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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조서 -고석종論

Author
janeyoon61
Date
2010-11-06 07:50
Views
10233


정직한 조서

  ―고석종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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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기택(강원대 교수,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1.

  고석종의 『말단 형사와
낡은 폐선』(2010)은 현직 형사의 구체적 체험을 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의미를 지닌다. 각종 범죄의 현장을 형사의
시각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양상이 흔한 소재는 아닐 것이다. 빠르게 읽히면서 남다른 시적 체험을 가능케 하는 것은 고석종
시가 지닌 최대의 매력이다. 무엇보다 삶에 충실한, 생의 조서(調書)로서 기록된 시들을 본다.

 『말단 형사와 낡은
폐선』은 시인의 처녀시집이지만, 늦깎이로 문단에 등장(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한 만큼 그 시세계는 연륜이 묻어나고
있다. 표제의 방식도 재미있다. ‘말단 형사와 낡은 폐선’이라는 표제가 수록된 작품에서는 동일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집을 관류하는 메인 모티프라 할 ‘말단 형사’와 ‘낡은 폐선’을 시집의 표제로 내세운 셈이다. 이미 낡음을 함의하는
‘폐선’이건만 ‘낡은’을 더하는 수사도 고석종 시의 순결함을 증거하는 듯하다. 요컨대 ‘말단 형사’와 ‘낡은 폐선’의 시적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그 시세계를 이해하는 첩경이리라 본다.

 

알지, 법보다 가까운 주먹이 무슨 뜻인지

목을 떼겠다는 말은 아무 것도 아니지

말해 뭐해

독 묻은 몽환의 이빨이야

구린 뒷구멍만 찔러 사정하는 기관이나

우미관의 전설적인 인물도 아니면서

생 쇼를 하는 거지

맛있는 범인들은 늘 구멍 속에 숨어 있지

내가 누군가, 평생 구멍 청소를 해왔던

권총 찬 형사잖아

구닥다리 짭새라며 깐죽대는 일

수도 없이 겪을 때도

대어를 낚으려 담금질했던 뿌리

환희와 절망이 거기에 있었다는 걸

몽환의 이빨에 물어뜯기며 알았지

홀로 숨통의 끈을 붙들고 교도소 담을 탈 때

발바닥 박박 긁어대던 기분, 말할 수 없어

그러니까 제발 말단인 이유 좀 묻지 마

―「몽환의 이빨」 부분

 

  ‘말단 형사’의 정체는
특별할 것이 없다. 위 작품의 일상적인 어조는 “권총 찬 형사”의 현재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말단 형사는 직급이
낮은 형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문제는 ‘말단’이라는 범주가 환기하는 개인사적 운명과 속악한 현실의 차원이다. 「몽환의
이빨」이 그리는 말단 형사의 시적 의미는 이러한 중층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때 “독 묻은 몽환의 이빨”은 말단 형사의
운명을 물어뜯는 동시에 위선적인 현실을 연출하는 기제로 보인다. 일종의 이데올로기일 수 있는 이빨의 존재는 시적 자아를 불가피한
복속의 대상으로 명명한다. 그리하여 “나는 목이 하나뿐이 아날로그 형사/ 구멍 속의 인생만 생각할래/ 어차피 세상은 구멍 찾기지,
엿치기처럼”이라는 결구의 표현은 말단 형사의 정체를 자학적으로 정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인 의미를 산파한다.
‘구멍’은 몽환의 이빨이 훼손하지 못하는 삶의 공백이며, 곧 끊임없이 멀어지는 욕망의 대상(대타자)이기도 하다. 범죄를 포함하여
지시될 수 없는 현실의 부정적 질서는 구멍으로서의 현실을 구성하는 물적 기반이다. 구멍은 실재인 것이다. 따라서 “구멍 속의
인생”은 비단 형사만의 것이 아닌바 “구멍 찾기”로써 말단 형사의 운명을 규정함은 가장 정직한 생의 철학인 셈이다.

 

  2.

