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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젖지 않는 발끝에 날개를 달아라!

Author
mimi
Date
2011-04-25 06:21
Views
10248

 


물에 젖지 않는 발끝에 날개를 달아라!

시집,『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2011년,  이향란 『지혜사랑


                                                      금은돌(문학평론가)   

 

 

 

 

 
허공에 피아노 건반이 있다면, 이향란 시인은 어떤 音을 내고 있을까? 그 건반은 공기적 질료의 감촉을

몇 옥타브의 음계로 표현해
낼까? 음표들이 엠보싱 모양으로 떠다닐까? 세모, 네모난 모양으로 사물

사이를 부딪치며 스타카토로 떠다닐까? 허공은 소리를 몰고
다닐 게다. 수천수만 개, 아니 수천억 개의

손가락을 이용하여 바람소리를 내고,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를 내고 있을 게다. 때로는
호흡을 맞추어

신호를 주고받으며 탭 댄스를 추다가, 엉덩이를 내려 깔고 가라앉을 수도 있다.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어느 사이엔가
엉큼하게 귓전으로 스며들 수도 있다. 아니면 무거운 공기를 이끌고 사람들 이마 위에

가라앉을 것이다. (그래서 두통이 생기는 게
아닐까?) 텔레파시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허공중의

수많은 손들이 그와 나를 잡아당기며, 끌리도록 연결시킬 것이다. (나는
약간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걷는다. 이런 상상에 빠지면서 걸으면 비밀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와 그는 서로를 바라보는


존재가 되니까. 공기적 질료는 수천수백개의 눈동자들이 떠 있는 거울이 된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내가 그를 바라보고, 바라본
것들이 또 다시 바라보는 관계이다. 이에 거울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 된다. 행동의 이면을 잽싸게 알아채고, 언젠가 다른
눈동자들이 비밀을 전해줄 테니까.)

 

 

  비껴가는 것의 슬픔

 

비껴가는 것,

그것이 머무는 것보다 더 아프다

-「머무는 것보다 비껴가는 것이 더 아프다」에서

 

 
시적화자는 비껴가는 것에 독특한 감정을 갖는다. 그 이유는 공기적 질료들끼리 갖는 마찰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비껴가는
것의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시인의 감각이 작디작은 미세한 부분까지

느낄 정도로 섬세하다는 얘기이다. 시인의 촉수는 공기적
질료를(가스통 바슐라르)을 형상화하는데

탁월한 상상력을 보인다.

 
바슐라르는 말한다. 공기에 대한 몽상은 “탈물질화의 동력학 위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그것은

최소한의 질료를 가졌을 뿐이며,
무한하고 형태 없는 이 세계 속에 꿈꾸는 존재가 “융합”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고. (가스통 바슐라르 ,『공기와
꿈』)

  여기서 공기적 질료들이 스쳐 지나가는데, 아픔을 느끼는 이유를 추론해 보자. 오히려 실현시키지

못했던 내면의 욕망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 붙들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고착시키고 싶은 욕망이

강했다는 뜻이 아닐까.


공을 바라보자. 가령 이삿짐을 나르는 사다리차를 바라본다고 가정해 보자. 시적화자는 허공에 떠

있는 그 사다리차를 보면서 슬픔을
느낀다. 푸른 하늘과 그 푸른 하늘 위로 비친 사물들 사이에서,

온전하고 완벽한 충만감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허공이 남겨
놓은 푸름 가운데 사물과 사물이

만나는 지점에서 상처를 감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의 공기적 질료는 언제라도 톡, 터져버릴 것 같은 위태로움을 안고 있다. 푸른 하늘을

꿈꾸는 자는 그 하늘을 자기
소유물로 삼을 수 없다.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기에 슬픔이 따른다.

공기적 질료가 육체성을 가지고 만져지지 않기에, 불안하다.
집착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껴가는

행위는 마음을 다치게 한다. 허공에서 일어나는 원인 모를 마찰은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응어리를

남긴다.

