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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상처위에 꽃을 꽂다

Author
mimi
Date
2012-03-31 10:31
Views
17540

 



최정아 시집「봄날의 한 호흡」작품 해설 (2011년 문학의전당 )

 


붉은 상처위에 꽃을 꽂다

 




                                                          마경덕 (시인)

 



  최정아 시인의 두 번째 시집「봄
날의 한 호흡」은 두 갈래로 읽힌다. 한 호흡처럼 짧게 가버리는 봄,

그 짧음에서 느끼는 ‘허무’와 눈부신 봄날에 ‘호흡’을 하며
힘차게 일어서는 ‘희망’이 그것이다. ‘허무’와

‘희망’은 다르지만 한 몸으로 어우러진다. ‘울다’가 ‘웃는’ 것처럼 격한
감정이 순해지기도 하고

돌연 감정이 격해지기도 하는데 모두 ‘한 호흡’이다. 시의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따듯한 봄날이었다가

서늘한
시의 체온을 느끼게 된다. 시인이 가슴속에 그려진 풍경을 바깥으로 끌어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최정아 시인은 ‘자연’과
‘동물’을 통해서 밑그림을 그리고 생각을 덧칠한다. 시인이

성장한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에 내장된 힘은 무한한
에너지를 지닌 자연에서 발아했다고

볼 수 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시인의 언어를 통해 단단하게 시의 축을 이루는데

「뒤뜰」도 그 중 하나이다.

 

 


  뒷문밖엔 이마 서늘한 그늘이 산다

  저 늙고 병든 짐승

  윙윙 댓잎 같이 날선 바람을

  사철 등에 업고 산다

  한나절도 못되어 슬금슬금 뒷걸음쳐

  구석까지 밀려나 바싹 엎드린다

  어둑발 들이치기 무섭게 몸져누워버린

  발톱은 늘 축축하다

  마흔 해도 더

  싸리꽃잎처럼 붉은 송아지 울음을,

  자욱이 깔리는 저녁연기를, 사랑하면서도

  한 발짝도 나서지 못해 괴괴한

  열사흘 달빛에 곤두서는 털가죽

  앞마당 가득 출렁이는 햇살은

  뒤뜰에 엎드린 짐승의 뜨거운 입김이다

 


  -「뒤뜰」전문

 

 


  ‘뒤뜰’에 사는 ‘그늘’이 늙고 병들었다니, 세상에! 그늘도 늙고 병이 드는가. 얼마나 오래 춥고

쓸쓸했으면 한나절도 못되어 슬금슬금 구석까지 밀려나 털 빠진 짐승처럼 엎드렸는가. 댓잎 같이

날선 바람을 사철 등에 업고 얼마나 따스운 바깥을 그리워했는가? 그늘을 헤집어보면 그 어둑한

그늘에는 많은 것들이 숨어있다. 詩가 되지 못한 파지 같은 날들, 송아지 울음과 저녁연기, 웅크린

짐승의 발톱, 바깥을 주시하는 반짝이는 눈빛…

 
최정아 시인의 의식속에 ‘각인된 그늘’이란, 눅눅하고 습한 곳이 아닌 ‘재생산’이 가능한 곳이다.

날마다 바깥을 동경하며 기회를
노리는 짐승이 살고 있다. 그늘은 시인이 붉은 심장을 숨겨두기엔

가장 좋은 ‘적소’이다. 무릇 시인은 혼자 놀기에 이골 난
자들이 아닌가. 하도 가지고 놀아서 번지르르

손때가 묻은 외로움도 숨겨 두기에 좋은 곳이다. 그곳에 시인은 아무도 몰래 “욕망”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늙고 병들었다는 건, 오래 기다린 자의 슬픔일 뿐, 열사흘 달빛에도 곤두서는 털이

곤두서는 예민한 짐승은
“날카로운 발톱”과 “뜨거운 숨결”을 가졌다. 발길이 뜸한

뜰은 기다림의

장소이며 슬픔을 기록하는 치열한 곳이다. 겹겹의 그늘 속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묻어두었는지,

그 짐승 같은 시간에
물리며 할퀴며 얼마나 붉은 피를 쏟았는지 가슴이 서늘해진다. 외로움이 묵으면

사나워지는데, 그 사나움은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발톱’을 들이밀기 마련이다. 최정아 시인은

그 외로움의 발톱에 수없이 할큄을 당했을 것이다.
한 그늘은 시인이기도 하다. 한 마리의

“욕망이라는 짐승”과 오래 음지에 묻어둔 “詩와 슬픔”이 모두 어우러져 그늘과 시인은
동일하게

읽힌다. 어둑발 들이치기 무섭게 몸져눕는 것은 그만큼 외부의 세계, 즉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 최정아
시편에는 “말랑거리는 발톱”과 가슴을 서늘케 하는 “억센 발톱”이 동시에

숨어있다.

