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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격정과 섬세한 서정의 결속
치열한 격정과 섬세한 서정의 결속 ㅡ시집,『내 남자의 사랑법法』 2011년, 이미란 『황금알』
-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이미란論
1. ‘자기 표현’이 꼭 내면 토로에 발원하면서도 그것이 현실이나 타자를 향해 힘껏 나아갔다가 다시 밟는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러한 서정시의 경로를 두고 우리는 주체와 타자 간의 결속 욕망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시적 욕망은 결핍과 유예를 숙명적으로 가지는 미실현(未實現)의 형식일 것이다. ‘시적인 것’의 실질을 완성하게 된다. 이미란 시집은, 이러한 보여주는 선명한 범례(範例)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할 것이다. 이미란 시인은 1997년에 등단하여 첫 시집 『준비된 말도 없이 나는 떠났다』(시와시학사, 1999)를 상재한 바 있고, 이번에 12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내 남자의 사랑법法』(황 그녀는 이번 시집에서 “한 번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것들의 이름을 부르며”(「시인의 말」) 살아온 생애를 갈무리하고, 자신을 구성해왔던 이름에 대한 상상적 열망을 통해 자신의 존재론적 ‘사랑법法’ 구현하면서, 이제는 부재하는 그 이름들을 불러보는 사후적(事後的) 과정이 바로 자신의 시작(詩作) 과정임을 선연하게 보여준다. 통증과 그리움에서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적되어야 한다. 그녀 흘러나오는 구체적인 물질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조감(鳥瞰)할 수 있는 지형을 모형적으로 구축하면서, 개념적 일반화로의 환원을 한사코 시편의 구체적 심미성에 접근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2. 직접 부르는 ‘당신’에 유예의 반복 속에서 시인의 존재론이 구현되고 있음을 감각으로 불러보는 ‘당신’의 형상에 다가가보자.
풍선의 이빨이 몇 개인지 아세요? 헬륨가스에 부풀은 혓바닥을 보셨나요?
대학로의 소극장에서 당신을 만나기로 한 날 오후 3시의 마로니에 공원에 앉아 구름이 씹다버린 햄버거의 속살을 오후 4시의 벤치에게 내주며 오후 5시의 소나기가 후렴을 부르는 가로수 울타리의 공연장을 돌아 권태의 양탄자가 푹신푹신 깔려있는 지하계단을 내려갔지요
늦게 도착한 휴대폰 속 당신의 변명을 진동으로 바꾸고 불 꺼진 무대 위의 고도를, 오지 않는 당신이라는 고도를, 처음부터 기다림은 없었다고 당당히 독백하는 고도를 흐린 오후의 그림자를 따라온 벤치에게 내주며 이빨이 모두 달아난 풍선의 틀니를 들여다보았지요
무대 위에 함몰된 천정을 뚫고 도착한 사라진 약속의 당신을 기둥과 벽 사이에 던져놓고 고도라는 인생의 귀인과 삐에로를 기다렸지요
거기, 은발의 머리칼을 날리던 오후 6시가 절대자의 중절모를 흔들며 짠, 하고 등장하던
주름진 풍선의 세월을 뚫고 날아간 고도라는 당신 헬륨가스를 삼켜버린 혓바닥이 몇 개인지 아세요? ― 「당신이라는 고도」 전문
않는 수 없다. 화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당신’은 화자로 하여금 내려와 무대를 바라보게 만드는 ‘텅 빈’ 존재이다. 오랜 기다림을 지나 변명을 뒤로 한 채, 화자는 불 꺼진 무대 위에서 ‘당신이라는 고도’를 새삼 떠올린다. 도 하다. 그렇게 거듭 “고도라는 당신”을, 그 미실현의 대상일 뿐인 ‘당신이라는 ‘고도’는 점점 외연을 넓혀 오래 머물길 원했던 ‘고도(古都)’로, 너무 외로운 아득한 ‘고도(高度)’로 의미론적 확장을 거듭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당신’이야말로 “내 청춘의 뒷모습이
개
연병장을 울리는 병사들의 힘찬 구령 소리가 지프차에 올라앉은 검은 선글라스 속으로 달려든다 나도 그들을 따라 차렷! 경례! 힘차게 외치며 떠나버린 유년의 해 저문 푸른 들판 위를 달려간다 ― 「푸른 경례 1」 중에서 화한다. 그야말로 폐기 이미지들로 대체되고 나열된다. 가령 ‘당신’은 발자국’으로 나열되다가, 낡아 사라진 왕조의 후예가 사는 곳을 사라져버리고 멀어져가기도 한다. 시편 제목 ‘푸른 경례’처럼, 화자는 연병장의 힘찬 구령 소리와 함께 “떠나버린 유년의 해 저문 푸른 들판” 위를 달려가면서 사라지고 멀어져간 그 무엇을 그리워한다. 그 그리움의 이미지로 동원된 “몰락한 왕조의 후예”나 “옛 애인의 볼우물”은 모두 강렬하게 암시한다. 지나가고, 사라지고, 몰락하고, 멀어져간 옛것의 이미지가 바로 세목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라지는”(「담벼락」) 야속한 있는 숙명적 공생(共生) 관계의 존재이기도 하다. 어떤 존재이다. 이때 시인의 시적 욕망은 ‘당신’과의 만남을 유예함으로써 “소풍처럼 왔다가 사라져간 바람처럼 한 줄기 문장으로 남겨지기”(「야사록夜事錄」) 싫어하는 상상적 불멸의 욕망이 아름다운 존재론적 전회(轉回)를 꿈꾸게끔 하고 있는 것이다.