 

줄곧 발 없는 울음이 온몸으로 기어올라

못으로 종지부를 찍던 벽

그 벽에서 나무의 푸른 계절이 흘러나오고

새의 부리와 나비의 날개

혹한의 바람이 배어나온다 오래돼 숨 가쁜 음악처럼

-「죽은 나무의 벽화」에서

 

 
그녀의 공기적 질료엔 액체성이 묻어난다. “발 없는 울음이 온몸으로” 딱딱한 질료적 성질 이면에

흐르고 있다. 그것은 눈물이다.
눈물이라는 액체성은 용암보다도 강력하다. 눈물은 단단한 벽과 지층

아래에서 뜨겁게 흐른다. 벽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을
품고 있다. 그것이 울음으로 터져

나왔을 때, “푸른 계절이 흘러나오고 / 새의 부리와 나비의 날개 / 혹한의 바람이 배어나온다”
울음이

지층을 뚫고 나올 때라야 슬픔이 멈출 수 있다. 단단한 벽은 눈물을 억누른다. 또한 시인의 꿈과 소망을

억누르고 있었다.
절제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오랫동안 부딪쳤던 “벽”은 시인의 또 다른 페르소나였다.

공기적 질료를 능숙하게 받아들이기까지 시인은
자기만의 상처와 아픔을 겪어왔다. 언젠가 떠날 것임을

알기에, 비껴가는 것이 싫고, 잡을 수 없기에 사라지는 것이 아프다.

 
오래된 울음은 점차 강력해진다. 울음은 저 스스로, 부드러움의 동력으로 강한 것을 이겨낸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단단한 것을
갈라지게 한다. 나무가 갈라지고 벽이 갈라지고, 상황이 뒤바뀌고, 하늘과

땅이 뒤바뀐 상황. 나무의 혁명이 일어난다. 그 갈라짐
뒤에 피어난 꽃. 그것이 “벽화”이다. 눈물을

토해낸 뒤 자연스럽게 피어난 무늬들을 “벽화”라 명명한 것이다. 나무가 갈라지는
것이 예술적

승화 작업으로 투사되면서, 나무의 고통을 창작의 고통으로 바라본 것이다. “죽은 나무”는 더 이상 죽은

상태가
아니다. 작품으로 승화되어, 새롭게 부활한다. 오래 묵은 소망이 벽을 뚫는 기적을 일으킨 셈이다.

 
시인은 원래 물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단단함 뒤에 자신의 성질을 감추어왔다. 단단한 것이

가면의 역할을 한 셈이다.
숨어있고 기댈만한 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타자를 향해 사무적인 역할

연기를 위해 벽이 필요했다. 혹은 가면을 써야했다.
단단함이라는 성질은 회피의 도구이자 자기

방어기제였다. 페르소나는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딱딱하고 단단한 것 뒤에서 울음이 그치지
않는다.

분명히 나 속의 나, 나의 나 속의 나가 깊은 곳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을 게다. 뭔지 모를 뜨거운

것이 올라와,
지층을 흔들었을 게다.

 
타자에게 비친 나와 실제로 감지하는 나. 의식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나와 홀로 남겨진 나 사이의

괴리감은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킨다. 자아의 균열이 심할수록 단단한 성질 뒤에 말랑말랑한 눈물이

쉽게 노출된다. 그 뒤에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면서.
시적화자는 단단한 척, 강한 척, 쾌활한 척,

재기발랄한 척, 의연한 척. 그러한 ‘척’들 사이에서 진정한 ‘나’를 찾는 과정을
진행해 왔다. 혼란과

방황 속에서 자아정체성을 찾는 작업은 “오래돼 숨 가쁜 음악”이 되어 어렴풋한 길을 찾는다. 울음을

기쁨으로
전환시키는 중이다.

 

 

  투명한 뚜껑

 

  뭔가가 이미 담겨져 있거나 담길만한 것에는 뚜껑이 있다

  주스 병을 따면 주스가

  콜라병을 따면 어김없이 콜라가 나온다

  밀봉됐던 냄새를 풍기며 탱탱하게 살아있다

 

  땅의 뚜껑은 하늘이며

  하늘의 뚜껑은 땅이다

  우리는 땅과 하늘 사이에 담겨져

  저마다의 생김새와 목소리와 냄새로

  온전히 숙성되기를 바라며 살아간다

  가끔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한 것

  혹시 우리의 생을 너무 무거운 뚜껑으로 유폐한 건 아닌지.

