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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가, 무엇이 다른가?

Author
mimi
Date
2009-08-17 14:49
Views
11992
왜 <미래파>인가, 무엇이 다른가?

권혁웅(시인)


최근에 부상한 새로운 일군의 시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들은 어떤 미학을 구현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삶을 형상화하고 있는가? 이들이 소개한 새로운 어법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 짧은 글은, 그런 여러 질문에 대한 개괄적인 안내를 의도하고 있다. 이들의 시를 정의하는 몇 개의 키워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이들 시에 접근하는 우회로를 확보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 우회의 끝에서, 키워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강조해야 할 것이 있다. 이들의 시를 일군의 특징으로 묶지 말고, 먼저 개별적인 성과의 집적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어떤 특징이 드러날 수는 있겠지만, 늘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편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한 교집합이 아니라, 그 공통성 이후에 발견되는 여집합들이다. 이들이 지금의 시와 다른 무엇을 <각자> 보여주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지, 새로운 무엇을 <함께> 보여주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미래적>이라는 수식어는 그래서 늘 진행형이어야 한다. 그것은 완성형이 아니다.

1. 환상?
새로운 시들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흔히 이야기되는 것이 환상성이다. 최근의 시들에는 비사실적인 진술이 전면에 드러나 있으며, 이를 통해 이들 시인들이 사실주의 문학에서 누리지 못했던 정신의 자유를 그 극한까지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이들 시에 대한 비판의 논거이기도 하다. 환상의 극단적 추구는 만연한 개인주의의 징후이며(이들은 공동선 따위에 관심이 없다), 쇄말의 표상이며(이들은 독자의 공감을 차단한다), 조작의 증거다(환상의 표현은 이들 누구에게나 엇비슷하다). 마지막 주장이 다른 주장의 논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어서 이름을 가리면 누군지 알 수 없는 환상이 범람한다는 것이다. 이런 환상이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그 저변에 깔렸다.
내 생각은 다르다. 환상적인 표현이 두루 보인다고 해서 환상의 내용까지 같을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들의 시가 환상으로 간주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추측과 비교와 설명을 단순한 현재시제로 처리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이들은 자주 와 같은 구문을 로 통일해서 서술한다. 그만큼 시는 단순해졌지만, 대신에 풍부한 함의를 갖게 되었다.

그는 지붕 위에 올라 녹색 루즈를 바른다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집에서 쫓겨난 남자
무슨 소용이에요 어머니,
벽 속의 열대어들을 꺼내주는 칠판은 없는걸요
그는 오늘도 내가 준 지폐에 노란 매니큐어로 편지를 쓴다
넥타이를 매다 말고 나는 연인의 지느러미를 만져 준다
바닥까지 늘어뜨린 그의 지느러미에서
불에 타다 만 풀 냄새가 난다
지붕 위의 그가 불안해
지느러미를 잡아 흔들어 방바닥으로 떨어뜨린다
편지에 쓴 철자법을 검사하고 스타킹처럼 달라붙는 교복 안에 그를 집어넣고 밀봉을 한다
해질녘 돌아와 보면
연인의 끈적한 타액이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다
혓바닥이 스친 벽마다 비린내가 슬고 있다
나는 그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사료를 준다
그의 혀 끝에 달린 플러그를 내 입에 꽂고
그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밤이면 잊어버리는 그의 발음을 입 안의 채찍으로 상기시킨다.
연인은 밤새 오물오물 우우거린다
잠들기 전 나는 그의 혀와 지느러미를 둥글게 말아
내 몸 안에 밀봉을 한다
마지막 지퍼인 눈을 감는다

