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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기록하는 뷰파인더

Author
mimi
Date
2011-02-15 06:05
Views
9391

 


이미정 ‘소시집 평론’

『삽량문학』(2010년 열번째)

 

                   시간을 기록하는 뷰파인더   

                                                                                                                                                
-마경덕(시인)-


 

 
이미정의 시편들은 밀 때와 당길 때 소리가 달라지는 아코디언처럼 열고 닫는 구조로 짜여있다.

수시로 열리고 닫히는 골목, 하루를
마감하고 문을 닫는 해 저문 바다, ‘오늘’이라는 페이지의

뒷장에는 ‘내일’이라는 또 하루가 기다리고 있다. 마치 주름상자를
양손으로 밀고 당기듯 이미정은

반음계마저도 놓치지 않고 하루하루를 능숙하게 연주한다. 시인은 책장을 넘기며 마지막 페이지에

또 내일을 쓴다. 눅눅한 시간을 털어내며 기대와 소망을 놓치지 않는다.

 

 

  잠깐 동안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연다

  햇살 보다 바람이 먼저 뺨을 친다

  낱권으로 꽂혀진 책들이 횡으로 일어서고

  전집들이 흩어진 열을 맞추고 있다

  간발의 소란스러움이 걷히고

  오래된 습관처럼 빈 벽에 등을 기댄 책꽂이

  책과 책 사이 바람이 들고 나면

  빈틈마다 햇살이 가득한 한낮의 서재는 단정해진다

  밑줄 그어놓은 문장들이 접혀진 채로

  낡은 지문들 사이로 유영하는 책 한 권을 꺼내

  눅눅한 시간을 털어낸다

  겨울처럼 아직 끝나지 않은 일기

  마지막 페이지에 또 내일을 쓰고 있다

 

                                                                                 -「서재에서」전문

 

 
창문에 커튼을 드리우면 잠시 외부와 차단된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면 바깥이라는 세계가 성큼

들어선다. 닫힌 공간에서
‘문’은 소통과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이다. 건반처럼 즐비한 책들도 시인의

손끝에 따라 펼쳐지고 닫힌다. 책은 품을 열고 재빨리
밑줄을 치고 흩어진 열을 맞춘다. 낡은 지문이

찍힌 서재는 기억을 쌓아두는 곳, 시인은 서재에서 ‘생각’을 낳고 ‘시’를
낳는다. 빈 벽에 등을 기댄

오래된 책꽂이도 시인에게는 세상과 교신하는 ‘통로’일 것이다. 시인은 책꽂이에 책을 꽂듯 단정하게

하루를 마무리하며 내일을 꿈꾼다.

 

  새벽닭이 어둠을 한입씩 베어 먹을 즈음

  서해 고서방(古書房)이 문을 연다

  규장각을 옮겨 놓은 듯한 열람실엔

  오래 전에 쌓아놓은 책들로 빼곡하다

  수백만 년 전의 낯선 시간들이 왔다가는 이곳에

  촘촘히 쌓아놓은 저 시간의 틀은

  누구의 경계인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책갈피 사이로 돌꽃이 핀다

  물 속에서 꽃잎을 주워 모으는

  오후에는

  한편의 시를 반납하고 돌아서는

  바다의 출렁거림으로

  하루가 잠시 흔들리는 듯 했다

  바다가 문을 닫는다

  나의 하루도 점차 봉인돼 가고 있다

 

                                                                  -「채석강에서」전문

 

 

 
화강암, 편마암의 얇은 기저막으로 내층을 이룬 채석강, 바닷물에 침식된 절벽은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았다. 어느 시인은 퇴적한
암벽을 보고 “차곡차곡 쌓아놓기만 했지 한 권도 빼주지 않는 수만 권

의 전집”이라고 했다. 이미정은 채석강을 ‘서해
고서방(古書房)’이라고 부르며 詩의 첫 문을 열고 있다.

「채석강에서」에서도 ‘여닫음’은 계속되는데 한 편의 시를 반납하고 돌아서니
바다는 문을 닫고

시인의 하루는 봉인된다. ‘열림과 닫힘’ 속에는 겹겹으로 쌓이고 흐르는 시간이 존재한다. 열리고

닫히는 행위는
동적이다. 유동성을 지닌 이미정의 시들은 아코디언의 주름살처럼 살아 움직인다.

