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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젖지 않는 발끝에 날개를 달아라!
물에 젖지 않는 발끝에 날개를 달아라! ㅡ시집,『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 2011년, 이향란 『지혜사랑』 금은돌(문학평론가)
몇 옥타브의 음계로 표현해 사이를 부딪치며 스타카토로 떠다닐까? 허공은 소리를 몰고 손가락을 이용하여 바람소리를 내고,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를 내고 있을 게다. 때로는 신호를 주고받으며 탭 댄스를 추다가, 엉덩이를 내려 깔고 가라앉을 수도 있다.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어느 사이엔가 가라앉을 것이다. (그래서 두통이 생기는 게 수많은 손들이 그와 나를 잡아당기며, 끌리도록 연결시킬 것이다. (나는 걷는다. 이런 상상에 빠지면서 걸으면 비밀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와 그는 서로를 바라보는 내가 그를 바라보고, 바라본 럭비공이 된다. 행동의 이면을 잽싸게 알아채고, 언젠가 다른
비껴가는 것의 슬픔
비껴가는 것, 그것이 머무는 것보다 더 아프다 -「머무는 것보다 비껴가는 것이 더 아프다」에서
때문이다. 더군다나 비껴가는 느낄 정도로 섬세하다는 얘기이다. 시인의 촉수는 공기적 탁월한 상상력을 보인다. 최소한의 질료를 가졌을 뿐이며,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고. (가스통 바슐라르 ,『공기와 여기서 공기적 질료들이 스쳐 지나가는데, 아픔을 느끼는 이유를 추론해 보자. 오히려 실현시키지 못했던 내면의 욕망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 붙들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고착시키고 싶은 욕망이 강했다는 뜻이 아닐까. 허 있는 그 사다리차를 보면서 슬픔을 온전하고 완벽한 충만감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허공이 남겨 만나는 지점에서 상처를 감지하기 때문이다. 꿈꾸는 자는 그 하늘을 자기 공기적 질료가 육체성을 가지고 만져지지 않기에, 불안하다. 행위는 마음을 다치게 한다. 허공에서 일어나는 원인 모를 마찰은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응어리를 남긴다.
줄곧 발 없는 울음이 온몸으로 기어올라 못으로 종지부를 찍던 벽 그 벽에서 나무의 푸른 계절이 흘러나오고 새의 부리와 나비의 날개 혹한의 바람이 배어나온다 오래돼 숨 가쁜 음악처럼 -「죽은 나무의 벽화」에서
흐르고 있다. 그것은 눈물이다. 아래에서 뜨겁게 흐른다. 벽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을 나왔을 때, “푸른 계절이 흘러나오고 / 새의 부리와 나비의 날개 / 혹한의 바람이 배어나온다” 지층을 뚫고 나올 때라야 슬픔이 멈출 수 있다. 단단한 벽은 눈물을 억누른다. 또한 시인의 꿈과 소망을 억누르고 있었다. 공기적 질료를 능숙하게 받아들이기까지 시인은 알기에, 비껴가는 것이 싫고, 잡을 수 없기에 사라지는 것이 아프다. 밑바닥에서, 단단한 것을 땅이 뒤바뀐 상황. 나무의 혁명이 일어난다. 그 갈라짐 토해낸 뒤 자연스럽게 피어난 무늬들을 “벽화”라 명명한 것이다. 나무가 갈라지는 승화 작업으로 투사되면서, 나무의 고통을 창작의 고통으로 바라본 것이다. “죽은 나무”는 더 이상 죽은 상태가 가면의 역할을 한 셈이다. 연기를 위해 벽이 필요했다. 혹은 가면을 써야했다. 방어기제였다. 페르소나는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딱딱하고 단단한 것 뒤에서 울음이 그치지 분명히 나 속의 나, 나의 나 속의 나가 깊은 곳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을 게다. 뭔지 모를 뜨거운 것이 올라와, 괴리감은 정체성의 혼란을 쉽게 노출된다. 그 뒤에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면서. 재기발랄한 척, 의연한 척. 그러한 ‘척’들 사이에서 진정한 ‘나’를 찾는 과정을 방황 속에서 자아정체성을 찾는 작업은 “오래돼 숨 가쁜 음악”이 되어 어렴풋한 길을 찾는다. 울음을 기쁨으로
투명한 뚜껑
뭔가가 이미 담겨져 있거나 담길만한 것에는 뚜껑이 있다 주스 병을 따면 주스가 콜라병을 따면 어김없이 콜라가 나온다 밀봉됐던 냄새를 풍기며 탱탱하게 살아있다
땅의 뚜껑은 하늘이며 하늘의 뚜껑은 땅이다 우리는 땅과 하늘 사이에 담겨져 저마다의 생김새와 목소리와 냄새로 온전히 숙성되기를 바라며 살아간다 가끔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한 것 혹시 우리의 생을 너무 무거운 뚜껑으로 유폐한 건 아닌지. 뻥! 하고 한번쯤은 머리꼭지와 가슴의 뚜껑을 따버러야 했던 건 아닌지
