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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자가 꾸는 꿈

Author
mimi
Date
2010-06-30 09:13
Views
10583

          

                                         위대한 자가 꾸는 꿈


차창룡의 시 세계

 

                                                                       -김태형-

 

모든 촛불은 자신의 몸만큼만



 

타오른다

 

- 「촛불」에서

 


현대사회의 일상성에 대한 희극적이고 정치한 성찰, 자아와 욕망의 근원을 향한
서정적 모험은 차창룡의 시가 천착해온 지점이다. 그리고 인도와 불교의 소재를 그 흔한 견성(見性)의 차원으로 끌어올리지 않고
세계와 마주한 삶의 자리로 이끌어온 것은 또 다른 축을 이룬다.
그 다채로운 시의
외연은 굴절된 웃음과 풍자의 언어를 거느리고 있으며, 때로는 자기 해체적인 고백의 수사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시적 변모의
추이를 따라오다 보면 어느덧 그가 광대한 신화적 세계관에 도달해 있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그 안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 세계에
대한 적의를 넘어 자기의 세계를 송두리째 파괴하고 다른 세계로 존재의 전환을 실행하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다. 그의 시는
그렇게 본원적인 삶의 의미를 향해 나아간다.

 

그가 맞닥뜨린 현대사회에 미만한 소외와 억압은 근대적 주체의 이성이 선택한
정연한 명제들이 오히려 어떤 ‘가치’들을 철저하게 왜곡하는 데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노동을 강제하는 타율적 규칙, 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하는 계량적인 삶의 양식, 무한경쟁 체제를 극한의 속도 위에서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것으로 인식한 시장의 원리는 근대적
시간성이 제도화된 차가운 자궁 속에서 태어난 것들이다. 차창룡의 시는 “해가 넘어가도 넘어가지 않는 가난”(「쟁기질 1」,
『해가지지 않는 쟁기질』)으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는 비속화된 개별성의 세계와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똥’이라는 자신의 육체성으로 환원해왔다.

 

시인은 첫 시집 이후에 와서야 자신의 진정한 출발을 선언한 바 있다. 황톳빛
‘아버지’의 세계를, 그는, 기필코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자신의 ‘시론’, 자기만의 시선을 통해 세계를 가로지르며 스스로
‘존재’하고자 했으리라. 그러한 미적 체험 이후의 시 세계를 보면 그의 삶과 의식의 체계들이 어떤 정점을 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시집은 무엇보다도 순식간에 터져 나온 깨달음이나 준열한 일성(一聲)처럼
현실과 관념의 총체 위에서 그의 삶과 의식이 어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을 여실히 보여준다.

 

 

순환과 재생의 신화

 

인도신화는 이 세계를 위대한 자가 꾸는 꿈이라고 말한다. 그 꿈은 영원의 바다
위에서 끊임없이 증식한다. 우주의 유지와 보수를 담당한
비슈누(Vishnu)는 ‘끝없음’이라는 의미인 뱀의 왕 아난타(Ananta) 위에 누워 이 세계를 꿈꾼다. 그 꿈에 의해
비로소 인간의 삶은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다. 비슈누의 꿈, 마야(Maya)로서의 인간의 삶, 불교 용어로는 삼계(三界)인 이
세계는 영원의 우주적 대양 위에서 꿈틀거린다.

 

현현하지 않는 비가시적 세계로부터 비롯된 신화는 다른 시간 위를 떠다니고 있다.
신화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열린다. 그 무의식의 차원으로 걸어 들어가는 경험을 통해서 ‘삶’은 사실 너머의 진정성과
마주한다. ‘영원’은 우주의 발생이 끝없이 순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작도 끝도 없이 오로지 현재에 매달려 있는 멈춰버린 시간도
아니고, 사회적 진화론자들의 선택받은 계몽주의의 시간도 아니다. 신화 속에서 순환적인 우주의 시간은 영원으로 표상된다.

