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기억으로 번져가는, 모국어의 심미적 진경
-시집,『붉은 작업실』 2010년 김은자, 『문학의전당』

-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국어국문과 교수)
ㅡ 김은자의 시세계
1. 김은자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붉은 작업실』(문학의 전당, 2010)은, 첫 시집 『외발노루의 춤』(2006) 이후 꼭 4년 만의 결실로서, 그동안 자신의 삶 속에 쌓아온 오랜 기억과 감각을 통해 자기 탐구와 자기 귀환이라는 서정시의 미학적 본령을 충실하게 성취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김은자 시인은 미국 뉴저지 주에 살고 있는 교포 시인으로서 매우 유려하고도 격정적인 모국어의 결과 품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데, 일상적으로 이중언어(bilingual)의 환경에 놓여 있는 이른바 ‘이민자’ 시인이 이토록 치열하고도 견고한 언어적 자의식을 가진 사례는 매우 드문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만큼 김은자 시인은 오랜 기억과 감각 속에 녹아 있는 모국어의 심미적 진경(進境)을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개척하고 완성해낸 경우라 할 것이다. 이번 시집에 구현된 김은자 시편의 세계는, 크게 보아 세 가지 줄기로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하나가 이민자로서의 경험적 직접성을 매개한 격정적 ‘내면’ 탐구의 세계라면, 다른 하나는 오랜 시간 축적해온 감각을 통해 재구성되는 ‘기억’ 탐구의 세계이고, 마지막 하나는 ‘시(詩)’라는 언어예술에 대한 메타적 탐구의 세계라 할 것이다. 물론 이 세 가지 지향들은 서로 배타적으로 작동하고 있기보다는, 함께 얽히면서 움직이는 이른바 ‘연동(聯動)’의 활력을 보여주는 관계에 놓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김은자 시학의 주춧돌이 ‘내면’ 탐구와 ‘기억’의 재구성 그리고 ‘시’에 대한 섬세한 자의식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 글을 통해, 이러한 세 줄기의 지향을 따라가면서, 김은자 시편의 풍경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2. 먼저 우리는 이번 시집을 통해, 김은자 시인이 견고한 ‘내면’ 탐구를 통해 자신의 시적 수심(水深)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을 접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시학적 표지(標識)가 퇴행적이거나 회고적인 정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이러한 시적 지향은 이민자로서의 격정적이고 견고한 ‘내면’ 탐구의 세계로 가 닿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존재론적 생성을 역동적으로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 시편의 궁극적 수원(水源)이자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탐구의 배면에는 이민자로서 겪었던 결핍과 갈등이 가로놓여 있다. 다음 시편을 통해 그러한 모습을 아름답게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공항에서 잃어버린 두개의 이민가방이 도착한 것은
미국에 도착하고 육개월 후, 동네 간이우체국
찌그러진 깡통 이민가방이 내 발 앞에 놓였을 때
이름표에는 이름이 반쯤 지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KIMEUNJA 귀. 먼. 자.로 불렀다 운명 같은 해독이후 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모국어가 목마른 날이면 먹먹해진
귀를 홀로 만지며 대숲을 뒹구는 사람들 틈 속에서
지퍼를 열면 붉은 울음이 빗방울처럼 매달려 있었다
이민 올 때 엄마가 사준 꽃무늬 원피스는 아직도
한쪽 팔이 꺾인 채 옷장 한켠에 박제처럼 걸려있다
귀머거리의 속성은 엷게 떨다 눈을 잠가버리는 것
겨울에 떠나 여름에 도착한 개화를 모르는 그리움
깊숙이 손을 넣으면 이민 올 때 언니가 사준 벙어리
장갑이 딸려 나온다 귀가 멀면 입도 멀어지는 법
이국(異國)은 명치뼈 아래께 느껴지는 통증 같은 것
흰 편지에 봉인된 얼굴들을 넣고 돌아서는 색색(色色)의
사람들 발음 틀린 소통이 오래 아프다 ― 「귀먼 자 KIMEUNJA」 전문
