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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바람의 보존법

Author
mimi
Date
2011-05-09 22:24
Views
10015

 


장미와 바람의 보존법

시집,『장미의 내용 2011년, 조정인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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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이(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1.

 
이 시집에서는 사과향이 난다. 에덴동산에서 이브가 처음 따 먹은 사과와 그로부터 줄기차게

번성하여 온 사과들. 금기의 맛이자
금기를 깨뜨리는 맛의 이중성을 지닌, 욕망 충족의 환희와

허망의 분열적인 경험을 안겨주는, 인간이 신의 낙원에서 추방당한 최초의
트라우마를

새콤달콤하게 반추토록 하는 사과들의 향.

 
‘사과’는 인간 역사의 기원과 형성(균열이기도 한)에 대한 상징이자, 욕망의 기원과 충족(좌절이기도 한)

에 대한 상징이며,
일탈과 처벌로 가시화된 여성의 주체적 행위의 기원과 성장(파열이기도 한)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신과 분열된 인간의 역사, 충족
및 승화와 분열된 욕망의 역사, 자기 자신과 분열된

여성의 역사에 대한 상징. 더불어 그에 관한 생생한 증거물. 이 사과를 집어
들 때 조정인은 그러므로,

“의혹투성이 미제사건에 손을 대듯”(「사과 따기」) 긴장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무는 일은 “지상에 흘린 에덴의 풍문을 한 입 베어 무”(「사과 따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조정인을 포함한 이브의 후예들이
모든 매혹의 순간들에 “가슴 속 사과가 와르르 몰렸다가 제 자리를

찾는”(「난감」) 사태에 전율하는 것 역시 최초의 경험을
반복하는 관성적인 행위에 속한다.

 
이 사과는 “고물대는 우주를 물고 있”으며, 지나온 “시간의 질감이 역력히 남”은 그러나 “알 수 없는

흔적들이 지워질 듯
어른거리”(「홍옥」)는 비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씨앗’과 ‘유적’과 ‘미궁’의 복합적

면모를 지닌 사과는 우주의 생명-존재의
비밀이 농축된 결정체로서 지금-여기에 현존한다. “미량의

크로뮴을 품은 돌”, “투명한 돌멩이의 구심에서 외곽까지 구석구석 원소의
메아리가 쟁쟁”

(「홍옥(紅玉)」)한
실(如實)한 생물(生物). 만지고 깨물고 삼킬 수는 있지만, 끝내 닿을 수는 없는

실재인 그것. 인간의 몸과 내면에 축적되고
유전하여 왔으나, 인간이 완전히 규명하고 제어할 수 없는

본질이기도 한 그것. 인간이 행하고 이룩하여 왔으나, 인간 스스로
투명하게 해명하기 어려운 모든

행위들의 환유이기도 한 그것.

 
이 오래된, 현전(現傳/現前)하는 우주적 배경을 지닌 인간의 존재론에 관해 조정인은 이렇게

읊조린다. “우리는 얼마나 먼데서
흘러온 시간들일까? 곁에 있으나/닿을 수 없는”.(「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하여 사과는 또한 인간이 세계/우주 및 타자와
맺고 있는 근원적인 관계와 그 관계의

빈 구멍들을 상징한다. 이 존재론적이며 관계론적인 빈 구멍들은 인간의 고뇌와 고통이
생성하고

분출하는 수원(水原)이자, 인간이 망각해 온 신성에 대한 갈망을 꽃피우는 통로가 된다. 조정인은

이 빈 구멍에서 희미해진
신성의 대리물 혹은 근사치로서 여성성을 발견한다. 그녀가 비속한 세계의

여러 시공간에서 고통 받는 존재들에게 손을 내밀어 그들의
고통을 육화할 때, 여성성은 신성의

유의어 혹은 계열어가 된다. 조정인의 시가 태초와 이후의 시간들을 아우르고, 종교와 과학을
넘나들며,

수많은 타자들의 삶에 참여하는 광대한 스케일을 갖춘 내력은 이러하다. 조정인의 시를 읽으며 현실과

현실 너머, 역사와
초(超)역사, 일상과 심연, 논리의 언어와 열정의 언어 등이 폭주하는 어떤 과잉의

사태에 곤혹스럽거나 즐거웠다면, 그 상당 부분은
조정인의 여성적 문제의식의 남다른 스케일에서

연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과는 인간에 의한 인간적인 삶의 출발을 ‘금기’로 예비한 “하느님의 붉은 혁명”을