 


이 신을 버리고 지상으로 내려오니

개와 가마우지가 뒤지는 시체 속에서

모든 생명체가 아름다이 꿈을 꾸누나

풀과 나무와 더불어 인간의 운명을 토론하면서

바람은 몸 없는 신의 모습을 그리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것은 이미 신들의 일이지만

신도 인간의 자식에게 아비를 죽일 권리를 부여하니

아우랑제브는 아버지 샤자한을 죽이고 천하를 얻은 후

신이 되려다 그만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아그라 성과 타지마할 사이에 화장터가 있다

 

그것은 어떤 비극도 괜찮다는 뜻이다

장례식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으니

연기는 동그라미를 그리며 하늘로 오르지만

재는 한사코 검은 강물 속으로 파고드누나

붉은 아그라 성과 하얀 타지마할 사이에 나룻배 한 척

촛불을 싣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갈 때

 

신이 신을 버리니 슬픔의 강이 되었어라

신이 신을 버리니 비로소 신이 되었어라

신으로서는 용서할 수밖에 없는 생명체의 반란

바람은 모든 생명체가 추악한 꿈을 꾸는 동안

소와 돼지와 더불어 몸 없는 인간의 운명을 토론한다

 

― 「야무나」 전문

 


다 시대의 신화에서 천신(天神)으로 군림했던 디야우스(Dyaus)는 아들 인드라(Indra)에 의해 대지로 떨어져 처절한 죽임을
당한다. 야무나 강은 “신이 신을 버리고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지만 그 강은 세속적 욕망에 의해 타락한 인간이 광대한 세계를
지배하는 신적인 존재가 되고자 했던 허욕으로 더럽혀졌다. 
아버지를 권좌에서 끌어내려 성에 가두고 새로운 권력을 세우고자 했던 아들의 세계는 이미 신의 세계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되고자 했던 한 불완전한 존재는 그 스스로 부재의 영역으로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있다. 아들은 곧 아버지가 되고
만다. 아버지를 죽이고 세계를 차지하려 한 인간의 욕망은 결국 그 대가를 치르게 됨으로써 비극은 역설적이게도 비극을 넘어선다.
인간에게는 ‘슬픔의 강’이지만, 신의 세계를 함부로 모방한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은 오히려 ‘신’의 위대함을 증명한다. 인간의 꿈은
한갓 ‘추악한 꿈’으로 전락해 있다. 우주의 꿈을 꾸려 했던 지상의 인간은 바람으로 “몸 없는 신의 모습을 그리는데”, 그것은
죽은 아버지의 운명을 따르게 될 뿐이다. 처음의 ‘바람’은 우주적인 생명의 숨결을 모방한다. 그리고 마지막 ‘바람’은 결국 꿈에
불과한 “몸 없는 인간의 운명”을 환기한다.

 


렇게 바람의 ‘토론’이 끝날 때쯤이면, 바람은 메마른 세계를 휘몰아치며 파괴의 불을 일으킬지 모른다. 불은 ‘연기’와 ‘재’의
동인(動因)이다. 연기는 커다란 구름의 형상으로 변해 비를 내리고 원초적인 대양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강물에 쓸려 내려간 재는
대지와 함께 물속에 가라앉을 것이다. 베다에서 비슈누는 태양신이었다. 그렇게 태양 자신인 비슈누의 꿈은 물속에 반쯤 잠긴 채
종국에는 불꽃으로 타오를 것이다. 재생의 고리는 다시 순환적인 시간에 연결되어 있다.

 

한번도 가까워진 적 없는 사랑이 있다

매일 한번씩 캄캄해지는 사랑이 있다

 

― 「태양」 전문

 


뜻 이 시는 대상에 이르지 못한 좌절과 그 슬픔에 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다른 시 「달」에서 주기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섭리를 통찰하고 실재의 길이 아닌 추상의 새로운 길을 인식하듯이, 「태양」 역시 그 빛과 어둠의 주기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빗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시의 무의식에는 자기 파괴와 소멸을 향한 가능성으로서의 삶의 염원이 자리하고 있다. 궁극적인
‘사랑’의 목적은 ‘태양’에 의해 자기 자신을 한순간에 태워 사라지게 하는 데 있다. ‘사랑’을 태양과 같이 강렬한 것으로
등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의 이면에는 파괴의 기원이 숨어 있다. 그 무의식은 파괴도 소멸도 아닌 바로 재생을 기다리는 자의
파토스(Pathos)를 품는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쿠쉬나가르」)을 체현하는 그 모든 것을 함의한다.

