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해설

문학자료실

워싱턴 문학

오늘의 시

평론과 해설

문학 강좌

세계의 명시

우리말 바루지기

워싱턴 문학 신인문학상 당선작

고요한 입술/송종규

Author
mimi
Date
2011-05-23 12:47
Views
11944




         피와 대지의 입술

시집,『고요한 입술 1997년, 송종규 『민음사



                                                                     허혜정(시인, 문학평론가)

 

 

   



  만약, 말로써 말해질 수 없고, 번역될 수 없고, 소통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말해져야 할까?

말에 대한 절망으로부터, 말이 아니라, 말에 결핍된 것으로부터 의미를 드러내려는 노력은,

아마도 현대시가 이미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제 이미지는 기억으로 확장되는 현실, 감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사유, 그 모든 것들을 모으는

하나의 점이 될 것이다.
이미지는 언어가 이르고자 하는 부재의 기원, 언어의 후면과 뒷면에서

솟아나온다. 이미지는 침묵한다. 하지만 그것은 침묵을 보여지게
하는 소리이다. 소리와 색체가

뒤섞이는 곳에, 작은 가지의 흔들림처럼, 또는 잎새들의 아픈 찢어짐처럼, 가늘고 약하게 소리를

토해 내는 침묵의 통로, 나는 그 입술의 이미지를 꼭 한번 써보고 싶어했다.

  결국 그러한 순간이 온다. 한 권의 시집이 조심스레 열려지고, 나는 언어 밖에서 언어를 향해

꿈꾸는 이미지들을 본다. 그것은 시인이 꿈꾸는 나의 꿈일지도 모르고, 내가 기억하는 시인의

기억일지 모른다. 아니, 지금 내 눈앞에 떠올라온 것은, 지금 바로 한 시인의 언어속
서 만들어진

유일하고 특별한 무엇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지들을 통해 송종규의 시에게로 다가간다. 이미지는

시간의 한 컷이다.
<마른 나뭇잎 한 장에서는/ 아, 하고 바스러지는 한 컷의 시간이 만져진다/ 수만 개의

나뭇잎을 매달고 있는 가문비나무
숲속에 들어가면/ 아, 하고 바스러지는/ 수만컷의 시간이 겹쳐져

있다>(「흑백 필름」). 이 수만 컷의 시간이 이어지고
겹쳐지며 이야기를 만든다. 만약 그렇게 이미지가

살아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지면서도 동시에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삶 그
자체이며, 시간의

세계에서 탄생의 장소로 언어를 돌아오게 하는 욕망이며, 끝없이 언어의 틈을 메우려는 창조적 고뇌의

본원적인
유로이다. 그러나 언어는 이미지에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입술은 언제나 하나의 액자처럼

고정된 낡은 의미들, 또는 그 이미지의
둘레를 맴도는 말들만을 토해 내기 때문이다.
 

 

  1)

 
낡은 액자 속에 폭설이 내리고, 전화선을 타고 검은 바다가 쳐들어왔다 운명이, 너무나도 빤히 남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러나 모든 不在 속에서만 살아 펄럭이던 희망이 비닐 봉지처럼 찍 -, 찢어졌다 누군가 헐렁한 신발을 끌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세상의 모든 무덤들이 타박타박 폭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고요한 입술」전문

 


  2)

  왈칵왈칵 붉은 피 흘리는

  오, 보이지 않는 상처 하나가

  차창에 어른거린다

  보이지 않는 것에 목에 목이 메고

  닿을 수 없는 곳에서 헛발 딛는

  이 상처의 둘레는 너무, 붉다

  ── 「노래」 부분

 

  3)

  사람의 시체를 뜯어먹는 개들이 피 묻은 입을 씻는

  갠지스 강 하류에서부터 컹컹, 개들의 울음이 얼비치는

  인도양까지

  긴 물길을 걸어 내려온다 말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해안은 어디에도 없다

  세상은 모래덩어리 ․․․․․․ 모래의 들판 ․․․․․․

  문자 안에 한번도 기록되어 본 적 없는 사람들의 해안이

  지금, 모든 풍경의 배후에 닿아 있다

  피 묻은 개들의 울음소리가 얼비치기도 하는 바다,

  불타는 모래의 바다,

 

  나는 한 주검을

  소리 없는 경전으로 읽는다

  ──「피 묻은 입」부분

 

  시 1)에서 독자는 (언어의) 낡은 액자 속에<쳐들어오>는 이미지들을 본다. 혼란스런 말들이 시 전체를

채운다. 그 소란스런 정경들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없다.

