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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시와 모더니티에 관한 몇가지 생각

Author
mimi
Date
2011-07-02 09:52
Views
14128

 


김수영의 시와 모더니티에 관한 몇가지 생각

        - 김백겸(시인, 웹진 시인광장 主幹)

 


 

 1.「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이름의 시론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삼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니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는

    열렬하다

    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暴風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시 「사랑의 변주곡」전문)

 

  이 시는 주제가 사랑이다. 과거의 많은 시인들이 사랑에 대해 썼지만 사랑을 어떤 식으로 드러내는가 하는 형식에 의해 그 시인의 세계관을 들여다볼 수 있다. 김수영은 그의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가장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자신의
시론대로 김수영은 이 시에서 사랑이 사물과 사람임을 몸으로 체험하고 실천해야 함을 말한다. 주제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김수영은 시에
산문성을 도입하여 주제의 암시보다는 직접 드러내고자 하는 전략을 취했다. 김수영은 다시 하이데거의 생각을 인용해서 말한다.

 

  산
문이란, 세계의 개진이다. 이 말은 사랑의 유보로서의 ’노래‘의 매력만큼 매력적인 말이다. 시에 있어서의 산문의 확대작업은 노래의
유보성에 대해서는 침공적이고 의식적이다. 우리들은 시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내용과 형식의 동일성을
공간적으로 상상해서, 내용이 반 형식이 반이라는 식으로 도식화해서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노래‘의 유보성, 즉 예술이 무의식적이고
은성적(隱性的)이긴 하지만, 그것은 반이 아니다. 예술성의 편에서는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산문의 편 즉 현실성의
편에서도 하나의 작품은 자기의 전부이다. 시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위에 있는 것이다.

( 최하림, 『김수영 평전』,실천문학사, 2008년, p 361) 

 

 
하이데거는 예술의 진리를 재현의 진리로 규정하고 예술작품을 전시장이나 박물관에 가둔 후 사물의 대리물로서 감상하고자 한 사실주의
미학을 비판한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예술을 ‘미적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진리가 발생하는 방식’으로 대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작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오로지 예술의 본질에서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하이데거가
생각한 예술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예술작품은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사물차원을 넘어서는 ‘존재’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존재’란 모든 ‘존재자’의 근원이며 배후인데 현상학적으로는 ‘본질’과 현상‘의 관계로 말할 있는 ‘진리’개념이다. 하이데거는
그리스인들이 파르테논 신전을 세우고 신적인 ‘존재’를 드러내고자 했던 예술태도가 예술의 ‘근원’이라고 파악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주체로 내세운 근대미학이 합리와 경험의 틀로 예술을 인간의 도구로 추락시킨 것을 비판한다. 하이데거에게 예술작품의 진리는
‘존재자’의 진리가 아니라 ‘존재’의 진리이기에 예술작품은 한정된 ‘존재자’를 은폐성으로부터 끌어내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예술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진리로서의 세계의 개진이 예술이며 하이데거는 예술자체를 예술가와 예술작품을 모두
포괄하는 상위개념으로 파악한다.

 

  김수영은
하이데거의 시론에 강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시의 본질(예술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위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서 예술적 긴장은 온 몸으로 밀고가야 하는 ‘어떤 것’인데 이 자체는 내용과 형식을 포괄하는 양자에
걸쳐있다고 생각한다.  시가 ‘노래의 유보성’으로 암시와 은폐에 서 있고 산문이 현실로서의 ‘세계의 개진’이라고 본 점은 장르의
형식성을 드러낸 말이다. 그러나 김수영이 하이데거의 시론과 미학을 충실히 이행한 것 같지는 않다. 김수영의 작품에서는 사물차원의
넘어서는 ‘존재’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예술이 ‘진리로서의 세계의 개진’이라는 적극적 실천개념을
하이데거로부터 가져온다. 나중에 하이데거에서 싸르트로로 이어지는 실존주의의 정신이 김수영의 시작태도에 변화를 가져왔다고 보고
싶다. 김수영은 자신의 시론에 당대서구의 모더니즘사상을 수용해서 기존 한국시의 틀을 깨는 새로운 시 형식을 시도한다.

