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성 시집, 『내년에 사는 법』서평>
이목구비를 넘어서는 방법으로서의 ‘안개 시학’
박남희
인간의 욕망은 이목구비를 통로로 하여 발원하고 순환한다.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의 역학관계 속에 인간의 욕망이 숨어있다.
인간의 행과 불행, 기쁨과 괴로움, 생과 사는 욕망의 지형도 속에 존재하는 대비적 삶의 이법들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인간의
삶에 따라 경중이 있을 뿐, 욕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들이다. 인생에서 깨달음이 중요한 것도 인간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욕망의 지형도를 잘 파악하지 못하면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시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보는 시적 화두이다. 왜 시를 쓰는가 하는
질문 역시 같은 맥락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는 자신의 삶이나 존재성을 언어적으로 표현하여 그
내적 의미를 향유해보려는 목적이 있거나, 또는 시를 통해서 삶의 활력을 얻고 깨달음을 얻기 위한 효용론적 동기 등을 가지고 있다.
혹자는 언어를 극단까지 몰고 가서 시에서 삶을 위한 효용적 가치를 배제하고, 시는 오로지 시로써 존재해야 한다는 김춘수식
존재론적 시관을 고집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시관을 가지고 있더라도 시를 삶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킬 수는 없다.
홍사성의 첫 시집『내년에 사는 법』은 삶에 밀착해 있으면서도 삶을 넘어서는 법을 탐색하고 있는 시집이다. 그 바탕에는 물론 불교적
사유가 내재되어 있다. 홍사성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삶이고, 동시에 삶 그 너머의 어떤 것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삶
너머의 어떤 것이란 종교적 초월이나 공간적 초월을 지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의 지고한 어떤 상태를 지향하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홍사성 시집의 곳곳에 등장하는 불경이나 불교사상은 종교적 깊이보다는 삶의 깊이를 탐색해보려는 의도에서 인유된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홍사성의 시들이 본질적으로 깨달음을 지향하는 것은 그의 시관이 인식의 시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쓸 때 주체나 대상을 새롭게 인식한다는 것과 불교에서 설법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은 보이지 않던 어떤 것을
새롭게 본다는 점에서 같은 것이다. 다음의 시는 이러한 시인의식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햇살 노란 가을, 양평 용문사 앞 은행나무
온몸 흔들며 반야심경 외운다
봄볕에 새순 틔워 이파리는 마른 가지 속에 들었다고
갈바람으로 우수수 낙엽 지게 하고는 푸른 잎이 노란 잎과 다르지 않다고
한 뼘 노을에 정신 팔려 은행잎에 새긴 말씀 다 알아듣지 못했다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맡고 싶고 먹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은
빈 염불만 하는 떠돌이
물구나무 서서 헛꿈 꾼 세월 참 길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쩐 일인지 천년 은행나무가 보이고 계곡 물소리까지 들린다
눈 뜨지 않아도 보이고 귀 대지 않아도 들린다
혹시 모르겠다. 이러다간 어느 날 갑자기 대나무 쪼개지듯 이목耳目이 열려
내 몸으로 하는 설법 내가 듣게 될지
―「나의 반야심경」전문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스스로 매여서 인간과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삶의 이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인용 시에서 반야심경을
외우면서 “푸른 잎이 노란 잎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있는 용문사 은행나무와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맡고 싶고 먹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은/빈 염불만 하는 떠돌이”인 화자가 대비되어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동안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헛꿈 꾼 세월을 뒤로 하고 비로소 이목구비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현상계의 한계를 넘어서는 법을 깨닫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시인의 눈에 새롭게 “천년 은행나무가 보이고 계곡 물소리까지” 들리는 것은 ‘한 뼘 노을’로 상징되는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空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반야심경은 인간이 오온五蘊, 즉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러한
것들은 결국 공空에 수렴된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오온의 구성 요소인 인간의 몸뚱이(色)와 마음작용에 해당하는 감각이나
느낌(受), 여러 가지 생각(想), 모든 의식적 무의식적 행위(行), 인식작용(識) 등은 각자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행위는 ‘헛꿈’에 불과할 뿐이다. 홍사성 시인의 시가 이처럼
인식의 시에 닿아있는 것은 시를 쓰는 행위조차도 ‘헛꿈’이 되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홍사성 시인이 시 쓰기를 통해서 지향하는 것은 반야심경에 머물지 않고 모든 중생을 폭넓게 아우르는 화엄 세상으로까지 나아간다.
