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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을 ‘기품’의 소설로 읽기 위한 하나의 시론

Author
mimi
Date
2010-04-29 08:23
Views
19102

[2010 경향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달려라, 그만 □□□□□  

 

- 김애란을 ‘기품’의 소설로 읽기 위한 하나의 시론 / 박준석

 

 다시-읽기에
실패하는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같은 이야기를 읽을 수밖에 없다.(롤랑 바르트, 『S/Z』)

 

0.

 

  ‘기품’1)의 소설로 김애란을 다시 읽어내자는 제안인 이 글은 기존의 비평에서 비롯된 불편함과
당혹감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김애란이 아니니 장담할 수는 없지만, 원치 않는 방식으로 자꾸 “사랑”하려고 해서 왠지 부담스러운
상황이랄까. 사랑한다는데 뭐라 하기 그렇지만 그간 드러난 비평과 같은 방식이라면, 그것은 “관심 없는 이성의 고백처럼 언제나
조금씩 지루”해진다.

 

  소설 그
자체가 품고 있는 가능성을 열어서 어떤 위기(crisis)를 만드는 것이 비평(critic)의 존재 이유라면, 기존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의제를 설정하려는 시도를 망설일 이유는 없다. 안정적인 이론에 기댄 일관된 해석을 비용으로 치르더라도, 이
글이 실험적 접근이라는 뜻에서 불안한 시론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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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김상민기자

 

 

1.

 

  먼저 소설 그
자체가 품고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어떤 해석이 나오는가에서 시작하자. 여기서는 이미 나온 해석 하나와 견주어 대비 효과만 드러내려
한다. 변명 아닌 변명이 되겠지만 한정된 지면 탓에 이런 선택은 불가피하다. 대신 기존의 비평에 맞세우고 싶은 김애란 소설
하나하나에 대한 세세한 비평은 적절한 자리가 언젠가 마련되면 제시하겠다.

 

  어느
인터뷰에서 백낙청은 「노크하지 않는 집」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뒷부분에 가면 주인공이 이 사람 저 사람의 방에 몰래 들어가
보는데 방에 대한 묘사가 한 자도 안 틀리게 똑같이 나오지요. 그 집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획일화된 익명성의 세계인지를 부각시키는
수법이겠지요. 하지만 그러다보니까 잠시 들여다본 방에 대한 묘사로는 안 어울리는 표현들이 나와요. 서랍 중 한 칸은 ‘언제나’
어떻다느니, 휴대폰 충전기가 ‘항상’ 충전돼 있다느니 하는 식이지요. 자기 방과 똑같은 방들이라는 점을 이런 양식화된 표현으로
제시하는데, 내가 보기에 이것은 첫 작품의 미숙성이라 해야 할지 아무튼 작위적인 냄새가 나는 대목이고요.” 이 소설이 ‘획일화된
익명성의 세계’를 다룬다고 읽는 방식은 평자들에 따라 강조점이 조금씩 변주되긴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일사불란하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어떤 실패의 자기반성적 후일담인 「노크하지 않는 집」을 다시 살펴보자. 처음 이사 왔을 때 지녔던 호의는 오래 가지
못하고 접근의 포즈는 곧 포기된다. 하지만 타인은 아무런 소통이 없더라도 노크도 없이 이미 내 안에 들어와 나를 교란시키고 삶의
안정을 깨뜨린다. 이런 존재론적 불안은 이내 불신과 적대와 두려움으로 바뀐다. 낯설어서 무섭고 무서워서 더 낯설게 된다. 그
실패의 과정에서 타인은 타자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괴물로 간주된다.

