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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극지(極地)를 헤맨 바람의 흔적

Author
mimi
Date
2011-09-24 09:33
Views
11786

 


「노을을 베끼다」김기산 시집 해설

 

 영혼의 극지(極地)를 헤맨 바람의 흔적

 

 



                                                                                                       마경덕(시인)

 



 
끝없이 퍼져나가는 파문을 보았다. 바람만 스쳐도 일렁이는 수면처럼 섬세하고 유장悠長한

울림을 보았다. 김기산의 세밀한 시편들은
영혼의 극지(極地)를 찾아 헤맨 바람의 흔적들이다.

그가 기록한 것들은 대부분 외곽을 떠도는 바람의 행로여서 쓸쓸하고
비애적悲哀的이다.

시인이 받아 적은 마음의 무늬들은 시집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드러나기 마련인데 김기산의

詩的 무늬들은 바람을
불어 넣으면 일그러지거나 부풀어 오르는 비눗방울처럼 움직이는 감각적

이미지(sensual image)로 전이 된다. 어딘가로
흘러가거나 떠나야하는 유랑流浪의 시편들은

아무에게도 짐 지우지 않고 혼자 감당한 외로움의 기록이다. 도시에 살면서도 자주 멀미를
해야 하는

그는 인파에 출렁이는 고독한 섬이 되어 외따로 서있다. 낡은 일기장 한권을 들고 번잡한 도시를 떠난

시인은 저무는
바닷가에 앉아 노을을 베낀다. 그가 기록한 외로움은 건강하고 맑은 외로움이다.

고통스런 흔적도 바람에 우는 풍경처럼 결이 곱고
섬세하다. 바람의 갈피를 읽어내는 떨림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치사량의 고통을 고통으로만 기록하지 않았기에 김기산의 시는
아름답고

기분 좋은 통증이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가는 것, 흐르는 대로 버려두는 것, 끝없이 비우고 비워 바람처럼 가벼워지는 것,

김기산이 사랑하는 것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세속을 떠난 시인은 마음도 몸도 가벼워져서 파도소리와

노을만 배낭에 지고 돌아온다.

 

 



  민박집에 짐을 풀고

  끊어진 옛길을 따라 걸었다

  협궤열차의 기적汽笛은 물밑으로 가라앉고

  시든 철길만 누워있었다

 


  빗장을 지른 역사驛舍를 지날 때

  바람소리가 바짝 다가왔다

 


  해를 삼킨 저녁바다는 목청을 높이고

  비틀거리던 그날처럼 창문도 밤새 덜컹거렸다

 

  낯선 방에 엎드려 친구에게

  노을을 베끼고 파도 한 장을 접어 보냈다

  혼자서 살만하냐고

  추운 날들이 쌓이면 볕이 드느냐고

 


  그 밤, 바람소리를 깔고 잠이 들었다


  도시를 떠난 지 며칠

  겹겹 쌓이는 파도에 밀려 먼 곳까지 흘러갔다

 


  그해 겨울, 우리는 멀리 있었다

 


                           -「파도 한 장을 접어 보냈다」부분

 

 




  ‘혼자’라는 말은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홀가분함이 아니다.「파도 한 장을 접어 보냈다」에서는

누구에겐가 매이고 싶은 간절한 ‘바람’으로 읽힌다. 그는 잃어버린 ‘나’를 만나며 떠난 ‘누군가’를

생각한다. 철길만 남은 끊어진 옛길을 따라 걸으니 사라진 것들이 다가온다. 겨울바다의 파도소리,

그 적막에 앉아 바라보는 도시는 어디쯤인가. 스스로 고립孤立에 묶임으로 시인은 혼자가 되었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람소리를 깔고 잠들기 전, 그는 누군가에게 노을을 베끼고 파도 한 장을 접어

보낸다. 혼자서 살만하냐고, 추운 날들이 쌓이면 볕이
드느냐고 묻는 시인의 심중이 물밑처럼 서늘하다.