  뻥! 하고 한번쯤은

  머리꼭지와 가슴의 뚜껑을 따버러야 했던 건 아닌지

 

  아직껏 단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나를,

  탄산가스만 부글부글 끓고 있는 나를

  언제 한번 힘 있게 따볼까

  내 안의 뜨거운 너는 속 시원히 솟구칠 수 있을까

  -「뚜껑」전문

 

 
앞의 시에서 발견되었던 “벽”은 “뚜껑”으로 치환된다. 시적화자는 스스로 벽을 찾아낸 것이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해야 한다. 벽을 벽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고정된 벽이 되지만,

벽을 문으로 치환시키는 사람은 벽을 뚫고 일어설 수
있다. 과제를 선택하는 일은 문제해결을 위한

디딤돌을 찾는 것이니까.

 
시인은 “땅의 뚜껑은 하늘이며 / 하늘의 뚜껑은 땅”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여기서 “뚜껑”은 좀 더

특별한 의미로 확장된다.
왜 그럴까?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억압하던 벽이 자신을 키울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울음이 아름다운 벽화를 꽃피우는

과정을 통해 내면적 성숙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탱탱하게” 살아있기 위해서는
“뚜껑”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막혀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뚫고 나가고 싶은 열망의 역설적인 깨달음이다.

 
이 과정에서 시적화자는 수동적인 이끌림에서 능동적인 가능성의 영역으로 이행한다. 하늘이 땅의

뚜껑이 되어주고, 땅이 하늘의
뚜껑이 되어주면서, 우주의 우연과 필연의 이치를 깨닫는다. 뚜껑이

있었기 때문에, 생명이 생명력을 가지고 역경을 뚫고 일어설 수
있었다. 시인이 발견한 뚜껑은 ‘빛나는

뚜껑’이자 ‘통과의례’와 같은 관문과 같다. 더불어 상생과 상극을 자극하는 기폭제이다. 이
관문을

통과하면, 나는 또 다른 ‘나’로 도약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소망한다. “아직껏 단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나를 /
탄산가스만 부글부글 끓고 있는 나를” 살아있게 하고 싶다고.

 
이 과정을 통해 시인의 상상력은 “물”의 성질에서 “공기”의 성질로 이행시킨다. 이와 동시에 시적

공간에 반성적 사유를
끌어들인다. 그동안 “우리의 생”을 “유폐”시킨 건 아닌지, “한번쯤은 / 머리

꼭지와 가슴의 뚜껑을 따버려야 했던 건
아닌지”라고. 이처럼 시인에게 “뚜껑”은 도약하고 싶은 의지

표출이다. 욕망을 분출하고픈 열정의 시어인 것이다. 질적으로 달라진
‘나’는 그 아래에 존재했던 ‘나’를

향해 소리치며 억눌려왔던 자신을 호명해 본다. 뚜껑 아래에서 뜨거워지는 것을 멈추고, 관문을
통과해

나오라고. 자, 이제 솟구칠 준비를 하라고.

   

중심에 스며들어, 찬란하게 박혀

다른 이름으로 살아보고자 몸부림쳐보는 날이 있다

뒷걸음질 쳐 다다른 숲에게

물고기를 낚게 해준 그 강에게

종일 세상을 말리다가 지는 태양에게

 

그러나 건너가 박히고자 하는 것들을 통째 삼키며

물렁해지기를, 숨어 흐를 수 있기를 바라지만

쓸쓸하게도 나는 흠집이 나있거나 부서진 자리로

매번 환원한다

 

되돌아가지 않고 분리되지도 않는 단단한 물

그 무엇으로도 해부되지 않는 고집이

어느 날은 꽝꽝 얼어

세상 모든 것을 철썩, 달라붙게 한다

-「물의 해부학」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 “물”의 속성 중에서도 특이한 영역에 주목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주목한 속성은 분리
불가능한 결합성과 회귀불능의 성질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물”의

유동성에 주목한다. 그러나 시인은 물이 결빙하는 속성에
주목한다. 수소와 산소의 결합성이 “물”이라는

고유한 성질을 간직하게 하는 주요 힘이라는 사실이다. 수소와 산소의 결합은 물의
고유한 특성인

흐름을 가능하게 한다. 시적화자는 그러나 흐름을 막는다.