3. 입구에 다다랐다. 이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현저하게 이월해 나아간다. 이때 절망케도 하는, 가열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오롯한 에너지를 통해 ‘사랑법法’을 깊이 한번 들여다보자. 돌아누운 그의 등줄기 사이로 마른바람이 분다 그 바람벽에 살을 묻고 울어본 적이 있었던가? 온전한 그림자의 알몸을 그의 등에 비비며 축축한 암술로 돋아나는 회한을 가닥가닥 엮어서 그의 등에 암각 된 성난 슬픔의 뿌리를 토닥이다가 잃어버린 모성의 숲 내 비린 젖무덤 사이에 이 세상 가장 편안한 숨을 내려놓게 해주었던가?
미안한 당신, 이라고 불러본다
내 남자의 등에 접혀진 얼룩무늬의 날개를 본다 나달나달하게 삭은 깊은 뒤란의 날개 속엔 오랜 세월의 먼지 속에서 골라낸 성근 햇빛과 달의 골수로 길러낸 사향노루의 주머니와 첩첩한 소금창고 속 항아리 밑에 묻어둔 그만의 황홀한 비문이 숨어있을 것이다 그 맨홀 속 같은 그리움의 뚜껑을 열고 들어가 별빛을 조명삼아 뒹굴어본 적이 있었던가?
미안했고 미안했던 당신, 이라고 불러본다
밤의 창문이 가로등 불빛을 포개며 돌아눕는다 저만큼 밀려난 등과 젖가슴의 간격이 휑하다 그의 등을 타고 온 마른바람의 숲이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구석기시대처럼 멀고 먼 야생의 무덤 같은 동굴의 입구를 지키고 서있다 거기 한 사나이의 꿈이 굽은 세월로 박혀있다 전생의 못다 푼 밀렵의 화살을 당기며 동굴 속 벽에 사향노루의 들판을 새겨 놓는다 거꾸로 도는 시계를 따라 해바라기처럼 퍼져가는
내 남자의 등에 매달린 빛나는 암각의 사랑! ― 「내 남자의 사랑법法」 전문
마른 바람만 부는 토닥이다가, ‘내 남자’로 하여금 ‘모성의 숲’에 화자는 그런 ‘내 남자’를 “미안했고 미안했던 당신”이라고 명명한다. ‘내 얼룩무늬의 날개가 있고 그 날개 안에는 “황홀한 비문”이 숨겨져 있다. 또한 ‘내 남자’의 등에는 “한 비문(秘文)을 통해 “그리움의 발견한 “내 남자의 등에 매달린 빛나는 암각의 사랑”은 이미란 선명하게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비문처럼, ‘암각(巖刻)’처럼, 깊이 각인된 ‘사랑’이야말로 등’에서 빛나는 순간과 함께 찾아오는 가열한 시인의 정서적 에너지인 것이다. 다음 시편에서도 그런 ‘사랑’의 에너지가 나는 추억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늘도 인연이라는 완행열차를 타고 당신이라는 간이역을 찾아간다 시간이 지나가는 길목엔 처음 같은 두려운 풍경이 기다린다 어느 날은 대낮의 플랫폼에서 아직은 낯선 당신 얼굴을 떠올리기도 하고 어느 날은 어두운 대합실에서 연착을 알리는 당신의 깃발을 찾기도 한다 당신은 나를 가벼운 눈길로 배웅하라 뜨거운 악수는 생략되어도 좋다 진한 이별의 말은 나누지 않아도 좋다 당신을 만나기 위한 많은 날들과 당신을 만나고 돌아선 많은 날들을 천천히 기억하며 남은 생을 살아가리니 당신의 이름이 과거로 명명됨을 슬퍼하지 마라 또 다른 간이역을 찾아 떠나는 나는 당신의 눈빛에 이 말 한 마디를 남겨둔다 나는 추억을 부정하지 않는다 추억이 된 당신이 못내 서러울 뿐이다 ― 「당신이라는 간이역」 전문