협궤열차의 기적汽笛이 물밑으로 가라앉듯 지난 기억을 수장할 순 없을까. 끝없이
바람이 되고자 하는

김기산은 어쩌면 버리고 싶은 기억들이 많았는지도 모른다. 김기산이 즐겨 쓰는 시의 질료는 자연인데

그 중 바다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세밀한 움직임의 감각적 이미지는 바다를 만났을 때 가장

절실하게 표출된다. 그는 오랫동안 고통을 보듬고 살았다.

 

 



  백령도 콩돌,

  파도에 여물어 콩처럼 자그만 돌

 


  빗소리에 바다가 젖고

  하얀 거품을 물고 달려오는 파도에

  콩돌이 몸을 뒤챈다

 

  물길에 닦인 맑은 눈이며

  구름의 무늬가 들어있는 환한 속살


  쨍쨍한 볕에 몸을 말리고

  서늘한 달빛을 덮고 잠이 들었으리라

  별빛이 다가와 흔들면

  선잠 깨어 파도의 숨길을 살폈으리라

 


  그 콩돌로 물수제비뜨는 무심한 사람들

  콩, 콩, 몇 발짝 뛰다가 가라앉는다

 

  깊은 바다에 수장된 푸른 콩돌

  또 얼마를 물밑에서 기다려야하나

 

  색색의 콩알이 머릿속을 굴러다닌다

 


                                             -「콩돌 해안전문

 



 
콩알처럼 콩콩 구르는 시 한 편이 섬을 통째로 들어올린다. 콩알처럼 작은 돌은 오랫동안 파도와

바람에 구른 흔적이다. 비로소
콩알만 해졌을 때 콩돌이 되는 것이니 파도에 깎이는 것은 콩이 여물듯

여무는 것이다. 그 작은 돌이 되기까지 견딘 시간은
얼마인가? 그런데 무심한 손길들이 물수제비를

뜨고 있다. 깊은 바다로 가라앉는 콩돌을 보며 가슴 아파하는 시인의 머릿속에 색색의
콩알이

굴러다닌다. 측은지심은 시인의 유순한 성품과 이어진다. 전쟁이라는 격렬한 시대를 건너온 시인에게

하찮은 목숨까지도 소중한
의미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예민한 짐승처럼 목덜미의 털을 세우고 긴장하는

것은 시인의 덕목이기도 하고 시 전체에 흐르는 내재율(internal rhythm), 즉 시인이 시를 엮는

호흡이기도 하다. 감성의 발달은 그가 살아온 세월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달콤한 미끼에 목이 걸려

  친구 따라 갔다

 


  오천 항에서 막막한 바닷길 한 시간

  꾼들의 현란한 묘수가 시작되고

  바다는 꿈틀꿈틀 저항한다

  흔들리는 갑판 위

  이미 몇 마리의 노래미와 우럭이

  팽팽한 명줄 버팅기며 파닥거린다

 


  낚싯줄에 바다가 끌려올 때마다

  손맛이 좋다고 소리를 친다

 


  도마에 누워 헐떡이는 목숨을 바라보니

  왠지 입맛이 쓰다

  살점을 저미는 익숙한 칼끝이

  자꾸 심장을 찌른다

   

 


                                            - 「손맛, 입맛」부분  

 

 


  ‘손맛과 입맛’이 합쳐지면 그야말로 일미逸味
것인데 시인에겐 그마저 쓴맛이다. 연민이 묻어나는

시편들은 자칫 유약함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나 함부로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못하는 것은

'생명존엄'을 강조하고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신실한 신자이며

어머니 또한
그러하였다.「낚시 유감」에서도 살생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여실히 드러난다.