 

 

  2. 김수영식의 사랑과 자유

 

 
낭만주의자들이 말하는 ‘사랑과 초월’ 김수영이 추구하는 ‘사랑과 자유’는 무엇이 다를까. 낭만주의 효시라 말하는 워즈워드와
코울리지는 자연의 관조 중에 상상력에 따른 우주와의 영적 합일감을 노래한 『서정민요집』을 간행한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와
사실주의에 반대해서 외적실재보다는 내적실재에 무게를 둔다. 낭만주의는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고 주관적 진리를 찬양한다. ‘낭만주의란
문학에 있어서의 자유주의이다’라고 선언한 위고처럼 낭만주의는 정열적 자아의 해방을 추구한다. 낭만주의의 사랑은 궁정시대의
로망처럼 종교적 존재나 궁정의 귀부인처럼 손에 닿지 않는 먼 곳과 옛 것에 대한 동경과 찬미가 주조이다. 동 사조는  대상에 대한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거나 1920년대의 우리나라 낭만주의처럼 현실도피성이 강한 허무와 퇴폐를 노래하기도 한다.

 
인용시에서 드러난 김수영의 사랑은 나와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는 표현은 언뜻 보면 자연에 대한 사랑 같다. 그러나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라는 시의 도입부는 김수영의 시각이 도시에 속한 공동체의 삶의 연장으로 자연을 보고 있음을 말한다. 즉 자연물이되
그 자연은 도시의 사물과 대척이 아닌 등가의 자연이다. 이 사랑이 사회적인 혁명과 자유로 이어진다. “사랑을 만드는 기술”은
“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처럼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대한 저항에 대한 사랑과 자유로
이어진다.

  김수영이
노래한 이 사랑과 자유가 사회체제의 저항을 말하고 있으니 한국식리얼리즘으로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김수영이 문학의 ‘사회적
참여’를 기치로 내세워 이어령과 논쟁을 하고 《창작과 비평》의 이념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은 ‘삶의 실재’를
모방하거나 재현한다고 보는 리얼리즘의 입장이 있지만 김수영이 리얼리스트의 입장에서 시를 썼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오히려 평자들은
김수영이 박인환, 김경린등과 더불어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의 신시론집을 간행한 점을 들어 한국 모더니즘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3. 김수영과 모더니즘

 

  최하림이
쓴『김수영 평전』은 김수영이 동경시절의 시작(詩作)에서 엘리엇, 오든, 스펜서, 니시와키 준이브로, 미요시 다쓰지, 무라노시로등
초현실주의 작가에 대한 경도를 말한다. 문학적으로는 초현실주의자였던 김수영이 사회적으로는 개인의 무한자유를 요구하면서 혁명을
찬양하는 급진주의자 였고 정치적으로는 좌파이념에 호감을 가진 민족주의자였기에 김수영을 모더니스트이자 리얼리즘작가로 보는 이중
견해가 나온다.

  김수영의 작품들은 조향의 작품처럼 사물의 합리적인 현실관계를 박탈해버리고 새로운 창조관계를 만들어 내는 수법인 데뻬이즈망(轉位)의 형식이 아니다. 모더니스트이되 시와 주제는 전체상황(사회문화질서)내의 질서를 따르고 있는 모더니즘이다. 김수영을 아방가르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욱동이 『모
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정리한 모더니즘 계보는 여러 갈래가 있다. ‘모더니즘은 좁게는 범 유럽적 현상, 넓게는 국경을 초월한
형상’이라고 김욱동은 말한다. 김욱동은 모더니티를 정의하면서 로버트 B. 피핀의 『철학적 문제로서의 모더니즘』을 인용한다.