 
혼돈이 퍼져나가는 동안, 시선은 오직 그것들을 바라볼 뿐이다. 저 <바다>는 무엇인가, 나는 물어본다.

또다시
물어본다. 저 <폭설>은 어디에서 쏟아지는 것인가. 분명 그 이미지들은 언어의 어느 지점을

스치면서 미끄러지는 욕망,
그녀의 입술을 침묵하게 하는 욕망의 혼돈 그 자체이리라.

 
하지만 시인은 혼돈이 퍼져가는 바로 그 순간을 통해서만 노래로 다가갈 수 있다. 자신의 말을 찾지

못한 시인의 혼돈스런 내면
풍경을 보여주는 액자, 다시 말해 위의 시는 노래가 되지 못한, 언어의

파편이며 격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는 입술,

  그곳에 바로 <노래>가 있다. <모든 不在 속에서만 살아 펄럭이던 희망이 비닐 봉지처럼 찍 ─, 찢어>

지듯이, 침묵이 찢어지며 벌어지는 곳에, 상처처럼 열려지는 입술이 있다.

  시인은 시 2)에서 <왈칵왈칵 붉은 피 흘리는/ 오, 보이지 않는 상처 하나가/ 차창에 어른>
린다고

쓴다. 이렇게 피 흘리는 상처처럼, 언어를 토해 내는 통증을 감각하는 데서 송종규의 시는 시작된다.

<닿을 수 없는
곳에서 헛발 딛는/ 이 상처의 둘레>에서 노래의 이미지를 보는 것이다. <문자 안에 한번도

기록되어 본 적 없는
사람들의 해안이/ 지금, 모든 풍경의 배후에 닿아 있>지만, 오직 그곳에는 <피 묻은

입술>만이 커다랗게 벌이고
있을 뿐이다. <말을 통해서/ 도달 할 수 있는 해안은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언어는, 시인이 부르고자 하는 무엇에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그러나 이 언어의 결핍이

역설적으로 환기시키는 것은, 그 결핍을 메워내기 위한 끝없는 언어의 탐색이다.

말을 떠나면서 말에게로 다가가는 영원한 공간. 시인은 자신이 읽고 있는 한 행에서, 잊혀지고,

버림받고, 다가가지 못할 공간, 즉 침묵의 공간을 본다. 언제나 한 행은, 그 행의 뒷면의 침묵들과

겹쳐져 흐른다.

 


  내가 다시 비숍의 문장을 열자, 더럽고 미개한 조선의 여자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마침내 낡은 밧줄은 끊어지고 나는 급류에 휩쓸려 여자들과 함께 폭우 속, 19세기 말

  근세사의 협곡을 가파르게 떠내려간다 멀리서, 게으르고 건방진 관리들의 뜰에 흐린

  등이 켜지고 내 방은 문득, 황토색 붉은 물소리로 가득 채워지면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문장을 따라가다가 잠이 든다」 부분

 

  흰 모시적삼과 붉은 목단꽃 무늬가 겹쳐지는 곳에 어머니는 있다 나는 자주, 희고 붉은

  꽃잎이 결들이 얼비치는 바다 내 삶의 텅 빈 복도에서 그곳으로 돌아가는 문을 기웃거리게

되리라 내 몸의 지느러미로 저 목단꽃 무늬 붉은 시간을 자맥질하기도 하면서

  ─「문득, 겹쳐지는 붉은 꽃무늬」 부분

 

 
화자 <나>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문장을 따라가다가> 그 행간이 <문득, 황토색 붉은 물소리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낀다. 거기에는 <19세기 말 근세사의 협곡을 가파르게 떠내려> 갔던 여인들의

상처가
겹비져온다. 비숍 여사의 시는 아이러니하게도, <더럽고 미개한 조선의 여자들>들의 목소리를

감추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여자들의 목소리와 시인의 삶이 어떤 무의식적 소통의 관계에 놓여

있는지, 또 그것이 현실과 어떠한 연관이 맺어져 있는지를
읽어낼 필요가 있다. 물론 그들이 살아간

시대적 맥락이나 시인이 살고 있는 현실의 정황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다. 하지만 그
조선 여자들의

삶의 경험은 어떠한 면에서, 시인의 실존적 문제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게으르고 건방진 관리들>에


짓밟힌 식민치하 여성들의 아픔처럼, 시인 또한 자신의 말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남근적 힘에 의해

상처받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아버지는 창문마다 쾅쾅, 못을 박으신다 그만 하세요 아버지, 내 몸에

