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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외로움, 비소砒素 같은 詩 /이가림 시집「바람개비별」

Author
mimi
Date
2011-09-03 16:35
Views
13149

 


                          이가림 시집「바람개비별」

 

            치명적인 외로움, 비소砒素 같은 詩

 

                                           -  마경덕-


 

 「내 마음의 협궤열차」이후 십년 만에 출간한 이가림 시인의 여섯 번째
집「바람개비별」을 읽는 동안 내내 비가 내렸다. 사나흘 별은 뜨지 않고 40년 묵은 뒷마당 호두나무는 허공으로 키를 높이 들어
올렸다. 오후 2시, 무성한 그림자를 발아래 내려놓을 시간,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파랗게 젖은 허공이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내렸다.
나무는 그 무거운 그림자를 어디에 숨겼을까?

 

 
무릇 그림자는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보는 것. 빛이 없으면 눈을 뜨고도 볼 수 없는 것이 그림자였다. 호두나무가
이파리마다 담아둔 향기는 무심한 마음에는 닿지 않는 고요한 향기여서, 나무그늘에서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켜는 것처럼 멀고
아득해서 손이 닿지 않는 것들은 모두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지구에서 4,800광년 떨어진 곳에 있다는 바람개비별, 1998년 4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대 연구팀이 하와이에 있는 지름
10m짜리 케크 천체망원경으로 발견하였다. 1광년은 초당 30만Km의 속도의 빛이 1년 뒤에나 닿는 거리라하니 상상을 초월하는
까마득한 거리이다. 태양보다 25배 무겁고 10만 배가 더 밝다는 그 별은 2개월 뒤에 촬영해보니 바람개비 돌듯 모습이 바뀌었다고
한다. 누가 그 거대한 별을 바람개비 돌리듯 돌릴 수 있었을까?

 

 
과학의 힘으로 드러난 불가사의한 바람개비별의 존재,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분명 실존하는 별이다. 어쩌면 영원히 묻혀버렸을 그
별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순간, 바람개비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가슴에서 빛나게 되었다. 인간의 끝없는 호기심이 숨은 별을 발견하듯
우주와의 교감을 원하는 시인의 상상력으로「바람개비별」은 다시 태어났다. 날개가 있어도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바람개비는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으로 가동되는 것이다. 자연과 사물에 대한 시인의 남다른 애정이「바람개비별」을 지상으로 데려와 많은
사람의 가슴에 걸어두었다.

  그때 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영영 당신이라는 존재를 모를 수도 있는 일, 이가림 시인은 바람개비별 같은 인연을 생 라자르역 광장에 세워놓는다.

 

 
우리가 헤어진 건 생라자르역 광장, 아르망 페르낭데즈의 조각 <모두를 위한 시간> 앞에서였지. 여느 때처럼 “다음 주
토요일 정오에 여기서 만납시다” 라고 약속을 하고 무심히 헤어졌었지. 하지만 그게 영원히 다시 못 볼 삼도내의 작별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운명의 시침時針이 너무 빨리 가는 시계를 찬 그대와 우연의 시침이 너무 늦게 가는 시계를 찬 내가 물의 도시 도빌행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한 건 몇억 광년의 세월 속에서 일어난 불가사의한 기적중의 기적이었지.

 
어느 낯선 거리 건널목에선가, 발을 헛디디는 아주 사소한 실수로 오토바이에 치여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는 어처구니없는 우발사라도
그대에게 일어났던 것일까. 그날 이래 우리의 시계판은 납땜질 된 채 운행을 멈춰버리고 말았지. 되돌아올 길 없는 망각의 나락에
떨어진 그대는 아르망 페르낭데즈의 <모두를 위한 시간> 앞에 다시 올 수 없었고, 그것으로 우린 영영 엇갈린 행로를
밟을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심술궂은 시간의 신神의 질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린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았고, 다만 눈동자와
머리카락 빛깔과 목소리의 억양을 아는 것으로 이미 다정한 연인이 되어버렸지.

  비록 지금 그대의 이름을 알지 못해 부를 수 없다 해도, 그대의 눈빛과 웃음소리와 머리칼 향기를 기억하는 한, 그대는 내 안에 생생히 살아 있고, 그대 안에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오.

