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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욤나무/봄아, 나를 불질러라

Author
mimi
Date
2011-04-16 22:50
Views
9765

 

신단향 시집 해설 / 시인이 하는 시평


「고욤나무」

 

 

                         아, 나를 질러라


                                                -마경덕 시인-
                            


 

   그녀를 두고 봄이
갔다. 그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봄은 또 그렇게 가버렸다. 봄은 곳곳에 많은 일들을 저질러놓았지만 그녀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기다릴 사람이 없는 봄, 그리운 사람이 오지 않는, 봄은 봄이 아니다. 해마다 봄은 그녀를 비껴간다. 기실
봄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아 그녀는 참혹하다. '봄아 나를 불질러라', 어디 한번 나를 태워라, 그녀는 외치지만 봄은 잔인하다.
꽃핀 적이 언제인가. 아니, 꽃이었던 때가 언제인가?  

 늘 그날이어서, 또한 예전의 그날이 아니어서 그녀는 슬프다. 영산홍이 붉은 치맛단을 올렸다 내려도 산 듯 죽은 듯, 꽃피지 않았다. 남편을 잃고 어느 날 어머니마저 사고로 떠난 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신단향에게 詩는
구원이다. 시의 힘으로 그녀는 여러 해를 살아내었다. 시인은 선물로 받은 꽃 한 송이에도 마냥 행복해하던 평범한 여자였다. 시를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었다. 남편 사별 후 시를 만나 시인은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시를 쓰며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시를 통해 떠난 사람을 만나고 보듬는다. 시를 쓸 때만 그녀는 살아 숨을 쉰다.

 

 「고욤나무」는 시인에게
첫 시집이다. 과장되지 않은 잔잔한 시편들이 마음을 쥐어짠다. 울컥, 가슴을 치받고 숨을 조이기도 한다. 마치 돌밭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린 듯, 통증이 온다. 시인은 그저 아무렇지도 않다는데, 웃고 이야기하는데, 왠지 철퍼덕 주저앉아 한바탕 울고 싶다.
왜일까? 시집 한 권이 피로 쓴 고백서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잃고 밤을 지샌 불면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읽다말고 몇
번이나 눈물을 찍어내었다.

 

   오이도 선창가 횟집에서
   빈 잔에 노을을 담아 마신다
   떠나고 없는 이의 유언이
   석쇠 위에 지글거린다
   젓가락으로 조개를 집어 올리는 동안
   어느덧 별처럼 네온사인도 켜지고
   쓴 소주 한잔이 가슴을 저민다
   너에게 취해 정지된 사랑을
   노을빛으로 달래보지만
   너는 왜 멀어져야만 하는지
   저 물결인들 말할 수 있을까
   장막처럼 펼쳐진 저녁 하늘에
   떠오르는 얼굴 하나
   이렇게, 너는 멀기만 한데
   오이도 선창가 횟집 통유리창은
   노을만 바라보라 한다
   얼굴 하나 점점 멀어져가고
   나는 취한 두 팔을 펼쳐본다
   유언이
   손등으로 뚝 눈물처럼 떨어진다.


   -「오이도에서」전문
   
시인은 오이도에 가서 조개를 구우며 노을에 취해본다. 보고 싶은 사람은 보이지 않고 선창가 횟집 통유리창은 노을만 바라보라
한다. 오이도는 시인이 사는 안산 집과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맘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다. 한번쯤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노을을 보러 갔을 것이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웃고 떠들던, 그때 그 노을도 시인의 눈자위만큼 붉었을까? 왜 하필
시인은 조개를 구우며 마지막 유언을 생각했을까?

 
어느덧 노을이 진 바다 위로 네온사인이 쏟아지는데 자리를 털고 일어서지 못한다. 손등으로 떨어지는 눈물 속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있다. 술에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들이 오이도에 있다'. 하늘은 캄캄한 장막인데 그녀에게는 '별마저 뜨지 않는
밤'이 있다.

 

  그를 품고
  산 듯 죽은 듯
 
  오래 앓았다

 

  수없이
  봄이 오고 가고

 

  영산홍이
  붉은 치맛단을 올렸다 내려도

 

  산 듯 죽은 듯
  나는 꽃피지 않고


   -「아네모네 사랑」전문

 

   아네모네의 꽃말은
'사랑의 괴로움'이다.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만이 사랑의 쓴맛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이루지 못한 사랑에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고백한다. 오로지 한 사람을 품고 살았기 때문이다. 떠나버린 사람을 도저히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산홍이 피고
지고 계절은 수없이 오갔지만 꽃 한 번 피우지 못한 시인은 그저 바라만 보는 아네모네 사랑에 피가 말라간다. 몇 줄의 짧은 시가
이토록 간절하다. 