  고석종 시는 소매치기,
마약중독자, 마약운반책, 중계상, 강간범 등 각종 범죄자의 시선으로 비루한 삶의 현장을 묘사한다. 또한 범죄에 의한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시선 역시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시적 자아가 투사되는 각종 범죄현장의 주체들은 말단 형사의 분신에 해당될 것이다.
다양한 범죄자들의 현실이 비루하기 짝이 없듯이 말단 형사의 현실 역시 비극적이기만 하다.

 

능선 너머로 견인되어가는 노을을 밟고

현장으로 간다

전화 한 통에 퇴근 시간이 묶인 것이다

늘 그러하듯

꼬리뼈에서 꼬리가 돋아났다

나는 개다

주검의 눈을 감겨주던 현장의 비린내가

발끝에 풀풀거린다

플라타너스 헐벗은 거리를 지나

눈꽃 거리도 지나

그 가지에 움이 솟아도

길을 훑으며 쫓고 쫓는 혼돈의 시간들

내 안의 수레바퀴가 삐걱거린다

향락의 구멍에서 주검이 매장된다는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앞니 사이를 빠져나온 헛웃음을 참고

밤을 밟으며 촉수 세운 바람의 길목에

내 목줄을 묶어둔다

자박자박

그믐달의 자맥질 소리 땅 끝까지 울린다

―「나는 개다」 전문

 

  시인의 자화상이기도 할
이 작품은 “나는 개다”라는 언명으로 상징되듯이 자학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는 명백한 아이러니일 것이다. 예컨대 “그렇다고
짖으라면 짖고 핥으라면 핥는/ 그런 개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통증」)라는 의식적 지양을 그의 시세계는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몽환의 이빨」에서 살펴본 것처럼 개의 운명으로 등치되는 말단 형사의 정체는 환유적인 것이다. 그것은 ‘현장’에 점착된
“혼돈의 시간들”과 인접되어 있다. 말단의 질서를 구성하였던 이데올로기로서의 구멍은 「나는 개다」에서도 “향락의 구멍”으로
재현되고 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는 말단 형사의 생을 지극한 서정적 어조로 드러내는 작품이라 하겠다.

  ‘낡은 폐선’의 의미를
구성하는 방식 역시 말단 형사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폐선의 상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기적 배경이 우선 전제되어야 한다.
남도의 한 섬(전남 완도 고금)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낸 시인에게 바다와 배 등속은 주된 인식소로 무의식 속에 자리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세상의 모든 폐선들은

지 몸 어디엔가 안락의 베개를 베고 누워 있다

끊임없이 방부제가 새어 나오고

뱃속엔 오갈 데 없는 물들이, 우울증 환자처럼

멍한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즐겁지 않은가

폐선 같은 몸으로 외갓집에 들르면

형사 조카가 왔다며

유자꽃 같은 웃음으로 반겨주시던 외삼촌

이제 언덕을 넘어가시려는 걸까

덜거덕거리는 틀니 속에 안락의 베개가 보인다

애달픈 나는 숨 가쁜 생의 닻줄을 부여잡고

퍼내도, 퍼내도 쉼 없이 솟아나는 눈물을

외삼촌 손등에 쏟아 붓는다

외삼촌은 손으로 낡은 폐선을 가리킨다

나는 장독대 아래

오종종 피어 있는 봉숭아꽃으로 눈을 돌린다

마른 고구마 순처럼

곧 부서질 것 같은 외삼촌의 손끝이

내게 머물렀기 때문이다

다 닳은 빗자루처럼

허우대만 멀쩡한 말단 형사인 나는

폐선이다, 그러므로

내 몸 어디엔가 안락의 베개가 있을 것이다

오, 생의 막장에서부터 밀려오는 통증

나는 왜, 이 기쁨을 즐기지 않고

세파에 떠내려가지 않으려

입에다 진통제를 한 주먹씩 털어 넣고

긴 목을 빼내어 썰물 같은 신트림만 하는가

―「외갓집 가는 길에 폐선이 있다」 전문

 

  폐선의 시적 상징이
적시된 작품이다. 폐선, 즉 생명을 다한 배 속에는 “안락의 베개”가 들어 있다. 흔한 경구처럼 적멸은 영원한 안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폐선이 지닌 재생의 이미지는 모든 유기체의 선험적 운명과 확연무성의 철학적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그리하여 화자는
스스로 폐선이 된다. 자기 자신을 폐선에 비유하여 “내 몸 어디엔가 안락의 베개가 있을 것”을 확신한다. 영원한 안식의 각성에도
불구하고 “입에다 진통제를 한 주먹씩 털어 넣고” 버텨야만 하는 현실이 있다. 현장은 폐선을 유기하는 이데올로기이자 다시 폐선을
부르는 실재이다.