 

 
째, 모더니티는 공통적인 언어의 전통에 둔 단일민족국가의 성립을 탄생시켰다. 둘째 모더니티는 인간의 문제에 있어 이성의 권위를
가장 윗자리에 두었다.  셋째 모더니티는 대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는데 무엇보다도 자연과학의 권위에 의존하였다. 넷째
모더니티는 삶과 자연현상에서 신비의 가면을 벗겨 버렸다. 다섯째, 모더니티는 모든 개인의 천부적 권리, 그 가운데에서 특히 자유와
자기결정권의 표현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였다. 여섯째 모더니티는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그에 따르는 임금노동과 도시화 그리고
생산수단의 개인 소유를 적극 장려하였다. 입곱째, 모더니티는 인간의 발전가능성을 굳게 믿으며 관용.동정.분별.자선 같은 기독교적
휴머니즘에 뿌리를 둔 덕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 김욱동,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현암사, 2004년, p 32)

 

  이 정의를
살펴보면 모더니즘은 산업사회가 발달하면서 근대국가가 자본주의제국으로 변하는 사회현실에서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르조아
가치관을 대변한 ‘역사적 모더니티’와 더불어 보들레르가『현대생활의 화가』에서 주장한 ‘심미적 모더니티’도 있다고 김욱동은
소개한다. 보들레르는『현대생활의 화가』에서 ‘일시성이나 우연성에서 파악한 감각적 현재를 가장 중요한 모더니티의 특성으로 여긴다고
기술한다. ‘심미적 모더니티’는 역사적 모더니티와 달리 ‘휴머니티’와 ‘이성’을 비판하고 이것과 단절을 꾀하는데 그 특성이 있다고
본다. (
김욱동,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현암사, 2004년, p 32-36) 

 

  김수영의
세계관은 나중에 상징주의 운동으로 발전한 ‘심미적 모더니티’대신 ‘역사적 모더니티’의 입장에 서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사회정의를 외친 작품들과 도시 소시민으로서 느끼는 생활사, 해방이후의 혼란한 정국, 6.25의 체험이 배여든 작품들을 많이 썼다.
소시민의 고통과 기쁨이었으나 크게는 사회전체의 고통과 기쁨의 알레고리로 볼 수 있는 작품들이 많다. 앞의 인용시 「사랑의
변주곡」도 결국은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말하고 있으니  ‘역사적 모더니티’의 입장에 선 시로 보여진다. 김수영이 해방이후의
한국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평자에 따라서는 외국의 모더니티를 흉내 낸 ‘뿌리없는 박래품(舶來品)’이라는
평가도 한다. 문화사를 새로 정의하는 평자의 입장은 80년대의 시대상황이 맞물려 다양한 해석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고 김수영이 바란 사회적 현실도 어느 정도는 개선이 되면서 지나간 시대사조에 한 작가의 세계를 구겨 넣은 것은 온전한
작품세계를 훼손할 염려가 있다.  한 작가의 작품은 그 비율과 조합이 다를 뿐이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요소가
같이 존재한다. 이런 김수영의 시에 대해 최하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
수영의 시는 시차가 있을 뿐 모두 그의 자유, 그의 시대의 자유와 관계하고 있다. 그의 시는 그가 살고 있는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읽어야 한다. 그의 시가 이미지나 시적징조보다 드러냄의 형식인 산문성의 침투를 심하게 받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기, 보안법이 제정되고 경향신문이 폐쇄되고 3.15부정선거가 치러지는 정치상황을 예사로 보아 넘겨서는 안된다. 그는 그
일들 때문에 술을 마시고 서강의 아름다운 황혼보다도 진한 피를 흘리면서 시를 쓴다. 우리역사가 처음으로 꽃다운 피를 흘렸다고
해도 되는 4.19혁명은 그런 밤들을 지나서 온다.