 

 

원형의 밤

 


은 언제나 구체적인 그 어느 곳을 향하지만, 그 지향점이 ‘꿈’이라면 길이 끌어안은 공간적 개념은 무의미해진다. “항상
어디론가”(「달」) 가는 것은 직선적인 시간관념을 벗어나서 순환하는 우주적 질서를 따른다. 시인은 그것을 “길 아닌 길을 지우며”
간다고 표현한다. 「온수시방(溫水詩)房」에서 알 수 있듯이 “나의 고향”이면서 “없는 고향”일 수밖에 없는 그곳을 찾아가는 길
위에 지금 시인은 서 있다. “나의 목적지는 나의 꿈”(「나의 꿈」)이지만, 시인은 “당신의 꿈을 향해 가면” 된다고 말한다.
나와 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각자 다르다 하더라도 그 근원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당신의 꿈은 생명의 원형, 우주의
본질에 닿아 있다.

 

계곡에 입술을 대고 물을 마시는 날

황홀한 마음 어디론가 가고 없을지라도

바위여 너는 착한 이끼를 길러도 좋다

이끼 그 태초의 식물을

 

이제야 당신에게 경배할 수 있음을

용서해다오 세상의 처음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바다로 갈지라도

이 자리에서 지키는 초심이여

 

― 「계곡에 입술을 대고 물을 마시는 날」에서

 


인이 찾아가는 원형의 우주는 육체의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본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현현한다. “벌거벗은 그대 가슴/입에
물면 한입에 바다”(「당신의 유방」)가 된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 더 심해지는 샘물”(「창세기」)처럼 육체의 욕망을 밑바닥까지
끊임없이 소진한 후에야 비로소 어떤 세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시인은 그곳에서 태초의 “고요한 노래가 숨어 있는”(「겨울
굴참나무」) 공(空)의 세계, 우주적 바다로 가고자 하는 ‘초심’으로서의 진정한 본능을 자각한다.

 


이미지는 길과 꿈의 상징이다. 마치 아난타가 영원이면서, 또 안내자로서의 뱀의 형상을 한 것처럼. “신은 우리에게 꿈을 주었다.
꿈은 물이다.”(「강」)
그의 시에는 유독
‘바다’ 이미지가 넘쳐난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며, 마침내 도달해야 할 지복의 세계를 의미한다. 또한 비슈누의 꿈이
태어나는 삶의 자리이기도 하다. 시인의 물 이미지는 이렇게 양가적인 속성을 품고 있다. 신이 이 세계를 꿈꾸는 것처럼 인간 역시
신을 꿈꾼다. 아니, 이 세계를 꿈꾼다.

그러나 인간의 꿈은 늘 좌절하고 만다. 추악한 세계에서 더욱 추악한 꿈을 꾸기 때문이다. 꿈의 상실은 세계의 상실이다. 그래서
시인은 “하늘을 바다로”(「부드러운 가시」) 만들어 한 척의 배를 띄우려고 한다.

 


은 충만한 대양의 축복 위에서만 이 세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비야말로 신”(「비」)이지만 그 신이 가져온 풍요의 상징은 이
지상에서 생명과 고통으로서의 이중적인 ‘피’의 이미지가 된다. 신과 악마 사이에 존재하는 ‘신의 아이’, ‘괴상한 새끼’야말로
잘못 꾼 꿈의 실체이면서 어찌할 수 없이 윤회의 지독한 사슬에 얽매인 존재들이다. 기필코 다시 돌아가야 할 어머니의 자궁-바다는
“신이 태어나고 사람이 태어나고 감로수가 태어”난 곳이지만, 지금 이곳에서 시인은 젖과 꿀이 아닌 고통과 희생의 ‘피’를 마셔야만
한다. 꿈을 향한 꿈은 ‘슬픈 진실’이다.