 

  사람들은 그를 버리라 했다
  그리운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이미 그에게 길들여져
  곁에 없으면 불안하다

 

  정든 사람들
  하나 둘 나를 떠나고
  떨쳐지지 않는 깊은 정이
  가슴에 차 오를 때
  구름처럼 멀거니
  흩어지는 연기

 

  시든 낙엽을 태우듯
  담배로 나를 태웠다
 
  사람들은 그를 잊으라 했다


  -「너에게 중독되다」전문

 

    시인의 반경 안에
그가 찾는 대상이 들어있다. 잠자거나 밥을 먹거나 말을 할 때도 '초점은 하나에 집중' 되어 있다. 이미 시인은 한 사람에게
중독이 되어버렸다. 슬픔에 길들여지고 외로움에 익숙해 버렸다. 그럴 때마다 곁에 담배가 있었다. 허무한 연기는 그녀를 휘돌아
나온다. 시든 낙엽을 태우듯 시인은 불을 켜서 화장을 하듯 몸을 태운다. 그녀는 슬픔이라는 독성에 조금씩 목숨을 태우며 살아간다.
담배는 한시도 그녀를 놓지 않는다. 그러나 '담배보다 더 독한 건 가버린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를 그만 잊으라고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잊기엔 너무 늦었다. 상처가 너무 깊다. 그녀를 다스리는 건 몸 안의 사람이다. 몸에서 빠지지 않는 사람이다. 오직
시를 쓰는 것만이 그를 만나는 길이다.

 

  겨울이 간단다


  어느 날 가슴에
  눈뭉치를 슬쩍 내려놓더니

 

  나목을 남겨두고
  겨울이 간단다

 

  고드름 끝에서 떨어지던
  시린 물소리에 가슴이 파였는데

 

  빈 가지에 새봄을 숨겨두고,

 

  그대가 간단다
  설익은 계절 잔설을 남겨두고

 

  나 혼자 어찌 봄을 맞으라는지


 -「봄」전문

 

   봄은 '희망의
상징'이다. 그러나 시인에게 '봄은 절망'이다. 겨울이 간다는 것은 봄이 온다는 것인데 '꽃 피우지 못하는 봄은 혹독한
겨울'보다도 더 가혹한 것이다. 시인은 '고드름 녹는 물소리에도 가슴이 파였다'고 한다.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마저 송곳이 되어
가슴을 찔러댔는데 꽃이 피고 진다면 어떠할까? 가슴에 눈뭉치를 얹어두고 빈 가지에 새 봄을 숨겨두고 혼자 봄을 맞으라며 겨울은
간다. 여기서 무심한 겨울은 떨치고 가는 사람이다. 혼자 남겨진 시인에게 '봄은 두려운 미래'이기도 하다. 시인에게는 우물보다
깊은 슬픔이 있다. 시인은 잠잠히 고여 있는 그 슬픔을 덤덤하게 보여줌으로 슬픔이 더 확장된다. 스치는 바람에도 반응하는 여리고
예민한 슬픔이 행간마다 둥근 지문을 그리며 번져간다. 

 

  어릴 적, 플라타너스 나뭇잎 주워
  비가 오면 내 머리를 덮었다

 

  여름 플라타너스  
  비를 맞아, 푸르게 멍들어 있다


  내 심장을 통해 지나간 실핏줄
  나뭇잎의 실핏줄도 나를 닮아 있다

 

  길가 플라타너스
  가지 끝에 하늘이 걸렸다 


  빈가지 힘껏
  허공을 끌어안은 채 서있다

 

  지금은 나뭇잎을 주우면 가슴만 덮는다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전문

 

   플라타너스는 잎이
넓은 만큼 그늘도 크다. 시인은 길에서 비를 만나면 그 널따란 잎으로 머리를 덮고 비를 피했을 것이다. 어릴 적, 그 이파리
하나로 비를 피할 수 있던 때가 있었다. 빈 가지가 힘껏 허공을 끌어안듯 이제 시인이 껴안을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다. 심장을
통해 지나간 사람은 실핏줄처럼 남아있다. 플라타너스도 비에 두드려 맞아 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 청청한 푸른 기운도 시인에게
상처로 보이는 것이다.