뚫린다니까요! 망치 소리에 으깨어져 내 목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는다>(「망치」)와 같은 구절에서

읽혀지는 남근적 힘은, 시인의 언어를 가두고 침묵시킨 세계의 모든 힘의 내포와
연결된다. 그러나

망치가 만들어낸 <못자국>이 시인의 고통스런 언어를 토해내게 하는 매개가 되듯, 침묵은 언제나

언어
속에 붉은 핏물처럼 휩쓸려 들어온다. <마침내 낡은 밧줄은 끊어지고 나는 급류에 휩쓸려 여자들과

함께 폭우 속>을
떠내려간다.

  거기서 화자는 어머니의 기억으로 미끄러져 가는 하나의 이미지를 본다. <흰 모시적삼과 붉은 목단꽃

무늬가 겹쳐지는 곳>, 즉 환한 빛깔과 상처의 어두움이 겹쳐오는 곳에서, 시인은 어머니의 존재를

나누어 갖는 자신의 이미지를 본다. <내 몸의 지느러미로 저 목단꽃 무늬 붉은 시간을 자맥질하>듯

끝없이 상처로 글 쓰기를 지속하는 화자의 삶은, 어머니라는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나온 말과 동작에 의해 지배받는다. 어머니의 흔적은 송종규의 시에서

언제나<핏빛> 고통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기억 속의 어머니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면서 시인은,

어려운 세월을 인욕하며
살아온 그녀처럼, 노래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건너가야 하는가를

깨닫는다. 진실은 너무나 흐리고 균열져 그것이 진실인지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한 어머니와

자신의 삶에 흔적지워진 상처의 겹겹을 더듬을을 통해서만, 그녀는 자신의 진실로 나아간다.
하자만

진실은 결코 실체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의 자의식을 구축하고 있는 시간의

소멸될 때, 언뜻 포착되는
기억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메아리와도 같은 것이다. <언제나 작고 빛나는,

짧은 한 순간을 위해서 들풀처럼 흔들렸>던
삶의 감각들(「위대한 것들은 달그락거리지 않는다」),

혹은 <땅 위로 떠오르지 않았던 몇 잎의 기억들>(「조팝나무」)을 불러내는, <깨꽃 같은 슬픈 글씨>

(「근황」)들, 침묵과 언어
겨우겨우 포개면서 말해지는 순간과도 같은 것이다. 시인은, 사라짐으로써

영원히 존재하는 시간, 마지막 꿈처럼 반짝이는 추억,
빠르고 느리게 흘러가는 물결처럼, 모든 것이

떠나가고 사라지며 스스로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이루어가는 것을 본다.

 

  감꽃 환한 그늘 아래, 노란 달빛 아래, 깊은 적막의 시간아래, 당신의 여섯 살이 유리 조각처럼 반짝이고 있는 마당 안쪽으로 사립문은 열려 있다 흙과 이끼와 모래알들이 지운길 밖으로 사립문은 이어져 있다

  (중략)

 

  커브 길을 돌면서 자동차가 출렁, 흔들어 놓은 섬진강의 흙과 이끼와 모래알들이 자주자주

하류로 가는 길을 지운다

  지워진 길 밖으로 사립문은 열려 있다 남해는 길 밖에 있다

  어쩌면 나는 오늘 남해에 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추억의 힘으로 다만, 반짝일 뿐이다

  ─「섬진강」부분

 

 
내 집의 지하 계단 입구에는 낡은 시계 하나가 걸려 있지요 간혹, 은찻잔 가득 대금 소리를 내며 고로쇠나무 잎사귀들이 바람에
쓸려갈 뿐 내 작은 뜰에는 여뀌풀과 자욱한 안개, 그리고 지하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시간의 발자국 소리로 가득 채워져 있답니다
혹시, 낡은 시계의 건전지를 바꾸기라도 한다면 시간은 침침한 지하 계단을 거슬러 올라 저 높은 질책을 타고 달아나 버릴지도
모르지만, 누가 함부로 제 몸 속의 녹슨 못을 갈아 꽂을 수 있겠어요 거기 엉거주춤 서 계신 당신, 이리로 내려와서 삭아서 재가 된
이 폐허의 냄새를 맡아보세요 푸른 칼을 들고 와서 이 상처의 향기를 잘라 가세요 오랜 세월인 당신, 내 집의 지하 계단 입구에는
아주 오래된 시계가 걸려 있답니다

  ─「고로쇠나무」전문




 