( 최하림, 『김수영 평전』,실천문학사, 2008년, p 272)

 

 

4. 김수영과 싸르트르

 

  기성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하고

  혁명을 바라보는 자는 바보다

  혁명이란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개수작이냐

  불쌍한 백성들아

  불쌍한 것은 그대들 뿐이다

  천국이이 온다고 바라고 있는 그대들 뿐이다

  최소한도로

  자유당이 감행한 정도의 불법을

  혁명정부가 구육법전서를 떠나서

  합법적으로 불법을 해도 될까 말까한

  혁명을 -

  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그대들 뿐이다

  그놈들이 배불리 먹고 있을 때도

  고생한 것은 그대들이고

  그놈들이 망하고 난 후에도 진짜 곯고 있는 것은

  그대들인데

  불쌍한 그대들은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

 

  그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고 있다

  보라 항간에 금값이 오르고 있는 것을

  그놈들은 털끝마나치도 다치지 않으려고

  버둥거리고 있다

  보라 금값이 갑자기 8900환이다

  달걀값은 여전히 영화28환인데

 

  이래도

  그대들은 유구한 공서양식(公序良俗)정신으로

  위정자가 다 잘해줄 줄 알고만 있다

  순진한 학생들

  점잖은 학자님들

  체면을 세우는 文人들

  너무나 투쟁적인 신문들의 보좌를 받고

 

  아아 새까맣게 손때묻은 육법전서가

  표준이 되는 한

  나의 손등에 장을 지져라

  4.26혁명은 혁명이 될 수 없다

  차라리

  혁명이란 말을 걷어치워라

  허기야

  혁명이란 단자는 학생들의 선언문하고

  신문하고

  열에 뜬 시인들이 속이 허해서

  쓰는 말밖에는 아니되지만

  그보다도 창자가 더 메마른 저들은

  혁명의 육법전서는 <혁명>밖에는 없으니까

   (시 「육법전서와 혁명」전문)

 

  김수영은
그의 행동과 사유방식이 이상하게도 싸르트르와 닮아있다. 김수영보다 15년 앞서 태어난 싸르트르의 서구지성에 당대의 한국지식인들이
매료당했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인간과 사회적 관심에 대한 서로의 코드(code)가 맞았다고 보는게 타당할 것 같다.  하이데거가
후설의 현상학을 ‘존재’의 문제에 적용해서 실존주의 지평을 열었다면 싸르트르는 ‘자유’에 문제에 적용해서 자신의 사상적 기초를
정립한다. 대상의 ‘본질’을 의식의 ‘지향성’에서 구한 현상학파는 하이데거와 싸르트르같은 실존주의 사상가들을 배출하였는데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전복적인 명제로 기존 서양의 전통적인 ‘존재론’을 뒤집는다.

 전통적인
서양철학은 사물의 본질(이데아나 신)이 사물의 실존에 선행한다고 보았다. 전통철학은 모든 사물의 제일원인으로서의 ‘신, 자연,
이성’을 전제한다. 전통철학은 사물은 시간 내 존재형식인 ‘실존’형식으로 구체적인 특성으로 존재하지만 ‘본질’의 반영과 그림자라는
생각을 가진다. 그러나 싸르트르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존재하고 자기 자신을 만나고 세계로 비약한다. 그리고 미래로
투기한다.’라고 주장한다. 싸르트르에게 인간이 행동으로 시간에 투기하는 실존의 결과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주인이 되고 그 자신의
어께위에 실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개인에게
‘실존’의 불안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만물의 근본으로서의 제일원인이 없으니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운명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한다. 싸르트르는 인간은 세계내 존재라는 제한 때문에 불안을 경험하지만  현실세계를 부정하고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으로 세계를
넘어서는 존재이기에 자유라고 말한다. 이 경우 상상력이 자유로서의 초월작용을 하는데 상상력이 없는 인간의 의식이란 순간의
현실성에 매몰되어 미래와 비전을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다.