공간 은유를 빌려 나타나는데, 가령 화자는 ‘대낮의 연착하는 당신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화자는 뜨거운 악수나 돌아선 ‘당신’을 향해, “당신을 만나기 위한 많은 날들과/당신을 만나고 돌아선 많은 날들”에 기억이 자신의 생의 밑거름이 될 것임을 고백하게 된다. 이제는 사라져 과거가 되어버린 “당신의 이름” 이 “또 다른 간이역을 추억을 매개로 하여 ‘당신’과의 각별한 인연을 순간성이 바로 ‘간이역’이라는 적실한 은유를 낳은 것이다. 깊을수록 선명한 이별의 숨이 막혀 눈을 뜨게 해”(「멍」)주는 것임을 ‘문신’처럼 선명하게 각인된 ‘멍’의 푸른 빛깔이야말로, 이미란 들여다보게끔 해주는 구체적 물질성이라 할 것이다.
4. 맑은 강물을 퍼 마시며 시린 사랑하게 되었다.”(「내 몸 안에 세상의 모든 길이 숨어 ‘몸’의 상상력은, 이번 시집을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이미란 시학의 한 발원하고 ‘몸’으로 수습하는 격정의 시학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노래하는 시인이다. 이때 ‘몸’은 구성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물리적 실재이자, 모든 인식과 실천이 생성되는 최초의 지점이다. 일찍이 니체(F. 이성이나 이념 지향의 인식론을 가장 구체적인 원형적 실재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지워진 역사를 ‘몸’이 주체와 세계를 잇는 가장 구체적인 매개체라는 인식론적 전회의 흔적을 담고 있는 시인은 “정글 숲의 비정한 한기를 품은 짐승의 눈빛처럼”(「한편, M은 새벽 3시에 총알택시를 타고 도망을 표현하고 있다. 노란 프리지아 꽃병이 길가에 쓰러져 있다 목이 좁아 슬픈 그림 속 물뿌리개가 알약 같은 햇빛을 보도블록 위로 쏟아낸다 바짓가랑이를 끌며 간 소멸의 구두 뒤축이다 씨방에 갇힌 허리를 두드리는 깊은 탄성과 성근 오후의 촉수가 게워놓은 위액을 따라가면 토사물처럼 번지는 뿌리의 그늘을 만날 것만 같다
비닐하우스에 갇혀 있던 오랜 풍문의 나날들 내.숨.통.을.조.이.는.소.풍.의.눈.물.이.보.이.나.요 묵언의 짙은 슬픔을 허공을 향해 타전중이다
하늘의 못에 걸린 태양의 외투를 벗기고 석양의 잔가지에 움트는 부리를 비비며 털갈이를 끝낸 새 한 마리 아득히 사라져간다 찰나로 다녀 간 뭉게구름의 계단 사이로 서늘한 그리움의 연서를 지상을 향해 털어낸다 마지막 산책의 절벽에 피어난 능소화의 행간처럼 늦은 봄날의 화원 앞에서 읽는 당신의 마지막 편지 ― 「봄날의 화원 앞에서 읽다」 전문
쏟아지는 햇빛 그리고 소멸해가는 풍경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남다른 그늘” 같은 적절한 묘사를 통해, ‘봄날의 화원’이 심미적 풍경이 아닌 치명적 풍경임을 거듭 암시한다. 그 위난의 날들은 “비닐하우스에 갇혀 있던 오랜 풍문의 나날들”인 셈이고, 화자는 화원’에서 화자가 읽고 있는 연서” 한 장이다. 지상을 향해 털어낸 그 행간처럼” 읽고 있는 것이다. 이는 봄날의 화원 앞에서 읽는 이룬다. 그 마지막 연서가 바로, 그동안 시인이 기다려온 ‘당신’에 대한 “멀미나는 노란 어린 이미란 시인은 “잠을 자다가 불현듯 나날”(「의자」)로 감내하면서도, “당신의 부재가 펼친 평화”(「풍경화」)를 오롯이 받아들이면서 자신만의 ‘사랑법法’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둥긂’의 형상을 지향하면서 이는 이번 시집이 암시적으로 드러낸 한 진경(進境)이 아닐 둥글고 따스한 세계로 진입해가는 시인의 섬세한 서정이 도드라지는 다음 시편이 그 실례가 처음엔 가시였어요 뾰족하게 돋아난 상처였지요 짐승들도 떠도는 추운 들판이었어요 아무도 헐벗은 지붕을 가릴 수 없었지요 어둠도 잠든 밤엔 눈만 내리고 달빛도 얼어붙었어요 캄캄한 세월의 터널엔 묵은 추억의 레일만 달렸지요 화살처럼 사방에서 몰려들던 먼지의 천국이었어요
