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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파르마코너

Author
mimi
Date
2009-12-14 20:57
Views
10480

  

   시인, 파르마코너


 

 

                                                                     김명원(시인· 대전대 겸임교수)

 

 

윤준경 「시인이 칼」 (『우리詩』2009년 6월호)

김석규 「만춘」(『우리詩』2009년 6월호)

이수익 「처음으로 사랑을 들었다」(『유심』2009년 3/4월호)

손순미 「살구나무」(『우리詩』2009년 6월호)

김지유 「독거미」(『시와인식』2009년 봄호)

박소영 「눈먼 고기 이야기」(『정신과표현』2009년 5/6월호)

이은심 「항상 저 쪽이 환하다」(『시와인식』2009년 봄호)

문인수「장미란」(『창작과비평』2009년 여름호)

윤 호  「성쓰레기」(『채송화』2009년 제4호)

 

 

   『우
리詩』와 ‘월평’ 약속을 했던 일년이 다 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월평을 씁니다. 창밖으로는 푸른 수목 그림자가 어룽대고,
더위를 몰고 오는 습한 바람이 도심의 어깨 위에 둔한 몸을 드리웁니다. 언제나 그러하듯 마지막이라는 것은 회한과 슬픔을
동반합니다. 2008년과 2009년을 통과하면서 수많은 지면에 실렸던 시들 중 제가 눈이 어두워 놓친 시들은 없었는지요. 귀
밝게 보려고 애썼음에도 새로운 지평을 감연히 열려 노력하였던 시를 빠트린 것은 아니었는지요. 시의 정통성과 위의를 보존하면서
시정신의 높이와 깊이를 과감히 견지하였던 시를 다루지 못한 것은 아니었는지요.

  
일년, 지나고 나니 수월한 시간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타 시지나 문학지들의 청탁 원고와 겹칠 때는 급한 마음부터
동동거렸고, 마감일에 임박해서는 혈압이 오르고 두통이 시작되는 압박증후군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수확이었던
것은『우리詩』와 일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단이 계파화하고 시류가 혼탁해지고 시들이 파편화하는 현시대에서 흔들림 없이 고귀한
시풍을 건재하게 지켜 가는 동인 시회가 있다는 것은 감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찌든 세파에 혼몽했던 제 심경이 이곳에서 시를 한
모금씩 마실 때는 내장까지 맑아지는 시원함에 상쾌해지곤 했습니다. 모든 우리시회분들의 작품을 지면상 모실 수는 없었지만 이미 제
가슴에는 명징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하니 이 일년은 저에게 수십 년이 된 셈입니다. 멘딜로우(Adam A. Mendilow)에 의하면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의
시간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시간을 사람들 모두에게 동일한 연대기적 시간과 그 가치와 강도에 의해 측정하는 자기
혼자만의 심리적 시간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니콜라스 베르자예프(Nicholas Berdyaeff)는 세계와 관련하여 시간을
우주적 시간, 역사적 시간, 실존적 시간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스 마이어호프(Hans Meyerhof)는 시간을 자아와
연결시켜 개인의 과거를 구성하는 기억 구조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표면적 현재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저는 특별하였던
이 시간들을 저에게 빛나는 영감을 선물한 심리적인 시간으로, 계절의 순환처럼 인지한 시의 순환별 우주적 시간으로, 잊을 수 없는
기억의 표면적 현재로서 정리하겠습니다.

  
이번 마지막 월평에서는 시인들의 치열한 시적 열정이 어떻게 시에 스며들어 있는지를 가늠해 보려고 합니다. ‘조제’ 혹은
‘조제술’을 의미하는 플라톤의 ‘파르마콘’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명약이라는 치유의 의미도 있고, 극약으로서의 치사라는
의미도 있으며, 마약이라는 중독성의 의미도 있습니다. 시는 파르마콘이 암시하는 다양한 의미들 중에서 치유보다는 치사를,
일회성보다는 중독성의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기에 시인들은 아마도 치사까지의 극단을 밀고 나가는 열정으로
가득한, 습관적 마약처럼 시 쓰기를 중단할 수 없는 지독한 파르마코너들인 것입니다.

 

 

칼 가세요, 칼 가세요

 

나는 뜻한 바 있어

칼 가는 장인匠人이 되었네

녹슨 칼, 이 빠진 칼, 무디어진 칼.