 
처음의 시를 보면 독자는 화자가 자동차 속에서 섬진강 가의 고즈넉한 풍경을 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서 문득 화자는
<감꽃 환한 그늘 아래, 노란 달빛 아래, 깊은 적막의 시간 아래, 당신의

여섯 살이 유리 조각처럼 반짝이고 있는
마당>을 본다. <안쪽으로 사립문은 열려 있」다. 내면의 공간은

<추억의 힘으로 다만, 반짝일 뿐>인
물빛으로 가득차 있다.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 그 이상이다. 그것은

시간을 넘어, 한 시인의 언어가 끝없이 다가갈 충만한 시원의
공간으로 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끝없이 언어를 지워가는 소리가 있다. 단순히 소리만이 아니라 색채가 있다. 언제나
기억의 장소에는 물,

나무, 햇빛과 같은 것이 반짝이고 있다. 은사시나무, 고로쇠나무, 조팝나무, 대나무, 감나무, 오갈피나무


등등이 자라나고 있는 이 아름다운 공간은, <말을 통해 세상을 건너는 법을 아직 잘 알지 못

>(「말들의 무덤」
는 화자에게, 말의 길을 가르쳐주는 자연의 화살표, 혹의 시인의 심리적인 회향성을

내포한다. 산과 강물에 둘러싸여 이제 고요함과
햇빛과 빗물과 바람만이 지배하는 곳. 거기서 말은 현실

너머 시원의 이미지를 향해 미끄러진다. 너무나 오래 전부터 들려와서
들려지지 않는 소리, 듣고 싶은대로

그대로 들리는 소리들은 나뭇잎의 살랑임이 될 수도, 물살의 찰랑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라져간 문명의 유적처럼 흐릿하게 보인다. 지도 속에서 문명의 유적지를 기억해 내듯(「초록색 칠판」),


인은 잊혀진 언어, 사라진 소리들을 향해 입술을 연다. 하지만, <멈춰진 시계>같은 그 원형의 시간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은 황홀하면서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어 속에 부재하는, 끝없이

말들을 포기함으로써만이 언어화될 수 있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언어는 언제나 상처의 둘레를

맴돌 뿐이다.

 

  목도리를 짜던 어머니는 피 묻은 내 목청에 놀라

  비상벨을 눌러댔고, 펑펑 검붉은 피를 쏟았고, 나는

  피의 늪 속에 누워

  아득히 날아가는 비비새를 보았다

  그날은 수세기 전이었고

  먼데서 별 하나가 팍, 자지러지는 밤이었다

  푸르스름한 달밤이었고, 붉고 비린 밤이었고,

  그날 나는 강보에 싸여 있었다

  ─「서기 2010년, 봄」부분

 

  장 보러 나가셨던 어머니는 어두워져서야

  헐레벌떡 집으로 들어오셨다

  ․․․․․․․․ 얘들아, 글쎄, 어찌된 영문인지․․․․․․․․ 집으로 오는 길 을 못 찾겠고․․․․․․․․

  ․․․․․․․․도깨비에 흘렸었나봐․․․․․․․․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시내를 몇 바퀴는 돌았을 거다․․․․․․․․ 이 다리 좀 봐․․․․․․․․

  보라색 꽃무늬 어머니 스웨터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중략)

 

  자잘한 보라색 꽃무늬 커튼 쳐진 방안에서

  암호와 문자들의 미로 속에

  나는 지금 갇혀 있다

  ─「도스 나들이」부분

 

  무슨 이유에선지 강보의 아이는 <피 묻은 목청>을 가지게 되고, 그것은 <피 묻은 목청>을 가지게 되고,


그것은 <피의 늪 속에 누워/ 아득히 날아가는 비비새를 보>게 되는 일종의 무의식적 계기로 작용한다.

이 상처는,
<수세기 전>의 아득한 아픔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강보>에서부터 어머니의 상흔을

상속받은 화자는, 그
상처 입은 기억의 공간에서, 상처가 토해 낼 수 밖에 없는 무수한 언어의 이미지를

동시에 본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것은 타자의
목소리가 자리잡는 순간부터 상처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주체, 세계 밖으로 밀려난 의미들을 언어 속에 끌어오려 하는
글쓰기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도스 속을 맴도는 언어>는, 존재하는 무언가의, 언어로 회귀할 수
없는

타자의 의미를, 자기의 삶의 테두리 안에 위치시키기 위한 끝없는 부정의 언술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세계는 거부할 수 없는 테두리로 시인의 실존에 주어져 있다. 제자리를 도는 맴도는