자신의 이름과 유사한 발음의 제목을 통해 일종의 펀(pun) 기법을 활용한 이 시편은, 그녀가 치르는 내면 탐구의 몫이 얼마나 진중하고 깊은지를 실감 있게 전달해준다. 이 시편의 화자는 이민 생활의 한복판에서 겪은 직접적 경험을 시의 소재로 택했다. 가령 입국할 때 공항에서 잃어버린 이민 가방을 6개월 후에나 겨우 다시 찾게 된 경험을 말하고 있다. 동네 우체국에서 그것을 찾았을 때, 거기 반쯤 지워진 자신의 이름 ‘KIMEUNJA’가 마치 “귀. 먼. 자.”로 들렸다는 것이다. ‘귀먼 자’라니? 이러한 “운명 같은 해독”을 통해 화자는 비로소 자신이 이국에서의 “귀머거리”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자신이 영락없이 모국어를 그리워하는 시인이라는 사실을 “귀를 홀로 만지며” 알아가게 된다. 이처럼 “붉은 울음”과 “귀머거리의 속성”을 함께 경험한 화자는 “귀가 멀면 입도 멀어지는 법”이라면서 이국(異國)에서의 생활이 결국은 “명치뼈 아래께 느껴지는 통증 같은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해, “귀머거리의 속성은 엷게 떨다 눈을 잠가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 화자가 겪어갔을 이국에서의 고독과 결핍을 환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경험들은 이번 시집에서 “멀어질수록 따스해라/하루가 소실점으로 찍히고/ 빈 가슴에는/유목의 달이 뜬다”(「길 끝에 집이 있다」)든지 “흩날리는 홀씨처럼 나도/이 생을 떠돌다 어
느 숲 속/저녁으로 깃들지 모를 일이다”(「황홀한 역류」) 같은 데서 유목의 여진(餘震)으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막의
노래가 들려요 그건 내 속에 유목의 피가/흐르고 있다는 징표 나는 사막의 언어를 버리지 못했어요”(「유목의 피」)에서 고백되는
그녀의 노마드(nomad)적 언어는, 이러한 이민 생활의 고독과 결핍을 선명하게 전해준다. 그렇게 김은자 시인은 자신의
이민자로서의 삶과 고독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가족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누리고 견뎌올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부부’의 모습이 시 안쪽으로 들어와 있는 경우가 많다. 다음 시편을 보자.
광부의 장화를 신고 보랏빛 갱을 건너 매몰된 당신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불빛 하나를 위해 들녘을 쏘다니다 둥지로 돌아갑니다 빛나게 늙어 가는 기억의 파편들 딱딱한 강을 건너 야생의 벌판으로 던져진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소리 하나 쌓이지 않는 곳 이방의 지붕 아래 좁고 깜깜한 누옥, 당신과 나는 한겨울 길 없는 곳으로 쏟아져 내린 장대비 반쯤 써 내려간 하루가 애처로이 닮아 있는
― 「夫婦」 전문
김은자 시편에서 ‘남편’은, “반쪽인 줄 알았는데/전부였던 남자/죽을 때까지 소용 있는 남자/애인에서 아빠로/아빠에서
오누이로/그림자까지 닮아가는 남자”(「남편」)로 현상된다. 이 시편에서도 시의 화자는 ‘남편’과 함께 살아온 세월을, 마치 장화를
신고 보랏빛 갱을 건너 매몰된 이를 찾아들어가는 과정으로 은유한다. 그러한 야생의 기억들을 안고, 두렵지 않은 시간들을 함께 채워갈 소리 없는 “깜깜한 누옥”에서 부부는 생을 같이 나눈다. 이러한 “빛나게 늙어 가는 기억의 파편”을 공유하면서 부부는 “반쯤 써 내려간 하루가 애처로이 닮아 있는” 모습을 서로 띠어간다. 이러한 장면은 “멀리 볼수록 고요하고/멀어질수록 깊어지는/바람 속에서 아이들을 낳고/장군의 신발을 신겨/하나 둘 도시로 떠내 보낸 뒤/노을에 물들어 선선한 숲바람/당신과 나 달랑,/둘만 남아도 좋겠어요”(「셰난도 오, 셰난도」)라는 사랑의 언어를 서로 주고받는 ‘부부’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고독과 사랑의 경험 속에서 김은자 시인이 건져낸 다음과 같은 잠언(箴言)들은, 그 어느 시인의 언어보다도 아름답고 날카로운 지혜와 감각을 보여주는 실례들이다. 이제 그녀는 애처로움과 아름다움을 통합하고, 두려움과 사랑이 같은 영혼에서 발원하는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벼랑에 서면 하늘도 물처럼 깊어진다 제 몸에 홈을 파고 수렁을 내려놓은 사람들 막다른 골목에 홀로 서 본 자만이 메아리가 될 수 있다 거친 능선을 넘어 어둠을 흔드는 별이 될 수 있다 ― 「벼랑의 별」 중에서
멀리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이제 나는 가까운 것을 거부한다
그것이 내 몸의 가시를 뽑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슴의 목도 멀리 보면 그리움이고
아픔도 멀리 보면 넉넉하다 ― 「손가락에 박힌 가시를 뽑으며」 중에서
이제 오랜 이민 생활을 통해 시인의 언어는, ‘벼랑’과 ‘수렁’과 ‘막다른 골목’과 ‘능선’에서 홀로 빛나는 “어둠을 흔드는 별”이 되어, 멀리 내다보고 자신의 몸에서 고통을 뽑아내는 넉넉한 통증의 제의(祭儀, ritual)를 치르고 있다. 이러한 시세계가 그녀 시편에서 가장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는 음역(音域)이라 할 것이다.