-이민하,「물고기 연인」전문


(그 제목으로 인해) 환상시의 대표적 예로 자주 거론되는 시집 『환상수족』에 실린 시다. 수업에 자주 빠지는 학생이자, 연인인 내게서 용돈을 타 쓰는, 무능한 남자가 있다. 그가 지붕에 올라간 것은 <집에서 쫓겨>났기 때문이고, 그가 물고기가 된 것은 학교에서도 <벽 속의 열대어들을 꺼내주는 칠판>이 없기 때문이다. 붙박이 어항 속의 열대어들은 체제에 갇힌 불쌍한 현대인들의 초상이다. 학교에서도 진정한 자유를 가르쳐주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그가 가진 <지느러미>가 이래서 나왔다. 나는 그에게 용돈을 건네고 그는 내게 고맙다고 <편지를 쓴다.> 가장이 바뀌었으므로 그는 루주를 바르고 매니큐어를 칠했고, 여자인 나는 넥타이를 맸다(이 행동이 남녀의 일상사를 대신하는 제유적 행동임은 불문가지다). <스타킹처럼 달라붙는 교복 안에 그를 집어넣고 밀봉을 한다>는 이상한 표현이 또 이래서 나왔다. 뒷부분도 같은 방식이다. 내가 그를 거둬 먹이므로 <사료>가, 하루 종일 겪었던 일을 얘기하는 그에게 맞장구를 쳐주었으므로 <플러그>가, 내가 질책했으므로 <입 안의 채찍>이, 그를 완전하게 안아주고 재워주었으므로 <지퍼>가 나왔다.
거의 모든 문장이 현재시제로 쓰였기 때문에, 사실판단을 필요로 하는 진술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환상으로 읽힌다. 그러나 그 현재시제를 추측과 비교와 설명으로 되돌리면 평범한 일상사가 드러난다. 이민하의 시는 고단한 현실, 피곤한 육체, 지극한 모성, 상처 받은 심사 등에 그 시적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를 애오라지 환상의 결과로 간주해서는 곤란하다. 환상이 미래형 시편들의 부정적인 공통 특질일 수는 없다는 얘기다.

2. 개인 은어?
최근 시들이 지나친 개인주의의 산물이라는 비판은 어떨까? 개인어 곧 혼자만의 隱語를 사용한다면 소통의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자기만의 발화방식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전통에 대한 대타의식이 아니라, 전통에 미숙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命名은 늘 사회적 함의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나의 기호가 사회적 쓰임의 그물망을 벗어나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물론 타당한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발화의 문맥에서도 도출될 수 없는 암호인가, 아닌가에 달렸다.


불-무당집, 죽은 할머니가 지저분한 손으로 자꾸만 권하는 약과

꽃-타오르는 이마, 할머니가 준 약과를 먹고 항문에 수북이 난 털

새-싫증난 애인의 입술, 처음 하는 질문의 얼룩

구름-불거진 文章, 한판 굿을 마치고 벗어던진 겹버선

집-색색의 지붕들, 죄다 팔레트에 넣고 섞으면 무슨 색일까, 똥색 혹은 쥐색

자동차-괴물들의 난교, 끝에 참 못 만든 핏덩이

그리고 겨울, 나랑 똑같이 생긴 조카의 책가방 속에는 귀를 찢는 클랙슨 소리가 티격태격 얽혀 있었다

뭐 하니, 무덤 만들어, 무덤은 왜, 삼촌 묻어주려고, 추울 텐데, 그럼 따뜻할 줄 알았어!

키스-척척해, 척척해

-황병승, 「똥색 혹은 쥐색」전문


황병승의 시에는 수많은 다국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다카하시 미츠, 니노셋게르미타바샤 제르니고코티카, 시코구, 리타, 키티, 아끼코, 메리제인, 쟝.... 이 수많은 인물들은 명명법이 요구하는 특정한 코드를 갖고 있지 않다. 어떤 때에는 어감을 위해서, 어떤 때에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위해서 활용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타기해야 마땅한 개인적 취향일까? 그럴 리가. 본래 이름이란 게 그렇다. 그 이름으로 불려야 할 어떤 필연성도 거기엔 없다. 이름은 타자에 의해 호명될 뿐이며, 타자에 의해 정체성의 지표로 활용될 뿐이다. 황병승이 부여한 이름들은 성(gender)과 상징과 문화의 경계를 뒤섞은 채, 그의 세계 곳곳에서 산다. 그들은 그렇게 혼종된 세계의 실재적인 거주자들이다.

