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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호명, 고독과 고통의 증언
시와 호명, 고독과 고통의 증언 ㅡ시집,『동백을 뒤적이다』 2011년 이채민,『한국문연』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
이채민의 시세계
1. 경험과 깨달음, 매혹과 그리움의 사이
이채민 신작시집 『동백을 뒤적이다』는, 시인 자신의 절실한 경험과 깨달음 그리고 사물을 향한 매혹과 그리움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서정시 본연의 심미적 결실이다. 이채민 시편들은 이러한 서정시의 속성을 통해 자신의 삶을 새삼 반추하고 나아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적 열망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또한 그녀 시편들은, 일상 언어를 간결하고 응축된 시의 문맥으로 흡수하여, 거기에 자신만의 구체적 경험과 깨달음을 얹는 안목과 솜씨를 한결같이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이채민 시편들은 읽는 이들을 매혹과 그리움의 세계로 이끄는 고유한 흡인력을 가지면서, 동시에 자신의 실존적 사유 과정을 충실하게 들려주는 편폭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그녀의 시는 구체적 경험과 깨달음, 강렬한 매혹과 그리움의 사이에서 발원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렇게 발원한 물줄기가 타자들을 향한 따뜻한 응시와 호명으로, 삶의 고독과 고통에 대한 선연한 증언으로 확장되어가는 흐름을 견지하고 있다. 이 길지 않은 글을 통해 우리는, 그러한 흐름을 충실하게 따라가면서, 그녀만의 시적 방법론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2. 주변적 존재자들에 대한 응시와 호명
이채민 시편들은 근원적으로 시인 자신의 절실한 자기 확인 욕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최근 우리 시에 나타나는 시인과 사물 사이의 치명적 균열 양상은 그녀 시편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녀가 자기 자신의 내면에만 몰입하는 시인인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이른바 반(反)동일성 원리까지 포괄하면서 타자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는 시인이다. 그래서 시적 시선이 타자들을 향해 한껏 나아갔다가 다시 자기 회귀를 열망하는 쪽으로 수렴되는 방법론적 일관성을 견지한다. 그 과정에서 사물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다시 결합시키는 과정을 끊임없이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채민 시인은 자신만의 응시의 힘으로 사물을 새롭게 발견하는 동시에 다시 사물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시적 호명의 과정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우리 시선에 잘 포착되지 않는 주변적 존재자들을 애써 응시하면서, 그들의 존재 방식에 대한 새로운 호명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편을 읽어보자.
비 내리는 오후 창경궁 명정전 꽃살무늬 창 앞에서 비를 피해 들어온 참새와 마주쳤다 녀석은 비에 젖은 내 모습을 강중거리며 살핀다 모든 시작이 그러듯이 키를 낮추고 눈을 맞추고 서로 죽지를 부비는 사이 늑골 밑에서 맑은 샘물소리가 났다 제 족속이 아닌 나를 받아준 녀석이 고마웠다
잠시, 풍경이 흔들리고 흔들리는 얼굴과 그 이름이 포개지고 그가 키운 깊고 포근했던 목화가 망국의 아픔을 기억하는 궁궐 뜨락에 하르르 떨어진다
인적 없는 명정전 긴 회랑을 돌아왔을 때 녀석은 가고 없었다 회랑을 감아 도는 빗줄기가 몸을 죄어온다 날개도 우산도 없는 허탈한 슬픔이 목이 메게 깊다는 것을 날아가버린 그를 비워내며 알아가는 중이다 ― 「깊은 것은 슬프다」 전문
화자의 시선에 순간적으로 들어온 것은, 비를 피해 창경궁 어느 한켠으로 들어온 참새 한 마리다. 비 내리는 한적한 오후, 비에 젖은 화자의 모습을 살피는 참새를 바라보면서 화자는, 생의 가파른 심연과 상상적으로 마주치는 경험을 한다. 서로 키를 낮추고 눈을 맞추고 죽지를 부비면서 화자와 참새는 맑은 샘물소리의 심연을 만들어낸다. 같은 족속도 아니면서 그렇게 서로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순간 그러한 동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 순간, 잠시 풍경이 흔들리면서, 화자는 “망국의 아픔을 기억하는 궁궐 뜨락”을 채우고 있는 목화를 “그가 키운 깊고 포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서 지칭되는 ‘그’란, 화자가 간절하게 기억하는 존재일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초월적 존재일 것 같기도 하다. 화자가 고요한 회랑을 돌아보고 오자 참새는 간 곳 없다. 그때 회랑을 감아 도는 빗줄기 속에서 “날개도 우산도 없는 허탈한 슬픔”이 깊은 심연을 보이며 다가오자, 화자는 사라져버린 ‘그’를 몸에서 비워내며 슬픔의 깊이를 배워간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슬픔의 깊이’이자 ‘깊이의 슬픔’이었을 것이다. 이채민 시인은 그러한 비워냄에 대하여 “생의 중심에 고여 있던/너를 비워내는 일이/나무와/돌과/새들이/우는 일”(「슬픔에 관한 짧은 리뷰」)과도 같다고 고백한 바 있는데, 그러한 슬픔을 깊은 점화(點火)의 순간으로 유비(analogy)하면서 슬픔의 미학화를 처연하게 수행한 것이다. 그때 ‘슬픔’과 ‘깊이’는 한 몸으로 만나고 서로를 결속한다.