 이제는 비가 오면 먼저 가슴을 덮는다. 뻥 뚫린 가슴으로 빗물이 들이쳐 가슴을 먼저 덮는 것이다. 질긴 추억의 힘으로 시인은 다시 살아간다. 힘겨운 추억에 눌려 죽은 듯 살아간다.


  벽에 걸린 마른 꽃
  벽이 묻는다
 
  너도 꽃이었니?
  꽃은 고개를 숙인다

 

  향기가 있었니?
  꽃이 마른 눈물을 흘린다

 

  너도 벌 나비 날던 꽃이니?
  꽃은 말이 없다

 

  낡은 벽과 마른 꽃
  그렇게 서로 바래가고 있다

 

  사랑이 식어가고 있다 


  -「마른 꽃」전문

 

   속절없이 말라 가는
꽃이 있다. 먼지만 부옇게 뒤집어쓰고 버석버석 말라버린 꽃이 있다. 꽃이 놓인 곳은 '꽃병이 아닌 벽'이다. 오랫동안 벽에 걸린
마른 꽃은 스치기만 해도 부스스 꽃잎이 떨어져 내린다. 꽃이 의지하고 있는 벽은 '빛이 바랜 낡은 벽'이다.

 시
인도 한때 꽃일 때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었을 때 향기도 빛깔도 그대로인 꽃이었다. 짧고 허무하게 꽃다운 시절은
갔다. 누구보다 꽃이길 바라는 시인에게 덧없이 흘러버린 시간이 있었다. 벽처럼 기대던 사람은 사라지고 그렇게 갈망하던 사랑도
쓰라린 애증도 이제는 마른 꽃으로 벽에 걸려있다. 시인은 자신에게 되묻는다. 너도 꽃이었니? 향기가 있었니?

 마른 꽃과 낡은 벽은 시인의 내면을 잘 보여준다. 신단향 시인은 사랑이 잊혀지길 바라지만 어쩌면 잊혀지는 사랑을 더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장미가 시들면
   더 초라하듯
   화려하게 피었다 진 사랑은
   얼룩이 진다

 

   늘 
   깊이 울고 있는 사람은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우는 법조차 잊은 것이다


   -「마른 눈물」전문

 

    소리내어 우는
사람은 눈물이 마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고 또 울다보면 눈물마저도 마를 때가 있다. 우는 일 조차 시들해져서 눈물조차 시들해지는
것이다. 삶에 지쳐 슬픔도 지쳐 우는 법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울지 않는다. 한번도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호탕하게 웃고 즐겁게 노래하고 크게 말한다. 목소리가 높아 아무도 시인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다. 그녀는 깊이 울고 있으면서 크게
웃는다. 슬픔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슬픔의 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이다. 스치기만 해도 바스러지는 마른 꽃처럼, 그녀가
위태롭다.

 

   어둔 방에

 

   우두커니 앉아

 

   그 멍에까지도

 

   사랑할 수밖에 없던

 

   내 사랑을

 

   나는 사랑한다 


   -「사랑」전문

 

    시인에게 사랑이란
무엇일까? 어둔 방에 홀로 앉아 눈물짓는 시인은 사랑의 멍에마저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한 사람의 굴레에서 한 발짝도
걸어나갈 수 없는 사랑이 끔찍하다. 사랑은 집요하다. 이것은 신단향 시인만의 사랑법이다.

 

   낯선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남자가 웃었다
   난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이맘때였나. 저 남자처럼 그도 나에게 웃음을 준 것이. 파도는 수 없이 밀려왔다 밀려가고 산부엉이가 산비탈 으슥한 곳에서 울었다 모래 위에 발자국을 꾹꾹 찍으며 그가 지나갔다


  -「모래성」부분

 

   낯선 사내가 말을
걸고 웃어주어도 그는 반응이 없다. 조금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온통 그녀를 '점령해버린' 사람이 있어 그는 요지부동이다. 그
남자의 웃음에서 시인은 오래 전 그의 웃음을 보았다. 산부엉이가 산비탈 으슥한 곳에서 울었고 모래 위에 발자국을 꾹꾹 찍으며
그가 지나갔다. 생각해보면 모래 위에 발자국만 남기고 간 사랑은 금세 허물어질 모래성이었다.