『여장남자 시코쿠』에 실린 위 시 역시, 황병승식 개인 어휘 사전에 등재된 단어들이다. 일반적인 정의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특별한 개인어들처럼 보인다. 이런 개인어들이 교감을 차단한 개인주의의 산물이라고 섣부르게 단정해선 안 된다. 시인은 그 몇 개의 단어를 이정표 삼아 지나온 삶에 관한 성찰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불>은 신열로 앓던 나를 위해 굿을 한, 한 때의 추억에 관한 얘기다.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아픈 손자에게 자꾸 약과를 권했다. 뜨겁게 앓던 나는 그 약과를, 할머니의 사랑을 먹고 (항문에 털이 난) 어른이 되었다 (약과는 항문 모양이기도 하다). 약과에는 <꽃>무늬가 있다. 자라서 나는 연애를 했다. 싫증 난 애인의 입술은 입술이 아니라 <새>의 부리다. 나를 끊임없이 쪼아댔다는 뜻이다. 첫 키스 혹은 첫 잠자리의 얼룩이 거기 묻었다. 그 얼룩이 <구름> 모양이다. 거기에 관해 쓴 글은 내가 쓴 문장 가운데 가장 불거진(도드라진) 문장이리라. <한판 굿>이 처음의 그 굿이 아님을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혼을 하고나면 <집>과 <자동차>를 갖게 될 것이다. 누구의 삶이나 비슷하게 암담하고, 그래서 그들의 삶을 섞으면 똥색이나 쥐색이 나올 것이다. <괴물들의 난교>는 자동차 사고다. 그 충돌이후에 핏덩이가 된 육신이 남았다. 그러고 나서, 내가 자라던 때와 똑같은 삶이 <조카>에게서 반복된다. 새로운 세대는 서둘러 내 세대를 무덤에 넣으려 들 것이다. 첫 키스의 추억이 다만 <척척>하듯(그 다음에야 달콤해 질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황병승의 시는 수많은 해석의 지평에 열려 있다. 정신분석의 언어로 읽을 수도 있고, 페미니즘의 논리로 해석할 수도 있으며, 혼종적인 문화 코드로 분석할 수도 있고, 인간의 본질에 관한 우화로 볼 수도 있으면, 反종교 담론으로 간주할 수도 있고, 사회학적 맥락에서 검토할 수도 있다. 발화방식이 같지 않다고 해서 이 시인의 말을 무조건 개인 은어로 단정하는 건 온당한 처사가 아니다. 새로운 발화 발식은 궁극적으로 모국어의 표현 방식을 넓히는 효과를 낳는다. 미래의 기대 지평에 열린 시들이 추구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3. 엽기?


이들의 진술을 사실 판단으로 간주할 경우, 시의 표현에 묻은 잔혹성이 가장 먼저 두드러질 것이다. 醜의 카테고리 역시 처음부터 미학의 자식이므로 배척되어서는 안 되는 영역이다. 추나 불협화음은 美나 협화음의 相關者로서 성립한다. 그러나 추함 자체를 시적 가치로 내세운 시들이 온전히 제 몫의 발언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불일치의 변증법■이른바 미나 협화음의 타자로써만 그것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추는 미의 범주에 포괄된 바깥이다. 확실히 그 外心的인 힘과의 긴장은 긴장 없이 아름다운 것, 다르게 말해서 매개되지 않은 미적 가치보다는 우월하지만, 여전히 미나 협화음과의 관계로서만 기술 가능하다는 점에서 우월하지만, 여전히 미나 협화음과의 관계로서만 기술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차적이고 종속적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엽기 코드가 서정을 파기하고 조화로운 표상을 어그러뜨린다는 비판이 힘을 얻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김민정의 시와 같이 엽기성을 표 나게 내세우는 시가 없지는 않지만, 대개의 미래형 시들이 엽기를 주요한 내적 동력으로 삼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표면적인 잔혹함 이면에, 오히려 천진한 시적 전언이 숨어 있을 때가 더 많다.