상징한다. 치명적인 분리의
기억을 환기하는 사과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인간의 능동적인 자생력을

표징하는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파열-생성의 가능성으로 충만한
“어마어마한 씨앗창고”인

“사과창고는 사실 서쪽하늘에 있”(「서쪽을 불러들이다」)지만, 그 열매들이 인간의 척박한 땅에서

자라고
수확되는 일은 그래서 가능해진다. 다르게 말하면, 신에 대한 분리의 과정과 불안 없이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창조할 수 없었으며, 그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신을 그리워하거나 망각함으로써 자신의

결핍과 자족(의 불가능)성을 증언해 왔다. 이 증언의 시간들이야말로
인간이 살아내 온 폭력과

성화(聖化), ‘킬러와 천사’(「목격」), 분열과 화합, 죽음과 삶, 두려움과 사랑 등이 넘실거리는
인간의

역사 자체인바, 조정인의 시가 개입하고 자생하는 자리는 바로 여기이다.


 

  2.


나무는 그 해의 잘 익은 태양을 이고 있고 신의 의중은 뿌리 밑에 스며있다 그의 의중이 재채기처럼

튀어나가 주렁주렁 나무의 문전성시를 이뤘다


(…)


지난여름 낙뢰, 그 환한 샛길로 사과밭의 환영이 지나갔다 몽상과 예감의 거친 파도가 쓸고 간 하늘

아래, 꿈처럼 재현된 과수원에서 사과를 땄다 그 붉은 필름에 바람의 소용돌이와 구름의 정처가

인화돼 있다 - 「사과 따기」 부분

 


 
‘신의 의중’이 주렁주렁 ‘문전성시를 이룬’ ‘사과밭’은 왜 ‘환영’의 형태로 다가오는가. 사과밭에 켜켜이

쌓인 신화적 두께와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이유일 터이다. 사과밭의 가시적 형상은 저 보이지 않는

실재의 기미들로 은성(殷盛)한 신의 손길을
현시한다. 지금 사과를 따는 곳은 ‘신이 있음(God is)’이

다시 한 번 “꿈처럼 재현된 과수원”이며, 사과를 따는 ‘나’는
신의 의중을 “몽상과 예감”의 초이성적이며

초자아적인 감각 기관-능력으로 감지하는 자이다.(조정인의 시에 ‘맹인’과 ‘시력 상실’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와 관련된다.) 하여 사과의 “붉은 필름”에는 과수원에서 생긴 모든 존재와 행위와

사건의 흔적들,
예컨대 “바람의 소용돌이와 구름의 정처가 인화돼 있다”. 혹은 사과는 “꽃을 쪼던

찌르레기 부리 끝 비린 향기와 쓸쓸쓸 쓰르라미
울음소리”에서부터 “머지않아 폭설을 몰고 올

당신이라는 별”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겹을 입혀 구워낸 붉은 종, 구월의
캐럴”(「홍옥」)이며,

퇴근길에 넘어져 “영원 같은 순간을 세상의 바깥으로/고요하게 휘돌아 나가”면서 “지구자전에

스텝을 맞추”며
“뉴턴의 사과”로 화한 “3개월짜리 계약직”인 ‘나’ 자신이기도 하다.(「내 무릎 속 사과」)

이 목록은 얼마든지 계속될 수
있다.