 
시적화자는 “해부되지 고집”에 매력을 느끼며, 결빙의 시간에 주목한다. 응집력이 강해지는 순간,

“어느 날은 꽝꽝 얼어 / 세상
모든 것을 철썩, 달라붙게 한다” 여기서 물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액체 속에 품고 있던 의외의 속성이 발현될 때, 그 질감은
날카로워진다. 때로는 세상을 얼어붙게

만들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소유하고픈 욕망을 충족시킨다. 해빙이 되기 전까지는 붙박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분리 불가능성이 바깥으로 실현되었을 때, 욕망의 부피는 커지고, 자아의 소유욕 또한

과대해진 것이다.
대상과 물의 강력한 결합! “되돌아가지 않고 분리되지도 않는” 물은 소유 욕망을

표현함과 동시에 시적 대상을 정지시킨다. 내부적인
운동성마저 고착시켜 사라지지 않게 한다.

그렇기에 시적화자가 비껴가는 것들에 슬픈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물의 몽상이 공기적 질료의 상상력으로 이행할 수 있었을까?

 

 

  울음을 가둔 곳에서 소리가 나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제 안 깊숙이 저물어가는 소리는 끊임없이 뒤척이는지

      찬바람에 휩쓸려 시리고 거친 손이지만

      종이 그려진 그림을 가만히 어루만질 때,

 

한순간 뜨겁게 울음을 털어버리는 소리의 유분遺粉

 

한 몸이 다가가 또 한 몸에게 말을 걸 때, 미끄러질 때, 스며들 때,

박제됐던 풍경은 숲속 어딘가로 금세 모습을 감추고

그 빈자리에서 파문처럼 번지는 적요, 몸을 떠는 종

 

종이 그려진 그림을 어루만진다는 것

그리하여 소리가 난다는 것

      -「종鐘이 그려진 그림을 어루만질 때」에서

 

 
그녀의 공기적 질료는 아직, 청명하지 않다. 습기가 묻어있는 허공이다. 울음을 기쁨으로 치환시키기

위해 시적화자는 그림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림 속에 그려진 종鐘을 어루만진다. 어루만지는 일은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손은 이미 상처를 받고
있으며, “찬바람에 휩쓸려 시리고 거친”

상태이다. 그러나 상처와 고난을 통해 치유능력은 어떤 누구보다도 풍부해졌다. 그 손으로
그림을

어루만지니, 그림 속 종鐘이 “몸”을 떤다. 종鐘이 파문을 일으키는 장면에서 시인 역시 “울음을

털어버리는” 치유의 과정이
나타난다. 이 과정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림에서 “소리”를 탄생시킨다.

무無에서 유有를 탄생시키며 동시적 파문이 일어난다.
종이 울릴 때 내면의 울음소리가 더불어 들리며,

동시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한순간 뜨겁게 울음을 털어버리는 소리의 유분遺粉”은 울음을 털어버린 흔적이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액체성의 고집과 결합성에서
놓여나기 시작한다. 놓여남과 놓음. 이 과정을 동시적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허공중에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림 속에서 종이
울리고, 타자의 입술이 말하지

않는 소리까지 귓가에 스며든다.


는 호흡이다. 시인의 호흡은 공기적 질료를 가지고 운율 속으로 파고든다. 속삭이는 숨결로, 때로는

절규하는 외침으로, 혹은
읊조리는 푸념으로, 공기 중에 떠도는 기운을 흡입한다. 시인은 소리의 파장을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감정을 녹여낸다. 떠돌아다니는
소리를 채집하고 침묵도 잡아챈다. 종이 위에서

발음 되자마자 허공중의 소리들은 시어로 피어난다. 시를 쓰는 과정을 알고 있는
시인은 ‘소리’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에 “눈멀고 귀먹은 이야기들이 자르르 쏟아”지고(「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네」), 시를 쓰며 구원을 얻는다.