 

  그러다 발생한
도난사건의 범인을 잡겠다고 몰래 들어가 본 나머지 방들이 똑같다는 것은, 타인들이 괴물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의
확인과, 동시에 타인들의 눈에 보이는 나는 바로 내가 상상했던 타인이라는 역전을 보여준다. 괴물로서의 타인은 내 공포가 투사된
변형된 에고에 불과하고, “반쪽짜리 얼굴”이 바로 나이기도 하다는 깨달음. 타인이 자신이 타인에게 보인 태도의 산물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타인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의 산물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무단 침입 이전에 진행됐던 서사의 흐름과
그 이후 전개를 살피면, 이렇게 소박하게 읽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이렇게 ‘노크 없는 집’도 아니고 ‘노크하지 않는 사람’도
아닌 「노크하지 않는 집」은 장소가 사람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영향력에 관한 생활 공포 소설인 셈이다.

 

  백낙청이 ‘안
어울리는 표현들’이라고 한 ‘언제나’와 ‘항상’은 그 역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두고 쉽게 ‘작위적인 냄새가 나는
대목’이라고 하는 것은, 묘사의 동일성에만 초점을 맞춰 유기적인 서사를 조각낸 채 이론으로 질러가버리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텍스트 자체에 주목하여 매끄럽지 못하고, 공백 같아 보이고, 어긋나고 이지러진 부분들을 아울러 그 안에서 자기 충족적으로
이루어지는 해석을 구성해내야 한다. 토머스 쿤 식의 사료 읽기2)는 소설에서도 선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획일화된 익명성의 세계’라는 비평과 그 변주에 비해 이런 해석은 그저 상식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경험 유무가 결정적이지는 않겠지만) 소설에 형상화된 것과 같은 주거환경에서 거주한 체험이 있는
경우라면, 이런 소박한 해석에서 훨씬 풍부한 현실적 함의를 끌어낼 것이다.

 

이런 대비는 어떤
해석이 옳은가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초점은 어떤 비평이 소설을 최선의 것으로 만드는가, 그 비평을 따르면 소설에서는 어떤
가능성의 공간이 펼쳐지는가, 그리고 독자인 우리에게는 어떤 삶과 세상이 가능하게 되는가, 라는 관심에 있다. 그래서 앞서 말한
불편함과 당혹감은 아쉬움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물론 이런
해석의 차이가 기존 비평의 오해가 아니라 필자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어느 지인의 표현을 고쳐 써보면, 오해는 하나의 해석을 두고
해석한 사람들만 진지하고 나머지는 다 우스워하는 현상이고, 착각은 하나의 해석을 두고 나만 슬프게 되고 나머지는 다 박장대소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내 착각인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제안하는 김애란 읽기가 더 낫다는 것은 착각일
뿐이고 기존의 해석이 더 올바른 것이라 하더라도, 그런 올바름이란 지나치게 정확해서 정확하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부정확한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은 여전하다. 나는 이론과 더불어 성공하느니 소설과 더불어 실패하는 길을 택하겠다.

 

2.

 

  김애란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수만 가지 일들이 우리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고. 어디
인생만 그럴까. 상관없어 보인다고 성큼 치워버린 것들이 비평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품’의 소설로 김애란을 읽기 위해 항상
염두에 둬야 할 점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김애란 소설의 디폴트 설정을 추려내는 것도 도움이 되겠다. 물론 각각의 소설에 이
기본설정이 모두 부각되는 것은 아니고, 최근작으로 올수록 이런 요소들은 점점 배경으로 물러나 은근하다.

 

  머리맡에 붙여
두면 좋을 ‘포스트잇’ 다섯 장. (1) (때론 트라우마를 포함하는) 상처 속에서 (2) 복원력이 있는 인물이 (3) 상상과
모순어법으로 세속에 대처해 간다. (4) 방으로 대표되는 공간구조가 인물에게 미치는 영향과 (5) 인물이 채택하는
재서술(redescription)과 그 효과에 주목하기.