 김수영은 6.25와 4.19를 거치면서 실존의 불안과 미래사회의 자유를 경험한다. 싸르트르도 무신론자였지만 최하림의 『김수영평전』에는 김수영이 종교나 신을 믿었다는 기록이 없다.

모더니즘은
신을 부정하고 인간을 주체로 내세운 니체나 싸르트르등 실존주의 지평을 연 사상가들과 깊은 연관이 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세계와
인간의 불안을 경험한 역사적 환경에서 실존주의와 모더니즘은 같은 뿌리를 공유한다. 니체와 싸르트르는 ‘실존이 본질보다 앞서는
존재'인 인간을 신의 자리에 놓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실존주의 사상에 경도된 모더니즘 작가들은 ‘자유의지와
선택’의 문제를 주요 테마로 다룬다.

 

 
통적인 리얼리즘이나 자연주의 작품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유전이나 환경의 영향을 받고 결정된다....에밀졸라나 토마스하디같은
작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작중인물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어떤 초월적인 힘에 따라 꼭두각시나 인형처럼 움직일
뿐이다. 그러나 모더니즘 작품에 이르러 작중 인물은 자신의 운명을 직접 결정해 나간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아무리 누추하고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마치 진흙으로 형상을 빗듯이 그들이 바라는 대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려고 한다

( 김욱동,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현암사, 2004년, p 84)

 

  김수영이
모더니즘적인 세계관을 가졌다고 하나 그의 창작은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하는 인간의 자유와 저항만을 노래하지는 않는다. 사회에
처한 소시민의 생존불안, 지식인의 무기력증 원망을 담은 작품들이 더 많다. 그러나 이런 발언도 뒤집으면 현실에 대한 고발의
시각이 되니 실존주의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 다음 시는 이런 김수영의 시적태도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대신에 왕궁의 음탕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데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 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있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성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전문)

 

 

   5. 김수영과 쉬르리얼리즘 

 

  김수영의 1961년 2월 10일자 일본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고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나는
내가 죽으라고만 하면 죽고 죽지 말라고 하면 안 죽을 수도 있는 그런 바보 같은 순간이 있다. 모두가 꿈이다. 이것이 ‘피로’라는
것인지도 모르고, 이것이 광기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형편없는 저능아이고 내 시는 모두 쇼이고 거짓이다. 혁명도 혁명을
지지하는 나도 모두 거짓이다. 단지 이 문장만이 얼마간 진실미가 있을 뿐이다. 나는 ‘고독’으로부터 떨어져 얼마나 긴 시간을
살아온 것일까. 지금 나는 이 내 방에 있으면서, 어딘가 먼 곳을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고 향수인지 죽음인지 분별이 되지 않는 것
속에 살고 있다. 혹은 일본 말의 속에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 자신은 지극히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이 문장도 어딘가
약간 부정확하고 미쳐 있다. 정말로 나는 미쳐있다. 허나 안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나는 쉬르리얼리즘으로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떨어져서 살고 있다. 내가 이제부터 앞으로(언젠가) 정말 미쳐버린다면 그건 내가 쉬르리얼리즘으로부터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탓이라고 생각해다오. 아내야, 나는 유언장을 쓰고 있는 기분으로 지금 이걸 쓰고 있지만 , 난
살테다

( 최하림, 『김수영 평전』,실천문학사, 2008년, p 272)

 

  
김수영이 대 사회적인 문제와 개인의 실존을 주제로 시를 쓰면서도 쉬르리알리즘의 시적미의식을 끊임없이 염두에 두고 있다는 언술이어서
흥미롭다. 김수영이 자신의 삶과 시인으로서의 표현이 자기방어나 자의식과잉으로의 ‘쇼’라고 토로한 점도 일정부분 내면의 진실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김수영은 사회적 자아로서의 ‘자유’보다는 내면세계의 주관을 사회적 검열이나 문화적가치의 눈치 없이 드러내는
‘자유’ 즉 ‘초현실’의 자유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쉬르리얼리즘의 세계관을 사전적으로 정의로 살펴보자.