번쩍번쩍 날이 서도록

시원하게 칼을 가세요

 

앓다가 마는 병이 되지 말고

가슴속 비장秘藏한 줄을 꺼내어

빛으로 닳아 없어지도록

칼을 가세요

 

그 칼로

음식을 만드세요

오래 먹을 맛 나는

영혼의 음식을

 

칼 가세요, 칼 가세요

썩어가는 영혼을 도려내세요

 

그러나

나도 시인이 되면

하나뿐인 목숨에 날을 세워

애꿎은 빈 도마만 치게 되겠지.

                    - 윤준경,「시인이 칼」전문(『우리시』6월호)

 

 

 

빈 뜰에 내리는 새소리 적막하구나.

 

어느덧 봄도 저물고

 

가는 봄으로 꽃잎이 흩날리니

 

시인은 또 한 편의 시를 남기겠구나.

                   - 김석규,「만춘」전문(『우리시』6월호)

 

 

 

  
윤준경은 시「시인이 칼」에서 칼 가는 행위를 시를 쓰기 위한 전 단계로 병치합니다. ‘칼’이 사물을 다듬고 깎고 자르기 위해
존재하는 존재태인 것처럼 시인에게도 언어를 벼르고 나누고 배치하는 엄밀한 심적(心的) 도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명품 창작물을
만들기 위해서 “녹슨 칼, 이 빠진 칼, 무디어진 칼”을 “번쩍번쩍 날이 서도록” 갈아야 하는 것은 단순한 사물 세공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칼로”써 “오래 먹을 맛 나는/ 영혼의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인 것처럼 윤준경의 칼은 “썩어가는 영혼을
도려내”는 비장의 무기가 됩니다. 그러니 시인이 시를 쓰고자 하는 각고의 결심은 단순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앓다가 마는
병이 되지 말”라는 당부 때문입니다. “가슴속 비장秘藏한 줄을 꺼내어/ 빛으로 닳아 없어지도록/ 칼을 가세요”라는 자신에게
까지를 포함한 부탁 때문인 것입니다. 한 편의 시를 만들어 내기 위해 부패한 영혼을 가차 없이 잘라내는 염결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 시는 보여줍니다. 더불어 “시인이 되면/ 하나뿐인 목숨에 날을 세워”야 한다는 단호한 각오를 드러냅니다. 서슬 푸르게 벼린
칼로 찌른 사물의 피 한 방울이 튀어 오르는 찰나에 싱싱한 이미지가 살아난다는 박용철의 말처럼 잘 갈린 심상과 시어로 기막히게
자르는 순간에 신선한 시가 만들어집니다. 쓸데없는 장식과 낡고 썩은 사족을 과감히 잘라 버리고, 여백과 사유를 간신히 남겨내는
그 곳에 근사한 시가 존재하는 연유입니다.

  
잘 벼린 칼론(論)의 결과물이 김석규의「만춘」입니다. 이 시에는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4행이 그대로 4연으로 이루어진「만춘」은
날씬합니다. 튼실한 근육조차 없이 뼈대만 앙상한 채입니다. 시의 1연은 적막한 풍경을 그려냅니다. “빈 뜰에 내리는 새소리
적막”하다는 고요의 정서는 2연 “어느덧 봄도 저물고”라는 기우는 심상을 만나 3연 “가는 봄으로 꽃잎이 흩날리니”라는 더욱
신산한 공허를 자아내게 됩니다. 여기에서 시가 끝난다면 저무는 봄에 대한 자칫 차분한 애절함에 그치겠지요. 마지막 연이
백미입니다. “시인은 또 한 편의 시를 남기겠구나”라는 절명적 절창인 것입니다. 소멸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근성,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속성, 이를 시로 써서 증명해 보이려는 본성, 이것이 바로 시인으로서의 천형입니다.

 

 

한 여성은

드디어 고막이 터져버렸다네, 깊고 캄캄하게,

너그러운 휴식을 맞이했다네, 아무렇게나 들을 수 없는

편안함이 그의 몸속으로 흘러들면서, 오래 오래,

 

처음으로 그는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네, 처음으로 그 세상의 남자가

여자를 만나서 온몸과 마음을 울리며 하던 말,

참으로 눈부신 열애의 고통을 떨어뜨리며

울부짖던 말, 한없이 숨 가쁜 사랑의 묘약이

백년이고 이백년, 삼백년을 거듭 견디며 내뱉던 말,

황홀한 눈물 없이는 차마 못 들을 그런 말, 말, 말,

 

강렬한 입맞춤은 귀의 내이 사이에서 공기압력에

불균형을 가져와 고막이 터져버린다는 것인데,

그런 ‘푸’ 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의 모든 소리들은

꺼지고 사라지고 말아, 그럼으로써 한 여성은 참으로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네,

 

오래오래 무너져 내려야 할

거대한 사랑의 지옥 같은 것!