어머니의 귀로처럼, 화자는 제대로 된 명령어를
찾지 못해 <도스> 속을 맴돈다. 그녀의 말은 욕망을

실행하지 못한다. 이렇게 체제의 테두리를 돌면서 진실을 소외시켜
가는 언어의 비극을 시인은 언어

공간 속에 부재하는 자아의 문제와 결부시킨다. 시인은 말한다. <이 세상에는 나를 포위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그러니까 나는 돌아올 수 없지/ (나는,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런데 나는 정말

어디로 간
거지?>(
「그런데, 나는 정말」)라고. <꿈이란 원래 지상의 것이 아니므로 내가 꿈꾸었던

지상에서 가장 먼 길은, 이미 지상에 없다)(「불빛 끝에 매달리다」).

 
이러한 언어의 문제가, 성적 의미에 관여할 때, 그것은 끝없이 언어 속에서 밀려나면서 동시에 언어에

의해 규정되고 억압되는
여성의 글쓰기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위의 시에 의하면 화자는 끝없이 언어를

찾지만, 그 언어는 절대로 자신의 근원적인 욕망,
또는 근원이라는 기의에 맞닿을 수 없다. 이러한

역설은, 끊임없이 시인의 언어가 기억 또는 부재하는 시간으로 열려야만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제 시인은 언어적 공간에 자신의 말이 놓여 있지 않음을 안다. 오히려 그의 말은, 끝없이

움직이고
배회하는 욕망처럼, 검은 미궁과도 같은 육체의 어둠 속에 깃들어 있다. <놀라워라, 그

검은 미궁의 시간이/ 내 육체의
집이었다니>
(「(지하 4층 下 코끼리 18번)」). 언제나 육체의 말은,

환상이니 신비니 하는 향수가 아닌, 아주 본질적인 방식으로 여성의 말을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언어는, <폐허의 안쪽과 바깥쪽>(「그 여자」)
동시에 드러나는 참혹하고 <서툰 말>의 형식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순히 어떻게 말이 억압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여성의 언어가 타자로의 개방을 위해

언어 속에 허용되지 않는 도피의 통로를 따르는가 하는 문제를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의

부재 속에, 기억의 공간속에서만 포착되는 충만함의 경험을 결코 놓쳐버릴 수 없다. 특히 기억으로

확장되는 모든 이미지들이,
우리가 <대지적>이라 부를 수 있는 나무, 풀, 꽃과 같은 것들과 결부되어

있음을 지나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여성적
자의식은 언제나 대지라는 원형의, 언어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언제나 대지는 여성적 감수성의 근거지이며, 시인이 궁극적으로
부르고 싶어하는 노래의 형상이며

이미지이다. 언어는 늘 자연과 대지의 토양으로부터 인간의 의식을 분리시킨다. 때문에 언어는 대지의

진실에 가닿지 못한다. <말이 강물을 이룬다 한들, 어떻게/ 붉은 꽃 그늘의 비밀을 해독해 낼 수 있을

것인가>(「시클라멘」).
러나 역설적인 것은 바로 그 언어 속에서, 대지를 만날 수 밖에 없는

현대인의 언어적 초상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은, 나라는 타자,
나라는 분신, 나라는 그림자의 모든

형식인 <상처의 말>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한다. 어쩌면 진실과 자아의 순수한
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육체적인, <상처>의 말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피에 젖은 꽃잎처럼 빠알간 혀가
조금씩

밀려 나오는 몸의 상처 속에서나.

 

  영산홍 곁에서

 
몇 밤을 지새우고 나서야 나는 겨우, 그 꽃을 내 안에다 옮겨 심을 수 있었다 꽃은, 붉은 그늘을 내게 주고 나는, 진눈깨비
내리는 작은 창을 그에게 주었다 낡은 유성기판이 목청 찢으며 헛바퀴를 돌던 날 아침, 영산홍의 작은 꽃망울들이 몸 안에서 혀를
내밀기 시작했다

  아무도 내 몸의 상처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도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오지 못했다

  햇빛과, 바람으로 채워진 날짜의 무늬들이 상처의 안과 밖을 드나들었다

  ─「영산홍」부분

 

  저 노을 빛에 덜컥, 노래 한 소절이 걸린다

  한 소절 노래가 떠메고 있는 꽃물 든 바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저렇게 들어올릴 수 있는 슬픔이 있다면

  ─「노을, 노을」부분

 