둥근 침묵의 방에 세를 들었지요 벽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따뜻하게 들렸어요 둥근 방은 양수의 잠처럼 포근했지요 한 달이 지나고 열 달이 지나고 모서리 없는 부드러운 방문을 열었어요 먼 거리의 하늘이 다정히 안부를 물었지요 다리를 건너 기차를 타고 푸른 신호등을 따라갔어요 둥근 창문과 둥근 계단을 지나 둥근 복도를 찾아갔지요
처음엔 가시였는데 생각해보니 뾰족한 그리움의 둥근 방이더군요 ― 「둥근 기억」 전문
벽에서 물 흐르는 소리도 나라를 선사한다. 지난날 얼어붙고 캄캄했던 기억을 “둥근 창문과 둥근 계단을 지나 둥근 복도”를 찾아간다. 온통 아프기만 했던 것들이 “뾰족한 그리움의 둥근 방”으로 화하면서, 시인의 상상력은 아픈 위난과 결핍의 시간을 지나 ‘둥근 띠고 있다. 말하자면 방’으로 바꾸는 것임을 발견해간다. 그 것이다. 따라서 이 시편은 앞으로 씌어질 이미란 시편의 미래적 상상력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섬세한 서정으로 시인은 “길과 길의 아늑한 간격이 ”(「길을 가다 멈추다」)는 자각을 실어, 삶에서 ‘둥긂’과 ‘아늑함’이라는 은유가 가장 “뭉클하다는 (「현지에게」)을 펼쳐나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한다. 선언한 것이 근대적 논리의 그래서 시인들은 현실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더 나은 현실’이라고 믿는다. 이미란 시인은 이러한 ‘시적 현실’을 줄곧 치열하고 추구하면서, ‘현실/꿈’의 접점에서 형성되는 긴장과 균형 속에서 자신의 미학과 윤리학을 완성해간다. 그녀는 것의 결핍이나 한때 분명히 실재했던 원동력을 담아내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이번 시집은 그러한 인식론적 화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 우 오히려 그녀 시편들은 내면 경험의 그리고 다양한 사물과 관념에 고유의 질감을 부여하는 창신(創新)의 물질성으로 바꾸어내는 조형 능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 점에서 우리는 그녀의 만만찮은 시적 능력을 통해, 사물과 인간의 상상력이 조우하여 빚어내는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로서의 창조물을 만나게 된다. 그 과정은 ‘당신’을 ‘둥긂’을 상상하고 실현하는 섬세한 서정과 결속하는 시를 쓰기 위하여/더 많이 ‘속도’를 근원적으로 반성하면서 ‘침묵’의 법을 (「구제불능의 노래」) “타이레놀 두 알이 성모 마리아”(「기형도를 읽는 넘어, 그녀로 하여금 아름다운 세 번째 시집을 완성케 하는 근원적 힘이 되기를 희원해본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모든 예술 행위는 찰나”(「두 남자」)라고 선언하는 그녀가 “어딘지 미심쩍고 겸손했던 슬픈 위장의 말들”(「무반주 결절(結節)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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