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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심리적 공간과 정신분석

Author
mimi
Date
2011-06-24 18:13
Views
10052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11년 7월호(2011, July)

  

 

 

 시의 심리적 공간과 정신분석   / 김백겸(시인, 웹진 시인광장 主幹)

 

 

  올 봄에 어지럼증이 생겨서 내이의 세반고리관이 문제가 생겼나 하고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검사 후
귀는 별 이상이 없다며 신경과로 가라고 했다. 신경과 의사는 일직선으로 똑바로 걷는 자세에서 내

흔들리는 보행균형이상을 잡아냈다. MRI를 찍은 결과 뇌는 이상이 없고 피검사도 깨끗했다.

신경과 의사는 귀가 의심스럽다며 다시 이비인후과로 미룬다.

  이런 어지럼증을 한의원에서는 가벼운 풍(風)으로 보고 치료하자고 한다. 침을 맞고 환약을 먹으면서도

내가 정신의 스트레스로 몸이 어지러운 것인가 생각한다. 심신증(心身症)이란 몸과 정신의 양쪽에

위치하는 증상이지만 여기에서 생각하고자 하는 주제는 시인들의 심리적공간이다.

  시인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음이 행복하고 건강하다면

시라는 언어의질환을 선택하지 않는다. 시는 언어의 의사소통에서는 정상문법이 아니다.

무의식의 언어논리와 욕망이 관계하는 갈등의 언어이다. 자폐와 공격성과 고통이 전이와 승화의 과정을

거쳐 나온다. 시인만의 독백이기에 독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분석가처럼 시인이 말하는 문법의

 수면아래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현대의 시가 과거의 시들보다 편하지 않은 이유는 현대문명과 사회생활의 압력에서 정신의 괴로움과

진폭이 더 증가했다고 보아야한다. 동병상린이라고 시인들이 시인들의 마음을 제일 잘 알겠지만

 전문독자를 포함한 일반독자도 자신의 추체험에 근거해서 공감력을 발휘해야 한다.

무엇보다 환자인 시인의 마음이 말하는 독백을 좋은 의사처럼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한다. 라깡은 인간의

무의식아래에 있는 광기와 정신분석의 통합으로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야심을 가졌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1.권정일

 

 

 블루 로즈                                          

                                         

 

 장미나라 유전자의 색계에선 유일하게 파란을 낳을 수 없다

 그래서 파란은 장미들의 이상향이다

 죽도록 파란 린넨 천을 두르고 싶은 장미는

 쉽게 도라지꽃 파란과 접붙는다

 종유석처럼 길고 오래 지속되어야 할 종의 미래

 파란에서

 파란에게

 파란으로 진화한다, 이젠

 분홍은 장미의 경향이 아니다

 그대에게 파랑새가 스미어 있듯 파란 린넨 옷을 입고

 

 서서히 꽃병을 걸어 나가는 파란장미

 그래봐야 장미, 그래도 장미 

 (계간 『애지』 2011년 봄호)

 

  “불루로즈”는 현실에 없으므로 장미의 이상향이 된다. ‘붉은 장미’는 너무나 많은 시인들과 시들이 비유와

알레고리를 통해 만진 터라 때가 묻고 낡은 기호가 되었다. 권정일은 이제 현실에 없는 ‘불루로즈’를 노래해서

다른 장미를 보여주려 한다.

  시인의 꿈꾸기는 현실 안에서 현실 바깥을 바라보는 행위이다. 비행을 연습하려는 청둥오리는 물위의

안락함을 버려야 하고 물의 논리와 리듬을 잊어야 한다. 붉은 장미가 ‘불루로즈’가 되기 위해서는 환골탈태를

해야 하지만 시인은 도라지꽃의 유전자를 수혈해서 꿈을 이룬다고 노래한다(이렇게 해서 실제로 파란장미가

이루어지는지 궁금하다).  

  시적 비전이란 들뢰즈의 말을 빌려 ‘사물들과 존재들의 새로운 사건을 세우는 것, 언제나 그것들에게 새로운

사건을 부여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파란 장미를 노래함으로 해서 권정일은 독자들의 시선을 붙잡는데

성공한다.

  시인이 질문하는 방식이 곧 시인이 세계를 보는 방식이다. ‘불루로즈’는 ‘파랑새’와 ‘파란 린넨’을 품고 가는

낭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인은 “꽃병을 걸어 나가는 파란장미/그래봐야 장미, 그래도 장미‘라는 표현으로

가능태를 현실태의 울타리 안에 가둔다. ’불루로즈‘가 기호가 아니라 시인의 상상 안에서 작동하는 사건이

됨으로서 시인의 망상으로 끝나지 않고  독자를 시의 새로운 의미에 참여하게 한다. 이 시의 덕목이다.