아직껏 단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나를, 탄산가스만 부글부글 끓고 있는 나를 언제 한번 힘 있게 따볼까 내 안의 뜨거운 너는 속 시원히 솟구칠 수 있을까 -「뚜껑」전문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벽을 문으로 치환시키는 사람은 벽을 뚫고 일어설 수 디딤돌을 찾는 것이니까. 특별한 의미로 확장된다. 억압하던 벽이 자신을 키울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기 과정을 통해 내면적 성숙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탱탱하게” 살아있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막혀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뚫고 나가고 싶은 열망의 역설적인 깨달음이다. 뚜껑이 되어주고, 땅이 하늘의 있었기 때문에, 생명이 생명력을 가지고 역경을 뚫고 일어설 수 뚜껑’이자 ‘통과의례’와 같은 관문과 같다. 더불어 상생과 상극을 자극하는 기폭제이다. 이 통과하면, 나는 또 다른 ‘나’로 도약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소망한다. “아직껏 단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나를 / 공간에 반성적 사유를 꼭지와 가슴의 뚜껑을 따버려야 했던 건 표출이다. 욕망을 분출하고픈 열정의 시어인 것이다. 질적으로 달라진 향해 소리치며 억눌려왔던 자신을 호명해 본다. 뚜껑 아래에서 뜨거워지는 것을 멈추고, 관문을 나오라고. 자, 이제 솟구칠 준비를 하라고. 중심에 스며들어, 찬란하게 박혀 다른 이름으로 살아보고자 몸부림쳐보는 날이 있다 뒷걸음질 쳐 다다른 숲에게 물고기를 낚게 해준 그 강에게 종일 세상을 말리다가 지는 태양에게
그러나 건너가 박히고자 하는 것들을 통째 삼키며 물렁해지기를, 숨어 흐를 수 있기를 바라지만 쓸쓸하게도 나는 흠집이 나있거나 부서진 자리로 매번 환원한다
되돌아가지 않고 분리되지도 않는 단단한 물 그 무엇으로도 해부되지 않는 고집이 어느 날은 꽝꽝 얼어 세상 모든 것을 철썩, 달라붙게 한다 -「물의 해부학」
그녀가 주목한 속성은 분리 유동성에 주목한다. 그러나 시인은 물이 결빙하는 속성에 고유한 성질을 간직하게 하는 주요 힘이라는 사실이다. 수소와 산소의 결합은 물의 흐름을 가능하게 한다. 시적화자는 그러나 흐름을 막는다. “어느 날은 꽝꽝 얼어 / 세상 액체 속에 품고 있던 의외의 속성이 발현될 때, 그 질감은 만들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소유하고픈 욕망을 충족시킨다. 해빙이 되기 전까지는 붙박이가 하기 때문이다. 분리 불가능성이 바깥으로 실현되었을 때, 욕망의 부피는 커지고, 자아의 소유욕 또한 과대해진 것이다. 표현함과 동시에 시적 대상을 정지시킨다. 내부적인 그렇기에 시적화자가 비껴가는 것들에 슬픈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물의 몽상이 공기적 질료의 상상력으로 이행할 수 있었을까?
울음을 가둔 곳에서 소리가 나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제 안 깊숙이 저물어가는 소리는 끊임없이 뒤척이는지 찬바람에 휩쓸려 시리고 거친 손이지만 종이 그려진 그림을 가만히 어루만질 때,
한순간 뜨겁게 울음을 털어버리는 소리의 유분遺粉
한 몸이 다가가 또 한 몸에게 말을 걸 때, 미끄러질 때, 스며들 때, 박제됐던 풍경은 숲속 어딘가로 금세 모습을 감추고 그 빈자리에서 파문처럼 번지는 적요, 몸을 떠는 종
종이 그려진 그림을 어루만진다는 것 그리하여 소리가 난다는 것 -「종鐘이 그려진 그림을 어루만질 때」에서
위해 시적화자는 그림을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손은 이미 상처를 받고 상태이다. 그러나 상처와 고난을 통해 치유능력은 어떤 누구보다도 풍부해졌다. 그 손으로 어루만지니, 그림 속 종鐘이 “몸”을 떤다. 종鐘이 파문을 일으키는 장면에서 시인 역시 “울음을 털어버리는” 치유의 과정이 무無에서 유有를 탄생시키며 동시적 파문이 일어난다. 동시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시인은 액체성의 고집과 결합성에서 진행한다. 그리고 허공중에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림 속에서 종이 않는 소리까지 귓가에 스며든다. 시 절규하는 외침으로, 혹은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감정을 녹여낸다. 떠돌아다니는 발음 되자마자 허공중의 소리들은 시어로 피어난다. 시를 쓰는 과정을 알고 있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에 “눈멀고 귀먹은 이야기들이 자르르 쏟아”지고(「그리고 아무 말도 숨죽여왔겠는가. 봄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며, 보이지 않던 정체불명의 흐느낌이 명확한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내가 왜 문제가 해결될 조짐이 보인 것이다. “눈동자 깊이 숨어 빛나던 말들”(「당신의 話法」)이 공기적 사이에 흘러넘칠 때, 그 말들을 잡아채어 한 사람의 화법으로 완성시키는 일.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시인이 아니고 누구이랴. 해빙의 시간을 선물해 준 것이다.
