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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화장실에 고양이를 가두지 마세요' 채은 '회문의 계절' 평론

Author
mimi
Date
2009-09-14 11:46
Views
14877

 왜 오렌지를 ‘오린지’라 했을까

- 김이듬 ‘화장실에 고양이를 가두지 마세요’·채은 ‘회문의 계절’의 역설의 묘미
-



문학이 사용하는 가장 유용한 무기 중 하나는 반어와 역설이다. 예컨대 어떤 고위 인사가
영어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오렌지가 아니라 오린지다”는 말을 정색하고 할 때, 이는 교육정책을 ‘인수’하려는 이들의 경박함을
자성(自省)적으로 조롱하기 위한 고도의 반어일 수 있다. 그리고 사교육비 문제를 깊이 고민한 어떤 정치인이 “자립형 사립고를 100개 만들면
사교육비가 준다”는 이상한 주장을 할 때, 이는 교육계의 상식을 뒤흔들기 위한 과격한 역설이라 봐야 한다. 문학에서 이런 수사학들은 중요하다.
진리를 확정하고 독점하려는 이들에게 문학이 보낼 수 있는 우아한 경고장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두 편의 시를 옮긴다.



“오늘 만난 사람은 좋은 사람/ 그녀는 말했어요/ 에단 호크는 배우만 했어야 했답니다// 오늘 만난 사람은 좋은 사람/
그는 말했어요/ 자신이 들고 가지 않으면 화장지를 가져다줄 사람이 없어요// 파파야의 나이트클럽에 데려가준댔어요/ 몽환적인 신시사이저를
들려준댔어요/ 그는 죽었지만 좋은 사람이었어요/ 아무도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았죠/ 우리들이 죽게끔 유도하거나 방치했답니다// 오늘 만난 사람은
좋은 사람/ 인디, 리버럴리스트, 진보주의자/ 그들이 말했어요/ 오늘 만난 사람은 좋은 사람// 오늘은 최악의 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날”(김이듬, ‘화장실에 고양이를 가두지 마세요’ 전문)

“부평 역전에서 너와 이별한 뒤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은, 이제 서서히 완성되어 간다 그동안 세 번 연어가 회귀했고 난 강둑에 앉아 저무는 미루나무를 바라본다 (…)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떠나버린 부평 역전 오늘도 한 여자를 사랑하고야 만 내게 도화사(道化師)는 달빛의 계곡으로 가라고 일러주었지만 히야신스가 머리를 눕힌 곳은
바람만이 알 뿐 앞으로 읽으나 뒤로 읽으나 뜻을 종잡을 수 없는 길거리에서 나는 장차 애인이 될 소녀들을 세심하게 고르다 이내, 반성한다 오
반성은 얼마나 매혹적인지 부평 역전에 너를 버려두고 온 뒤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심했었다”(채은, ‘회문(回文)의 계절’ 부분)


앞의 시는 김이듬의 두 번째 시집 <명랑하라 팜 파탈>(문학과지성사·2007)에서, 뒤의 시는 채은의 첫 번째 시집
<멜랑콜리>(천년의시작·2007)에서 골랐다. 김이듬의 시는 버려진 고양이의 말로 읽힌다. “오늘 만난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구절이 경쾌하게 반복되면서 고양이의 인간 품평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저마다 ‘좋은 사람’이기만 할 뿐, 버려진 고양이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서 저 경쾌한 반복구는 텁텁한 반어가 되고 “오늘은 최악의 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날”이라는 멋진 결구에 도착하면서 시는
묘하게 쓸쓸해진다.

채은의 시는 회문에서 출발한다. ‘자꾸만 꿈만 꾸자’처럼, 앞으로 읽으나 뒤로 읽으나 똑같이 읽히는 문장을
회문이라 한다. 이 시적인 소재를 시인은 연애 쪽으로 끌어당겨 한 편의 시를 엮었다. “앞으로 읽으나 뒤로 읽으나 뜻을 종잡을 수 없는
길거리에서” 시인이 암시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과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결국은 같은 것이 아닌가라는 역설이다. 이 감상적인
시의 여운은 길다. 사랑과 이별도, 욕망과 반성도, 결국은 회문 같은 것이 아닌가, 라고 묻게 한다.

이 시들은 모호하고
아름답다. 문학은 힘이 세고 단순한 말을 혐오한다.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 혹은 ‘그렇다 아니다 그것만’과 같은 말법은 문학의 금기다.
힘이 세고 단순한 말들의 뉘앙스는 앙상하지만, 힘없고 섬세한 말들에는 다채로운 뉘앙스가 있다. 뉘앙스의 우주는 깊고 넓다. 문학이 소중한 것은
모호한 뉘앙스들의 가치를 알고 음미할 줄 알기 때문이다. 뉘앙스의 차이는 정서의 차이이고 그것에 대한 존중은 개개 인간들의 차이에 대한 존중으로
연결될 것이기에 예삿일이 아니다. 우리는 한 편의 시를 놓고 벌이는 토론이 ‘오렌지냐 오린지냐’를 주제로 한 구강기(口腔期)적 논쟁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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