 

 


  창문이 덜컹거립니다

  꽃사과나무 아래 앉았던 바람이 무릎을 폅니다

  일을 시작하려나 봅니다

  두들기고, 당기고,

  점점 거칠어지는 풀무질 소리

  계절의 첫 자락이 팽팽해집니다

  내 머리카락마저 세공하려는 바람의 손길에 끌려

  나는 꽃 사과나무 아래 앉아봅니다

  꽃피는 봄날 온다던 엄마는 바람이 여물어도

  돌아오지 않고 그동안 써놓은 이력서가 뿌리처럼 깊습니다

  오래된 기억을 마저 다듬어봅니다

  불린 쌀에는 밥물이 얼마

  배추 몇 포기면 소금이 얼마

  내가 그동안 세공한 내용들입니다

  경력란에는 죽어 썩어질 몸이라고

  일러 준대로 적었는데

  엄마는 썩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죽은 척 꿈쩍 않던 꽃사과나무가

  바람이 걸어준 보석을 뽐내며 살아나듯 말입니다

  당기고 두들겨 빚은 오색 빛깔이

  내 몸 곳곳에서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바람의 세공」전문

 


 
영영 오지 못할 것이 있다. 해마다 계절은 돌아오지만 이 세상을 떠난 이들은 다시 오지 않는다.

머리카락까지 세공하려고 달려드는
바람도 어쩌지 못하는 것은 가슴에 묻어둔 기억이다. “썩지 못하는”

기억은 곧 ‘그리움’이며 ‘상처’이다. 사과꽃이 피는 계절은
아름답고 눈부시지만 그 ‘찬란한 봄’을 나눌

상대가 없다면 상처는 “꽃보다 붉게” 터진다. 어린 딸에게 쌀을 안치는 법과 김치
담는 법을 가르쳐준

화자의 어머니는 아직 가슴에 살아있다. 오랜 기억의 원리, 즉 ‘슬픈 이력’은 봄이면 다시 도져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리는 것이다. 최정아 시인은
의 구체성으로 시를 결속하고 독자를

한 호흡으로 묶어둔다. 자연이라는 ‘오브제’를 사용해 ‘과거’의 ‘기억’을 ‘현재’와
‘접목’하는 솜씨가

돋보인다. ‘상처’를 ‘순화’시켜 행간사이에 은근슬쩍 끼워 넣는 시작법이 예사롭지 않다.

 



  기계주름이었죠

  물방울무늬, 세로줄무늬, 풀리지 않고 아무데나 잘 어울리는

  때론 민무늬, 민소매도 격이 맞는 치마였죠

  다림질을 했죠. 지우고 싶은 기억 뭐 없나?

  뭉긋이 눌러 접은 주름이

  달동네로 올라가는 계단 같았죠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

  오래전부터 거기 살고 있는

  거친 숨소리가 들리죠. 마지막 계단

  달빛이 내려와 쌓이는 꼭대기집

  치맛말기처럼 아랫집들의 허리를 포개 안고 있죠

  바닷가 저녁노을 같은 인어치마를 꿈꿔본 적도 있지만

  짓물러 생긴 흉터 같은 거, 잊고 싶은 기억 같은 거

  다림질로 꾹꾹 눌러 주름을 잡았죠

  오늘은 파란색 민무늬 셔츠를 입기로 했죠

  뭉게구름 두어 숟갈 곱게 떠

  양 가슴에 주머니를 달기로 했죠

  그리고 구름처럼 흘러가는 나를 바라보았죠

  사람들은 모르죠. 주름치마가

  상처를 숨기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걸

   -주름치마」전문

 