시인의 관심은 ‘골목’을 통해 확산되는데
「하루」「귀가길」「엘리스의 골목길」에서 보여주듯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가난한 이웃이다. 모순적인 현실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는 갈등적

구조 속에 놓이게 되고 주어진 생을 힘껏 연주해도 탁음을 내거나 소리가 끊어지기도 한다. 소리를

질러도
들리지 않는 無音의 生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아파트 담벼락 밑에 움막처럼 앉아

  은밀한 전대 속의 허수를 세던 노인이

  채소거리 늘어 놨던 길바닥을 접고 일어선다

 

  휘어진 다리가 어둠을 밀고 가는

  베란다에서 보이는 끝까지

  노인이 가는 길을 따라 가 보면

 

  고단한 하루가 느리게

  깡마른 노인의 등에 업혀 간다

  노인이 가는 길마다

  둥그런 달이 걸리고

 

  오늘 별들은 무수한데

  공산에 헛 달이 뜬다

 

                                                                         -「하루」전문

 

 
이미정이 서있는 곳은 한눈에 전망이 내려다보이는 곳, 노인이 하루를 보낸 길을 따라가기 좋은

곳이다. 아파트 담벼락 밑에
움막처럼 앉아 하루를 열었던 노인이 푸성귀를 늘어 놨던 길바닥을 접고

일어서는 모습이 시인의 안테나에 잡혔다. 시인의 반경으로
들어선 풍경은 베란다에서 보이는 곳이

끝이지만 이미정의 연민에 찬 마음은 사라진 노인이 가는 길을 끝까지 따라간다. 깡마른
노인에게

업혀 가는 건 고단한 하루, 전대 속의 허수를 세던 노인에게는 헛 달이 뜬다. 희망이 사라진 노인에게

하루란 무엇일까? 또
한 개의 주름살과 근심이 늘어난 노인은 하루하루 캄캄하게 저물어간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빈곤’은 그 파장이 깊다.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의 과정은 고통이라는 끈으로

이어진다.

 

 

  희망근로를 끝내고

  아직 해가 지지 않은 골목을 따라 걷는다

  하루의 노고가 신발 밑창에 껌처럼 붙어다닌다

  모르는 얼굴들이 밀려오고

  모르는 얼굴로 답한다

  계산이 틀린 포장마차 주인은 손님과 실랑이를 벌이고

  붕어 한 마리 허공으로 튀어오른다

  지느러미를 쭉 뻗어 허공으로 헤엄쳐 간다

  아직은 살아 따끈한 붕어 몇 마리를 손에 들고

  뻐끔 뻐끔한 눈으로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을 위해

  배 터진 붕어 한 마리 덤으로 얻는

  오늘 하루가 즐겁다

 

                                                                               -「귀가길」전문

 

 

  「하루」와
달리「귀가길」에서는 활력이 넘친다. 하루의 노고가 신발 밑창에 껌처럼 달라붙어도

아직 살아낼 힘이 남아있어 해가 지지 않는다.
‘희망’은 곧 힘이다. 포장마차 주인과 손님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붕어 한 마리가 허공으로 튀어오르고 지느러미를 쭉 뻗어
허공으로 헤엄쳐 간다. 순간

좁은 골목이 후끈 달아오른다. 따끈한 붕어 몇 마리가 살아 움직이는 골목, 배 터진 붕어 한 마리

덤으로 얻어 집으로 길, 기다려 줄 아이들이 있어 하루가 즐겁다. 여기서 시선을 끄는 것은 ‘배 터진’

붕어빵이다. 내장이
쏟아졌으니 초라하고 내세울 것도 없는 지난한 삶일 것이다. 흔히 보는 장삼이사

같은 이웃들이지만 아직은 살아있음으로 감사할
뿐이다. 꿈이 있는 사람을 내일을 기약하고 마음의

문을 열어두지만 꿈이 사라지면 마음의 문도 닫히게 된다. 현실은 많은 가치의
기준들로 얽혀있다.

이미정은 ‘열린 마음’과 ‘닫힌 마음’을 통해 삶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진정한 행복의 가치기준은

무엇인가?”

 

 

  한 낮에도 햇살이 시침 떼는

  어둑한 샛골목

  따라 들어가면

  길이 길을 잃고 뒤돌아 서있다

 

  누군가 처마 밑에 걸어 둔

  새장 속의 새가

  새장 밖으로 나를 가두려는지 주문을 건다

  전파사에서 서먹하게 흘러나오는

  낡은 악보에 잃어버린 음표들이

  고압선에 감겨 있다

 

  소리의 추억은

  늙은 도편수의 대팻날 같이

  아득하여 무디어져가고

  까만 뿔테 안경에 걸쳐 앉은 돋보기너머

  엉켜진 소리의 길들을 풀어주는

  깡마른 노인의 눈빛

  아직 젊다

 

  시간이 느리게 걸어가고 있는 사이

  까칠한 골목길이 그새

  작달비에 휘어지고 있다

  노인이 황급히 새장을 거둬들인다

 

  처마 밑에 서서

  새가 마저 걸지 못한 주문을 외는데

  우산들이 젖은 이마를 부딪치며 뛰어가는

  횡단보도는

  아직 파란불이다

 

                                                                  -「엘리스의 골목길」전문

 