 
우린 '안녕히'란 차디찬 작별의 말을 입으로 말한 적이 없으므로 결코 헤어진 것이 아니오.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지만
누구도 틀린 것이 아닌 아르망 페르낭데즈의 <모두를 위한 시간> 앞에서 난 기어이 오고야 말 이 세상의 기적의 순간을
한사코 기다릴 것이오.

  

                       -「투병통신投甁通信․2」전문

 

 
광장이란 많은 사람이 모이는 넓은 빈터,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가는 곳이다. 그곳에서 만난 한 사람과의 인연은 마치 바람개비별을
발견한 것처럼 불가사의하고 기적적인 일이었다. ‘세상’이라는 광장에서 만난 사랑은 절대적 운명이었다.

 
파리 생라자르역 앞에 우뚝 서있는 <모두를 위한 시간> 은 아르망이 크고 작은 벽시계로 탑을 세운 작품이다. 벽시계가
뒤엉킨 <모두를 위한 시간>은 각양각색의 멈춰버린 시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바늘은 누군가 쓰다버린 시간들이며 기억이 정지된 순간 심장이 멎어버린 시간들이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시공을 초월한 영원으로
이어지는 시간일 수도 있겠다.

 
프랑스 신사실주의 선구자 아르망 피에르 페르낭데즈(Armand Pierre Fernandez)는 사물을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아상블라주(assemblage) 기법'과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을 연속적으로 쌓아올리는 '집적(accumulation)
기법'을 사용, 도시인의 생활을 작품 속에 반영하는 프랑스 조각가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들, 악기 가구 자동차 시계
구두 톱, 틀니 등 물체를 반복해서 늘어뜨리거나 해체시켜 쌓는 방법으로 그 물체가 가진 원래 쓰임새나 성격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보여주는데 그 힘은 가히 사납고 폭력적이다. 일상에서 소비되는 물체들을 빽빽하게 쌓아 과소비가 넘치는 고도의 물질문명에 대한
경고를 서슴지 않는다. 쉽게 폐기처분되는 물건을 통해 우리가 처한 현실을 비판하고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역, 광장은 기쁨과 슬픔이 시계바늘처럼 교차하는 곳. 시계들이 엉켜있는 모습에서 한 치의 여백도 없이 아옹다옹
등을 떠미는 현시대의 자화상과 희비(喜悲)에 뒤엉켜 흘러가는 세상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인파가 몰려들고 밀려가는 역 광장,
시침과 분침이 만나는 때, 하나가 되는 지점을 인연이라고 불러도 무리는 없겠다. 파리 생라자르역 광장 앞 <모두를 위한
시간>을 택한 이유도 어쩌면 그 이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모두 다 바쁘게 흘러가고 흘러가는 광장에서 유독 혼자만 느리게
걷는 이가림 시인.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돌의 언어」로 가작으로 입선,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빙하기」가
당선되었으니 어림잡아 시력 40년이 넘는 이가림 시인의 행보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걷는 것이다.「갓길에 앉아서」라는 시편에서도
시인이 걷고자 하는 보폭을 보여준다.「내 마음의 협궤열차」이후 십년 터울로 태어난「바람개비별」은 빠르게 달려가는 이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시인의 품에 맞게 욕심 없이 걸어왔다. 절제된 언어를 고르고 그 언어가 발효되기 까지 신중하고 진중하게 기다린
것이다. 오랜 침묵을「바람개비별」이라는 시집에 공들여 담았다. 시인은 말을 아끼는 사람이지 말을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가림
시인은 “진실의 과녁을 정확히 꿰뚫기 위해 언어의 탄환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으려고 아무것에나 쉽사리 방아쇠를 당기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신경림 시인 역시 추천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역설 같지만 이가림의 시인의 시는 말이 끝나는데서 시작되는 것 같다. 누항의 모든 말들이 진실에 다가서지 못하여 마침내 침묵할
때, 비로소 그의 시는 시작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외롭지만 아름답고 쓸쓸하지만 눈부시다. 모든 시들이 온통 저자거리에 나앉아
“날 좀 보소”와 “싸구려”를 외치는 판에 그만이 말을 아끼고 진실을 찾는 시의 정도를 걷고 있어 그의 시가 더욱 빛나는 대목도
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시가 무엇이며 무슨 일을 하는가를 호소력 있게 말해주는 것이 이가림의 시들이다.”