누구의 가슴에 뜨겁게 안겨본 적 있던가 누구의 머리에 공손히 꽂혀본 적 있던가 한 아름 꽃다발이 되어 뼈가 시리도록 그리운 창가에 닿아본 적 있던가 그림자 길어지는 유월의 풀숲에서 초록의 향기로 날아본 적 없지만 허리가 꺾이는 초조와 불안을 알지 못하는 평화로운 세상 젊어야만 피는 것이 아니라고 예뻐야만 꽃이 아니라고 하늘을 향해 옹골지게 주먹질하고 있는 저 꽃 ― 「파꽃」 전문
이번에는 ‘파꽃’이라는 대상이 눈에 들어왔다. 파꽃은, 파의 대롱 끝에 둥근 모양으로 피어나는 흰 꽃이다. 꽃 중에서도 주변적 존재자인 ‘파꽃’은, 누구의 가슴이나 머리에 뜨겁게 안겨보거나 꽂혀본 기억이 도대체 없다. 왜소하게 파 대롱 끝에 핀 모습으로는 꽃다발도 초록 향기도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리움의 향기를 피우며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파꽃은 다른 꽃들과는 달리 “허리가 꺾이는 초조와 불안”을 알고 있다. 그러니 그것도 모르는 세상에 “젊어야만 피는 것이 아니라고/예뻐야만 꽃이 아니라고” 주먹질하는 게 아니겠는가. 이러한 파꽃의 생태를 통해 이채민 시인은 화려한 외관보다는 내적 페이소스를 간직한 주변적 존재자를 새롭게 발견하고 호명한다. 이때 ‘파꽃’의 생태는, 초조와 불안 속에 잊혀져간 우리 삶의 종요로운 가치로 몸을 바꾸게 된다. 이처럼 이채민 시인은, 참새 한 마리나 파꽃 한 송이를 통해 우리 시선에서 배제되거나 잊혀질 법한 사물들에 대하여, 혹은 우리가 흘깃 지나칠 수 있는 무심하고도 소소한 생명의 가치에 대하여 그 깊은 의미를 묻고 있다. 그 고독한 주변적 존재자들에 대한 응시와 호명 과정이 이렇게 세세하고 정성스러울 수가 없다.
3. 깊은 기억 속의 그리움과 고독
우리는 서정시가 시인 자신의 정서를 직접화하는 양식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서정시는 시인 자신의 현실과 꿈 사이 간극에 관한 상상적 기록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만큼 서정시의 저류(底流)에는 시인 자신이 겪어온 절실한 경험 가운데 가장 뿌리 깊은 기억의 지층(地層)이 녹아 있게 마련이다. 이채민 시편에는 ‘시간’에 대한 기억과 성찰을 노래한 것들이 많은데, 그녀는 마치 시간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 시적 목표라도 되는 듯이 오랜 기억의 지층을 통해 자신의 존재론적 근원을 상상하고 사유한다. 이러한 작법(作法)은 오래 전부터 상상하고 사유해온 근원적 흔적들이 삶의 마디마디에 박혀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오래된 시간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시의 시간’이라고 한 파스(O. Paz)의 말처럼, 오래된 시간 안에 자신의 원형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기억의 원리가 시인으로 하여금 진한 그리움과 고독을 불러오게끔 한 것이다.