언어의 알, 그 치유의 힘
흐린 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소리가 들린다 한 잎 배처럼 떠있는 커다란 귓속으로 따뜻한 말들이 스며들어 알을 낳는다 더 이상 울 일도, 기다릴 일도 없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매달았던 소원들이 햇빛으로 내려앉는 오늘 괜찮다, 살만하다 여보세요, 잘 계셨죠? -「하늘, 여보세요」에서
놓아주리라 저마다 얼마나 높고 푸르러지는지 저희들끼리 얼마나 한판 퍼지르고 노는지 초대받을 날만 엿보며 기다리리라 -「끈」에서
알은 먼지처럼 상상력만으로 우리는 색다른 이미지에 휩싸이게 때문이다. 어머니의 품에서 기르고 품어줘야 할 대상으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자연히, ‘알’은 온화한 체온을 가지고 있다. 떠돌아다니는 알은 안타깝고 위태롭지 않다. 모성의 보호를 받고 있기에, 이미 치유의 힘을 나눠 줄 준비가 되어있다. 동그란 알은 치유의 물질을 흘려보낸다. “더 언어는 마술적인 위력을 갖는다. 꽃으로 피어날 씨앗인 셈이다. 그렇기에 언어의 ‘알’은 쓰다듬고 어루만진다. 아무도 없는 가운데서도 하늘의 안부를 물으며, “괜찮다, 위로받는다. 때로는 “속삭임”(「슬픔을 나르는 사다리차)」에 두근거리다가 “한 아름의 기쁨을 하강시킬 수” 있기에 푸르러지는지” 바라볼 여유도 생긴다. 해방감이 공기 중에 상승의 맛을 보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얻을 수 있다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시적화자는 어느새, 정적이고 고착된 이미지를 뚫고 언어 역시 자유롭다. 언어의 ‘알’들이 탱탱하게 살아서 춤을 춘다. “내 안의 빙그르르 도는 말言들이” (「말言이 언어적 공간이 형성된다. 타자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말〔言〕은 말〔馬〕을 타고 달린다
초
울
먼 곳으로부터 흘러온 목이 짧은 짐승과 숨은 사내의 인생을 싱싱하게 발췌해 읽는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구둣가게에서」전문
덜어내는 일에 집중한다. 놓아주었기에 벗어던지고 역동적인 공간으로 시의 공간을 확장한다. 시인은 자신의 공기적 활달하게 펼칠 준비가 되어 있다. “울퉁불퉁한 과거는 지우고 가보지 못한 욕망, 희망, 절망”을 잇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꿈꿀 준비가 되어 있다. 물에서 공기로 점진적 이행을 완벽하게 해낼 준비가 된 것이다. 나오는 사람”이다. 그는 마치 버림받았다한들 무슨 상관이랴” 시적화자가 자기 확신을 얻은 숨어있다니!(「겹, 겹」) “너를 향유하면서 맘껏 뜨거워지겠어. / 그것이 나를 알리는 (여름」)와 같은 발언들을 뿜어낸다. “탱글탱글 입술”의 “부활”을 기다리며 공기적 질료로의 이행을 충실히 시인은 이미 시든 적이 있고, 바라보며, 경쾌하게 스텝을 밟는다. “억센 손에 쥐어진 길들의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은 시적화자가 정체성을 찾으며 비상하는 순간의 도약을 담은 작품이라 할만하다. 허물을 벗으니, 한 고비 넘겼으니, 눈물이 증발하면서 대기의 알들이 투명한 춤을 춘 작품이다. 아슬아슬하게 의문문으로 질문하고 달라. 말처럼 달려라. 더 덜어내고 덜어내며, 가벼워져라! “관망하는 꿀 수 있다. 공기적 질료의 융합 가능성을 믿고, “자신의 절룩거리는 발자국을 성큼성큼” 주워 절룩거릴지라도 즐거운 상상을 멈추지 않으면 될 일이다. “날아가는 것들에겐 가벼움이 삶이다 / 그럼에도 끝없이 이제 새로운 날갯죽지를 다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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