 
‘신의 의중’과 우주와 인간의 역사가 새겨진 “정교한 秘文”(「먼지야. 그때 너 왜 울었니?」)으로서

사과. 이 사과들의 향이
진동하는 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 조정인이

첫 시집에 명시해 놓은 것처럼 - “한 생애가 고인 삼엄한
현장”(「노을과 장미 2」,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이다. 한 생애는 누대로부터 첩첩 쌓여온 수많은 생애의
집적물이기도 한 것이어서,

한 생애가 고인 삼엄한 현장이란 존재와 시간의 중첩과 펼쳐짐, 응축과 확산이 수시로 일어나는 곳이


된다. 광대무변한 이 삶의 현장은 특정 시공간과 개체의 경계를 넘어 다른 시공간 및 존재들과 자유로이

접속하고 연대한다. “種의
경계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고양이는 간간 상황 너머에 있다」)

실감하는 일쯤은 이곳에서는 한낱 예사로운 일이 된다.
조정인은 다양한 생의 현장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전 우주와 지구의 역사를 망라하고, 타자의 먼 생애를 속속들이 살아내며, “사물의
심연 속으로 내려가

개별적인 진동, 소리 내지 않는 음악을 듣”(「붉어진 공기」)기도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조정인에 의하면, 그때-저곳에서 지금-여기까지 우리의 삶의 현장은 변함없이 “영의 통일성이

점유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은 마을과 마을을 유전한다 머리 위로 원반처럼 날아다니는 초월의 힘을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내가

종종 샤갈의 밤하늘을 가지는 건
이상할 게 못 된다 영의 통일성이 점유하는 세계가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그의 양탄자를 타고 밤하늘을 날겠는가? (…)


어떤 사람이 꿈에 에덴동산에 갔다가 그 증표로 꽃을 받았는데 꿈에서 깨보니 꽃이 정말 손에 쥐어져

있더라는, <콜리지의 꽃>에 부쳐 나는 쓴다 (…)



벽녘 나는 붉은 장미성체를 혀 위에 받는 꿈을 꾸었다 사제 몰래 손바닥에 뱉어 확인한 꽃잎의 은유

, 누가 꽃을 따서 내 입에
넣었나? 이천여 년 저쪽 노을 비낀 해골산, 로마병사의 창에 찔린

나사렛남자의 옆구리에서 뚝, 뚝, 뚝, 듣던 핏방울 그 혈흔이
내게 관여한 꿈! 우리는
참 많은 씨앗의

여지를 잠 속에 묻어뒀다 잠, 그 따뜻한 무풍의 나라 통증이 멎는 나라에

-「성체」 부분


(…) 깜깜한 진흙반죽으로부터 고대인을 통과하여 영원히 인간게놈 정중부에 꽂히는 빛의 화살촉

신성은 자신의 관성으로 인간과 인간, 사물과 사물을 관통하며 시제는 현재다

- 「숲」 부분

 


 
꿈속에 에덴동산에서 받은 증표인 ‘꽃’이 깨어난 후에도 손에 남아 있는 것. 이천여 년 전 나사렛 남자가

흘린 ‘혈흔’이 내
(무)의식의 ‘씨앗’으로 유전하는 것. 깜깜한 진흙반죽으로부터 시작된 ‘빛의 화살촉’이

고대인을 통과해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것. 초월의 힘, 영의 통일성 등으로 설명되는 ‘신성’이

인간과 인간, 사물과 사물을 관통”
증거는 도처에 가득하다. 인간의 세계를 만들고 움직이는 원리는

신성(의 관성)인바, 신성의 “시제는 현재”이다. “불현듯 눈이
멀어 전신이 눈이 되는, 신성의 얼굴과

마주한 백열상태”(「숲」)는 조정인에게는 명백한 현재의 사건이다.

 
신성(의 관성)이 이룩한 세계에서 조정인은 크게 두 가지 작업을 수행한다. 먼저, 신성의 맥락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재구성하기. 이 과정에서 조정인은 신성과 인간(특히 자신)의 본성 사이의

균열을 체감하는 일을 경험한다. “이 풍성한 외로움의
배후는 당신이라는 저편”(「아무 일 없이」)이며,

우리의 세계에서 “영혼의 어떤 거리는 여전히 비어있”(「날개에 바치다」)는
까닭에 조정인의 정체성

규정 작업은 지난한 여정이 된다. 가령 ‘나’는 “신의 꿈속”일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꿈속의 일곱 겹
꿈”

이고, 심장이 사라진 흰 늑대이며, 마침내 “그 모든 무질서의 총계”이다. 규정될 수 없는 자신의 본질을

규정하려는 불가능한
열망은 조정인의 시를 지배하는 뜨거운 낭만적 열정과 방황의 정조들에 고스란히

이입된다.