  한때 유행했던 ‘주름치마’에서 연상되는 것은 ‘계단’이다. ‘접힌’ 것에서 ‘오른’다는 것으로 바뀌면서

‘계단’이 튀어나온다. ‘계단’을 숨차게 올라가보면 “
빛이 내려와 쌓이는 꼭대기집”이 서있다. 시인이

경험한 삶의 형식은 무의식속에 잠재되어 ‘상처’도 슬쩍 주름진 치마폭에
숨겨두었다. 그곳에서 노을처럼

물들며 동화처럼 아름다운 꿈을 꾸기도 했다. “상처의 허기”를 ‘그리움’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자연’을

사용하는 것은 ‘시적 에너지’를 키우는 방법이다. 시인이 주목한 ‘밝고 긍정적’인 삶의 형상은 ‘상처’에서

변환된
‘건강한 에너지’이다.

  과거라는 시간에서 현재의 시간으로, 더 나아가 미래의 시간으로 끌고 가는 힘은 최정아 시인의 역량일

것이다. ‘아래 두 편의 시에서도 ‘건강한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

 

 



  반값이란다

 


  신발도 핸드백도 반값이라고

  외치는 판매원이

  서둘러 딸을 시집보낸 아버지처럼 보인다

 


  신어보고, 메어보고

  이미 전단지로 뿌려진 반 생

  누군가의 손에 들린

  구두코가 서럽다

 


  반값이 되기 전에 서두르라고

  세상은 다그치지만

  꼭 입을 다문 핸드백속에는

  네 발을 가진 짐승의 일생이 요약되어 있을 것이다

 


  저 가죽의 무게는

  서둘러 떠나간 목숨의 값

  뜨거운 울음이 담긴 핸드백 속 깊이를

  가늠하기엔,

  너무 화창한 날이다


  -「바겐세일」전문

 




  어깨에 걸린 가방에서 송아지 소리가 들린다. 젖떼기 무섭게 멀리 보낸 그 송아지 울음이다.

 


  비오는 날 흠뻑 들이킨 물, 한동안 심했던 갈증에 부풀대로 부풀었다.

 

  죽어서도 끌려 다니는 짐승, 세상이 무덤 같아 밤마다 뜬 눈이다.

 


  뿔을 반으로 갈라 불에 굽고, 얇게 깎아 문양을 새긴 화각장, 봉황이나 연꽃으로 환생한 소뿔에 인고의 발톱자국이 숨어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쏟아져 내리는 햇살도 잘게 쪼개어 삼켜두었어야만 했다. 뛰쳐나가고 싶을 때마다 뿔을 세워 허공을 힘껏 들이받아야 했다.

 


  죽어서도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에 몸을 부르르 떤다.

 


  극장으로 숨어들어 해리포터 죽음의 성물에 몸을 맡겼다. 마법의 나라에서는 내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악마와 싸워 이기는 방법은 간단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용기를 내는 것, 악마의 뱀이 내 앞에서 죽었다. 불이 켜지는 순간 내가 큰 짐승이라는 걸 알았다.


-「소∙9」전문

 



 
시인의 의식을 짓누르는 ‘상처’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어두운 삶의 터널을 지나면서도 놓치지 않는

것은
‘희망’인데,「바겐세일」에서는 마지막 행에서 ‘화창’한 날씨를 보여주며 불안한 기류를 뒤엎는다.

누군가의 ‘죽음’을 ‘위로’하기에
날씨는 너무 맑고 화자는 ‘죽음’과 먼 거리에 서있다.「바겐세일」에서

“시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은 할인의 기쁨 뒤에 숨은
소의 ‘죽음’이다. ‘핸드백’이 되고 만 ‘소’의 울음이

반값이지만 시인은 그 반값의 ‘기쁨’에 머무르지 않고 먼저 짐승의 ‘목숨
값’을 생각한다. 쓸쓸한 ‘悲感’은

‘반값’이라는 이익보다 앞서작동한다. 세상에 하찮은 목숨이란 없다. 하루살이도 하루살이에겐
하나뿐인

목숨이 아닌가. 최정아 시인은 다양한 상처를 ‘객관화’하고 담담하게 치유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소∙9」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용기를 내는 것, 악마의 뱀이 내 앞에서 죽었다.

불이 켜지는 순간 내가 큰 짐승이라는 걸
알았다.” 고 토로한다.