칡뿌리같이 저 홀로 깊어가던 고독은
저 혼자 떠날 때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붉은 신열이 멍울멍울 피어오르는 가슴에서
강물소리가 난다 흐르는 강물은
그 무엇으로도 동여맬 수가 없다
미안하다 ― 「미안하다」 전문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저 홀로 깊어가던 고독”조차 떠날 때를 준비하고 사라져갔다. 그렇게 생의 고독을 떠나보낸 화자는 붉은 신열(身熱)이 피어오르는 가슴에서 새삼 맑은 강물소리를 듣는다. 찰랑찰랑 소리를 내며 흐르는 강물은 우리 손으로 묶어둘 수가 없다. 그러니 화자는 고독과 신열을 거쳐 듣는 맑은 강물소리를 통해, 새로운 고독과 신열을 몸으로 받아들여간다. 이는 마치 “당신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는/다른 삶이 있다 해도/여전히 난 당신을 그리워할 것”(「고흐를 그리며」)이라는 그리움의 전언을 떠올리게 하면서, “잔혹하게 자라는 그리움의 형벌”(「풍경이 있는 숲」)이 자신의 실존적 양식(樣式/糧食)임을 거듭 암시해준다. 두루 알다시피, 오랜 기억들을 섬세하게 재현하여 그 안에서 어떤 운명적 시간을 포착하는 것은 서정시라는 장르가 수행해온 오래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시간이 아니라 자신이 고유하게 경험해온 ‘내재적 시간’으로 귀환하려는 시인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외따로 있던 사물들 사이에 유추적 연관성이 생겨나는 것도 이러한 기억의 매개 작용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이채민 시편들은 오랜 내재적 시간을 섬세하게 재현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생이 결국 그 안에서 그리움과 고독을 견뎌내는 일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리움과 고독의 초상은 다음 시편에서도 이어진다.
사람들은 그녀를 휘파람새라 부른다 그녀는 휘파람을 불지 못한다 높이 날지 못한다 오래 날지도 못한다 날기 위하여 발끝을 세워본 적도 없다 불구를 인식 못하고 키가 큰 나무 위에 둥지를 틀었다 흐려진 인식의 重罰인가! 늙은 거미줄에 감겨 목청을 잃어버리고 가슴에 구멍 하나를 얻었다 그럴지라도 화약의 불꽃처럼 피가 도는 날 서늘한 웃음이 서걱대는 갈대숲에서 백치 같은 문장으로 노래하는 휘파람새의 사촌 쇠개개비를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치정이 엉겨 붙은 갈대의 무덤 속에서 풀벌레의 작은 울음에도 빗장을 다스리지 못하는 쇠개개비를 사람들은 휘파람새라 부른다 ― 「쇠개개비」 전문
사람들이 흔히 ‘휘파람새’라고 잘못 부르는 새의 진짜 이름은 ‘쇠개개비’다. 시인은 쇠개개비라는 낯선 이름에 ‘그녀’라는 인칭을 새롭게 부여한다. 휘파람도 불지 못하고 높이 날거나 오래 날지도 못하는 ‘그녀’는, 자신이 그러한 불구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모른 채 마치 “흐려진 인식의 重罰”처럼 키 큰 나무 위에 둥지를 튼다. 그렇게 높은 곳에 삶의 터를 차리고서 ‘그녀’는 목청을 잃은 대신 “가슴에 구멍 하나”를 얻었다. 하지만 ‘그녀’는 불꽃처럼 피가 돌 때 비로소 갈대숲에서 “백치 같은 문장”으로 노래를 부른다. 갈대밭에서 살아가는 여름새 쇠개개비를 떠올릴 때, 우리는 그렇게 갈대숲에서 눌언(訥言)으로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때 “풀벌레의 작은 울음에도/빗장을 다스리지 못하는” 쇠개개비의 섬세하고도 예민한 감각은, 시인 자신의 존재론을 등가적으로 은유한다. 따라서 쇠개개비는 이 어둑한 세계에서 목청을 잃고도 백치 같은 문장으로 노래할 수밖에 없는 고독하고도 그리움에 젖은 시인의 존재론을 매개하는 상관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채민 시인은 이렇듯 그리움과 고독의 정서를 통해 자신만의 시적 원리를 구체화하는 동시에,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으로 노래하는 시인의 존재론을 고백적으로 토로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쓰고 있는 시가 여전히 시인 스스로의 현실과 꿈 사이 간극에 대한 상상적 기록임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구체적 경험과 구성의 시법(詩法)