 
생략함으로 더 많은 말을 하는 시, 말이 끝나는 데서 시작하는 시는 상상력을 확대시켜 파장이 크다는 것. 침묵함으로 더 많은
이미지를 파생시키고 감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시란 이런 것이 아닌가. 언제부턴가 말을 아끼고 진실을 찾는 시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시들이 수다스럽고 어지럽다. 때로는 황당해서 무슨 암호를 풀듯 시를 해독해야 할 때도 있다. 너도 나도 목청을 높이고
시를 장식하는데 시인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았다. 간결하고 나지막한 어조에 비장미(悲壯美)가 흐르는「투병통신投甁通信․2」는 함부로
사랑을 남발하고 기다림을 모르는 성급한 이 시대의 사랑법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기실 막막한 기다림이란 그만큼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것,「투병통신投甁通信․1」에서 보여주는 절망감이란 뼈가 시리는 슬픔이다.

 

  이제

  내 비소砒素 같은 그리움을

  천년 종이에 싸

  빈 술병에 넣어

  달빛 인광燐光 무수히 떠내려가는

  달래강에 멀리 던진다

 

  먼 훗날

  부질없이 강가를 서성이는 이 있어

  이 병을 건져 올릴지라도

  그때엔 벌써

  글자들이 물에 씻겨

  사라져 버렸을 것을 믿는다

 

  끝내 말하지 못한 것이야말로

  영원히 숨 쉬는 것

 

  이제

  내 비소 같은 그리움을

  천년 종이에 싸

  빈 술병에 넣어

  일찍이 미친 사내 하나 빠져 죽은

  달래강에 멀리 던진다

 

                      -「투병통신投甁通信․1」전문

 

 
원소기호 As로 표기되는 비소(砒素)는 구리나 납 아연 등의 금속을 제련할 때 생기는 부산물이다. 비소화합물은 방부제 살충제
매독 치료에도 사용된다. 중독이 되면 죽음에 까지 이른다는 독성이 강한 물질이다. 그리움이 얼마나 깊어 비소 같은 그리움인가.
끝내 말하지 못한 것이야말로 영원히 숨 쉬는 것이라니 썩지 않는 천년 종이에 싸서 빈병에 넣어 던져보면 훗날 이루지 못한 사랑을
누군가 기억해줄까. 그렇다면 시인은 그리움을 시로 적어 세상에 던져두고 천년이나 썩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데, 그때는 글자들이 물에
씻겨 사라져 버렸을 것을 ‘믿는다’고 한다. ‘믿는다’는 ‘믿고 싶지 않다’로 읽어도 될 것이다.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하는
그리움으로 사모한 것들이 시집이라는 천년종이에 싸여 세상으로 던져지기 까지 일찍이 시에 미쳐 비워낸 술병은 얼마이며 달래강에
빠져죽은 적이 몇 번이던가. 시인에게 詩는 목숨과 같은 것, 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불멸의 사랑이다. 참으로 절실한
그리움이다. ‘바람개비별’을 그리워하듯 시를 향한 고백은「바람개비별․4 -마음의 귀」와「바람개비별․5」에서 절정을 이룬다.

 

  저 포산包山 남쪽에 사는 관기觀機

  불현듯 도성道成을 보고 싶어 하면

  그 간절함

  바람으로 불어 가

  산등성이 떡갈나무들이 북쪽으로 휘이고

  도성 또한 관기를 보고 싶어 하면

 

  그 기다림

  바람으로 불어 가

  산등성이 상수리나무들이 남쪽으로 휘이는 것

  옛적에 벌써

  우리 서로 보았는가

 

  내가 보내는 세찬 기별에

  그대 사는 집의 처마 끝이나

  그 여린 창문이 마구 흔들리는

  뜨거운 연통관連通管이 분명 뚫려 있어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달려가는

  내 눈먼 굴렁쇠여!

 

             -「바람개비별․4 - 마음의 귀」부분

 

「바
람개비별․4」에는 ‘마음의 귀’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마음을 열어두면 멀리 있는 마음도 이심전심 통한다는 것이다. 간절함은 진실의
과녁을 통과한다고 했던가. 삼국유사 포산이성(包山二聖)에 실린 관기와 도성, 두 성사(聖師)의 삶에 관한 설화를 끌어들인
초자연적 신령한 세계를 다룬 작품이다. 시와 시인으로 연결된 팽팽한 고리를 관기와 도성의 관계처럼 읽었다. 서로 간절히 원하는
연인처럼 늘 연가를 들려주어야 시와 시인의 관계는 지속된다.