 

우리의 사랑은 신화입니다.

마치 사실이 아닌 것 같지요.

사실인 것 같은 사실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신화 같은 사실이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신화입니다.

 

― 「상카샤」에서

 

‘사
랑’이라는 행위는, 혹은 관념은 저 무한의 우주적 밤을 찾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지금 그 ‘사랑’은 자기 파괴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신화 같은 사실”은 이성의 완강한 강제 앞에 무력하지 않고, 제 안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 삶의 본래성을 구현한다.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나 자신이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붓다」)는 일이다. 소유와 집착, 제도화된 권력에 통제당한 현대사회의
물적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짓 자아를 버리고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는 일이다.

 

 

타자의 욕망과 새로운 주체의 공간

 


대적 자의식은 그 과학적인 합리성의 기획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인간을 개체화시키고 제도의 강제력 앞에 무력하게 만들었다. 소비사회의
물적 풍요와 개인의 자유는 타율적인 체계를 낳았다. 상품 앞에서 주체는 자기 기만적이다. 선택은 언제나 주체의 무의식을 장악한
시장의 몫이 되었다. 자유는 하나의 방어기제일 뿐이다. 경제적 가치만을 삶의 척도로 받아들인 사회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확립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주체성(Identity)의 문제로 귀결된다.

 

또 여자를 사고 말았다

카드를 긁으니 여자의 시간이 내 것이었다

내가 사정할 때까지의 시간을 통해

여자는 구원받았고 국가는 세금을 얻었지만

 

또 자위를 하고 말았다

내가 소비한 휴지만큼 나는 후회하면서도

내가 소비한 휴지만큼 세계 경제에 기여했다면

세상에 유익하지 않은 것은 없을 것임에도

 

― 「자본주의를 위한 자그마한 기여」에서

 


본주의는 무제한적인 욕망을 확산시키면서 일상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그 욕망은 항상 외부에서 전이된 욕망이다. 욕망은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된다. 「성교에 관한 몽상」(『고시원은 괜찮아요』)에서 작은 셋집들이 비좁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는 서로의 소리를
공유할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는 은밀한 신음마저 벽을 넘고 담을 넘어 다른 집에까지 세어나간다. 이 신음 때문에 괜한 성적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자기의 욕망이 아닌 외부에서 전이된 욕망은 그 순간 ‘자기’를 잃게 한다. 이것은 하나의 예시에 불과하다.
욕망을 소비하는 것은 자본의 끝없는 재생산을 위해서 필요할 뿐이며, 소비사회는 그러한 욕망을 관리하고 통제한다. 타자의 욕망은
실체적 사고가 아닌 다른 기호와의 차이와 관계 속에서 생산된다.

 

드디어 친구가 생겼소

아내와 별거중이라는군

고시원의 작은 방에 누우면 친구는

아내의 자궁 속에 누운 기분이라나

새로운 감옥은 독방이 아님에는 분명하구려

 

― 「고시원은 괜찮소」에서

 


시원의 방은 한 사람이 간신히 삶을 견딜 정도로만 최소한의 공간을 제공한다. 고시원은 소외와 개체화의 공간이며, 현대사회의 강제된
고통을 인내하도록 고안된 비인간적인 공간이다. 고시원은 이제 “새로운 감옥”으로 진화하고 있다. “아내의 자궁 속에 누운” 것
같은 고시원의 비좁은 공간은 자기 자신을 잉태하는 형국이다. 이 ‘감옥’은 여지없이 불모성을 재생산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만의
고독한 공간은 타자의 욕망이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를 꿈꾸는 새로운 주체의 공간으로서 어떤 가능성을 갖게 될지
모른다.