구불텅한 골목이 어미들을 토해놓았다 골목이 토해놓은 어미들이 아이들을 토해놓았다 아이들을 토해놓고 어미들은 골목의 좁은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아이들에겐 그러나 토할 입이 없다..(중략)..숨 막히게 배꽃 피는 밤 아이들은 제 몸에서 성기를 잘라냈다 아이들의 성기가 커다랗게 부풀어 골목을 가득 채워도 골목은 끝내 입 없는 아이들을 토해내지 않았다(「골목」부분)

매일 저녁 어미들은 대형 슈퍼마켓에서 아기들을 한 근씩 산다 얼음 상자 안에서 아기들이 빨갛게 웃는다(「어미들」부분)

?네 몸을 보여줘, 네가 내게 말하자 나는 네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가고 있었드랬는데 몸은 그러나 좀체 쑤셔 넣어지지는 않고, 비틀리고 비틀리기만, 네 눈이 내 몸을 도로 뱉어내었을 때는 내 몸 구석구석 잘 펴지지 않는 구김들만 가득했다는 이야기인데, 말씀이야, 어느 너의 동공에도 사글세 한 칸 얻어들지 못하고, 나 그저 잘 접어 만든 종이인형처럼 앉아만 있었다는,(「잘 접어 만든 종이인형처럼」부분)

주름 자글자글한 소녀를 만난 적 있지/어제가 오늘과 살짝 옷을 바꿔입는 구멍 앞에서/그 늙은 소녀가 자꾸 풀을 꺾는 것을 지켜보았어/나는 풀들의 꺾인 뼈를 맞추며/늙은 소녀와 내가 아기를 낳으면/뱀이기도 하고 소년이기도 한/할미이기도 하고 소녀이기도 한/아기가 태어날지 궁금했다구(「뱀 소년의 외출」부분)

김근 시집 『뱀 소년의 외출』에서 고른 구절들이다. 이 구절들은 무시무시하지만, 그 뜻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구절마다 살펴보자.?가난한 동네 얘기다. 골목마다 가난한 어미와 아이들이 산다. 어미가 아이들을 낳았고 그 골목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토할 입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곳을 벗어날 운명이, 그 힘든 삶을 토설할 입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마침내 <아이들은 제 몸에서 성기를 잘라냈다.> <배꽃>을 염두에 둔다면, 이는 자위를 하거나 포경을 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가난은 대물림되었다. ?이번 아기는 고기나 생선이다. 장 보러 나온 어미들이 보기에, 고기와 생선이 먹음직스러웠던 모양이다. ?이번엔 사랑 얘기다. <네 몸을 보여줘>란 말 앞에는 네가 보고 싶어라는 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 눈에 차지 않아서, 네 주목을 받는 데 실패했다. 난 <잘 접어 만든 종이인형처럼. 무력했다. ?

시인이 붙인 주에 따르면, <뱀 소년>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복(蛇福, 蛇伏)을 말한다. 사복은 뱀 아이란 뜻이다. 시인은 짐짓 <그가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지는 『삼국유사』에서 확인되지 않는다>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사복이 뱀 소년으로 불린 것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일어서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복의 어미는 원효가 사복이 전생에 공부할 때 그 경전을 실어 나르던 암소였다. 암소에게 수고를 끼쳤으므로, 사복이 業을 씻기 위해 이생에서 아들로 태어났다. 시집의 제목이 된 이 긴 시가 사복의 목소리를 빌려, 조숙한 소년의 성장기를 말한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소녀>는 이 어미의 분신이기도 하고(이 얘기에서 사복은 띠풀을 뽑은 구멍 안에 어미를 업고 들어가서 장례를 지낸다. 그 구멍 안이 극락이었다), 희망을 잃어버린(그래서 늙은) 첫사랑의 대상이기도 하다. 첫사랑을 잃지 않았다면 그녀와 나는 아기를 갖게 되었을까? 그 아기는 나를 닮았을까, 그녀를 닮았을까? 시에서 말하는 것은 엽기가 아니라 회고담이다.