3. 원래 모든 ‘기억(記憶)’은, 과거의 삶에 대한 사실적 재현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살아가는 이의 현재적 욕망에 의해 선택되고 구성된다. 그 점에서 시인이 선택하고 구성하는 ‘기억’의 형식들은, 곧바로 시인이 현재 가지고 있는 욕망과 닮게 된다. 김은자 시편들 역시 이러한 욕망, 곧 지난날들을 호명하면서 ‘기억’의 힘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깊이 담고 있다. 결국 그녀의 시세계는 이러한 ‘기억’의 풍경을 통해, 세상이 살 만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장 근원적인 터치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시간의 가혹한 무게를 견디면서, 그 진정성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기억’을 부조(浮彫)하게끔 한다. 이는 마치 베르그송(H. Bergson)이 말한 “지속의 내면적 느낌”이라고 부른 시간이 자신의 삶 속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기억의 볼륨을 높여도 떠나온 시간은 /만져지지 않는다”(「겨울정물 ― In the wintertime」)는 감각을 진중하게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고, “내가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기억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씨」)이라는 자신의 의지를 선명하게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 작품은 그러한 감각과 의지를 심미적으로 표현한 사례일 것이다.
노래를 부른 것은 새가 아니라 바다였다 누이야 저, 노을 속에는 빨간 새가 살고 있나봐 누이는 심해(深海)를 건져 수평선에 넌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해 아이가 지평선을 향해 걸어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들녘 위 해는 붉게 눕고 그림자는 하얀 숨을 고른다 누이야 저, 노을 속에는 빨간 새가 살고 있나봐 ― 「불새 - 씬 # 49.」 전문
지나온 날을 비극적 형식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서정시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게다가 그 비극 속에 잠겨 감상적 자기 탐닉에 빠진다면 그것은 범상하기 짝이 없는 동어반복으로 머물 위험성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김은자 시편은 그 비극이 사랑의 힘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함으로써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적 전망을 가지게 된다. 위의 시편은 모국어로 짜낸 아름다운 은실 같은 노래가 아닐 수 없는데, 시의 화자는 바닷가의 일몰 광경 속에서 아름다운 ‘기억’의 화폭을 하나 그려내고 있다. 노을 속에 ‘빨간 새’가 살고 있다는 아이의 말을 듣고는 “심해(深海)를 건져/수평선에” 널고 있는 ‘누이’는, 언뜻 보아 김은자 시인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번져온 듯한 느낌을 준다. 그 ‘누이’가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해”라고 말하지만, ‘아이’는 아랑곳없이 지평선을 향해 걸어간다. 해가 붉게 눕고 그림자는 하얀 숨을 고르는 바로 그 순간, “누이야 저,/노을 속에는 빨간 새가 살고 있나봐”라는 아이의 반복되는 말 속에서 화자가 그려낸 ‘씬’은 완성된다. 어디선가 “별을 부르는 순간, 푸드득/내 속에 살고 있는 새를 느낀다”(「별에 대한 연구 보고」)고 노래한 바로 그 풍경과 기억의 상호 결속이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말할 것도 없이, 서정시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결핍과 부재를 견디는 힘에서 생겨난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의 결핍, 한때 분명한 실재(實在)로서 존재했던 것들의 부재, 이러한 생의 결여 형식에 대한 가장 원형적인 반응이 ‘기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는 화이트헤드(A. N. Whitehead)가 지적하였듯이, ‘기억’은 실재 자체가 아니며 현재적 자아의 심리에 따라 조정되고 재현된 굴절된 시간의 집결물이기 때문이다. 김은자 시인은 이렇게 “생애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기억”(「해피엔딩이 좋아」)을 시적으로 구성하면서, 자신의 현재적 삶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편에 나타난 ‘기억’을 들여다보자.