 
당연히 쏟아지는 말들을 받아 적어야 할 일이다. 억눌려왔던 소리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숨죽여왔겠는가. 봄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며,
해빙된 언어들이 넘쳐날 것이다. 울음의 언어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던 정체불명의 흐느낌이 명확한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내가 왜
힘들었고, 내가 왜 슬펐는지,

문제가 해결될 조짐이 보인 것이다. “눈동자 깊이 숨어 빛나던 말들”(「당신의 話法」)이 공기적
질료

사이에 흘러넘칠 때, 그 말들을 잡아채어 한 사람의 화법으로 완성시키는 일.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시인이 아니고 누구이랴.
‘소리’는 시적화자에게 정체성을 확인하게 해 주는 촉매제이다. 소리의 발견은

해빙의 시간을 선물해 준 것이다.

 

 

  언어의 알, 그 치유의 힘  

 

흐린 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소리가 들린다

한 잎 배처럼 떠있는 커다란 귓속으로 따뜻한 말들이 스며들어 알을 낳는다

더 이상 울 일도, 기다릴 일도 없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매달았던 소원들이 햇빛으로 내려앉는 오늘

괜찮다, 살만하다

여보세요, 잘 계셨죠?

-「하늘, 여보세요」에서

 

놓아주리라

저마다 얼마나 높고 푸르러지는지

저희들끼리 얼마나 한판 퍼지르고 노는지

초대받을 날만 엿보며 기다리리라

-「끈」에서

 

 
시적화자는 공기 중에 떠도는 소리들이 언어의 “알”(「하늘, 여보세요」)을 낳는다고 해석한다. 언어의

알은 먼지처럼
떠돌아다닌다. 알은 귓가에서 귓가로 이동하며, 매일같이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낸다. 이

상상력만으로 우리는 색다른 이미지에 휩싸이게
된다. 그 알을 보호해야 하는 모성애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품에서 기르고 품어줘야 할 대상으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자연히, ‘알’은 온화한 체온을 가지고 있다. 떠돌아다니는 알은 안타깝고 위태롭지 않다. 모성의 보호를

받고 있기에, 이미 치유의 힘을 나눠 줄 준비가 되어있다. 동그란 알은 치유의 물질을 흘려보낸다.

“더
이상 울 일도, 기다릴 일도” 없는 상태에서 “상처 난 무릎과 주름진 이마”에 발라준다. 그녀의

언어는 마술적인 위력을 갖는다.
소원을 들어주는 주문과도 같고, 위안을 주는 햇빛과도 같다. 언젠가는

꽃으로 피어날 씨앗인 셈이다. 그렇기에 언어의 ‘알’은
향기를 몰고 다닌다. 상처를 입히지 않고

쓰다듬고 어루만진다. 아무도 없는 가운데서도 하늘의 안부를 물으며, “괜찮다,
살만하다”고

위로받는다. 때로는 “속삭임”(「슬픔을 나르는 사다리차)」에 두근거리다가 “한 아름의 기쁨을

하강시킬 수” 있기에
참고 기다릴 줄도 안다.

 
시적화자는 이렇게 따스한 기운이 흐르는 가운데, ‘놓음’을 실행한다. “저마다 얼마나 높고

푸르러지는지” 바라볼 여유도 생긴다.
집착은 결빙의 시간을 만들지만, ‘놓음’은 해빙의 시간을 만든다.

해방감이 공기 중에 상승의 맛을 보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상이 가능하다. 놓아줌으로써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시적화자는 어느새, 정적이고 고착된 이미지를 뚫고
나온 상태이다.

언어 역시 자유롭다. 언어의 ‘알’들이 탱탱하게 살아서 춤을 춘다. “내 안의 빙그르르 도는 말言들이”

(「말言이
말馬처럼 달릴 수 있다면」) 자유를 선사받는다. 공기가 맑아지고, 휴식과 즐김이 가능한

언어적 공간이 형성된다. 타자에 의해
수동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탭댄스를 출 무대가

주어진 것이다.