김근의 시는 조숙한 유년과 가난한 삶, 그럼에도 잃지 않은 인정과 풍광들, 일상잡사에 관한 체험을 위주로 한다. 시가 길고 표현이 격하지만, 그의 시는 우리가 아는 통상의 서정시와 맥락을 같이 한다. 엽기는 그의 코드가 아니며, 나아가 새로운 시들의 주된 코드도 아니다.

4. 감각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시 독법은, 시인이 마련한 감각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이다. 전언은 시를 이해하는 궁극의 심급이 아니다. 시를 낳고 이루어가는 것은 감각이지 전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언은 시를 마무리 지을 때 최종적으로 갖추는 의장과 같은 것이며, 그래서 최초의 감각과는 다른 결론을 내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나는 거의 도달한다 이젠 무엇에 대한 의식을 끄고 싶다 停電.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일정한 밝기로 감동하고 싶지 않다 약속한 장소에 가고 싶지 않다 停電.
아주 늦게 가서 그가 남긴 분통에 미지근한 물 부어주고 싶다 이해해.
이젠 잠시 停電하고 싶다 그런데 잠이 안 오네.
스위치스위치스위치스위치스위치... ...나는 거의 도달한다.
반복이 잠을 불러올 것을 경험으로 안다 나는 충분히 지루하다 停電.

너무 많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나는 구겨진 은박지 같다 나는 뒤척인다.


-김행숙,「두 개의 전선」전문

시집 『사춘기』에 실린 시다. 전언을 핵심에 두면, 당연히 이 시는 불면증에 관한 시다. 나는 <의식을 끄고> 잠들고 싶다. <정전>이 된 것처럼, 스위치를 끄고 캄캄하게 잠들고 싶다. 먼저 잠들어 꿈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가, 왜 늦었냐고 터뜨리는 분통(<憤痛>이자 <粉桶>인)을 달래주고 싶다. 양을 세듯, 스위치란 말을 반복하면서 나는 거의 잠에 도달할 것 같다. 자리에 누워 나는 이미 오래 지루하다. 그런데도 잠은 안 오고, 나는 <구겨진 은박지>처럼 뒤척일 뿐이다... ...


그런데 전언 너머에 숨은 감각을 찾아 나서면, 시가 다른 방식으로도 구조화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감각의 中核에 있는 것이 <스위치>다. <나는 거의 도달한다>에 숨은 감각은 성적인 것이기도 하고 상상적인 것이기도 하다. 거기엔 의식이 끼어들 틈이 없다(상상은 상상할 수 있는 임계치까지 올라간다). 나는 정신이 없다. 그가 내 몸의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일정한 밝기로> 감응하고 싶지 않다. 내 몸에 흘려보낸 전류를 끊고 싶다. 첫 번째 스위치(2행)가 그와의 접속을 가능케 하는 입구라면, 두 번째 스위치는 그와의 전선(<電線>이자 <戰線>인)을 끊고, 자기발전을 가능케 하는 입구다. 내 안을 들고나며 나는 충분히 반복했고 충분히 지루하며 그래서 거의 도달했다. 그 후에는 잠이 쏟아질 것이다. 내 안의 환한 빛 때문에 나는 <은박지처럼> 반짝이며 뒤척인다... ...


감각은 전언과는 다른 통로다. 전언과 감각이 들어맞지 않는 것이 최근 시의 특성만은 아니다. 멀게는 이상에서 가깝게는 박상순에 이르는 많은 시들이 그랬다. 이런 시들은 불가피하게 반어적이거나 역설적이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세계의 복잡성을, 세계 내의 풍요로운 형상과 이중적인 내면을 형상화하기 위한 방법론일지도 모른다. 나는 최근 시를 설명하기 위해 감각의 운동방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현대시학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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