파도에 고무줄을 뛰어논다
찰칵찰칵 등 뒤로 노을이 드러눕는다
엄마는 고장 난 테이프처럼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하신다
‘은자야 밥 먹어라’
고봉밥이 보인다
딱딱한 움막으로 변해버린 가슴은
집 나간 자식들을 기다리느라
한 번도 문을 닫아 본 적 없다
문에 손이 닿자 잘 익은 문이
석류처럼 벌어진다
엄마의 목이 한 뼘이나 길어져 있다
엄마는 그때까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은자야 밥 먹어라' ― 「엄마는 아직도 나를 기다리신다」 전문
이 시편에서 비로소 가장 아름다운 모국어인 ‘엄마’가 나온다. 앞 시편에서의 ‘누이’처럼, 여기서의 ‘엄마’ 역시 시인의 깊은 기억을 매개하고 현상하는 구체적이고 궁극적인 원천이다. 김은자 시인은 ‘파도’와 ‘노을’을 다시 한 번 시 안으로 끌어들인다.(그러고 보면 김은자 시인은 ‘바다(파도)’의 자의식도 매우 깊은 시인이다.) 파도가 너울대는 바닷가에서 고무줄놀이에 신이 났던 화자의 어린 시절, 그 뒤로 눕는 노을, 그런데 ‘엄마’는 같은 말씀만 되풀이하신다. 순간 환청처럼 그 말이 들리자 “봉분 같은 고봉밥”과 움막으로 변해버린 “엄마의 가슴”이 떠오르고, 화자의 기억 속에는 이민으로 떠나버린 자식들을 기다리시는 ‘엄마’의 목소리가 따라온다. 원래 시인의 ‘원체험(原體驗)’은 가장 오랜 기억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지속적으로 시인의 행위나 감각에 영향을 준다. 모든 시인은 이러한 원체험을 부단히 변형하여 상상적인 ‘기억’을 통해 자기동일성을 점진적으로 획득해간다. ‘파도’와 ‘노을’이 매개된 두 시편에서, 우리는 김은자 시인이 자신의 몸 깊이 숨겨져 있는 ‘원체험’을 아름답게 번져가게 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녀 시편의 선연한 한 줄기가 이렇게 깊은 ‘기억’에 가 닿고 있음을 알게 된다.
4. 마지막으로 우리가 강조해야 할 김은자 시세계의 한 줄기는, 바로 ‘시’ 자체에 대한 혹은 ‘시쓰기’ 자체에 대한 깊은 자의식에 관한 것이다. 시인은 고국(故國)에 대한 짙은 향수와 모국어에 대한 애착을 중심으로 하여, 자신의 ‘시쓰기’가 매우 지속적이며 불가항력적인 작업임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민자 생활을 관통하면서 존재하는, 양도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 방식이라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에 대한 깊은 그리움도 가로놓여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녀에게 ‘시’ 혹은 ‘시쓰기’란 무엇이었는가.
배가 고플 때
웃음과 울음은 같은 어원이 된다
같은 어원 속에서
눈물은 글쪽에 가깝다
울음에 답장하고 싶을 때
콩나물과 찢어진 책갈피
풀어진 운동화끈
엉킨 실타래
냄새나는 옷
금간 그릇 나는 왜 또
말싸움에서 이겼을까?