 



 
내가 거느린 식구들 숫자를 모른다. 거짓말 같지만 그들이 거처도 모른다. 다만 몇 조각의 과일과 약간의 빵 부스러기를 준비해 둘
뿐. 늦은 봄날 밤비처럼 찾아와 성찬으로 배를 불리고 돌아가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다. 가끔 찾아오는 손님 앞에서 그들의
행적을 숨기기에 급급하던 내가 그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은 사소한 변화였다. 페르몬 같은 분비물이 어떤 농약보다 깨끗함을 알게
되고 그들의 출현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분명 뒷방 어딘가에 서로 몸을 부비며 추위를 이겨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그들이 머무르는 방을 찾아내지 못하겠지만, 온기가 남아 있는 부뚜막에 밥 한 덩이 마련해두고 부엌을 나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개미」전문

 


 
작품「개미」에서도 시인이 뚜렷한 개성으로 자신의 음역(音域)을 구축해나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경험 속에서 우러난 생명의
소중함은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존재의 소중함이다. 삶은 단선적

질서에 의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얽혀 전개되고
갈등을 일으키지만 화자의 마음에서

‘용서’와 ‘포용’이라는 질서가 자리를 잡는 순간 귀찮은 ‘존재’는 친밀한 ‘가족’으로
전환되었다. 드디어

‘개미’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시인은 그들의 출현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뚜막에 밥 한 덩이 마련해두고

부엌을
나선다. 시인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엉뚱한 시인들은 어쩌면 현실에 가장 적응이

늦은 자들이다. 개미를 키우는 일은 분명
귀찮은 일이지만 시인이 ‘귀찮음’을 ‘긍정’으로 받아들임으로

건강한 에너지가 발생되었다. 개미는 시인에게 부지런함과 끈질김을
선물로 줄 것이다.

 


  무서리 내리는 날 아침

  속이 차오른 배추를 짚으로 묶어주었다

  엎드린 내 눈에 못을 치는 자 누구인가

  퍼런 진액을 흘리며

  오로지 배추만을 향해 기어가는 애벌레

  그동안 내가 총구를 겨눈 것들은

  하나같이 도망을 갔다

  발등에 앉은 모기, 밥상을 기웃대던 파리

  줄지어 벽을 오르는 개미까지

  내 총을 비껴 재빠르게 도망을 쳤다

  저에게 총을 겨눈 나를 의식하지 않고

  온몸으로 기어가는 애벌레는

  제 몸을 구부렸다 폈다

  먹고사는 일에 열심이다

  나는 언제 저토록 땀 흘린 적 있었던가

  어쩌면 오래 전

  제 몸의 일부를 내어주는 배추와

  열애를 약속했는지도 몰라

  나는 그만 총을 겨눌 수가 없었다


  -「배추밭에서」전문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는 상처가 의식으로 떠오르는 것을 거부하려고 하는 경향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 거부의식은「배추밭에서」잘
드러난다. 화자가 수없이 총을 겨눈 상대는 하나같이 도망을 갔지만

정작 화자에게 누군가 들이댄 총부리는 모두 피할 수 있었을까.
잠시 약자인 배추벌레가 되어보는 순간,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동한다.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인 仁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 義에서 우러나오는 수오지심, 禮에서 우러나오는
사양지심, 智에서 우러나오는 시비지심이

그것이다. 배추벌레를 대면한 화자는 배추벌레에겐 가장 두려운 천적이다. 화자가 맘 먹기에
따라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비의 유충인 애벌레는 세상을 아직 모른다. 오직 배춧잎을 향해

자벌레처럼 기어간다.
어쩌면 배추벌레는 그 위험한 순간에도 ‘날개’라는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목숨을 걸고 기어가는 배추벌레는 오직
배추만이 전부이다. 이때 최선을 다하는 것에

대한 ‘감동’은 화자의 마음을 돌려놓는다. 이처럼 연민어린 눈으로 세상을 어루만지고
한발 물러서는

최정아 시인의 시편들은 메마른 마음을 적셔주고 탁한 감정을 걸러주는 필터 역할을 하고 있다. 시인은

현실의 경계를
뚫고 나갈 때 시를 만날 수 있다. 자신의 영혼에 불을 당겨 발화하지 않는다면 시인의

마음이 독자에게 스미지 못할 것이다.