  마약만큼 지독한 사랑의 근원을 더듬어 가면 시인의 뒤편에 아낌없이 사랑을 부어준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늘 울음을 참고 계신다
   그러다 비가 오면 부뚜막 앞에서
   끝내 우신다
   군에 간 아들, 도시로 유학 보낸 딸
   비 맞을라
   밥은 먹었을까
   무쇠 밥솥뚜껑 열다 말고
   눈물 떨어뜨린다

 

   ---- 중략 ------

 

   늘 비바람 막아주시더니
   이제 바람에 찢어진 
   우산이 되었다

 
   -「찢어진 우산」부분
     
어머니는 '비바람을 막아주던 우산'이었다. 자식 걱정에 밥을 푸다말고 눈물을 흘렸던 정이 넘치는 여인이었다. 시인이 의지하고
사랑하는 어머니도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사고로 세상을 뜨셨다. 시인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찢어진 우산 사이로 빗줄기는
쏟아지고 시인은 이제 비를 막을 우산이 없다.

 슬픔의 진원지를 따라가 보면 일찍 남편을 잃은 할머니와 어머니가 시인의 뒤편에 서있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몸 흔들며
    자장가를 부르네요
    어머니
    어머니도 여자였던 걸 몰랐어요.
    나 그때 그걸 알았다면
    어머니를 좀 더 사랑하였을 것을 


    -「어머니, 다시 사랑하게 되면 1」부분

 

   행복은 그런
것이다. 떠나고 없는 빈자리를 보면서 무심히 나누던 '사소한 말 한마디가 행복'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시인도 어머니가 여자인 줄을
몰랐다고 눈물짓는다. 여자보다는 엄마로만 살았던 어머니, 시인은 어머니를 잃고 좀 더 사랑하지 못한 지난날을 후회한다.

 

    어머니 옛날에
    돼지고기 씀벅 썰어 화롯불 위에 들들 볶아
    후후 불며 먹던 두루치기와 막걸리 생각나지 않으세요
    모처럼의 귀향에 밤늦어 출출한 시간 부엌 불 밝혀
    대충 먹자던 손맛, 그윽이 바라보던 흐뭇한 눈길
    어머니 오늘밤은 푸짐하게 취해 보세요.
    18번 '울어라 열풍아'도 불러보세요
    오늘밤 쌓였던 회포 후련히 풀고
    손 한번 잡아요. 축 늘어진
    어머니 젖가슴도 만질래요
    어머니, 입고 가신 소복 벗어버리고
    대청마루에 앉아 계세요.


    -「어머니 만나러 가다」부분

 

    어머니의 첫
기일을 지내러 가는 길이다. 어머니의 늘어진 젖가슴을 만지고 싶다는 시인은 중년의 나이에도 어머니 앞에서는 응석을 부리는
어린애다. 입고 가신 소복을 벗어버리고 대청마루에 앉아 계시라는 당부에 그만 목이 메인다. 그동안 취하고 싶은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여자의 몸으로 자식을 키우기란 쉽지 않은 일,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날에도 맘놓고 취할 수 있었던가?
그러나 어머니 앞에서만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맘껏 취해보고 싶다고 한다. 여자가 아닌, 두 아이의 어머니로 살아낸 시간이
그녀에게는 더 많았을 것이다. 어머니 또한 그러셨으니 이제 잔이 철철 넘치도록 술 한잔을 올리고 싶은 것이다.

 

    왜 하필 길가에
    측은히 서 있는지 묻고 싶었다
    여름 한낮을 서성이는 개망초

 

    ---- 중략------

 

    보고 싶어요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차창에 어리는 얼굴이라도
    꼭 한번 
    눈 속에 가득 담고픈 사람이 있어요

    한들거리며
    흰 손수건으로 눈물 꼭꼭 찍으며 


    -「개망초꽃」부분

 

  시인은 길가에 핀
풀꽃마저 그저 스치지 못한다. 눈길조차 받지 못한 개망초가 한들거리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모습을 보고 만 것이다. 풀꽃의
마음까지 읽어낸 시인은 예민한 귀를 가진 사람이다. 한밤 장롱의 이야기도 TV의 이야기도 시인의 귀에 포착된다. 가구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으며 밤새워 누군가에게 속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끙, 입이 무거운 장롱이 입을 뗀다
   그 옆의 TV도 지지직 소리를 낸다
   대화를 엿들으려
   내 침대도 들썩거린다

 

   아무도 오지 않는
   적적한 밤
   가구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나도 누구에겐가
   밤새워 이야기하고 싶다

 

   누가 들을까 맘 졸이며
   소곤소곤
   나도 누구에겐가
   -「이야기를 엿듣다」전문 

 

   시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줄 사람은 없다. 전화로 친정어머니에게 늘어놓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할 수가 없다. 누가 들을까 맘 졸이며 소곤소곤
귓속말이라도 하고 싶다. 쉿 비밀이야, 간지럼먹이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킥킥거리고 싶어하는 시인을 보며 그녀가 혼자 보낸 불면의
밤들을 생각한다. '춥고 외로워 외투깃처럼 너를 세우고 싶었던' 밤들…, 그녀의 불면 속으로 한발 들어가 본다.