  해일일까요, 아니면

  내가 잠근 방문의 열쇠 구멍 속으로 누가, 전력으로, 젖은

  몸 밀어넣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자주 내 몸 가득 차오르는 정체 모를 물살의 두근거림 속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숫자나 문자 안에 새겨넣던 희망이나 번뇌는

  결국 그 바다에 이르러 일만 개의 빛깔로 깊어집니다

  ─「범람하는 방」부분

 

너무나 작아 보이지 않는 상처. 시인의 입술은 그 상처로부터 벌어지는 것이다. 붉디붉은 영산홍

꽃잎처럼, 온몸을 열면서 생명을 터뜨리는 말을 시인은 본다. 언제나 그는 그런 노래를 꿈꾸었으리라.

하지만 그 노래는 <상처의 안과 밖을 드나>드는 것이다. 말하는 것은 상처 입음이며, 그
상처로부터

자신을 피워내는 것이다. 작은 상처는 마침내 <꽃물 든 바다>처럼, <전력으로, 젖은 몸 밀어넣고
있>는

<해일>처럼 확장된다. 언어적 공간을 무너뜨리면서 열려지는 여성적 무의식의 열림, 넘침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상처는, 노래
의 처음으로 이르는, 붉은 장미 꽃의 이미지를 향해 나아간다. 그곳에

비치는 어머니의 그림자. 그것이 자신이 부르게 될 노래의 이미지란 것을 어린 날의 시인은 몰랐으리라

. 하지만 이제 그는 본다. 고적한 산길, 가시에 찔리면서 한아름 장미꽃을 안고 있던 유년의 그 지점에서

말이다.

 

  1

  덩굴장미 한 묶음 안고 넘어가는 산길 십 리

  허리춤에 맨 책 보자기 속 양철 필통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함께 걸었다

  장미는 가시를 세우고 나는

  해진 검정 고무신 가득 모래알 털어내며

  가시 다스리는 방법을 익혀갔다

  사랑채 앞 흐드러진 장미, 뚝뚝, 꺾어주며

  이 꽃 꼭 선생님께 갖다드려야 한다 하시던

  장미처럼 젊었던 어머니

  (중략)

 

  3

  내 몸은 구겨진 한 장의 셀로판지

  빨강, 노랑, 분홍으로 활짝 피어오르는

  눈부신 상승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철철 피 흘리는 아찔한 추락을 꿈꾸는 것인지도 모른다

  꽃잎처럼 젊은 어머니

  오늘도 사랑채 앞 붉은 장미 뚝뚝 꺾어주시고

  양철 필통 달그락거리며 나는 밤마다 그 산 넘는다

  닳아빠진 검정 고무신 가득 모래알 털어내며

  ─「밤마다 그 산 넘는다」부분

 

 
화자의 가슴에 가득한 노래의 이미지는 언제나 <장미처럼 젊었던 어머니>의 모습과 겹쳐진다. 시인은

아득히 자라서야 그
노래의 이미지인 장미를 보게 된다. 가시로 가슴을 찌르는 아름다움처럼, 그 자신의

가슴에 안겨 있는 언어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먼 시간 뒤에, 그 딸애의 눈을 통해 되비쳐오기를

기다리는 듯한 어머니의 기억들. 시인은 결코 그 장미의 언어들을 버리지
못한다. 장미를 안고 가는

숲길에는 아이의 <양철 필통>이 달그락거린다. 삶의 어느 순간 불현듯 침묵은 소리를 토해
낸다.

<빨강, 노랑, 분홍으로 활짝 피어오르는/ 눈부신 상승을 꿈꾸>면서. 나는 본다. 상처를 돌아보고,


돌아보면서 그 상처를 모조리 열어 하나의 세계를 열고 싶은, 혹은 그 세계를 침묵으로 간직한

입술을. 언어로서 토해지지 못하는
소리들의 끝없는 절망을. 스러지는 영혼처럼, 피어나는 꽃잎처럼,

숨이 멎는 것만 같은 탄성의 반짝임들처럼, 이미지는 아프게,
아름답게 빛난다. 소리와 색채가 어울리며

만들어낸 조용한 움직임. 그 모든 것은 하나도 낯설지 않다. 나는 본다. 끝없이 소멸하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벌어지는 통로, 상처도 없이 입술이 충혈된다. 뜨겁게 타오른다. 이렇게 환화고 아픈 장미의

이미지는,
<고요한 입술>에서 흘러나온 침묵의 모든 이미지이다. 그것이다. 내가 송종규의 시에서

발견한 것은.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