘러 말하기와 시치미 떼기 화법으로 시적 대상을 새롭고 낯설게 표현한 경우가 여럿이 보인다.
이름 짓기를 좋아하는 할머니가 있어, 침대는 옥상이라 부르고 의자는 나무라 부르고 빗자루는 벗이라 부르지, 할머니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애완동물도 꽃도 좋아하지 않아, 할머니가 좋아하는 것은 오직 사물들, 탁자, 서랍장, 냉장고, 신발을 좋아해, 주머니종, 모자, 은수저를 좋아해, 사물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할머니의 취미, 이름을 바꿔 부르며 하루를 버티는 할머니, 옥상에서 잠을 자고 나무에 앉아 밥을 먹고 빗자루를 타고 돌아다니는 건 할머니의 사생활, 떠돌이 개가 오면 돌멩이를 던지고, 고양이가 오면 종주먹을 휘두르는 할머니, 다시는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소리치면서 먹을 것을 꼭꼭 챙겨주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 이름 짓기를 좋아하는 할머니가 있어, 할머니가 좋아하는 것은 사물들, 이별은 이제 그만, 나는 나보다 오래 있는 것들이 좋아
―정선희「이름 짓는 할머니」전문
정선희의 시에 등장하는 이름 짓기를 좋아하는 할머니는 언뜻 보면 어딘가 비정상적인 할머니처럼 보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할머니야말로 진정으로 시인이다. “침대는 옥상이라 부르고 의자는 나무라 부르고 빗자루는 벗이라”부를 수 있는 할머니의 화법이야말로 낯설게 하기로서의 시인의 화법이 아니고 무엇이랴. 화자는 할머니가 어떤 대상을 다르게 부르는 것이 할머니의 취미이고 하루를 버티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고 기술하면서 할머니는 “애완동물도 꽃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떠돌이 개가 오면 돌멩이를 던지고, 고양이가 오면 종주먹을 휘두르”며, “다시는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소리치면서”도 “먹을 것을 꼭꼭 챙겨주는 사람”이 할머니라는 점에서 할머니의 화법은 반어법에 더 가깝게 읽힌다. 이 시에서 할머니가 사람이나 동물이나 꽃보다 사물들을 좋아하는 것은 이별이 싫기 때문이다. 이러한 할머니의 독특한 취향은 아마도 가족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할머니 곁을 떠난 경험에서 오는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내가 들에 나가 들에게 고통을 말할 때
다 듣고 난 들이
바람을 불어오게 놔두고
논둑을 허물어지게 놔두어서
나는 바람을 실컷 맞으며
논둑을 조심스레 밟으며 돌아오고,
내가 산에 올라 산에게 고통을 말할 때
다 듣고 난 산이
낙엽이 구르도록 놔두고
바위가 가만하도록 놔두어서
나는 낙엽을 오래 바라보며
바위에 한참동안 앉았다가 내려오고,
내가 당신에게 다가가 고통을 말할 때
당신이 미처 듣지도 않고
들에 나가 보지 않은 탓이라거니
산에 올라 보지 않은 탓이라거니 하면
당신을 데리고 들에 나가
당신을 데리고 산에 올라
내가 당신으로 하여금 고통을 말하게 한다
그러면 들도 산도 여럿이 된다
그러면 나도 당신도 여럿이 된다
―하종오「고통을 말할 때」전문
인간이 말하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소통을 위한 것이다. 화자는 고통이 느껴질 때 들이나 산으로 나가서 고통을 말한다. 그러면 들이나 산은 자연의 행위를 통해서 화자에게 응답을 하고 화자는 그러한 자연의 대상물들을 몸으로 감각함으로써 위로를 받는다. 물론 이 시에서 자연이 하는 행위는 화자의 말에 대한 자연의 의도된 반응이라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자연을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화자는 이러한 자연을 자신의 호소에 대한 반응으로 읽음으로써 위로를 받게 된다. 하지만 인간끼리는 이러한 소통이 어렵다. 그것은 인간이 타자와 소통을 하지 않고 자신을 고집하려는 이기심 때문이다. 이에 화자는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을 데리고 들에 나가거나 산에 올라 들이나 산에게 고통을 말하게 하는 방식으로 당신에게 나의 고통을 이해시킨다. 그 결과는 놀랍게도 들도 산도 여럿이 되고 나도 당신도 여럿이 되는 인식에 이른다. 이것은 나와 당신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나는 나이고 당신은 당신이라는 대타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하지만 자연은 인간에게 나와 당신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임을 깨닫게 함으로써 나와 당신 사이의 대타의식을 허물어버린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당신이 나도 될 수 있고 나도 당신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즉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의 고통을 자연을 통한 에둘러 말하기 방식으로 해소하고 있다.