 

    고욤나무 그림자가
    마당을 기어다닌다

 

    건너 초가지붕 위
    새치름한 별 하나
    고욤나무를 보며 웃고

 

    가지 끝 반달
    달빛이 서늘하다

 

    어느새 고욤나무
    머리에 별을 꽂고
    벙긋 웃고 있다

 

    고욤나무 그림자 꼭대기에서
    고욤 하나를 줍는다

 

    혼자 먹는
    고욤이 떫다
    -「고욤나무」전문

 

    '고욤나무가
마당을 기어'다니는 밤이다. 식물도 사람과 같이 밤에는 잠을 잔다고 하는데 고욤나무는 왜 잠들지 못했을까? 시인은 고욤나무를 통해
'잠들지 못한 숱한 밤'을 보여준다. 달빛 서늘한 고욤나무 가지 끝에 반달이 걸려있다. 반달은 말 그대로 반쪽이다. 반달은
반쪽인 사랑을 암시한다. 감보다 작고 달고 떫기도 한 고욤 역시 감이 되지 못한 반쪽 감이다. 불면도 완성되지 못한 하루의
반쪽이다. 모두 불완전한 것들이다.

 시인은 잠들지
못해 마당을 서성이다가 '고욤나무 그림자 꼭대기'에서 고욤 하나를 줍는다. 왜 꼭대기인가? 여기서 '꼭대기'라는 높이가 시선을
끈다. 꼭대기는 나무의 '가장 높은 곳', 손이 닿지 않는 곳이다. 시인이 찾는 사랑도 늘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있다.
그리움은 위험수위를 지나 꼭대기까지 치달았다. 그림자 역시 만질 수 없는 허상이다.
실체가 아닌 그림자는 두 개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림자의 검은 빛은 죽음, 사별한 남편을 암시한다.  또 하나는 남편의 그림자로 살던 화자, 즉 시인이다.

  뜨겁던 사랑도 달빛처럼 서늘하다. 고욤나무는 머리에 별을 꽂고 벙긋 웃는데 깊은 밤, 혼자 먹는 고욤은 떫기만 하다. 쓸쓸한 풍경 한 장이 신단향의 시들을 압축해 보여주고 있다.

 

   신단향의 시는
과장된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 혼잣말처럼 덤덤히 말한다. 펄펄 끓어도 김이 나지 않는다. 안으로 삼키는 그의 시들은 안타깝고
애처롭다. 연민을 느끼게 한다. 만지면 따뜻하고 서늘한 시들은 반쪽을 채우지 못한 시인의 갈증과 오래된 슬픔이 축축하게 말라있다.
시 또한 구원이면서 고통이듯. 이율배반적이다.

 

    시인은 낮과 밤을
바꿔가며 살고 있다. 남들이 잠자는 시간에 연탄불을 피우고 고기를 썰고 굽다가 아침에 퇴근을 한다. 생업에 밀려 시를 쓰지 못한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말한다. 이 시집을 묶어 세상으로 내보낸 뒤 어두운 곳에서 일어나 빛이 되고 싶다고 한다.

 

   그대 해인 듯
   나 오래 바라보았다
   일편단심 바라보다 
   이제 고개가 꺾였다

 

   이제 네 안부를 묻지 않겠다
   안녕,
   네게 안녕하냐고 묻지 않겠다
   네 안부를 묻지 않겠다
   -「소망」전문

 

    이제 '안녕'을 고하고 싶단다. 안부를 묻지 않겠단다. 가족을 위해 헌신한 한 세상, 이제 나일 수 있게, 나답게 살고자 하는 시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음지까지도 사랑하여 후회할지라도, 그 후회마저 후회할지라도 한 세상 뜨겁게 살고 싶다는 신단향 시인, 오래된 불면도 줄기찬
외로움도 모두 시의 거름으로 쓰이기를 바란다. 첫 나무인 '고욤나무' 가지가 휘도록 달디단 시의 고욤이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시집  <문학의전당> 마음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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