못난이는 누구든지
지리산 화엄사 각황전에 가볼 일이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새든 벌레든
꽃이든 나비든 흙이든 물이든
꼭 한번 가볼 일이다
가서 깨달을 일이다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는지
그 부처가 어떻게 화엄 세상 만드는지
뒤틀어진 몸으로 서 있는 기둥은 나무부처
돌계단에 드러누운 장대석은 돌부처
빛바랜 단청 속에는 나비부처
용마루에는 이끼 낀 기와부처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부처, 부처, 부처
하찮은 중생도 여기서는 부처가 되나니
거지같이 살아온 인생도 황제가 되나니
누구나 별 볼 일 없이 걸어온 길 억울하거든
전라남도 구례 땅 화엄사 각황전에 가볼 일이다
가서 못난이 부처나 되어볼 일이다
부처 구경이라도 하고 올 일이다
―「못난이 화엄 세상」전문
인간 세상은 욕망의 법칙이 지배하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이에 각종 차별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슬픔과 고통과 열등감 등이 존재하게 되고, 결국은 불성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시인은 이러한 세상의 차별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화엄적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다. 화엄사상의 핵심은 법계연기(法界緣起)이다. 즉,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존재하는 일이 없이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가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얽혀있으며 궁극적으로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고 말한다. 홍사성의 「못난이 화엄 세상」은 화엄사상의 핵심적 사상 중의 하나인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즉 현상계의 모든 사물이 서로 차별하는 일이 없이 일체화되고 있다는 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화엄적 사유체계를 통해 세상을 보면 세상에는 못난이와 잘난 사람이 따로 없고 중생과 부처가 따로 없게 된다. 시인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의 내면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던 ‘변두리 의식’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홍사성
시인이 뼈저리게 느끼는 변두리의식은 개인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더구나 이러한 의식은 인간 뿐 아니라 자연의 생물은 물론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다.
<한 수행자가 조주 선사에게 “개에도 불성이 있느냐”라고 묻자 어느 날은 “있다有”하고 어느 날은 “없다無” 했다고
한다>는 전제를 달고 있는 시 「개같은 그대에게」역시 “개처럼 살아도/부처/부처처럼 살아도/개//눈 뜨고 보니 보이네/ 눈
감고 보니 더 잘 보이네//개같은 그대/ 부처 같은 그대”라는 구절에 드러나 있는 화엄적 깨달음으로 통해서 ‘변두리 의식’을
훌륭하게 극복해내고 있다. 그런데 시의 제목이 의식적으로 과격하게 표현된 것을 주목해보자면, 그것은 간접적으로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시인의 야유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부처님 나이쯤 되면
머리카락은 파뿌리처럼 하얗고
얼굴에는 검버섯이 잔뜩 피어야 할 텐데
해인사 부처님은 천 살이 넘었다면서
머리는 여전히 새카맣고
피부도 아직 팽팽한 그대로시다
매일 싱싱한 과일이며 꽃 공양 받으셔서 그런가
밤마다 염색하고 보톡스라도 맞으셨나
그런 좋은 방법 있으면 좀 가르쳐주시지
귀엣말로라도 슬쩍 일러주시지
그 비방을 이미 팔만대장경에 새겨놓으셨다고?
아이쿠, 그걸 언제 다 읽나!
평생 해인사에 살던 이름난 큰스님들도
다 못 읽고 입적했다는데……
그러지 마시고, 오늘 밤 꿈속으로 찾아뵈오면
물었던 사탕 빼 손자 입에 물려주듯이
자상하게 일러주시지
제발 좀 그렇게 해주시지
염치없지만 응석 부리듯
오체투지로 삼 배, 오체투지로 백팔 배
―「응석」전문
「응석」이라는 제법 귀여운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해인사 부처님께 응석부리는 어법을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타락한 불교와 부패한 세상을 향한 야유가 숨어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천 살이 넘었으면서 여전히 머리가 새카맣고 피부가 팽팽한
해인사 부처님을 야유하고 있는 것은 실은 세속적 욕망을 쫓는 타락한 불자들을 향한 야유인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물론
신앙적 염결성에 기인한 것이지만 폭넓은 관점에서 보면 불교의 한계를 넘어보려는 시인의 노력도 포함되어 있다. 홍사성 시인이 불자가
되지 않고 시인이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홍사성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불교적 화두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을 단적으로 말하면 지극한 인간다움의 세계이다. 시인은 그의 시들을 통해서 종교적 해탈을
꿈꾸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인간 세상의 한계를 긍정하고 욕망의 거처인 몸의 귀중함을 새삼 깨닫는다.