 

  
다이즘에서 출발한 초현실주의는 근본적으로는 경험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애썼으며 현실을 본능적이고 잠재적인 꿈의 경험과 융합시켜서
논리적이며 실재하는 현실, 그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시켜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현실에 도달하려 했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무의식 영역에 속하는 id의 발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것을 화면에 표현해 보려고 시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 사전』 인용) 

 

  서구의
모더니즘이 종교 철학 사회 경제의 근대화와 더불어 시작한 운동이지만 20세기의 사상사에서 구체적으로는 맑스의 유물사관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 등에 큰 영향을 받는다. 모두 기존과학의 합리주의와 전통가치를 뒤집고 근대를 연
분기점의 사유들이다. 프로이트가 자아(ego)를 조종하는 무의식(id)의 인간관을 역설해서 수많은 모더니즘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꿈과 초월’은 내면세계의 자유를 원하는 작가들의 통로였다. 앙들레 브르통은 특히 프로이트에 경도하여 '꿈과 무의식'을 인간정신의
자유로운 발로로 보았다. 이런 경향은 앞서 김욱동이 정의한 ‘심미적 모더니즘’의 예술태도와 가깝다.    ‘역사적 모더니즘’과
반대로 ‘심미적 모더니즘’은 프랑스 상징주의 운동처럼 예술자체의 ‘자기목적성’에 무게를 둔다. 예술가 자신의 심미적 주관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런 운동에 김수영이 내면으로는 깊이 공감하면서도 사회와의 불화라는 자신의 위치 때문에 예술성의 심미와 표현의
탁마는 생략한 채 사회적 주제를 직접 드러내는 시작태도를 견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김수영의 일상행동이나
시적자유를 추구한 태도는 쉬르리얼리즘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쉬르리얼리즘의 운동은 단순히 내면의식의 확장과 전복에 그치지
않고 대 사회적인 실천으로도 나간 운동이다. 이 운동은 사회생활이 개인에게 강제하는 금지를 문제 삼고 혁명을 통한 정치적 자유의
도래를 그리며 종교적 도그마를 타도하고 사회의 명령에서 해방된 개인의 승리를 원했다. 김수영의 일생과 시작태도는 이 쉬르의
운동을 행동으로 실천하려 한 것이 아닐까.

  인간의
내면이란 대극(對極)적 자아로 구성되며 빛과 어둠처럼 양자를 포함한다. 페르소나가 자유투사라면 아니마는 섬세한 여성적 자아로
전체자아를 표상하기도 한다. 김수영의 예술가로서의 내면자아(아니마)는 행동하는 외부적 자아와 함께 예술가의 순수한 자유와 초월에
대한 동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 근거해서 나는 김수영의 시에서 일상과 사회의 문제가 소거된 시「풀」을 김수영의 예술적인
심미관과 자유와 초월이 드러난 쉬르리알리즘의 시계열 혹은 상징주의 시로 보고자 한다.

 
 모더니즘운동은 세계를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운동이 아니라 예술가의 주관적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새로운 해석을 드러내는 운동이다.
이러 관점은 독자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해석역시 예술이 작품과 독자의 상관관계에서 발생하는 긴장이라는 수용미학도 성립하게 한다.
심미적 모더니즘입장에서 김수영을 바라보는 일은 일종의 해석이지만 텍스트는 시대상황에 의해 언제든지 다시 해석되는 ‘오브제’이다.
작가나 사회적 배경에 대한 편견이나 우상이 모두 사라진 후세에는 「풀」이 김수영의 살아있는 영감의 작품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기대와 관심으로 이 글을 마친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눞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b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시 「풀」전문)

   

  김백겸(시인, 웹진 시인광장 主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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