                            - 이수익,「처음으로 사랑을 들었다」전문(『유심』3·4월호)

 

 

 

이발사 김씨가 살구나무에 목매달았다

죽은 개를 파묻었다

고양이를 파묻었다

슬픔이란 슬픔은 살구나무에 다 파묻었다

봄마다 살구나무

그 슬픔들을 추모하며

조화弔花 한 다발 피워 올렸다

살구나무 열심히 슬픔을 익혔다

어느 날 살구 사리알 주렁주렁 열렸다

슬픔은 완성되었다

                            - 손순미,「살구나무」전문(『우리시』6월호)

 

 

 

  
뿐입니까. 시인은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극도로 예민한 청력과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천착해 내는 놀라운 안목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수익은「처음으로 사랑을 들었다」에서 한 사람의 사랑이 내장하고 있는 극도의 통증이 어떻게 흘러나와 타자인
시인에게 전이되는 지를 세밀하게 보여줍니다. 대상은 “한 여성”이고, 그 여성의 “드디어 고막이 터져버”려서, “깊고
캄캄하게,/ 너그러운 휴식을 맞이했”으며, “아무렇게나 들을 수 없는/ 편안함이 그의 몸속으로 흘러들면서, 오래 오래”, 그러나
“처음으로 그는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음을 반어적으로 간파해 내고 있습니다. 듣게 된 그 말은 “처음으로 그 세상의
남자가/ 여자를 만나서 온몸과 마음을 울리며 하던 말”이고, “참으로 눈부신 열애의 고통을 떨어뜨리며/ 울부짖던 말”이고,
“한없이 숨 가쁜 사랑의 묘약이/ 백년이고 이백년, 삼백년을 거듭 견디며 내뱉던 말”이면서, “황홀한 눈물 없이는 차마 못 들을
그런 말, 말, 말”들인 것입니다. 이수익의 시에 의하면 “강렬한 입맞춤은 귀의 내이 사이에서 공기압력에/ 불균형을 가져와
고막이 터져버”리게 된다는 것인데, 그 여성의 귀가 터져버려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드디어 들리는 사랑의 고통스러운 형벌을 시인은
기막히게 옮겨 냅니다. “오래오래 무너져 내려야 할/ 거대한 사랑의 지옥”이라고요. 귀 먹은 여성조차 겁먹고 있을 지 모를
사랑의 주파수를 감지해 내는 귀를 가진 자, 바로 시인입니다.

  
손순미는「살구나무」에서 주검들이 파묻힌 힘으로 자란 나무가 어떠한 발현의 미학을 제기하는 지를 그려냅니다. 살구나무에 목매단
“이발사 김씨”, 파묻힌 “개”, 파묻힌 “고양이”, 그들의 육신이 사라질 때마다 “슬픔이란 슬픔은 살구나무에 다 파묻었”던
시간은 쌓여 “봄마다 살구나무/ 그 슬픔들을 추모하며/ 조화弔花 한 다발 피워 올렸”다고 노래합니다. 자신에게로 와 죽어 간
영령들을 추모하고자 “열심히 슬픔을 익혀”서 “어느 날 살구 사리알 주렁주렁 열”리게 했을 자연의 엄정한 법칙과 순리를 시인은
보고 있습니다. 죽음이 삶을 키워내고, 죽음이 삶으로 부화하는 과정은 이 시에서 명징하게 읽혀집니다. 그것은 손순미가 살구나무
배면에서 지켜냈을 슬픔이라는 뒷심이 어떻게 시로 형상화되는 지를 눈 밝게 그려내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당신을 먹고 나를 뱉는다