남다른 기억의 지층을 세세하게 재현하고 항구화하려는 것이 서정시의 보편적 욕망임은 널리 인정되어왔다. 그렇게 한 영혼의 기억을 담아온 서정시는, 우리 삶이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합리적 표지(標識)들을 한편으로 위반하고 한편으로 감싸 안으며 나아가는 것임을 오래도록 보여주었다. 서정시의 위의(威儀)를 회복하려는 시인들의 고전적 열망이, 이러한 기억의 원리를 통해 우리가 상실해온 삶의 지표들을 복원하고 한 시대의 불모성에 저항하게끔 하는 미학적 경험을 주는 것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채민 시편들은 이러한 고전적 열망과 미학적 경험 속에서 매우 중요한 삶의 장면들을 포괄하는 기억의 구체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매우 절실하고도 선명한 존재 확인의 순간을 만나게 되는데, 그 순간에 삶의 비의(秘義) 혹은 숨겨진 뜻을 직관하게 되고 나아가 격정적으로 솟구치는 정신적 고양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경험은 존재 갱신의 활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어둑한 실존적 자각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인’은 언어를 통해 존재 갱신의 활력과 어둑한 실존적 자각 사이에서 생의 형식을 완성하려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채민 시인은 이러한 활력과 자각 사이에서, 삶의 복합성으로 비롯되는 고통들을 선연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비가 오면 뻘건 녹물이 흘러내리는 골목 끝 양철대문 집에서는 한쪽다리가 짧은 남자의 퀭한 눈알과 덜거덩거리는 노모의 낡은 기침소리가 굴러다녔다 엉겅퀴보다 작은 늙은 어미가 숨을 거두던 날 골목은 골목을 바쁘게 돌아다녔고 꽃상여에 실려 가는 노구老軀를 따라 찔레덤불이 줄장미의 목을 잡고 긴 골목을 빠져 나갔다 물기 없는 남자의 울음이 그칠 무렵 빨간 구두를 신던 남자의 여자가 녹이 슨 대문을 걷어차고 사라졌다 골목은 사라진 여자의 소문 물고 다니다 아무 곳에나 퉤퉤 뱉어버리고 소문의 씨앗은 펄렁이는 치마 속을 들랑거리다 만삭이 되었다 남자의 신음이 만월처럼 차올랐다 우우우 장마 몰고 오는 바람이 다녀가고 사흘 밤낮 슬레트 지붕을 두들기던 장대비를 타고 남자의 꿈이 골목을 빠져 나갔다 빈 마당에는 엎드린 질경이풀이 뿌득뿌득 번져나갔다 ― 「골목 깊은 집」 전문
이 시편에는 다양한 인물과 배경과 서사가 녹아 있다. 비가 오면 뻘건 녹물이 흘러내리는 양철대문 집은 ‘골목 끝’에 있다. 이러한 위치가 바로 이 집의 외곽성과 주변성을 선명하게 암시해준다. 그곳에는 불모의 삶을 이어가는 이들이 산다. “한쪽다리가 짧은 남자”와 낡은 기침을 하고 있는 노구(老軀)의 어미가 있다. 이 집에서 노모가 숨을 거두던 날, ‘골목 깊은 집’은 순간적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메마른 남자의 울음이 그칠 무렵, 그 집을 채우고 있던 또 한 사람 곧 빨간 구두를 신던 “남자의 여자”가 녹슨 대문을 걷어차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골목 안에는 여자의 소문과 함께 남자의 신음도 커져갔다. 그리고는 장마철 내리던 장대비를 타고 “남자의 꿈”마저 골목을 빠져나가고, 그 ‘골목 깊은 집’은 빈 마당에 질경이풀만 가득한 폐가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죽음과 낡아감과 떠남과 소멸의 서사는, 그 자체로 사람살이의 불모성과 고단함을 보여주면서도, 우리 삶을 묵시록적으로 감싸안는 삽화적 힘을 보여준다. 이때 우리는 “죽은 나무들이/서로의 풍경이 되어주는”(「죽은 나무들의 풍경」) 것을 바라보면서, 삶에 편재해 있는 고통들에 대한 그녀만의 비극적 관찰을 미덥게 바라보게 된다.