 



  비는 내리고

  두꺼비 한 마리 두 눈 깜빡이며

  마당으로 기어 나왔다

 


  엎드린 이마에서 빗물이 뚝뚝

  들깨 모종 심던 엄마처럼

  질퍽한 땅을 한발 한발 내디뎠다

  곁눈질하면 금방 넘어질 것 같은 디딤돌

  웅덩이 속 지렁이를 낚아채는 저 빠른 혓바닥

  얼룩진 디딤돌에서 더운 김이 솟았다

 


  “발에 흙 묻히지 않고 살면 얼매나 좋겠나”

  “아무렴 비가 뼛속까지 파고들겠나”

 


  그 디딤돌 밟지 않고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던 나처럼

  대밭 어디엔가 분명

  귀가 뻥 뚫린 새끼들이 있을 것이다

 


  청보리 잎 같은 비 오래도록 내리고

  간간이 들려오던 산꿩 울음도 사라지고

  문득 앞산의 나무들

  속옷까지 벗어던진 날이다.

  -「무죄」전문

 


 
가난이 죄처럼 느껴지는 이 시대, 가난은 죄가 아니고 불편할 뿐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불편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가난은 죄진 사람마냥 무거운 짐을 안겨준다. “비가 뼛속까지

파고 들겠느냐”는 말은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랴”와
같은 맥락이다. 더는 갈 데가 없는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는 말이다. 비를 맞으며 들깨 모종을 심는 엄마와 웅덩이 속 지렁이를
낚아채는 두꺼비는 모두

치열한 삶을 살고 있다. 화자에게 디딤돌은 질퍽한 흙에 엎드린 어머니이다. 대밭 어디엔가 먹이를

애타게
기다리는 두꺼비의 새끼들에겐 어미 두꺼비가 디딤돌이다. 모두 먹고 살기 위해 젖은 땅에서

비를 맞고 있다. 발에 흙을 묻히고
살아야하는 엄연한 현실에서 탈출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힘들고

질척한 풍경 앞에서 최정아 시인은 무릎을 꿇지 않는다. 청보리 잎
같은 빗속에 목청 좋은 산꿩을

등장시키고 앞산의 나무들을 속옷까지 벗겨 비를 맞힌다. 참으로 싱그럽다. 얼마나 건강하고 아름다운

생각인가. 순간, 가난은 저만치 물러서고 싱싱한 흙냄새가 대지를 적신다. 슬픔을 슬픔으로 말하지 않고

에둘러 말하는 방법이
더없이 애틋하고 감동을 준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역동적인 힘은 활동(活動)

에너지가 되어 파문처럼 번져간다. 청승맞은 비가
들깨 모종에게 뿌리를 줄 것이라고 믿는 모녀에게

가난은 무죄이다.

 


  여보게

  자네 날개 비비는 소리에 가을이 깊어 간다네

  들녘의 알곡들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발에 밟히는 풀씨들도

  으레 고개를 숙이는데

  밤하늘에 떠오르는 별 좀 보게나

  칠흑같이 어두워질수록 더욱 빛나지 않던가

  오래지 않아 자네 주변 감싸던 풀잎들도

  서서히 돌아갈 텐데

  거친 숨소리의 내 발자국 소리 들리지 않나

  난 자네처럼 풍류를 즐길 여유가 없다네

  둔치가 흔들릴 만큼

  고음으로 노래하는 자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

  오늘밤도 자네를 찾아왔지만

  진정으로 충고 하겠네

  자칫 그렇게 즐기다보면 맹목의 세월 보낸 나처럼

  쫓기게 될지도 모르니까

  여보게!

  자네 노랫소리 들리지 않으면

  내 충고 기꺼이 받아들여

  어디선가 열심히 살고 있는 것으로 알겠네


  -「풀벌레에게 주는 말」전문

 



 
자연 친화적인 최정아의 시편들은 풀벌레에게로 시선이 옮겨간다. 감상에 빠지기 쉬운 소재임에도

그는 독특한 발상으로 구조의
완결성을 이루고 있다. 자연이라는 주제와 근접함으로 통일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주제를 설정하고 집요하게
탐구함으로써 하나의 흐름을 갖게 되는데

그 흐름은 시인의 취향으로 나타나고 총체적 색깔을 지니게 된다. 어두운 곳만 조명해서
칙칙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시가 많은데 필자 개인의 취향으로는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전염성이 강한

