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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종교성과 탈종교성
현대시의 종교성과 탈종교성
박남희 (시인, 평론가)
세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만물에 영성이 깃들어있다는 생각은 이미 고전적인 사유에 해당된다. 하지만 지나오면서 인간의 이성은 영성을 억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성주의를 기반으로 한 근대 자본주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근대 자본주의 윤리 속에는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의 핵심인 현대철학이 이성 중심에서 탈이성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현상을 프로테스탄티즘과 직접적으로 연계시킬 세 왜냐하면 시야말로 세상만물을 대상으로 한 읽고 쓰는 시 속에는 종교성과 탈종교성이 동시에 들어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의 내재해 있는 종교적 사상뿐 아니라 창조자적 관점에 서있는 시인을 포함한다. 이러한 사유는 시의 종교성을 신앙적 시인은 시적 대상을 자신의 독특한 관점으로 믿고 있는 창조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는 그 자신이 스스로 존재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시 스스로가 미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이미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처럼 우리 하지만 우리시의 종교성과 탈종교성을 탐색하는 논의는 아직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시의 종교성과 탈종교성을 신앙적 차원을 뛰어넘어 시적 차원에서 논의하는 작업은 의미가 있다.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 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나희덕,「뿌리로부터」전문(『문예중앙』, 겨울호)
나 당선작 「뿌리에게」는 뿌리에게 무한한 나희덕의 시는 초기작에서부터 일관되게 모성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최근에 여성으로서의 존재성에 더 깊이 천착해있다. 최근의 나희덕 시가 여성의 ‘사랑’이라는 주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이파리를 거처 우듬지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여성성을 나타내는 은유이다. 나희덕이 이파리나 우듬지의 삶을 믿는 것은 “뿌리로부터 일이 여성적 사랑을 이 유사성에서 출발한 시인의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시라는 것이 드러난다. ‘무소의 뿔’은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을 사회 전반의 문제로 끌어올려 페미니즘에 관한 논쟁에 불을 붙였던
공지영의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염두에 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시인의 사유는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같은 구절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감각의 촉수”는 여성으로서의 육체적 감각과 연관되어서 여성의 성적 즐거움인, 자크 라캉의
‘주이상스(jouissance)’를 연상시켜준다. 나희덕은 모성적 뿌리의 삶으로부터 도망쳐서 여성적 아름다움과 성적 즐거움이 있는 나희덕의 삶 속에서 ‘잎과 꽃’은 더 이상 장식품이 아니라 이 시는 형식적으로는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종교성을 지향하지만, 그 정신은 오히려 지향한다.
사 —우대식,「의심」전문(『시안』, 겨울호)
우 내용적으로는 탈종교성을 지향하는 시이다. 이 전지전능하사 나를 보호하시며 한없이 사랑하시는도다.”라는 구절로 보아, 기독교의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신이 만들어준 ‘의심’이라는 옷을 입고 사람들을 의심하고 아버지를 배반하고 “의심이라는 환한 옷,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잠을 잘 때도 벗지 있듯이 반어적이다. 일반적으로 반어법을 사용하는 시들은 알레고리적 속내를 보여준다. 이 시 역시 세상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끝없이 의심하는 불신풍조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자기반성의 거울을 가지고 있다. 이 시의 말미에 준엄한 꾸짖음을 상징하는 이미지이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오히려 있었다”는 결구는 반성할 줄 모르는 자아와 시대에 대한 반어적 풍자라고 볼 수 있다. 나 지향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 좋아하지 않고 종교마저도 과감하게 비유로 사용하는, 금기에 대한 위반의 정신을 때문이다. 텐션(tension)이 문학의 본질이라면 종교적 틀이 그 무게로 인해 종종 문학적 긴장관계를 갖게 해주는
나의 神은 언제나 왼쪽 귀로만 온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편애에 익숙한 그는 왼손잡이인지도 몰라 사륵 사르르 긴 옷자락을 끌며 하루도 빠짐없이 전례처럼 그가 다녀가고 내 왼 귀는 그래서 종교적이다 지극히 도덕적이다 오른 귀의 낭만과 사철 부는 바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좌우의 기류가 풀 멕인 하늘처럼 팽팽한 날 그런 날은 성난 신의 발자국 소리가 더욱 거칠어진다 데칼코마니 같은 내 몸의 경계에는 반절짜리 연애가 산다 절반쯤 달려가다 돌아오고 돌아오는 슬픈 연인이 산다 그래도 모른 척 신은 왼쪽 귓속에 더 깊은 소리의 동굴을 파고 사르륵 사륵 오늘 밤도 내 왼쪽 귀는 거룩한 순교를 꿈꾸며 신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든다
—이화은,「이명」전문(『미네르바』, 겨울호)
이 않고 삶의 중요한 원리로 인식하고 있게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나의 神은 언제나 왼쪽 귀로만 으로는 왼쪽 귀에만 이명 현상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속뜻은 ‘왼쪽’으로 상징되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종교적 도덕성이 작동하여 “오른 귀의 낭만과 사철 부는 바람”에 제동을 거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는 양면성을 이명 현상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시 시인의 내면에서 종교적 도덕성이 여전히 그의 연애는 ‘반절짜리 연애’일 수밖에 없고, 그의 몸의 경계에는 “절반쯤 오는 /슬픈 연인”이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이상이 그의 소설 「날개」에서 ‘아내’와 '나'의 같은 종교적 도덕성이 시인에게는
시는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 신 없는 성당, 외로움의 성전, 언어는 시름시름 자란 외로움과 사귀다가 무성히 큰 허무를 만든다. 외로움은 시인들의 은둔지, 외로움은 신성한 성당, 시인은 자기가 심은 나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나는 나무에 목매달고 죽는 언어 밑에서 무릎 꿇고 기도한다. 시인은 1인 교주이자 그 자신이 1인 신도, 시는 신이 없는 종교, 그 속에서 독생獨生하는 언어. 시은市隱하는 언어 나는 일생 동안 허비할 말의 허기를 새기리라.
—조정권,「은둔지」전문(『동리목월』 겨울호)
혹 단언한다. 이런 말의 이면에는 시로서는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오히려 시의 탈종교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이 시는 수 있다. “언어는/시름시름 자란/외로움과 사귀다가 무성히 큰 허무를 만든다.”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무에 목매달고 죽는 언어 밑에서/무릎 언어는 구원의 언어가 아니라 죽은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신이 없는 속에서 독생하는 언어로 시를 쓰면서 일생동안 말의 허기를 가슴에 새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시 그 이면에는 이러한 탈종교성이야말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일찍이 브룩스가 말한 ‘시의 언어는 역설의 말하고 있는 시의 탈종교성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종교에 매몰되지 않고 종교성을 넘어선 시가
일반적으로 좋은 시로 평가받고 있는 현실은 현대시의 본질이 탈종교성에 더 가깝게 자리하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 박남 신춘문예 시 당선. 거울의 시학』이 있다. 현재『시산맥』주간, 출강하고 있다.
*<동리목월>2012년 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