중환자 병동 창밖 느티나무에서 꽁무니가 긴 암매미가 허물을 벗고 있다 창 안쪽에서는 십이월의 숲처럼 헐거워진 그녀가 그믐달 같은 생의 허물을 벗고 있다 일생 소리를 내지 못한 두 개의 허물이 창 안과 밖에서 어둡고 습한 길을 지우며 지상의 소슬한 평화를 받아내고 있는데 나라는 무기수는 설익은 눈물을 익히고 있다 피붙이 하나 없이 홀로 피워올린 8월 꽃무릇보다 외롭고 헐거운 그녀의 生을 나는 아직 읽어내지 못했는데 가슴에 남아 있는 후회의 문장 미처 지우지 못했는데 그녀는 지금 우화를 꿈꾸는 두눈박이좀매미처럼 지상에서 날아갈 그 날을 빠르게 준비하고 있다 ― 「8월, 상사화」 전문
중환자 병동 창(窓)을 사이에 두고 안팎에서 허물벗기가 진행중이다. 안쪽에서는 “십이월의 숲처럼 헐거워진 그녀”가, 바깥쪽에서는 암매미가, 자신들의 낡은 허물을 벗고 있다. 이러한 데칼코마니 화법(話法/畵法)은, 우리 삶의 안팎에 가득한 불모와 폐허의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그렇게 두 개의 낡은 허물은 그동안 지나왔던 어둡고 습한 길을 지우면서 “지상의 소슬한 평화”를 받아내고 있다. 하지만 화자는 아직도 설익은 눈물로 “외롭고 헐거운 그녀의 生”을 읽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8월의 꽃무릇보다 더 고독했을 그녀의 생을 상사화에 비유한다. 꽃이 필 때 잎이 없고, 잎이 있을 때 꽃이 없어, 꽃과 잎이 서로 그리워하는 상사화의 속성이 그녀 삶의 힘겨운 통점(痛點)을 은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마음 깊은 곳에 남은 “후회의 문장”은, 곧 화자가 쓰는 ‘시’와 등가의 위치에 선다. 그렇게 머뭇거리는 순간, 그녀는 우화(羽化)를 꿈꾸듯 지상에서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녀의 투병과 죽음의 이미지군(群)이 교차하면서, 이 시편은 우리 삶의 소멸 형식을 보여주는 묵시록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이처럼 ‘골목 깊은 집’이나 ‘8월의 상사화’는 모두 죽음과 소멸의 이미지를 거느리면서, 우리 삶의 고독하고도 고통스런 심연을 확연하게 증언해준다. 이러한 구체적 영상들은 한결같이 사람살이의 모습을 실감 있게 보여주면서, 이채민 시학의 근간이 삶의 구체적 경험과 구성의 시법(詩法)에 있다는 사실을 적극 증명해준다.
5. 다시, 상승의 감각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이채민 시편들은 솟구쳐오르는 상승의 감각이라기보다는 충분히 가라앉은 하강의 감각 속에서 씌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밝고 경쾌한 희망의 원리가 아니라 어둑하게 가라앉은 견딤의 원리에 의해 자기 언어를 구성해온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채민 시인은 주변화된 존재자들에 대한 따듯하고도 미학적인 응시와 호명, 고독과 그리움의 깊은 기억들, 생의 고통에 대한 증언 등으로 그녀만의 시적 개성을 구축해놓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이러한 하강과 견딤의 기운 속에서도, 어느 면에서는 순간적이고도 상상적인 역류(逆流)를 꿈꾸는 역동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 역류의 상상이 그녀로 하여금 새로운 상승의 감각을 찾아가게끔 하고 있는 것이다.
상카의 향이 배달되는 아침 8시 푸른 잠에서 깬 느릿한 맥박이 빨리 달리기로 채널을 바꾸네 체온으로 데워진 작은 창을 열고 꽃이 왜 아름다운지 생생하게 들려주는 그의 목소리 나, 귀를 세워 들어가네 술래의 쓸쓸함을 알았는지 바람을 붙들고 있는 관절마디마다 단내 나는 수액을 넘치도록 수혈해주고 미련하게 남긴 간밤의 얼룩도 말끔히 거두어 가는 보라! 보라! 오동꽃이 지즐대는 푸르른 이 아침 ― 「푸른 아침」 전문
상카(sanka) 향기와 함께 열리는 푸른 아침에, 화자는 “푸른 잠에서 깬 느릿한 맥박”을 돌려 “빨리 달리기”로 채널을 바꾼다. 활력의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창을 열고 꽃의 아름다움을 들려주는 생생한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여기서 ‘그’는, 구체적인 대상을 함의할 수도 있고 어떤 신성한 존재로 확장 가능한 보편자를 함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 푸른 아침은, 화자로 하여금 “단내 나는 수액”을 만나게 하고 “간밤의 얼룩”도 말끔하게 거두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침의 새로운 생명력에 감동하면서 이채민 시인은 “가난한 내 꿈”(「손톱」)을 하나하나 완성해갈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은 시인의 집이라 하지만/구름 위에서 시 쓰는 일도/땅에서 헤엄치는 것만큼 어렵다”(「구름 속의 집」)고 고백한 그 ‘시 쓰는 일’을 통해 깊이 사유하고 표현하며 시인으로서의 길을 고단하고도 아름답게 걸어갈 것이다. 이번에 출간하는 신작시집을 토양으로 삼아, 그녀가 걸어갈 시인으로서의 길이, 다시, 상승의 감각으로, 푸르른 활력으로 열려가기를 깊이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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