 

  


  콱 물어라 월척답게,

  순간순간 눈을 떼지 않고 유혹하다가

  순진한 놈 걸려들면

  재빨리 낚아채는 속셈,


  팽팽히 매달리는 숨통을

  바늘에 걸린 피투성이를

  즐기는 사람들 짓이 어딘지 사기詐欺 같아서

 

  평소 방생하시던 어머니 따라

  평생 바다를 낚지 않았다

 


  생명을 놀이로 삼는 일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까

 

  가끔 하늘에 대고 혼잣말을 해본다

 

 

                                               -「낚시 유감」부분  

 


  많은 사람이 즐기는 낚시조차 즐기지 못하는 시인은 세상과 섞이지 못하는 고통을 시로 쓴다.

한 방울의 물에도 반응하는 시인은 선천적으로 인간임을 슬퍼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힘을 가진 자가

약자에게 휘두르는 힘을 그는
기詐欺 같다고 한다. 배고픈 것들에게 낚싯밥을 던져 끌어올린 행위를

‘속임수’라고 보는 것은, 생계가 아닌 취미, 즉 놀이로
즐기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김기산은 낚시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유 없는 살인, 무절제한 세상의 폭력에 대한
약자의 저항이다.

「오늘 사람인 것이 미안하다」에서도 팔려가는 소를 어쩌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람이 짐승에게 빌고


있다.「둥지」에서도 철로변 전봇대로 밀려난 새둥지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한전 직원들이 기둥차를

타고 둥지를 헐어내는 것을 보고
“과연 이 세상이 사람만의 것일까” 라고 반문한다.

 

 


  뼈 한 조각까지 다 내주고

  돌아가는 소

  이제 부처가 사랑하는

  너의 족이 모여 사는 곳으로 가라

 


  미안하다

  사람이라서 미안하다

 


                             -「오늘 사람인 것이 미안하다」부분

 



  둥지 틀만한 나무도 없고

  새끼 키울만한 먹이도 없다

  철로변 전봇대로 밀려난 둥지도

  감전사고 난다고,

  한전 직원들이 기둥차를 타고 헐어낸다

 


  과연 이 세상이 사람만의 것일까

 

                                                       -「둥지」부분

 


  심성이 약한 그는 번번이 말을 삼키고 만다. 그가 토해낼 수 있는 곳은 하늘이다. 하늘은 정직하고

공의로운 신이 사는 곳, 그는 방향과 중심을 잃은 세상의 일들을 세상에 쏟지 않고 기도처럼 하늘에

쏟아낸다. 도시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시인은 여전히 출렁거리며 또 하루를 건너간다.

 

 



   


  뱃전에 서서 아득히 물길을 바라보듯

  잠시 울렁이는 내 인생의 순간들

  벌써 저만큼 물러가 낯설게 반짝이는,

 


  출렁이는 도시의 섬

 


  노래방에 가면

  나는 자주 멀미를 한다

 


                               -「도시의 섬에서 출렁이다」부분  

 

  시인이 노래방에 가서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은 정적인 그가 소란함을 싫어하는 이유도 있지만

몇 소절 훌쩍 건너뛰고 싶은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뱃전에 서서 아득히 물길을 바라보니 울렁이던

인생의 순간들이 멀미로 다가온다.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삶의 장면들, 고여 있던 상처가
부의

자극에 출렁거리며 쏟아진 탓이다. 시인의 감정과 생각이 살고 있는 그곳, 역시 외로운 섬이었다.

시적 발상을 유발시키는 시적
모티프는 음습하고 가난했던 ‘과거’라는 진원지에서 출발한다. 대부분

시인이 머무는 곳은 과거이며 그곳을 향해 떠나간다. 이
어두운 여로旅路는 눈 감고도 걸을 수 있는

길이며 설렘과 통증이 존재하는 곳이다.