암울한 기운이 시 전체에
퍼져 독자의 기분까지 우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최정아 시인의 시의

색깔은 짙은 녹색이다. 그 짙푸름에는 마치 「뒤뜰」의
그늘처럼 강한 삶의 의지가 들어있어 삶의

의욕을 북돋아준다. 여러 굴곡을 거쳐 온 시인에게 모나지 않은 사고가 존재하는 건 필시
거짓 없는

자연이 준 혜택이며 가난하지만 사랑을 듬뿍 부어준 누군가가 곁에 있었다는 증거일 터, 이처럼

시간의 경계를 넘어 삶의
바닥까지 내려갈지라도 고통은 두렵지 않을 것이다. 아래 두 편의 시에서

시인이 넘어가야할 가파른 경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꼬마전구가 한 사람의 생애를 읽는다

  입에서부터 항문까지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긴 통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엄마의 떡을 뺏던 호랑이가

  굽이굽이 넘을 적마다 위협이다

  떡 하나씩 던져주며 넘어온 오십 고개

  내시경의 불빛이 오십 쪽의 내 이면을 뒤적인다

  육십 쪽으로의 선회는 디귿자 길이었다

  나는 살 한 점을 뚝 떼어준다

  주르르 피가 흘러도

  구불구불 가야만 하는 길

  한 모롱이 돌아서 또 살 한 점을 떼어준다

  살아 있어 피가 붉다

  아이들 생각에 아픈 줄도 모르고

  다시 한 모롱이,

  이번에도 살 한 점 떼어 호랑이를 달랜다

  한 사람의 생애를 모두 읽은 꼬마전구

  가만가만 잠든 내 몸을 빠져나온다


  -「탐색하다」전문

 



  할머니 뼈 갉아먹고

  언제 내게로 옮겨왔는지 골반에서 신호를 보내온다

  근원지 밝혀보려 엑스레이실 침대에 누워 생각해보니

  늘어진 뱃살, 허벅지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드러난 내 몸

  철심으로 박힌 내 뼈들이 대단해 보이는데

  닮아진 골반 물렁뼈가 감나무에 걸린 연줄 같단다

  눈금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뼈마디

  경고 메시지를 보내느라 허연해졌을까?

  거미줄도 바람 불면 흔들리는데

  대낮부터 비틀대던 건넛집 돌배 아버지

  간장에 췌장까지 노출한 뒤 이 태만에 세상 뜨고

  의상실 옆 중학교 구선생도 생산 집 노출에 술렁술렁

  소문만 자자하다 엊그제 세상 뜨고

  아픔은 제 속에서 자라 무성한 노출을 낳고

  화려한 열대 꽃이라도 심으려는지

  따스한 피 돌고 도는 가슴 쓸어보는데

  나도 몰래 뒤통수에 샛문하나 있었는지

  오소소 실바람 새어들고


  -「위험한 노출」전문

 


 
엄마의 떡을 뺏던 호랑이가 이제 딸의 몸을 노리며 위협을 한다. 구불구불 한 모롱이 돌아서 또

살 한 점을 떼어주는 시인의 몸을
내시경이 탐색중이다. 아픔은 무성하게 자라 할머니 뼈를 갉아먹더니

이제 골반에서 신호를 보내온다. ‘위험한 노출’을 감내하고
침대에 눕는 화자는 바람에 흔들리는 ‘거미줄’

같은 나이에 들어섰다. 불안은 고조되지만 화려한 ‘열대꽃’을 등장시켜 상처 위에
꽂아두고 아픔을

감내한다. 그것은 시인의 능청스러움이다. 조그만 일에도 온갖 포즈를 취하고 엄살 부리는 시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
시들이 얼마나 가벼운지를 알기에 그 능청스러움이 듬직하고 반가운 것이다. 목마름의

‘실체’가 다만 일상적 삶의 무료함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실체’를 찾아가는 치열한 작업이었기에

앞으로 詩作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꽃으로 장식하는 것은 삶을
견뎌가는 내성耐性을

키우는 일, 오래 잠자던 시의 환부에 발톱으로 상처를 내고 시인은 그 상처 위에 붉은 꽃을 꽂는다.

오로지
시를 통해 숨을 쉬며 통증을 다스린 최정아 시인은「봄날의 한 호흡」으로 파랗게 피어오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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