 

기적의 집이여

죽어서도 부디 의연하여라

너의 자궁에서 가난한 생명이 감로수를 얻었나니

 

― 「집의 운명」에서

 


은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고 머물며 꿈꾸는 곳이다. 하지만, 이제 그 탄생의 거점은 사라지고 있다. 재개발 지역에 낡은 집이
헐려나가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다세대 주택에 기거하던 가난한 서민들은 고작 몇 평의 안락한 거주지마저 잃고
쫓겨나야만 한다. 집이 헐려 사라지기 전까지 그곳에서 시인은 영원을 꿈꾸는 존재였다. 이제 그 꿈마저 금융자본을 기반으로 한
부동산 시장의 위력 앞에 사라지고야 말 운명에 처해 있다.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오래 전에 그 쓸모를 다하고 망각 속으로 사라졌던 우물 속의 어둠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 우물의 뚜껑을 여는 순간 “절망이란 처녀새가/푸드덕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소문”(「흑석3동 재개발구역에는 우물이 있었다」)이 어수선한 골목을 잠시 스쳐 지나간다.
아파트만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를 뿐이다. 시인은 이렇게 ‘절망’의
소문마저 한순간의 덧없음으로 사라지는 삶의 불모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은 타자의 욕망이 지배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성찰하는 일이다.

 

 

죽음 이후

 


파니샤드는 자유를 궁극적 실재인 신과 합일한 상태로 보았다. 궁극적 자유를 얻지 못한 이들은 시공간의 사슬에 얽매여 끊임없이
필멸자의 운명을 반복하게 된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베다 시대였지만 아직 그 실체는 분명하지 않았다.
우파니샤드에 이르러 재생의 개념은 두 가지 길을 찾아낸다. 궁극자의 빛의 세계인 데바야나(Devayana)와 윤회를 거듭하는
어둠의 세계인 피트리야나(Pitryana)가 그것이다. 이러한 고대인들의 세계관은 언제나 현생의 윤리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인은 자기를 파괴함으로써 또 다른 순환의 주기를 맞아 재생의 길을 찾으려 한다. 태양의 불 속으로, 우주적인 바다로 나아가는
것만으로 ‘사랑’의 궁극적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죽은 나무가 죽은 채로 서 있어야 하는 이유는/사랑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죽은 나무는 죽은 나무가 아니다」) 인식하는 시인에게 ‘사랑’은 단순하게 대상과의 합일과 교감으로 한정되지 않고,
우주적 순환의 광대한 순리 속에서 자기 존재를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일체의 것이 된다. 그렇게 시인이 꿈꾸는 순환과 재생의 길은
윤회의 사슬을 끊고 ‘빛의 세계’를 향할 것이다.

 

모든 사랑은 벼랑 위에서 시작되더라, 당신을 만나고부터

벼랑은 내 마음의 거주지. 금방 날아오를 것 같은 부화 직전의 알처럼

벼랑은 위태롭고도 아름다워, 야윈 상록수 가지 붙잡고

날아올라라 나의 마음이여, 너의 부푼 가슴에 날개 있으니,

 

일촉즉발의 사랑이어라, 세상은 온통 양귀비의 향기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신과 나는 벼랑에서 떨어졌고,

세상은 우리를 받쳐주지 않았다. 피가 튀는 사랑이여,

계곡은 태양이 끓는 용광로, 사랑은 그래도 녹지 않았구나.

 

― 「벼랑 위의 사랑」에서

 


이 끝나는 곳, 그래서 결코 길이 될 수 없는 곳, 그러나 길 끝에 허공(虛空)이 비로소 시작하는 곳. 벼랑은 그렇게 시인 앞에
의미론적 층위로 다가선다. 그의 ‘사랑’은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벼랑 위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둥근
바위가 곧 부화할 것 같은 알의 형상으로 허공을 향해 솟아오른 벼랑에서 “당신과 나”는 일체가 되어 떨어지고 동시에 죽음을
경험한다.