 

             꽃나무와 여자들이 주술에 드는 사월, 가수는 노래하네 ― 세상은 신의 꿈속이 아닐까?

             꿈속의 일곱 겹 꿈인, 당신을 사랑하는 나는 당신의 아홉 겹 슬픔을 품은 거대한 밤바다

- 「초신성-supernova」 부분


그런데 나는 왜 심장이 사라지는 것일까 흰 늑대가 되어 눈보라처럼 이불홑청처럼 하늘 복판을

펄럭이는 것일까

- 「장미의 내용」 부분



는 숨 쉬는 진흙덩이, 욕망이라는 사과 한 개, 필연을 품고 날아가는 화살촉 죽은 자들이 필자인

기나긴 연재, 태어나지 못한
메아리들의 무덤 탄흔으로 얼룩진 성전 내벽에 걸린 인류의 파편, 한 뭉치

열패감 그리고 구토, 그 모든 무질서의 총계

- 「장미와 바람은 다 어떻게 보존되나」 부분


 

 
다음으로, 같거나 다른 시공간 속의 타자들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상상하고 전유하기. 신성과 인간성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이
작업은 신성을 닮은 여성성이 발현되는 결정적인 토양이 된다. 신성을

지향하는 여성성, 신성으로 수렴되는 여성성으로 요약될 수 있는
조정인의 시적 체제 속에서 과거와

현재, 기억과 상상, 현실과 비현실/초현실 등의 구별은 가볍게 무화된다. 이 신성-여성성의
시적

주체는 지금-여기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서도 무수한 타자들을 윤회한다.

 


저물 무렵, 쥐스킨트 1街 향수의 거리에서 나는 향기가 진한 자두와 장식깃털을 팔다가 그를 보았다

치마를 털고 일어나 뒤를 �i았으나 사람들 사이 놓치고 말았다 그를 찾아 몇 세기를 헤매는 중

기억하느니 한때 나는 맹인이었다

- 「날개에 바치다」 부분

 


 
비단, “그를 찾아 몇 세기를 헤매는 중” 한때 ‘나’의 화신(化身)이었던 ‘맹인’뿐만이 아니다.

『장미의 내용』의 상당 부분은
이 윤회의 기록을 위해 바쳐진다. 중세의 시민광장에서 화형당하는

불륜의 마녀(「불꽃에 관한 한 인상」), 백년을 보폭으로 바다를
건너오는, 지구의 어느 곤고한 시절

굶어 죽은 “은발을 풀어헤친 혼령들”(「눈보라는 어디에 잠드나」), 짐승의 혼들이 밤하늘의
별이 되던

원시 시대의 사냥꾼 쿤(「畵工」), 거울 앞에서 불현듯 깨어나는 내 안의 네안데르탈인(「히아신스와

나와 네안데르탈인의
원반던지기」), 천년 전 전란이 있던 해 바위섬 외딴집에 깃들어 산 부부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한국전쟁의 격전지에서
55년 된 물이 담긴 수통과 함께 발견된 무명

전사자(「수통 속의 천사」), 자신을 납치한 무장혁명군의 간부와 사랑에 빠져
정글에서 부엌칼 시술로

아이를 낳은 콜롬비아의 여성 변호사(「한 장 모포」),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장애인들

(「느리게 흐르는
책」), 집 나가는 엄마에게 가지 말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아이(「유리」) 등. 기억과

상상, 공감의 형식을 빈 수많은 타자들로의
시적 윤회는 조정인이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초월의 힘’과

‘영의 통일성’을 발휘하는 방식이자 그 산물이다. 타자들로의 윤회는
다음과 같은, 타자를 ‘착취’하는

인간 존재의 본성을 정반대의 형태로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다. “당신과 내가 갉아 먹은 것은
서로의

슬픔, (…) 우리는 일생 타자의 슬픔을 헐어 제 공복을 채운다”.(「고구마를 깎다」)

 
타자에 대한 일방적인 ‘착취’를 반대 방향의 ‘증여’와 ‘존중’, 쌍방향의 ‘순환’으로 돌려놓는 것 - 이 또한

인간의 본성이다
- ,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이제, “네 사랑을 펴봐”(「먼지야. 그때 너 왜

울었니?」)야 할 시간. 사랑의
시간은 타자의 슬픔과 나의 슬픔이 뒤섞이(지 못하)는 가운데 문득 도래한다.