그가 “몸이 전부다//몸이 있어 숨 쉬고 몸이 있어 일하고 몸이 있어 사랑하는 거다 그래서 몸에 충성하는 거다 몸을 우습게
보지마라 몸한테 잘 보이려고 옷 입고 몸 배고프지 말라고 밥 먹고 몸 쉬게 하려고 집 짓는 거다 그래서 악착같이 돈 벌려고 하는
거다// 몸이 있으니 살아있는 거다. 몸이 전부다”(「몸을 철학해보니」)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그가 탈속을 꿈꾸는 염세론자가
아님을 증거해준다. 시인의 이러한 세계관은 그의 또 다른 시「늪」에서 불국사 조실 월산 스님이 던진 화두인 “여기, 늪에 빠지지
않고 늪을 건너갈 사람 몇이나 있는가!”라는 말 속에도 들어있다. 즉 시인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한계를 인정하고, 늪 같은
세상에 아주 빠지지 않고 무사히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을 시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들에는
하늘이 감당하지 못할 무게가 있다
한 방울의 비
한 송이의 눈
한 장의 꽃잎
한 티끌의 재
한 올의 새털……
이 모든 가벼운 것들은
그 무게로 하여 지상으로 낙하한다
문밖으로 내쳐진 사람들에게는
대지가 감당하지 못할 무게가 있다
파양당한 고아
농성 중인 수배자
어려서부터 몸 팔아온 창녀
쌀가마에 불 지른 농사꾼
지하철역 노숙자……
이 모든 거리의 목숨들은
그 무게로 하여 세상을 침묵시킨다
―「슬픔의 무게」전문
이
세상에는 아무리 가벼운 것들도 무게가 있다. 시인은 이러한 무게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슬픔과 연계시킨다. 시인이 이 시의
초두에서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들에는/하늘이 감당하지 못할 무게가 있다”고 말한 것은 그의 인생관이 건실하게 지상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이 인식하고 있는 ‘무게’는 인간이 지상적 삶을 영위하면서 느끼게 되는 존재론적
무게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시인에 따르면 이러한 무게는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존재, 즉 해외 입양 고아, 지명 수배자,
창녀, 농사꾼, 노숙자처럼 하찮게 느껴지는 존재들에게까지도 동일하게 존재하는 고귀한 생명의 무게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이들을
하찮은 존재라고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이다. 홍사성의 시가 자칫 종교적 관념에 묶일 위험이 있으면서도 넉넉히 그것을
넘어서고 있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향한 긍정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썩고 썩어서 더 썩을 게 없는” 갯벌 같은 세상을 “속은 진작 다 죽고 껍데기만 겨우 살아 있는/ 한 만 년쯤 된 고목나무
냄새”(「안개처럼 자욱하다」)를 풍기며 살아가는 설악산 霧山 스님의 삶을 통해서 타락한 세상을 나름대로 긍정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깨우치게 된다. 시인에 따르면 무산 스님이 세상을 사는 방법은 알아도 아는 게 아니고 보아도 보는 게 아니고 들어도 듣는 게
아닌, “알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어/ 돌아서면 더욱 자욱해지는/ 설악산 안개” 같은 삶이다. 스님의 이러한 삶의 태도야말로
이목구비(욕망)를 넘어서서 타락한 세상에 매몰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지혜인 것이다. 홍사성 시인이 지향하는 시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그의 시학을 ‘안개 시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안개 시학’은 쉽게 종교적
관념에 매몰되지 않고 타락한 세상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메타포로서, 앞으로 그의 시가 주목해야 할 새로운 덕목
중의 하나이다.
-------
박남희: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고장난 아침』외, 현, 고려대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