숭고한 배출, 꼬리쳐온 정자는

자궁으로 나와 방긋 내 아이라 불리는데

목을 휘감던 스파게티도 항문으로 나와

입을 빠져나간 회충처럼

내 말은 내 것이 되질 않고

혀끝 어디쯤에서 묻힌 촉매제일까

내보내진 순간 내 뼈가 아닌 말

올리브 오일 위를 따로 노는 면발처럼

나뒹굴어지며 끊어지는 말의 사고

오전 여덟시 여의도역을 들어서는

철야 마친 사내처럼, 간혹 역행하여

폐부를 치는, 뒷물의 효과도 볼 수 없는

내 것이 아닌, 내 말, 사랑해

나의 밥통, 위벽의 헬리코박터균처럼

나를 스물스물 기어나가는

독거미

                        - 김지유,「독거미」전문(『시와인식』봄호)

 

 

 

  
시인은 역설에 강한 자들입니다. 반어적 모순에 황홀해하는 자들입니다. 누구도 엿보거나 훔치지 못하였던 언어의 영역에서 과감히
언어를 찌르고 살해하고 해부하여, 잘 어울리지 않는 것들끼리 봉합해 보면서 그들 사이에서 피 튀기며 번뜩이는 충돌과 긴장의 맛을
즐기는 자들입니다. 김지유는「독거미」에서 파르마코너로서의 치사적 매력을 마음껏 내뿜습니다. 시의 1행부터가 만만치 않습니다.
“당신을 먹고 나를 뱉는다”라니요. “당신을 먹고 나를 뱉는” 행위는 치열한 욕망으로 대체한 극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때
이루어진 “숭고한 배출, 꼬리쳐온 정자”는 “자궁으로 나와 방긋 내 아이라 불리는” 것으로 성욕으로 대체한 욕구는 ‘아이’라는
성과물을 얻은 셈인데, “입을 빠져나간 회충처럼/ 내 말은 내 것이 되질 않고/ 혀끝 어디쯤에서 묻힌 촉매제일까”라고 시적
화자는 회의합니다. 왜냐하면 “내보내진 순간 내 뼈가 아닌 말”인 까닭입니다. “올리브 오일 위를 따로 노는 면발처럼/
나뒹굴어지며 끊어지는 말의 사고”인 이유입니다. “철야 마친 사내처럼, 간혹 역행”하기도 하는 “폐부를 치는, 뒷물의 효과도 볼
수 없는/ 내 것이 아닌, 내 말”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시를 쓸 때 처절하게 감지하는 고민과 고심과 끝없는 욕망을 이 시는 역설로 증명해 보입니다. 어느 누구나 시인이라면
사후에도 빛나는 영감으로 존재할 시를 쓰고자 합니다. 그러나 번번이 쓰고 난 후에 자신의 내공에 좌절합니다. 우주 만물과
교접하고 사통하고 낳은 수많은 아이(詩)들을 제 자궁에서 섭생하며 사랑으로 키웠음에도 그 아이(詩)들은 기대치만큼 근사하게 자라
주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하늘로부터 접지한 천형과 자신의 능력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는 통증이 도사립니다. 그것을 김지유는
“나의 밥통, 위벽의 헬리코박터균처럼/ 나를 스물스물 기어나가는/ 독거미”라고 표현합니다. ‘독거미’는 ‘파르마코너’로서의
상징물입니다. 단 한 편의 절대영감의 먹이를 노리며, 그것을 끝끝내 기다리면서 고독한 힘을 과시하는 존재, 그러면서도 자신이
품은 독으로 자신마저 해칠 수 있는 모순적 존재, 그것이 바로 시인인 것입니다.

 

 

 

1. 사랑에 눈먼

 


발이 부르트도록 저자거리를 헤맸었다지. 이 잡듯 눈에 횃불을 켜고 다녔지만 세상에서 제일 이쁘다는 애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는,
바람의 뒤를 쫓듯 종일 바삐 길을 밝혀 주던 해도 지쳤는지 눈이 동백꽃잎처럼 시뻘겋게 충혈이 되었었다지. 어둠이 십자군처럼
밤으로 쳐들어오는 저녁, 그 때 엄마를 찾으며 울던 아이가 잡았던 손을 놓고 엄마 하고 뛰어 내달리었다지. 애보다 조금 큰,
삼태기를 엎어 놓은 듯한 꼽추여자가 아이를 부여안고 숨이 넘어갈 듯 울고 있었다지. 남포등 켜져 있는 국밥집으로 가서 자초지종
이야기 하려는 순간, 물 한 되를 부어도 흘러내릴 것 같지 않는 곰보자국이 팔월보름달처럼 웃고 있었다. ―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