 

 

 

 2.김세형

 

 

 새들의 낙원                                         

                                       

  뉴칼레도니아 섬은 ‘카구’라는 새에겐 젖과 꿀이 흐르는 에덴동산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큰 은총을 내려주시어 그 섬엔

 온갖 나무열매들과 벌레들 등, 일용할 양식이 늘 지천으로 널려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시각각 목숨을 노리는 포식자도 없다

 그러니 카구에겐 정말 그 섬이 지상낙원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날개달린 새라지만 이쯤 되면 카구에게

 하늘이 뭔 필요가 있으며 날개가 뭔 필요가 있으랴?

 때문에 카구는 이젠 날개가 있어도 날지 않는다

 아니,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한다

 카구의 축 늘어진 기인 날개는 이미 만찬 파티용 드레스가 된 지 오래다

 좀처럼 빨지 않아 좀 더럽긴 하기만 자신이 마치

 십칠 팔세기 영국 귀족사회 사교클럽을 드나드는 공작부인이라도 된 듯,

 그 꾀죄죄한 긴 드레스를 땅에 질질 끌리도록 몸에 축 걸쳐 입고

 늘 시도 때도 없이 열리는 에덴동산 만찬파티에 참석하러

 온종일 섬 이곳저곳을 뒤뚱, 뒤뚱, 분주히 나돌아 다닌다

 그것이 카구가 에덴동산에서 하는 일과 전부이다

 인간의 잃어버린 낙원도 아마 그곳일 것이다

 원래 새였던 인간도 그 낙원에서 살다 결국 날개를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새들의 낙원인 그 섬 밖으로 쫓겨났을까?

 아니, 달아났을까?

 그리고 왜 인간은 그 새들의 낙원으로 돌아가 살지 않고

 낙원 밖에서 잃어버린 날개를 그리워하며 늘 눈물지으며 살고 있는가?

 그 까닭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도 아마 잘 모르실 것이다

 그러나 다시 날개를 달고 새처럼 하늘로 날아오르길 날마다 학수고대 꿈꾸는 난,

 그 까닭을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카구는 날개 없이 살아가는 그곳이 낙원이지만,

 인간은 날개 없이 살아가는 그곳이 지옥이기 때문이다  

(월간 『우리詩』 2011년 3월호) 

 

  김세형은 “뉴 칼레도니아 섬”을 에덴의 은유로, “새”를 인간의 은유로 사용해서  낙원추방의 알레고리를

재현한다. 김세형이 이 시에서 차용한 모티브는 인간이 에덴이 갇힌 존재가 아니어서 ‘자유’를 획득했다는
시각이다. 성서에서는 인간이 원죄로 인해 에덴에서 영원히 사는 자유를 상실하고 에덴 밖에서 죽는

존재의 감옥에 산다는 설정을 하고 있다. 김세형은 기존의 해석을 뒤집어 ‘날개’로 표상되는 자유가 없기

 때문에 에덴이 지옥이라고 말한다.

  안내를 뒤져보니 뉴칼레도니아는 호주와 뉴질랜드 사이에 있는 프랑스령의 섬이고 신혼여행의 관광지로
유명하며 쥐라기 시대의 생태가 보전되어 있는 곳이라고 한다. 경관이 아름답고 포식자의 위험이 없이

먹을것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이 섬이 ‘낙원’의 상징이 될 만도 하다.  인간 또는 “카쿠”새에게 제공된

 낙원은'날개’가 필요 없는 역진화(逆進(化)를 일으킨다. 역진화는 과거로의 퇴행이라는 암시인 반면에

진화(進化)란 혹독한 자연선택에서 살아남는 시련을 뜻한다.

 김세형은 에덴을 뒤집는 알레고리로 독자에게 ‘낙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김세형의 시각에

동의하는 계몽과 진보의 시각이 있을 수 있고 반대하는  낭만의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와 행위를 믿는 시인의 가치판단이 이 시에는 내재해 있다. 낭만주의 환상이든 또는 모더니즘에

 의한 이성의 해석이든 간에 시인은 ‘유토피아’라는 원본을 염두에 두고 현실풍경을 ‘재현’하고 있다.

에덴에서나 지금의 현실에서나 어디에도 없는 ‘날개’를 생각하게 하는 시의 구조가 이 시의  비전이다.  