 


  어느 날 녹차 향에서

  무청시래기 냄새가 스쳐간 후로

  누이는 녹차를 우려내지 않았다

 

  쉴 새 없이 포성에 쫓기고

  서걱거리는 무청더미에

  허리 펴지 못한 피난길이

  녹차가 토해낸 서러운 물빛이어서

 


  삶아서 죽을 쑤고 된장 섞어 버무리고

  한나절 배 꺼질까

  뛰어다니지 못한 세월이

  그 찻잔에 녹아있어서

 

  깊고 쌉싸래한 녹차의 온기溫氣를

  애써 잊으려 돌아서는 누이

 

  그 숨결마다 고인 눈물이

  꽁꽁 언 바람벽에 걸려있어

  아직도 녹차를 마시지 않는다

 


                                                -「누이와 녹차 」전문

 


 
전쟁과 가난은 누이에게 ‘정신적 외상外傷’이다. 피난길에 겪은 어릴 적의 배고픔이란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상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녹차를 우려낸 물빛만 보면 무청에서 흘러나온 파릇한

물빛이 생각나고 포성에 쫓기던 그때가 떠오른다. 시래기의 맛 속에는
죽음을 체험한
누이의 두려움이

숨어 있다. 배고픔보다 더 무서웠던 포성이 귀청을 찢고 지나가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뒤엉킨 피난길은

누이에게
가장 피하고 싶은 기억이다. 녹차 한잔으로 끌어낸 그늘 한 점은 상처의 뿌리 중 한 갈래일

뿐이었다.

 

 


  언덕을 넘을 때 달빛이 밟혔다

  별은 차갑게 내려오고

  어둠은 앞서 묘지를 향해 갔다

  나는 할머니 뒤를 따라 걸었다

 

  낮은 산기슭 외진 창고에 닿아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해가 떠도 오가는 사람 없고

  가끔 포성이 언덕을 넘어왔다

  할머니와 나는 그곳에 짐을 풀고 한참을 살았다

  나는 나무를 하고 물을 길었다

 


  나무를 못한 날은

  불기 없는 아랫목에서 웅크리고 잠을 잤고

  할머니는 숨겨놓은 소주를 한잔씩 드시곤 했다

 


  할머니의 마른 기침소리에

  잠이 깨는 날은 또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동이 트면 포성이 지나간 자리에

  아침 해가 서늘한 맨발로 들어서고

 


  그 묘지에 내 일가들이 묻혀있었다는 것

  할머니 돌아가시고, 전쟁이 끝난 후

  한참 만에 알았다

 


  가끔 스쳐가는 열한 살

  할머니 숨소리 가까이 들리는 날

  나는 또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운 숨소리」전문

 

 



  열한 살 소년이 전쟁을 피해 간 산기슭 외진 창고는 시인의 슬픔이 고여 있는 곳이다. 거대한

파괴력에 속수무책인 불안과 공포는
인에게도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어머니와의 이별, 포성소리,

할머니의 마른기침은 참담함과 절망을 잘 보여준다. 병든 할머니를
대신해 나무를 하고 물을 길어야

했던 그 시절, 동이 트면 포성이 지나간 자리에 아침 해가 서늘한 맨발로 들어섰다. 죽음 속에서도

해는 뜨고 봄은 오고 핏빛처럼 붉은 꽃은 피었을 것이다. 김기산은 ‘절망’이란 극한 상황에서 ‘태양’이라는

‘빛’을 등장시켜
희망과 삶의 의욕을 보여준다. 또한 삶과 죽음은 ‘해가 지고 뜨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말하고 있다. 소멸된 자리엔 다른 생명이
잉태되고 그렇게 세상은 돌아간다.
죽음에 대한 시인의 생각은

어릴 적 전쟁을 통한 두려움으로 잠재의식 속에 자리를 잡으며 생에 대한 소중함을 일찍 깨닫게

해주었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는 그가 세상을 살아내는 자세를 가르쳐준 셈이다.

그래서 김기산의 시편들은 진중하고 사려가 깊다. 마른기침을 하던 가쁜 숨소리마저 그리운 나이,

빛바랜 흑백사진첩을 넘기면 바람처럼 흘러간 시간이 보이고 슬픔의 근원을 더듬어 가면 휘어진

기억들이 하나씩 걸어나온다.