 

2. 무심에 눈먼

 


애는 서른한 살, 둘째는 스물여섯 살. 작은 애가 형하고 옷을 같이 입을 수 없다고 옷 좀 사달라고 투덜대는 걸 그냥 같이
입으라고 했다. 바지 밑단이 너덜너덜해져 옷 좀 잘 입고 다니라고 이르는 나를 쳐다보는 작은 애 ―엄마, 내 키가 얼만지
아세요? 형하고 십 센티 이상 차이 나는 것을 아세요? 그냥 모른 채 하는 거예요. ― 21세기 대명 천지에 볼 것 안볼 것 다
보며 살아가는 나, 그러나 자식 키 하나 제대로 볼 수 없는 심해의 눈먼 물고기

 

3. 소리에 눈먼

 

-
아버지가 딸에게 약을 먹여 눈을 멀게 했지. - 운명이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아버지의 욕심으로
눈먼 송화, 비천하고 딱한 生을 살다간 송화는 가고 없지만, 그녀의 소리는 구천을 떠도는 魂 같아서 서편동편 할 것 없이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아다니지. 무엇에든 미치면 보이는 것이 없다고 하지, 아버지는 눈먼 딸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을까?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생겨나고 어둠이 빛에 스러지듯 소멸하기도 하지. 해가 칼날같이 번쩍이는 지상에는
어떤 이유에서든 또 다른 송화의 아버지는 개망초 피어나듯 생겨나고, 세상은 심해다. 눈먼 고기들이 부딪치지도 않고 헤엄치며
살아가는

                                  - 박소영,「눈먼 고기 이야기」전문(『정신과표현』5·6월호)

 

 

 

  
박소영은「눈먼 고기 이야기」에서 “심해”인 “세상”의 “눈먼 고기들이 부딪치지도 않고 헤엄치며 살아가는” 비의(秘意)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눈 먼 고기”들이라고 표명하게 된 증례들이 시에 세 편 소개됩니다. 첫 째, “사랑에 눈먼” 편입니다.
엄마를 잃은 아이를 데리고 “이 잡듯 눈에 횃불을 켜고”서 “세상에서 제일 이쁘다는 애 엄마”를 “발이 부르트도록 저자거리를
헤맸”던 끝에 드디어 찾게 되었는데, 그 엄마는 “삼태기를 엎어 놓은 듯한 꼽추여자”이면서 “물 한 되를 부어도 흘러내릴 것
같지 않는 곰보자국이 팔월보름달” 여자였답니다. 아이에게 엄마는 누구와도 비교되지 못할 절세 미녀였던 셈입니다.

  
둘째는 “무심에 눈먼” 화자 편입니다. “작은 애가 형하고 옷을 같이 입을 수 없다고 옷 좀 사달라고 투덜대”자 그때서야 작은
애의 키가 “형하고 십 센티 이상 차이 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시적 화자는 말미에 이르러 “21세기
대명 천지에 볼 것 안볼 것 다 보며 살아가는 나, 그러나 자식 키 하나 제대로 볼 수 없는 심해의 눈먼 물고기”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세 째 편은 “소리에 눈먼”으로 “아버지가 딸에게 약을 먹여 눈을 멀게”한 ‘서편제’ 이야기입니다. 득음이라는 성취를 위해서
“아버지의 욕심으로 눈먼 송화, 비천하고 딱한 生을 살다간 송화는 가고 없지만, 그녀의 소리는 구천을 떠도는 魂 같아서 서편동편
할 것 없이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비극적 운명을 화자는 묘파해 갑니다. 이는 곧 “무엇에든 미치면 보이는 것이 없다고
하”는 예술지향적 극단성을 제기합니다. 시인들 역시 언어의 마력에 이끌려 자신의 상당 부분을 포기한 자들입니다. 극도로 편협해진
순수한 시각을 가지고서 추녀 엄마를 절세 미녀로 인지하고 있는 어린 아이의 ‘편파성’으로서, 자식의 키마저 무심해지는 일상
탈피의 ‘무모성’으로서, 오로지 시에 매달리는 ‘탐닉성’으로서 말입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시라는 마약에 도취된 ‘눈먼 고기’가
됩니다.