 


의 제단에서 스스로 죽음을 향해 뛰어내리는 자는 희생자이며 동시에 정화된 자로서 어떤 성역(聖域)에 들어서 있다. 그러나 다른
삶을 받아들인 자기 참해(慘害)적인 상징은 아직 현실에 묶여 있다. 벼랑에서 떨어진 자는 계곡의 “태양이 끓는 용광로”에서조차
자기 파괴를 거부당한다. 여전히 불은 “한번도 가까워진 적 없는” 태양의 문 뒤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미망으로부터의 탈주는 쉽게
용인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죽음의 끝이 새로운 시작이라고 섣불리 발설하지 않는다. 삶은 결코 죽음을 통해 반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벼랑’은 기투(企投)의 첨예한 현장이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제사를 지내다보면

갑작스레 나는 과일에 관심을 갖는다

왜 대추와 밤과 배와 감을 필수적으로

제사상 맨 앞자리에 놓는가

생각해보니 이 제사상에서 과일만이 죽지
않았다

죽은 사람의 식탁에 산 생명이 앉아
있는 것이다

(…)

부모가 다 키운 자식을 세상에 내놓듯이

나는 죽은 아버지를 이미 오래전에 버리고는

살아 있는 과일들에게 넙죽 절을 했다

 

― 「제사」에서

 


음은 결국 삶을 위한 상징이며 그것이 치환된 관념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며 정작 죽음보다도 삶에 경배하는 희화화된 역설적인 상황은 시인이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죽음을 기리는 행위는 결국 살아 있음을 숭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죽은 사람의 식탁에 산
생명이 앉아” 죽음을 통해 삶을 반추하면서도 죽음보다 삶의 의미에 천착하려는 태도를 이 시는 견지하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살아 있기 위해서 “아기를 낳고 낳고 낳고 또 낳고자 하는 의지”(「대추」)는 필연적으로 죽음이라는 희생
위에서만 가능하다.

 

 

다시 삶을 찾아서

 


화는 삶의 양식이다. 그런 것처럼 신화적 세계관의 순환론적 시간관념은 현재적 시간성과 근원적 성찰의 경계를 넘나든다. 야망과
이기적인 욕망을 일체 만유에 다시 재현하려던 인드라를 깨우친 것은 광대한 우주적 시간 속에서 인드라 자신이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인드라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영예란 일흔한 번의 영겁 동안만 유지될 뿐이다. 그 시간은 순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일흔여덟 번째 인드라가 윤회하는 시간은 브라흐마(Brahma)의 하루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살아 있는 동안 사악한
행위를 한 존재는 반드시 미천한 존재로 환생하기 때문에 그 영예는 결코 항구적으로 지속하는 것이 아니다. 비슈누가
나라다(Narada)에게 환영을 보여준 이유 또한 삶의 고난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이 아닌가. 그 고통의 사슬을 끊는 일은 결국
삶의 문제로 돌아온다.

 


변의 영원한 실재인 리타(Rita, 天則)가 우주의 혼돈과 불확실성으로부터 조화로운 세계를 선사한 것처럼, 인간 세계의
다르마(Dharma, 理法)는 현실적인 삶을 견인한다. 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무한한 ‘존재’는 리타와 다르마의 간극을
가로지르며 지금 이곳에서 꿈꾸는 자다. 참된 선택은 어떤 권능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근원에 다가가고자 하는
것이며 그렇게 삶의 결연한 의지를 전경화(前景化)한다.

 

이번 시집은 시인이 승가에 귀의하기 전에 정리한 속세에서의 마지막 시집이다. 이
시집을 ‘어머니’에게 헌정한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육친의 정을 넘어서서 그의 세계가 어떤 거대한 ‘바다’를 향하고
있을 때, 필연적으로 그는, 어쩌면 등가적 표상일 수도 있는, 자신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근원’ 앞에 자기의 세계를 바치게 된다.
“바람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간/영원히 촛불을 켤 수 없다”(「이제는 사랑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시구 하나를 들고 이제 두
손을 가만히 모아보자. 그 촛불이 밝히는 어느 먼 길의 입구까지나마 함께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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