 

 

  말〔言〕은 말〔馬〕을 타고 달린다

 


원을 누볐을 짐승의 휘날리는 전언은 너무나 질겨 자세히 읽어내기가 좀 난해하다 그 짐승의 출생부터를 정점으로 해야 할지 아니면
한가로이 풀을 뜯었을 본능부터 읽어야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따라서 사라진 짐승의 진부한 역사는 덮고 스스로 걸어 나오는 사람을
읽도록 한다 기계가 돌아가는 사이사이 가죽을 바늘로 엮고 무늬를 찍고 맨질맨질 타성의 윤기를 입히던 어느 사내, 짐승의 추억 따윈
새카맣게 묻고 자신의 절룩거리는 발자국을 성큼성큼 주워 담던 사내

 


퉁불퉁한 과거는 지우고 가보지못한 길 위의 욕망, 희망, 절망을 두드리고 잇고 바르던 그. 끊어져 폐쇄됐거나 휘어졌거나 새 길에
의해 버림받았다한들 무슨 상관이랴 억센 손에 쥐어진 길들의 발버둥치는 아우성이 그저 신날 뿐, 그 구두 완성되면 또각 대는 칠백
번째 여자와 결혼하게 될 텐데

 

먼 곳으로부터 흘러온 목이 짧은 짐승과

숨은 사내의 인생을 싱싱하게 발췌해 읽는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구둣가게에서」전문

 

 
이 시는 비상하는 꿈으로 가득 차오른다. 고착되거나 가라앉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게를

덜어내는 일에 집중한다. 놓아주었기에
세상은 자유로운 공기로 가득하다. 기존의 정적인 틀을

벗어던지고 역동적인 공간으로 시의 공간을 확장한다. 시인은 자신의 공기적
질료가 가득한 상상력을

활달하게 펼칠 준비가 되어 있다. “울퉁불퉁한 과거는 지우고 가보지 못한 욕망, 희망, 절망”을 잇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꿈꿀 준비가 되어 있다. 물에서 공기로 점진적 이행을 완벽하게 해낼 준비가

된 것이다.

 
드디어 시적화자는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킨다. 능동적이고 가벼운 주체이다. 바로 “스스로 걸어

나오는 사람”이다. 그는 마치
니체의 초인처럼 마술적 주문을 걸고 예언을 한다. “새 길에 의해

버림받았다한들 무슨 상관이랴” 시적화자가 자기 확신을 얻은
것이다. “내 안에 이렇게 부드러운 겹이

숨어있다니!(「겹, 겹」) “너를 향유하면서 맘껏 뜨거워지겠어. / 그것이 나를 알리는
척도가 아니겠어?”

(여름」)와 같은 발언들을 뿜어낸다. “탱글탱글 입술”의 “부활”을 기다리며 공기적 질료로의 이행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더 이상 젖어들 수 없다”(「젖지 않는 물」)라는 선언으로.

 
삶이란 어떻게 가치 부여를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상승작용을 하기도 하고 추락하기도 한다.

시인은 이미 시든 적이 있고,
추락한 경험도 있다. 그래서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다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경쾌하게 스텝을 밟는다. “억센 손에 쥐어진 길들의
발버둥치는 아우성”조차 신이 난다.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은 시적화자가 정체성을 찾으며 비상하는 순간의 도약을 담은 작품이라

할만하다. 허물을 벗으니, 한 고비 넘겼으니, 눈물이 증발하면서 대기의 알들이 투명한 춤을 춘 작품이다.

 
이향란 시인이여, 더욱 신선하게 춤을 추어라! 몇몇 시들이 가정법 상황으로 멈추어 있고,

아슬아슬하게 의문문으로 질문하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덜어내라! 희망사항이 아니라 희망이 되어

달라. 말처럼 달려라. 더 덜어내고 덜어내며, 가벼워져라! “관망하는
자”(「철새관망타워」)이기에 꿈을

꿀 수 있다. 공기적 질료의 융합 가능성을 믿고, “자신의 절룩거리는 발자국을 성큼성큼” 주워
담아라!

절룩거릴지라도 즐거운 상상을 멈추지 않으면 될 일이다. “날아가는 것들에겐 가벼움이 삶이다 /

그럼에도 끝없이
덜어내려는 날갯짓은 / 그래서 아름답다” 시인 자신이 자신에게 내리는 답을 믿고,

이제 새로운 날갯죽지를 다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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