얼굴을 개명할 시간
전단지엔 연습용 얼굴은 안전해라고 쓰여 있다
제멋대로의 점 선 면들
끔찍한 제목의 얼굴들
언제까지 고독해야 되나
결코 뒤태를 보이지 않는 얼굴
얼굴은 고집이 세지
얼굴은 참을성이 없지
누구십니까
누구이고 싶습니까
남은 얼굴을 어디에 쓸까 두리번거리는 얼굴들
―권정일「얼굴의 이해」전문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 얼굴을 통해서 인간은 세상과 소통하면서 자아의 존재성을 확인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얼굴에 만족하지 못하고 종종 다른 얼굴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강남에 성형외과가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은 성형외과에서 뿌린 전단지를 보면서 성형의 유혹을 느낀다. 그 전단지들은 인간에게 ‘얼굴을 개명할 시간’을 자각하게 해주고 “연습용 얼굴은 안전해”라고 유혹을 한다. 하지만 그 전단지를 본 화자는 전단지에 드러난 “제 멋대로의 점 선 면들”을 보면서 “끔찍한 제목의 얼굴들”이 떠올라 얼굴 개명을 망설이게 된다. 그러면서 화자는 “언제까지 고독해야 하나” 걱정을 하면서 고집이 센 자신의 얼굴을 탓하면서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하지만 얼굴은 고집도 세지만 참을성이 없어서 결국 성형을 하게 되고, 화자는 성형을 한 자신을 향해 “누구십니까/누구이고 싶습니까” 자문을 하게 된다. 시인은 이렇게 성형이 된 얼굴을 ‘남은 얼굴’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시인의 표현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탈을 향한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얼굴 이면에 또 다른 욕망을 숨기고 시치미를 떼는 이중적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바케트에서 바리케이드까지, 마그마로 만든 빵을 주세요
악어는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누워 있지 머리를 조아리고 매복 중인 화살표는 책동할 뿐 본성을 드러내지 않지
악어가 매복한 바리케이드는 늪
악어의 서식지는 급소의 매복
악어가 매복한 광화문 사거리에서 차들은 악어의 입모양을 따라 움직이고 나는 화살이 날아다니는 상상을 하지
적신호에서
화살을 화살표로 착시한 상상에는
먼저 떠나간 속도가 있고 앞으로 떠나야 할 속도가 있지
후진만 있고 직진이 없는
녹아내리는 회중시계가* 매복 중인 악어를 발견하겠지
속도의 나들목에서
시간의 역주행은 음모였어 조만간 화살표는 악어가 되어서 닥치는 대로 통째로 삼켜버리겠지
늪처럼, 바케트에서 바리케이드까지, 다 먹어치우겠어
리허설이 없는 바닥
매복은 생존이지
―김분홍「화살표는 악어가 되어가고」전문
우리는 길을 찾아갈 때 종종 화살표를 만나게 된다. 화살표는 방향을 지시해주어 목적지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방황하지 않고 그 곳에 도달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그런데 김분홍의 시에서 화살표는 악어가 되어가는 존재로 변용되어 포식성과 활동성이 훨씬 강조되어 있다. 이 시에서 악어는 ‘머리를 조아리고 매복중인 화살표’로 은유되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존재로 표상된다. 악어가 인간의 욕망을 표상하는 주체라면 바리케이드는 그러한 욕망을 억제하는 사회적 제약을 상징하는 은유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제약은 욕망의 주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해서 “후진만 있고 직진이 없는 녹아내리는 회중시계”로 하여금 시간의 역주행을 하게도 하지만, 강력한 욕망의 기표인 악어는 이러한 음모를 넘어서 “늪처럼, 바케트에서 바리케이드까지, 다 먹어치”운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리허설이 없는 바닥”이고 “매복은 생존”이라는 절박성이 엄연히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각주에 의하면 여기서 ‘녹아내리는 회중시계’는 달리의 그림으로 ‘기억의 지속’의 의미를 지닌 이미지이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기억은 지속될 수밖에 없고 기억은 결국 욕망 쪽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의 1연에서 시인이 “바케트에서 바리케이드까지, 마그마로 만든 빵을 주세요”라고 독백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욕망하는 빵이 결국은 굳어져서 돌멩이가 될 수밖에 없는 ‘마그마’와 같은 것이라는 암시를 내포하고 있다. 시인의 이러한 표현법 역시 에둘러 표현하는 간접화법에 해당한다.
일요일은
내가 좋아하는 옷 입고
서점에 가자
매일
똑같은 의자에 앉아
똑같은 노래를 들으며
이젠 네가 지겹다는 소리를 들어야지
서툴게 이별을 끝내고
견고한 슬픔이 찾아오면
저녁 먹다가
농담을 던져봐
아무 것도 아닌 말을 하며 살기엔
구름이 자주 멈춘다
흰 종이를
뒤뚱뒤뚱 건너다가
길을 잃었다
―성은주「팽귄」전문
인간이 일상을 거역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인간은 일상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은 종종 인간으로 하여금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거나 권태를 동반하게 하기도 한다. 시인들 역시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시인은 이러한 상황을 못견뎌하며 탈출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성은주의 시에서도 화자는 일요일에 습관적으로 좋아하는 옷을 차려입고 서점에 가서 “매일/ 똑같은 의자에 앉아/똑같은 노래를”듣던 자신의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이러한 탈출은 누군가로부터 지겹다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와 이별을 마무리 짓고 견고한 슬픔이 찾아오면 농담을 던지기도 하고 흰 종이에 글씨를 끄적이는 일을 통해 실행된다.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흰 종이를/뒤뚱뒤뚱 건너다가/길을 잃었다”는 화자의 진술은 시인의 시 쓰기가 습관적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도구일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이처럼 이 시는 본격적으로 시 쓰기를 거론하는 메타시의 포즈를 취하고 있지 않지만 에두른 표현을 통해서 시인이 시를 쓰는 동기를 은근히 드러내 보여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시의 화법은 직설적이지 않고 다양한 모습으로 에둘러 변주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때로 은유나 상징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고 반어나 역설과 같은 아이러니의 의상을 걸치고 나타나기도 한다. 현대시에서 에둘러 말하기와 시치미 떼기는 현대시가 산문화하는 것을 막고, 주체나 대상을 낯설게 표현함으로써 시적 긴장감을 한층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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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희: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폐차장 근처』,『이불속의 쥐』,『고장난 아침』이 있으며, 평론집으로『존재와 거울의 시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