 

상처라는 세속.
“모든 부드러움에는 자신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잔인함이 있다.”(「나는 편의점에 간다」) 가느다란 비웃음 소리나 누군가의 작은
눈짓 하나에 어깨가 처지던 경험이 있다면, 눈에 잘 띄지 않아 항의하기도 곤란한 작은 행동들의 폭력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생겨나는 상처가 관계와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오래 지켜보는 김애란 소설의 바탕에는 이런 ‘부드러운 잔인함’의 세속이
도사리고 있다.

 

  복원력.
“스카이 콩콩을 타는 나의 운동 안에는 뭐랄까, 어떤 ‘정신’이 들어”(「스카이 콩콩」) 있다. 그 정신은 우선 복원력이다.
살면서 상처를 겪더라도 새로-튀어 오르는(rebondissement) 정신의 보이지 않는 용수철이자 탄성인 복원력. 상처 입은
자들은 자주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든다면 견딜 만하다”는 전통에 기대지만, 재구성된 이야기가 겉보기에 그럴싸하다고 해서
그 속내마저 고통스럽지 않다고 짐작하는 것은 섣부르다.

 

  실종의 상처를
다루는 「사랑의 인사」를 보자. 이 소설은 ‘나’의 말처럼 “별 목적은 없”는 이야기로 보는 것이 오히려 최선이다. “다만 한
번의 인사, 사랑의 인사”를 나누려는 절실함으로 충분하다. 실종이란 애도가 불가능하리만큼 어려운 사건이다. 실종 이후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가 없고 그렇다고 체념하며 받아들이지도 못하니, 상처는 아물지 못하고 트라우마는 치유되지 못한다. 작별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기에 ‘한 번은 만날 수 있어. 결코 만날 수 없을 거야’라는 식으로 진자운동을 하는 베케트적 딜레마 역시 견뎌내야만
한다. 이것이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 일인지 공감이 된다면, 소설의 마지막에 왜 ‘내’가 “문득,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상상과 모순어법. 상상은 세속의 상처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내밀한 사적 세계를 창조하는 방어책으로 쓰인다. 물론 보상적 허구로서의 상상은 요새이자 감옥일 수 있다. 상상이
몽상을 넘어 망상이나 허언증으로 흐르지 않으려면, 복원력을 지원해주는 정서적, 사회적 둥지가 필요하다. 거기에 유머와 명랑이
곁들여진다면 더욱 좋다. 김애란의 인물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둘러싼 세속을 모순어법이라 불러도 될 형태로 파악해갔으리라
짐작된다. 관점을 이동시켜 한 가지 사태의 두 측면을 다루는 모순어법처럼, 김애란에게는 A이면서 동시에 B라는 태도를 취하려는
듯한 어휘가 많다. 소설 속 인물들은 현실은 잔인한데 상상은 따스한 분열된 세계에서 살아가고, 동일한 사태에 대한 모순적인 서술을
오가면서, 상처로 일그러진 자아를 재구성해 나간다. 종종 부모의 부모 노릇을 하는 아이와 아이의 아이 노릇을 하는 부모, 즉
애어른과 어른이의 세계가 도드라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방이라는
문제. “모든 게 ‘방’ 때문이다.”(「성탄특선」) 김애란 소설에서 방이라는 문제는 인물이 처한 불평등한 주거 공간과 생활 여건을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공간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롭 쉴즈,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에서)고
말해도 좋을 정도랄까. 이 방이라는 문제가 김애란 소설에 담긴 여러 사건들의 방향에 현실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인물의
습관이나 기질보다는 공간 구조에서 비롯되는 효과에 주목하는 것이 낫다. 때론 장소가 사람의 정체성에 끼치는 영향관계에 주목하여
‘장소를 가진 사람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지리학의 시선(애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도 도움이 된다.