 


내안의 뭔가가 함부로 휘저어질 때 자신의 침묵에서 떠오른 아름다운

                    섬, 당신이 있었어 (…)


달빛 번진 해수면의 반짝거림, 되새 떼 목청의 떨기, 백합조개에 걸쳐진

수평선에까지 바람은 발산과 수렴, 증식과 소거의 파도를 그리는데

내 사랑의 촘촘한 연산이 적힌 석판은 어디에 있나?

- 「축제」 부분


멀고 쓸쓸한 극지에서 태어난, 그보다 훨씬 먼 행성에서 날아온 씨앗에서 움튼

사랑해, 라는 말에는 얼마나 자주 마음이 다녀가는지


당신과 내가 투숙하는 이쪽과 저쪽, 극지와 극지 사이 아득하게 레일이 놓였고

하루치 쓸쓸한 바람을 적재한 그날의 화물열차가 협곡을 지나간다

- 「말들의 크레바스」 부분

 


 
끊임없이 “발산과 수렴, 증식과 소거의 파도를 그리는” 바람으로, “멀고 쓸쓸한 극지에서 태어난”

씨앗으로, 당신과 내가
투숙하는 “극지와 극지 사이” 협곡의 바람으로, 기타 등등으로 “내 사랑의 촘촘한

연산”은 진행된다. 조정인의 시가 편력해 온
거대한 스케일의 우주는 실은 ‘사랑의 우주’였음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대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대의 감긴 눈이 볼 능력을
잃었다고 해서 사랑의 우주가 멈춰

서지는 않는다.”(개리 레너드, 『우주가 사라지다』)는 말은 조정인의 시에 적절히 들어맞는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나 무관심이 아닌 두려움이라는 말 역시 그러하다. 조정인은 규정되고 설명될 수 없는

자신의 실재/실체에 대한
두려움(만지고 깨물고 삼킬 수는 있지만, ‘닿을/다다를’ 수 없는 ‘사과’를 다시

떠올리자.)을 넘어 타자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간다. 이 도약이 신성을 갈망하는 여성성에 의해

이루어졌음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세상에는 다다를 수 없는 것만이 공법인 검법이 있다 당신께 쓰는

내 문장은 급소를 모르나 필생의 화염 속에 있다면

그것으로 전부다

- 「검객」 부분


 
이제 조정인 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진술을 할 시점에 이르렀다. 조정인 시의 잉태와 발화의 주체는

사후적으로 감각하고 사유하는
개별적인 ‘자아’가 아닌, 선험적으로 몽상하고 예감하고 직관하는

‘영혼’이다.(‘영혼’의 의미를 조정인의 시에 깔린 카톨릭의
종교적 테두리로 한정하지는 말자.) 개체를

초월하고 시공마저 가볍게 초월해 다른 영혼들과 소통하는 영혼이 체험하고 증언하는 시.
“영혼에게도

뼈가 있어서 영혼이 제 뼈를 앓아누웠다”(「바람벽화」)는 조정인의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조정인은 자신의 영혼을
시 쓰기의 주체로 하여, 그 쓰는 일로써 ‘장미와 바람’ 즉 인간의 능력으로

보존할 수 없는 것들을 보존하고자 한다. ‘장미와
바람’을 담아 사랑하는 “당신께 쓰는” 시는 “필생의

화염”을 토해내는 “내 고유한 화형식”으로 점철된다. 조정인의 말처럼, 이
사랑하는/쓰는 일에는 뚜렷한

기원이나 정처가 없다. 그러니 ‘나’를 불사르며 그저 쓰고 또 쓸 뿐. 사랑하고 또 사랑할 뿐, 다른
방법이

없다.

 


시야 가득 지펴지는 말들의 불꽃으로 치르는 내 고유한 화형식 손끝을 빠져나가는 그림자를

지면으로 흘리며 나는 묻지 기록이 흘리는 검은 피, 쓴다는 일은 어디서 오며 정처는 어디인가

- 「장미와 바람은 다 어떻게 보존되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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