 
한낮에도 어둑한 골목, 길이 길을 잃는다. 얼기설기 얽힌 길을 따라가 보면 이마를 맞댄 낮은 처마가

이마에 부딪치고 그 처마는 새
한 마리를 붙들고 있다. 골목에 사는 깡마른 노인에게 유일한 말벗이

있다면 새장에 갇힌 새 한 마리가 아닐까? 그 새가 노인의
마지막 희망임을 이미정은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새장에 갇힌 새는 그 골목에 갇혀 하루를 버티는 노인이기도 하다. 여기서 새는
어둑한

골목에 긴장감을 주는 텐션 (tension)역할을 하고 있다. 아침마다 골목을 여는 새의 울음, 적막한 노인이

새장을
들고 나와 처마에 걸어두고 오가는 발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쓸쓸한 하루가 주마등처럼

전개된다. 날개를 잃어버린 노인과 날개가
있음에도 날지 못하는 새가 ‘자유’와 ‘구속’이라는 팽팽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새 한 마리가 화자가 골목으로 들어서자 새장 밖에
서있는 화자에게 재빨리

주문을 건다. 새장 밖의 세상은 ‘자유’가 있는 곳, 새의 소원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미처 주문을

외우기도 전에 골목으로 작달비가 쏟아진다. 장대같이 굵은 비는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다. 일순

골목이 젖고 우산들이 젖은 이마를
부딪치며 뛰어간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미정은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다. 노인의 눈빛이 아직 젊고 건너야할 횡단보도는 지금
파란불이다.

 
루이스 캐럴이 지은 동화「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연상케 하는「엘리스의 골목길」은 주인공

엘리스가 겪는

이상하고 재미있는 여러
사건들을 상상하게 한다. 이미정은 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새장과 주문을 외우는

새를 등장시켜 한껏 ‘이상한 나라’, 즉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엘리스의 골목길」은 이미정의

뛰어난 수작(秀作)이다.

 

  이미정의 시들은 시간의 궤적에 초점을 맞춘다. 오늘과 내일이 이어져 기억이 살아 움직이고

꿈틀거린다.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는 방법은 사진일 것이다. 시인은 성능 좋은 카메라를 동원해

‘찰나’와 ‘영원’을 사로잡는다.

 

 

  17분 포토샵 안에 내가 묵묵히 앉아 있다

  렌즈에 초점을 맞추고 나를 겨눈다

  지친 눈동자가 잠시 동안 머무르는 순간

  어둠을 깔고 앉은 횡단보도는 지금 빨간 불이다

  셔터가 나를 읽고 지나간다

  신호등이 바뀌는 순간 차들이 직진한다

  텅 빈 이력서 위에서도 홀로 인 나는

  인주 묻은 목도장을 찍을 때마다

  구겨진 길들이 잠깐 펴지는 듯 했다

 

  산 18번지 굽은 골목이 나를 걸치고 쓰러진다

  길이 끝난 스무 번째 계단 위에서

  젖은 사진을 더듬다 빗물에 말갛게 씻긴 나를 본다

  아이였을 때

  버려진 슬픔 속에서도 웃고 있던 낯익은 얼굴

 

  불 꺼진 옥탑방에 달빛이 졸고 있다

  확장되어 가는 또 하나의 텍스트

  이력서 위에서 다시 홀로인 나는

  오늘도 회전문을 여는 꿈을 꾼다

 

                                                                   -「증명사진을 찍다」전문

 

 
사방에 숨겨둔 CCTV가 셔터를 누른다. 17분 포토샵 안에 앉아있으면 렌즈는 초점을 맞추고 화자를

겨눈다. ‘증명사진’은 말
그대로 ‘나’를 증명하는 이력서에 첨부된다. 인주 묻은 목도장을 찍을 때마다

구겨진 길들이 잠깐 펴지는 듯 했다고 화자는
토로한다. 이력서는 걸어온 길을 그대로 찍어낸다.

산 18번지 휘어진 골목이 튀어나오고 길이 끝난 스무 번째 계단 위에서 시적
화자는 젖은 사진을

더듬기도 한다. 버려진 아이가 웃고 있는 산 18번지, 불꺼진 옥탑방 가파른 골목이 아이를 안고 쓰러진

다.
이미정은 여러 개의 이미지를 중첩시키며 빠르게 시를 전개해 나간다. 고성능 카메라로 보이지

않는 것들과 소외된 슬픔을
줌인(zoom in)이라는 촬영기법으로 담아낸다. 이미정은 뷰파인더를 열고

다시 오늘을 찍는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인화된 어제가
튀어나온다. 불가항력적인 삶의 텍스트는

끝없이 주어지지만 이미정은 아름다운 생을 연주하기 위해 반복되는 일상을 힘차게 열고
들어선다.

과장되지 않은 저음의 목소리가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이미정의 시편들이 싱싱한 활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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