  

 

 

 3. 이영광

 

 

 깊은 계곡 응달의 당신   

 

 주말 등산객들을 피해 공비처럼 없는 길로 나아가다가

삼부능선 경사면에 표고마냥 돋은 움막 앞에서 썩어가는

그것을 만났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것도 놀라지 않았다 몸이 있어 있을 수있는

광경이었기에 이미 짐승들이 뜯고 찢어 너덜너덜한 그것 곁에 

찌그러진 양푼곁에 불 꺼진 스탠드처럼 어둑어둑 소나무 그늘이

드리웠기에 나는 쭈그려 담배를 피우며 아, 여기는  저승같네

하면서도 정시하진 못했다

  아직 시체와 눈 맞는 인간이 되어선 안 되었다 그것이 자기를 잊고 벌떡

일어나선 안 되었다

  사실 파리는 왱왱 거리고 구더기들은 들끓었다 구더기들은 다시 파리가 되어

피를 빨고 알을 슬어 허렁한 음부나 가슴 밑에

  또 구더기를 키우고 있을 터였다 그러면 저것은 죽은 것인가?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그것이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나는 이해했다,

  저 몸은 이 산의 압도적안 응달 안에서 그렇게 검은 흙과 푸른 잎에 숨 쉬듯

젖고 있지 않은가 금방도 꺽였던 무릎을 슬며시 폈다,

  이것은 산 것인가? 빚쟁이를 피하듯 사람을 피해 식은 몸 결에

멎었을 뿐인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가 또 혼자 갸우뚱했다 생이

한 번 죽음이 한 번 담겼다 떠난 빈 그릇으로서  이것의 마른 몸은 지금

축축하고 혈색도 체취도 극악하지만 죽은 그는 다만 꿋꿋이 죽어가고 있다

  무언가가 아직 건드리고 있다 , 검정파리와 구더기와 송장벌레와 더불어

깊은 계곡 응달의 당신은 잠투정을 하는 것 같다

  귀가 떨어졌다 당신의 뺨은 문드러졌다 내장이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당신의 한쪽 팔은 저만치 묵은 낙엽 위를 홀로 기어가고 있다

  그것이 닿는 곳까지가 당신의 몸일 것이다 끊겼다 이어지는 새 울음과

근육질의 바람이 이룩하는 응달까지가 당신의 사후일 것이다

  고통과 인연과 불멸의 혼을 폐기하고 순결히 몸은 몸만으로 꿈틀댄다 제가

몸임을 기억하기 위해 부릅뜨고 구멍이 되어가는 두 눈을,

  눈물처럼 벌레들이 끓는 그 곳을 곁눈질로 보았다 그것은 끝내 벌떡

일어나지 않았지만 죽음 뒤에도 요동하는 요람이 있다

  생은 생을 끝까지 만져준다 나는 북받치는 인간으로 돌아와 왈칵 왈칵 토했다

  아카시아 숲길 하나가 뿌옇게 터져 있다 자연이 유령의 손으로 염하는

자연을 세 번째 본다 이 봄은 울음 잦고 길할 것이다   

(계간 『세계의 문학』 2011년 봄호 )   

 

   시체를 대상으로 한 이 시는 인간이라는 자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물음을 낳게 한다. 자아란 몸이라는
물질의 운동인가. 자아란 몸과 정신을 포함한 인격인가. 자아란 몸과 정신과 시공간을 초월한 영혼까지
포함하는 그 무엇인가. 과학과 철학과 종교의 해석이 다르듯 실상(實相)은 알 수 없다. 가장 객관적이라는

과학도 인간의 관찰을 근거로 하고 있으니 역시 사물의 운동을 근사(近似)와 유용함의 견지에서 표현할 뿐
진리라는 보장이 없다. 더구나 인간의 해석과 믿음인 철학과 종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 문제는 인간의

신념과 의지에 따른 해석의 문제로 귀착한다. 일지기 니체는 이러한 사정을 간파하여 ‘신념이 없는 진리는
아름답지 않다’고 말했다.

  이 시에서 드러낸 이영광의 신념은 무엇인가. 집요하게 시체가 썩어가는 과정을 묘사한 시인의 시선 때문에

시체는 시체를 넘어 살아있는 주체인 것처럼 보인다. 시인의 상념이 죽은 시체에 피를 부어 대화와 공감의
장을 마련한다.

  이영광의 신념은 예술가의 공감력 안에서 ‘존재자’의 ‘존재’가 드러난다는 하이데거의 신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이데거는 예술이야말로 진리를 드러내는 가장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 예술은 ‘예술가’와

‘예술작품’을 포함한 ‘존재’의 자기현시인데 예술가의 신념과 의지에 의해 드러난다.