 

  어찌하여

  그대에게만 닿으면

  내 안의 화약통

  그 뇌관이 꽃불로 터지는지

  나는 모르겠네

 

  그대가 아래서 춤추고

  내가 위에서 춤추는

  캄캄한 태극太極의 대낮이었다가

  그대가 위에서 춤추고

  내가 아래서 춤추는

  눈부신 무극無極의 밤이었다가

  입으로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 뱀같이

  둥그런 하나의 고리가 되는지

 

                       -「바람개비별․5」부분

 

 
시인에게는 시에게 연결된 도화선이 있다. 영감(靈感)에 불이 붙는 순간 뇌관은 충격에 의해 시의 화약통이 터지는 것인데, 그
불꽃이 꽃불처럼 아름답다. 시와 시인이 한 몸이 되어 캄캄한 태극(太極)의 대낮이었다가 눈부신 무극(無極)의 밤이 된다니 시에
빠지면 누구나 무아지경(無我之境)이 되어 뜬눈으로 밤을 보낸다. 마치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뱀처럼 제 피를 뽑아 시를
쓰는 격이다.

 
우로보로스는 고대의 상징으로 커다란 뱀 또는 용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삼키는 형상으로 원형을 이룬다. ‘시작’이 곧 ‘끝’이라는
의미를 지녀 윤회사상 또는 영원성의 상징으로 인식되어왔으나 시대가 바뀌면서 잠재 에너지라는 의미로서 '쿤달리니'와 같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끝없이 회전을 되풀이하는 圓은 ‘탄생’과 ‘죽음’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시간’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뱀의 탈피 행동을 ‘낡은 육체를 버리고 새로운 육체를 얻었다’고 믿었다. 불사신이라는 생각이 발전하여
우로보로스가 생겨난 것이라 한다. 시와 시인은 마치 물고 물리는 관계로 둥글게 한 몸이다. 시인은 시에게 묻는다. “어찌하여
그대에게만 닿으면

관이 꽃불로 터지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시인에게 시만큼 뜨거운 것이 있을까. 좋은 시를 발견했을 때의 흥분과 기쁨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시가 가진 魔力이니 어찌하랴. 시인은 제 살과 피를 내주고서라도 그 시를 얻어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태어났으니 그것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형벌인 것이다.

 
시인이「바람개비별」을 그리워하듯 어디엔가 매장된 수많은 시들도 누군가 발굴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새벽이 오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어둠처럼 시는 어디에선가 모여 있을 것이다. 저녁은 부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어슬렁어슬렁 나타나지만 시는 그렇지
않다.

 
간절히 부르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 그만큼 진심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니 절대적 교감이 필요한 것이다. 프랑스 문학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한 불문학자이며 미술에도 조예가 깊다는 이가림 시인, 무엇보다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다. 그 눈빛에 교감이
오가고 진심이 묻어있어 편 편마다 감동을 안겨준다.

 「공
중 채마밭」「귀가, 내 가장 먼 여행․1」「매미를 위한 변명」「이외출씨의 하루」「이사」「35평방미터의 고독․4 -딱따구리」등에서는
도시에서 느끼는 메마름을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 문명이 주는 편리함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근본적인 고독을 무엇으로 메울까.
새소리 물소리 흙냄새를 그리워하는 것은 비단 시인이라서 만은 아닐 것이다. 이가림 시인이 「바람개비별」에서 보여준 시의 결기는
부드럽지만 힘차다. 십년 만에 꺼내 든 시인의 悲歌集, 오래 품었던 비소 같은 사랑에 어찌 동참하지 않으랴. 불멸의 사랑 앞에
어찌 함께 앓아눕지 않으랴. 외로움이 치명적이므로 시는 더 절실하고 그 힘으로 시인은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시편들, 어느 경계를 넘어선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아닌가. ‘삶을 살아내는 방법’을 절박한
그리움으로 승화시킨 시집 한 권으로 한동안 굶주린 나의 외로움에게 밥을 먹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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