  한편 폐선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훼손된 이상향으로서의 고향을 상징하기도 한다. 폐선의 존재는 “외갓집 가는 길”의 지정학적 의미로 규정되는 것이다.
이야말로 주목해야 할 이 작품만의 장소성을 구성한다. 위에서는 “곧 부서질 것 같은 외삼촌의 손끝”이라는 가족사적 비애가
응축된다. 한편 “더 이상 버텨낼 뱃길을 잃어버린 가마호/ 봉두난발한 채 앙상한 뼈 드러내놓고 있다”(「귀신고래」)에서 보듯
폐선은 지역사적 곡절을 담는 르포이기도 하다. 한때 육지로의 소통을 도맡던 가마호는 연육교(고금대교)가 놓이면서 폐선으로 전락하고
만다. 또한 폐선의 운명은 “녹슨 어구들”과 함께 “육남매를 바다에서 길러 낸 아버지”의 과거를 담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폐선에 함의된
개인사적 내력과 삶의 지평은 「외갓집 가는 길에 폐선이 있다」나 「귀신고래」 등의 장황한 시어들에 등치될 것이다. 시적 긴장과
미적 거리라는 현대시의 장르적 운명에도 불구하고 폐선에 관한 수사는 요설적이다. 이 역시 고석종 시의 아이러니로서 요설의 이면에
담긴 삶의 진정성을 폐선은 재현하고자 한다.

 

  3.

  형사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선과 악의 이항대립만이 아니라 그로써 설명되지 못하는 생의 이면을 포함한다. 모든 잠재성을 분석하는 날카로운 시선은 시적
서정의 운산을 아우르고 있다. 삶의 의미를 공소하는 고석종 시의 방식인 것이다.

 

배수갑문 난간에 기대어 있는 목발 한쪽

잔기침을 하고 있다

그 옆에 벗어놓은 흰 운동화 한 짝

소외된 반쪽으로

살아온 길을 지우고 물속의 길을 찾아

첫 나들이에 나선 것 같다

수사 중, 출입금지란 노란색 비닐 띠 안의

과학수사팀 형사들

무말랭이처럼 쪼글거린 열 손가락 끝 마디에

검은 칠을 한다

유기된 한 생의 사유를 밝히려는 거겠지

카메라가 짤깍거릴 때마다

이승은 잘려 나가고

캄캄한 문이 한 뼘씩 열리고 있다

―「물속의 길」 부분

 

  고석종 시가 보여주는
진솔한 삶의 현장은 당대의 삭막한 삶에 경종을 울린다. 뿐만 아니라 범죄 현장의 구체적인 시화를 통해 사회적 병폐를 각인한다.
서정시가 공론화하기 힘든 특수한 시대적 조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위 작품은 사라진 한 생의 흔적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살아온 길”과 “물속의 길” 사이의 언어를 구한다. 이 시대의 어떤 서정시가 저 유기된 운명의 언어를 밝히고자 하는가.

  남은 문제는 시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고석종 시를 통해 현란한 시적 재기를 체험할 수 없는 점은 아쉬운 단면이다. 이 소론만으로 함의하지 못하는
고석종 시의 의미망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삶의 진정성과 시의 수월성은 분명 다른 차원에 선다. 그러나 이 시들에게 그 밖의 시력을
요구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변모될 수 없는 고석종 시의 재현 방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석종 시를 그
자체로 감상하는 과정은 분명한 하나의 시적 시간이 될 것이다.

 




[출처]웹진 시인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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