 

 

꽃 피는 것과는 관계도 없는 일이

꽃 지는 것과는 관계도 없는 일이

두 마디째를 우는 새와도 관계없는 일이

내 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수저통의 수저들이 죄다 등을 보이고

서먹하게 이파리들이 다 뒤집어져 있어도

산 채로 꺾이는 일만 없다면

나무 한 그루만큼만 꿋꿋하게 살자 했다

그대만 깊숙이 옮겨심고 들판처럼 멀리 나가자 했다

 

내 쪽을 헐어서

내일 모레 조금씩 아프면 그만이었다

 

문 밖에 세워두어도 슬픔의 주인은 변하지 않는 것

쓰라린 꽃에도 나비 날아드는 꿈이

내 사는 일의 치명적 낭비였다

                                    - 이은심,「항상 저 쪽이 환하다」전문(『시와인식』봄호)

 

 

 

  
이은심은「항상 저 쪽이 환하다」에서 시인으로서 시를 창작하는 고충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힐리스 밀러(Hillis Miller)는
시를 코코넛열매에 비유합니다. 절대로 깨지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딱딱한 껍질을 깨트리고 시를 빼내려는 안간힘은 늘 시인을 지치게
합니다. 시인이 토로하듯이 어쩌면 “꽃 피는 것과는 관계도 없는 일”로, “꽃 지는 것과는 관계도 없는 일”로 “두 마디째를
우는 새와도 관계없는 일”을 “내 사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겠지요. 어떨 때는 “그대만 깊숙이 옮겨심고 들판처럼 멀리 나가자
했”겠지요. 시를 생산해 낸 후 얼마나 힘겨우면 들판처럼 멀리로 도망하고 싶었을까요. 이는 “내 쪽을 헐어서/ 내일 모레 조금씩
아프면 그만이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시인이라는 숙명은 그리 녹록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문 밖에 세워두어도
슬픔의 주인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시인’이라는 영광스러운 고통의 월계관을 스스로 쓴 자, 피할 수 없는 시라는
독배를 마시고 피 흘린 자는 또 다시 ‘시’라는 문으로 들어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니 “쓰라린 꽃에도 나비 날아드는 꿈이/
내 사는 일의 치명적 낭비였”음을 알아차리게 되어도, 내일이면 또 다시 시인은 ‘치명적 낭비자’가 되어 시를 독하게 맞고, 시를
독하게 쓰고, 시에 의해 독하게 쓰러지고 있을 것입니다.

 

 

장미란 뭉툭한 찰나다.

다시는 불러 모을 수 없는 힘, 이마가 부었다.

하늘은 이때 징이다. 이 파장을 나는 향기라 부른다. 장미란,

가장 깊은 땅심을 악물고,

악물고 빨아들인 질긴, 긴 소리다, 소리의 꼭대기에다 울컥, 토한 한

뭉텅이 겹겹 파안이다. 그

목구멍 넘어가는 궁륭을,

궁륭 아래 깜깜한 바닥을 보았다.

 

장미란!

 

어마어마하게 웅크린 아름다운 뿌리가,

움트는 몸이 만발,

밀어올린 직후가 붉다.

                       - 문인수,「장미란」전문(『창작과비평』여름호)

 

 

 

  
시가 어떻게 사물과 사람을 뚫고 나오는지를 보여주는 시입니다. 문인수는 이미 시단에서 시선으로 검증된 분이기도 합니다. 절묘한
순간에 어떤 칼로 시의 맥을 끊어야 하는지, 죽음 직전에 어떻게 숨통을 겨누어 시의 이미지를 번쩍 살려내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터득하고 있는 시인입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시인이라는 파르마코너로서 회의나 권태가 없으셨던 분으로 보여집니다. 시 한
편마다 쏟아 붓는 열정의 힘이 매번 감지되는 까닭입니다. 지치지 않고 시라는 독주를 마시는 것을 보면 건강에도 이상이 없으신 듯
합니다. 부럽습니다.