 

  따뜻한 추억 하나 없지만

  잠들면 가끔 찾아가는 그 판잣집

 


  젊어서 혼자되어 이고지고 온 피난길

  그 골목에 들어서면

  등잔불 아래

  구멍 난 옷을 깁던 어머니 그림자가

  온몸을 녹인다

 


                                               -「흑백사진첩」부분

  


 
하루에 몇 번씩 물지게를 지고 헐떡이던 가파른 길, 잠들면 가끔 찾아가는 그 판잣집에 젊어서

혼자된 어머니가 있다. 아버지 대신
물지게를 져야 했던 시인은 그래도 어머니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김기산은 슬픔을 돌아보고 어루만지며 삶을 견뎌가는 내성耐性을
키운다.

그래서 그의 서정적인 시편들은 생각보다 꿋꿋하다. 만만찮은 결기가 느껴진다.

 

 


  미군 사격장이 내려다보이던 용산 해방촌

  삼팔따라지들*이 모여 사는 마지막 촌이었다

  이북이 고향인 우리가족도 그곳에서 살았다

  열네 살 되던 해 나는 중학교를 쉬고

  큰 누이는 동네 꽈배기공장에 다녔다

  이른 새벽, 젖은 두레박을 잡고 내려다보는

  우물은 깊고 어두웠다

  눈만 뜨면 녹슨 수레에 이삿짐이 떠났고

  낯선 얼굴들이 들어서던 해방촌

  동네 초입 야매담배를 팔던

  구멍탄집**은 셋집도 소개하며 먹고 살았고

  동네 끝자락 구두수선집 아저씨는

  바늘과 초실을 입에 물고

  굳은살 박인 손으로 헌 구두를 기웠다

  황해도가 고향인 집주인 병찬이 아버지는

  쪼그려 앉아 종일 담배를 피우던 골초였고

  평안도 희망이발소 아저씨는 멱살잡이 싸움꾼이었다

  종일 물지게 지느라 발등이 젖었던 북청 아주머니는

  가족도 없이 쪼글쪼글 늙어갔다

  마음이 여린 염색소 원산 아저씨는

  눈을 감고 명사십리를 한 바퀴씩 돌아오곤 했다

  고향땅 수복을 기다리는 피난촌

  끼니때 맞춰 한물간 생선장수가 찾아들고

  소 내장과 선지를 초롱에 지고

  국거리 사라는 높은 목청이 지나가면

  그 뒤를 따라 두부장수가 종을 치며

  김이 나는 지게를 지고 달려갔다

  오지 않는 봄을 기다리며

  하루의 끼니에 목숨을 걸고 살던 산동네

  더는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낮은 바닥이었다


  끝내 남쪽에 할머니를 묻고 아버지를 묻고

  내 어머니를 묻었다

  고향은 늘 가슴에 있었다

 


*삼팔선을 넘어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연탄집

 


                                             -「해방촌 사람들」전문

 

 


  용산 해방촌, 삼팔선을 넘어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모여 살았다.

해방을 기다리며 잠시 몸 기대며 살던 곳, 시인의 손끝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재생된 해방촌은

소외된 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위태로운 ‘삶의 현장’에서 열네 살 소년은 중학교를

쉬고 누이는 동네 꽈배기공장을 나가야 했다. 두레박줄을 잡고 물을 긷던 소년에게 우물은 깊고

어두웠다. 사방이 막힌 우물은 시인은 암담한 심경과 절망을 그대로 보여준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은 해방을 기다렸지만 끝내 해방은 오지 않고 시인은 남쪽에 할머니를 묻고 아버지를 묻고

어머니를 묻었다. 고향은 늘 가슴에 있었다. 부모가 묻힌 곳은 가슴이라는 묘지였다.

 



 
시인은 고달픈 일상을 들뜨지 않고 차분한 필치로 담아내고 있다. 대체로 그의 시편들이 진중하고

담담하게 읽히는 것은 삶의 한 컷 한
컷을 소묘하듯 정밀하고 세심하게 그려낸 이유일 것이다.