  이 시는 상황이 주제가 되고 표현이 제재가 되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독자에게 묻고 있다. 시인이 던진
질문의 형식 안에 이미 답이 있다. 독자는 이 답을 암시에 의해 받아들이고 상황에 참여하고 상처를 입는다.
이시가 독자의 정신을 새롭게 배열했다면 성공한 시가 된다.    

 

 

 

 4. 김중일

 

 

  시곗바늘 속에 모래 찾기  

    

  내 잠속으로 쇄빙선을 타고 백년 삼백육십오일 이십사 시간

울퉁불퉁한 파도와 유빙을 뚫고 항해하다보면 엉치뼈가 모래가루가

될 때쯤 나오는 백사장에는, 전 세계로부터 지금까지 버려진 고장난

시계가 삼십일억오천삼백육십만여 개. 버려진 시계들은 썩어 모두

모래가 되었다. 나는 오래전 잃어버린 너를 이제 모래라 부르련다.

  시곗바늘이 수초처럼 울창하고, 까만 목줄까지 맨 열두 마리 유기견들이

서로 뒤엉키며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다. 그곳에는 메트로놈 같은 녹슨

시소 하나가 끽끽 조율되고 있을 뿐. 너는 시소 한쪽 끝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벗은 신발 속에 모래를 채워 넣고 있다.

  한번만이라도 번쩍 안아보고 싶어도 모래처럼 주르륵 떨어지던

너의 한줌 몸무게를 빌려, 시소는 빨래집게처럼 추억의 백사장을

집어놓고 있다. 바람 분다 백사장은 물결치며 펄럭거린다.

  너의 한줌 몸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른다. 시소의 반대편 끝에는,

모래투성이 해진 외투처럼 버려진 백사장 한 벌을 주워 걸친 노인,

어제 죽었고 잠시 후 또 죽을 예정인 노인이 앉아 있다. 그 노인이 말하길,

  (아주 아주 먼 옛날, 내가 진짜 목숨 붙어있던 그 옛날에, 지구가 모래

한 알 만큼 작고, 모래 한 알이 지구만큼 커다랬을 때 그때는 사는 게

무서웠는데, 죽어서 이렇게 살다보니, 이제 죽는 게 무섭구나 사라지는 게

무섭구나 모래처럼 여기 이렇게 모여 살아지는 게 무섭구나 그것 참

이상하구나)

  내 가슴속 백사장 버려진 시계의 묘지에는, 열 두 마리 그림자처럼

평생토록 유기되지 않는, 검은 개들이 둥글게 둥글게 뛰어다니고 있다.

개들마다 목줄처럼 매어진 시곗바늘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덩달아

길길이 날뛰고 있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널 못 찾겠다. 

 (웹진 『시인광장』 2011년 6월호 )  

 

  김 중일의 환상을 따라 가보기로 하자. 화자의 ‘잠’속으로 ‘쇄빙선’을 타고 가니 독자는 화자의
내면풍경이거나 초월인 무의식이 그려놓은 해변에 도착한다. 모든 사물이 시간에 의해 모래로 변하는

이 곳은 “삼십일억오천삼백육십만여 개”의 고장난 시계가 모래가 되고 있다. 시계하나가 한 세상의
상황임을 감안할 때 유구하고 긴 시공간이 인도의 시간처럼 과장법으로 제시된다.

 ‘너’ 라는 존재와 세월이 쌓인 백사장을 은유하는 ‘노인’이 시소를 사이에 두고 관계와 상황의 풍경에
참여한다. 시인은 시계의 진자운동을 암시하는 ‘메트로놈’의 소리를 시소의 진자운동에 연결시켜 역시
시간의 운동을 드러낸다. 노인의 독백으로 드러난 5연이 화자의 심정을 대변한다.  

  이 시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환상과 초월의 긴 시간에서 들여다보게 하는 시인의 알레고리와 상상력이
볼만하다. 언어와 이미지를 연상의 논리가 없이 폭력적으로 결합해서 신기함을 노리는 젊은 시인들의
언어적 재능들이 있다. 그러나 주제를 알레고리에 묶고 표현을 연상 가능한 암시에 묶어 스토리를
드러내는 김중일의 상상력의 진폭과 환상이 더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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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겸 시인

 

 


1953 년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 졸업.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비를 주제로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산 하나』, 『북소리』,

『비밀 방』, 『비밀정원』등이 있음. 대전시인협회상, 충남시인협회상 수상.

현재 웹진 『시인광장』主幹. 계간 『시와 표현』主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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