  
‘장미란’은 2008년 제29회 베이징올림픽 역도 국가대표로 살맛 안 나던 국민들에게 금메달의 쾌거를 선사한 선수입니다. 단
하루 단 한 회의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매일 매회 자신보다 배가 넘는 무게를 들어 올리던 그녀는 “뭉툭한 찰나”를 “다시는
불러 모을 수 없는 힘”으로 단단히 집중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문인수는 “하늘은 이때 징”, “이 파장을 나는 향기라
부른”답니다. “가장 깊은 땅심을 악물고,/ 악물고 빨아들인 질긴, 긴 소리”라고 부른답니다. 이에 더하여 “소리의 꼭대기에다
울컥, 토한 한/ 뭉텅이 겹겹 파안”이라고 노래합니다. 이때 시인은 “목구멍 넘어가는 궁륭”을, “궁륭 아래 깜깜한 바닥”을
봅니다. 이는 “어마어마하게 웅크린 아름다운 뿌리”로 “움트는 몸이 만발”하는 순간이고, 그 거대한 시간은 “밀어올린 직후가
붉다”라는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동인(動因)이 됩니다.

  
떨어트리게 되는 역기를 매번 들어 올려야 하는 장미란도, 장미란의 영광스러운 고통을 노래하는 시인도, 사라질 순간을 붙들기 위해
감당해야 할 돌을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 Sisyphus)의 운명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자신이 견딜 수 있을 가장 큰 역기를
찾아내야 하는 장미란 처럼 시인들도 자신의 내공 중 가장 무거운 정점을 찾아 끊임없이 시를 쓰고 또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고를 지향하는 자들, 열정을 거두지 못하는 자들, 그중에서도 언어가 내장한 한계를 체득하여 언어의 무게를 견디며 시를
밀어올리는 파르마코너들, 시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중첩 되는 시입니다.

 

 

 

자기를 버린 사람들에게

자기를 태워

온기로 되돌려 주고는

높다란 굴뚝을 유유히 빠져나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늘을 향해 뭉게뭉게 날아오르는

하얀 영혼을 본다.

 

어둠이 내리면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로 떠오르는

그 별들을 또한 보게 되리라.

                         - 윤효,「성聖쓰레기」전문(『채송화』제4호)

 

 

  
이토록 고통에 부대끼면서 안간힘 하는 시인이 바라보는 궁극은 진정성의 발견에 있습니다. 스쳐 지나가도 될 사소한 것마저 꼼꼼히
살피는 진중함, 부정과 부조리를 완강하게 부인하는 저항심, 하늘을 외경시하는 겸허함, 죽어가는 것들을 긍휼히 여기는 연민의 정,
도모해야 할 이상적 세계를 꿈꾸는 사랑, 이 모든 것들이 시인에게는 사무치고 있습니다. 윤효는「성聖쓰레기」에서 버려지는 삶이
어떠한 모습으로 재생되는 지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남루하고 척박한 생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니, 바로 그것은
‘쓰레기’였을 것입니다. 쓰레기는 “자기를 버린 사람들에게/ 자기를 태워/ 온기로 되돌려” 주는 헌신을 감내합니다. 그리고선
“높다란 굴뚝을 유유히 빠져나와/ 별일 아니라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늘을 향해 뭉게뭉게 날아오”릅니다. 이 때 보게
되는 “하얀 영혼”은 “어둠이 내리면/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로 떠오르는/ 그 별들”이 됩니다. 시인과 시들의 종말입니다.
사회의 척박하고 어두운 곳에서 시의 밀실을 꾸려 작업하였던 시들은 어쩌면 시인의 고통을 모두 태우고 발열하는 물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쓰레기’가 ‘성聖쓰레기’가 되는 것처럼, 시인들의 비경제적이며 낭비적인 작업으로 여겨지던 시들은 어쩌면 자신을
모두 환원하고도 죽은 후마저 어둠을 엷게 비추는 숭고한 별들로 뜨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는 그럴 것이라 믿습니다. 시인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애니미즘의 예절처럼 시간이 이르는 강가에 이르러 엎디어
절하면서 네, 라고 입 맞추듯, 시인은 멈추지 못하는 시의 길을 갈 것입니다. 소멸이 다시금 생명이 되는 순간을 지키기 위해,
쓰레기가 별이 되는 성스러움을 놓치지 않고 기록해 갈 것입니다. 그동안 비천(卑賤)한 저에게 비천(飛天)할 수 있는 지면을
주셨던《우리시》와 제 글을 읽어주셨던 분들께 감사 말씀 올립니다. 내내 건승하시고, 초록 행복에 젖으시기를 기원 드리겠습니다.

                                     

 

                                                                                             - 2009년 6월 햇빛이 플래시를 켜는 아침에, 김명원 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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