안보이게 졌을 때
사람이 칼보다 예리하고 아플 때
벽과 무덤과 서랍이 부드러울 때
나는 한 손가락으로 치는 피아노
거울 속과 거울 밖에서
얼룩과 무늬의 혼돈
바람조차 침묵할 때 그,
침묵으로 고막을 뜯어낼 때
누군가를 외로워 할 때
무모함에 목매달고 싶을 때
깜깜하게 타오르던 불씨
야금야금 내 몸을 뜯어 먹을 때
쓰려 하지 말자 하나 둘
지워가자 ― 「시쓰기」 전문
‘웃음’과 ‘울음’이 같은 어원이라는 것, ‘눈물’이 어느새 ‘글’이 된다는 것, 화자는 온갖 생의 순간에서 이러한 역리(逆理)를 알아간다. 이렇게 “얼룩과 무늬의 혼돈”의 끝에서 ‘시쓰기’는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침묵’과 ‘외로움’과 ‘무모함’ 속에서 “깜깜하게 타오르는 불씨”가 바로 ‘시’의 은유가 되고, 화자는 그 순간 쓰려 하지 않고 “하나 둘 지워가자”라고 하지 않는가. 이는 “안 보이는 바람에 집을 짓고/내재율같이 얇은 가슴팍에/휘파람만이 들리는”(「비가悲歌 혹은 비가非家」) 언어를 향해 가는 시인의 고독과, “잊혀진 소리를 받아 적는 것”(「하프 파이프」)이 시쓰기의 본령임을 깨달아가는 시인의 의지가 함께 반영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어둠마저 빛나는 길/소리로 찾아가는 먼 골목”(「詩가 詩에게」)에서 마주친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시’는 “도려내도/도려내도/살아 돌아와/발기 발기/나를 찢는 손/아니, 갈퀴”(「시」)가 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시인’의 운명은 다음 시편에서 아름다운 비유적 형상을 얻는다.
가
쁜 숨을 내쉬던 하늘이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후드득 빗방울에 주저앉은 어둠이 하나둘 스러지자 거룩한 내통을 시작한 장대비 내가
시와 씨름하는 사이 젖은 페이지를 읽고 있었다 목마른 문장들이 가파른 언덕을 뛰어 내려 축축한 땅 위로 곤두박질쳤다 은밀한
유서에는 거대한 바다가 그려져 있었다 바람은 왜 한쪽 눈으로만 우는 것일까? 발자국 하나가 어둠의 맨 앞에서 휘파람을 불며
지나갔다 메마른 대지를 끌어안고 끝없이 말을 잇는 저 온전한 시 한편 나대신 울고 있는 네가 시인이다
― 「곡비哭婢」 전문
‘곡비(哭婢)’는 장례 때 행렬 맨 앞에서 울음 우는 역할을 맡은 여종을 뜻한다. 이 시편에서는 곡비가 우는 그 울음이 바로 ‘시’의 은유가 된다. 하늘도 목놓아 울기 시작하고 빗방울이 후드득 쏟아질 때 젖은 페이지를 넘기며 누군가를 읽고 있는 화자는, 곧바로 ‘시인’의 운명을 함축한다. 그는 “목마른 문장들”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상상적 풍경을 통해 “메마른 대지를 끌어안고 끝없이 말을 잇는 저 온전한 시 한 편”을 상상한다. 그 순간 바로 “나 대신 울고 있는” 곡비는 “시인”이 되는 것이다. 김은자 시인의 시선에는 “소리에 깃든다는 것은/저렇듯 어두워지는 것”(「소리에 깃들다」)인데, 이때 ‘시인’은 “산림이 자랄 수 없는 수목의 한계선에서/소리를 훔쳐온 악공”(「명기名器」)이 된다. 그러니 ‘시인’은 언어적 자의식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는 자기 규정성을 뛰어넘어, ‘언어’를 찾아 헤매고 궁극에는 사물들 속에서 ‘언어’를 발견하고 경험하려고 하는 존재로 바뀌게 된다. 다시 말하면 ‘언어’의 도구적 기능을 넘어서 ‘언어’ 자체에 대한 탐색에 공을 들이는 이가 ‘시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렇듯 김은자의 시세계는, ‘시’의 생성과 소통 그리고 그 과정을 수행하는 시인의 고독에 대한 자의식이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녀 시편에서 감성과 이성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례가 이러한 자의식에 있다 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김은자 시편들은, 이민자로서의 경험을 통한 ‘내면’ 탐구의 세계, 오랜 시간과 감각을 통해 구성되는 ‘기억’ 탐구의 세계, ‘시(쓰기)’에 대한 메타적 탐구의 세계로 펼쳐져왔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모국어의 심미적 진경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비록 “세상이 온통 푸른 멍”(「환절기」)일지라도, 그녀의 언어는 그 ‘멍’을 닮아 푸르게 푸르게 번져가고 있다. 그 푸르름에 우리도 한껏 목을 적신다. 그렇게 푸른 기억으로 번져가는 그녀의 시편이, 왜 아름답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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