고요함 속에서도 역동적인 힘이 느껴지는 것은 생을 바라보는 따뜻함과
진정성이 긴 여운으로

감성이입을 불러일으켜 독자의 심중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서정은 내면과 감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고리가
되어 흐름을 이어준다. 나지막한 어조로 잔잔히 펼쳐가는 시인은 「
염소」에서
“유일한

무기는 뿔이지만 무저항의 기사이며 그의 영혼이 맑디맑아 애기울음으로 운다”고 하였다. 어쩌면 그

염소는 오물오물 종이를
씹으며 수행을 되새김질 하는 시인 자신일 지도 모른다. 이승에서 맡은 시인의

수행은 쉽게 끝나지 않아 김포장, 모란장, 가평장,
봉평장, 횡성장까지 바람처럼 돌아온다. 이제 그는

도시를 떠나 한적한 외곽에 터를 잡고 나뭇가지에 새소리를 걸어두고 살고 있다.

 

 



  양평 항금리 도둑 없는 마을

  잡초 우거진 밭

  하찮은 시름까지 지고 가 풀어놓는 곳

  밭에서 나온 돌은 담이 되고

  나무 몇 그루 가난한 살림을 가려준다

 

  느린 걸음으로 약수터 올라가

  나뭇가지마다 걸어둔

  자자한 새 소리 들으며

  약수통에 물을 채우고

 

  풀밭 헤치며 내려오는 길

  나도 한때 잡초처럼 욕심이 무성했다

  그러나 내 욕심은 말라붙어

  누구든 드나들기 좋아졌다

 


  이제 누구의 발등도 적시지 않으련다

 


  가끔

  숲속의 고요가 찾아오면

  나의 텃밭에

  마음껏 하늘을 들여놓는다

 


                    - 「나뭇가지에 새소리 걸어두고 」전문

 

 



  걱정하지 말게나

  이 오지奧地 산막이 나에게는

  다시없는 엄마 품이네

 


  방안까지 달빛을 들이고 사니

  내 어지럼증도 점차 나아지겠지

 


  발걸음 흔들리고

  한참씩 눈 뜨지 못하는 현기증도

  개울물에 헹구고

  머릿속 소음들 한줌씩 흘려보낸다네

 


  도피랄 게 있나

  세상 낯설어지면서

  혼탁한 웃음들 피해온 곳인데

 


  저녁 풀벌레 소리에

  가슴 굳은살 빠지고 있다네


                      

                                                          -「奧地 산막

 



 
이제 욕심은 말라붙어 누구든 드나들기 좋아진 나이, 새소리나 걸어 두고 텃밭에 마음껏 하늘을

들여놓고 살고 있으니, 이제 누구의
발등도 적시지 않으리라. 기실 심성이 착한 그는 누구의 발등도

적셔보지 못했다. 어릴 적, 키보다 큰 물지게를 지고 수없이
엎질렀던 물은 그에게 깊은 상처였으므로….

  말랑한 복숭앗빛 딸이 어느새 시집을 가서 안겨준 손녀딸을 보며 시인은 시름을 지운다.「奧地 산막」에 울리는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와 저녁 풀벌레 소리로 세상에서 얻은 어지럼증과 가슴에 박인 굳은살을

녹여내는 중이다. 바람을 불러들여 그것들이 세상을 향해 표정을 가지기까지 자자한 새소리나 약수통에

채우며 욕심을 버리는 중이다. 깊은 시적 사유와 단단한 문장으로 선을 보이는 김기산의 첫 시집은

노을처럼 붉게 익었다. 결기를 버리고 둥그레져서 모두에게 스민다는 말, ‘노을’이란 얼마나 완숙한

아름다움인가. 세월의 두께만큼 조금씩 닳아가는 것은 소멸이 아니다. 비로소 하나의 완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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