 

  재서술과 그 효과. 김애란은 A를 A라고 하지 않기
위해 내내 골몰한다. 전경화되는 A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동시에 A라고 하지 않으려는 시도가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질문해야 한다. 작게는 ‘기도 중에 담배를 피우면 안 되지만, 담배를 피우는 중에 기도를 하는 것은 된다’는 전환이 삶에
가져오는 효과가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게 드러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크게는 비트겐슈타인적인 물음인 ‘우리가 습관적인 수많은
언어게임을 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어떻게 될까?’를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게 묻는다.

 

  자신을
끊임없이 재서술하는 「영원한 화자」는 이전에 일어나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의 과거를 재서술함으로써 자율성을 획득한다. 지하철에서
겪은 사건들을 통해 자신의 우연성을 깨닫게 되고, 동시에 ‘내’가 만나러 가는 헤어진 애인조차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러나
만났다고 믿고 있는 모르는 사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타인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타인의 자율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자신을 서술하고 있는 것들을 재서술하는 방식을 통해 자율성을 만들어가려는 이 소설에서는, 이런 재서술의 재서술의
…… 재서술이 “흐르는 물에 손을 베이지 않고도 칼을 씻는 방법”으로 제시된다.

 

 「스카이
콩콩」에서는 비행시간의 실패를 추락시간의 성공으로 재서술해내자, “비행에 성공한 각각의 비행기들이 약속한 듯 모두 추락하기
시작”한다. 실패가 문제가 아니라 실패의 형식이 어떠한가에 따라 사람들을 움직이는 변화가 생겨난다. 혼자 그대로 넘어지면
창피하지만, 넘어질 때 재주를 넘으면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법이다. 세속의 변화를 가져오려는 전략인 재서술을 서술적 차원의 다시
쓰기나 고쳐 쓰기로 축소해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달려라,
아비」에서는 아비가 달린다는 처음의 상상이 아니라 아비에게 ‘선글라스’를 씌우는 나중의 상상에 방점이 놓여야 한다. 처음의 상상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나쁘면서 불쌍하기까지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단지 자신이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비를 가해자로 만드는 것도 거부하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그런데 나중의 상상은 “비록 세상에서 가장 시시하고 초라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그런 사람도 다른 사람들이 아픈 것은 같이 아프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각성에서 시작된다. 아비에게 선글라스를 씌우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우선, 선글라스는 아비의
정체를 가린다. “사실만큼 그 사람을 잘 말해주는 것이 없다면, 아버지는 분명 나쁜 사람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버지는 내가 아직
모르는 사람”이 된다. 아비에게 덧씌워졌던 기존의 서술에서 벗어나, 재서술을 통해 자율성을 만들어갈 기회가 내게 생긴다. 더
중요한 점은, 선글라스로 아비에게도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쓰지 않았을 때와 똑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를 수 있는 세상.
달리는 아비를 상상한 것이 내 마음에 선글라스를 씌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 아비에게도 ‘비인생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기회를 선물한다. 처음에는 나를 위해서 달리던 아비가, 나중에는 아비 자신을 위해서도 달리게 된다.

 

  재서술을 포함한 기본설정을 염두에 두고, 서술이나
사건이 아니라 인물의 태도와 화법과 말투(tone)에 주목한 채 해석을 끌어내면, 김애란 소설의 시작이며 동시에 끝인 ‘기품’이
드러난다. 자, 이제 거기로 가자.

 

 

3.

 

“워 더 샤오숴 더 쩌웨이 짜이날?”

 

“제 소설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리 쩌리 위안 마?”

 

“여기서 멉니까  ?” (「그곳의 밤, 여기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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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김상민기자

 

  “안녕하세요. 가늠할 수 없는
안부들을 여쭙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안녕 하고 물으면, 안녕 하고 대답하는 인사 뒤의 소소한 걱정들과 다시 안녕 하고 돌아선 뒤
묻지 못하는 안부 너머에 있는 안부들까지 모두, 안녕하시길 바랍니다.”(「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넉넉하게
아우르면 김애란 소설은 우선 안부를 묻고 전하는 이야기, 말하자면 하이-스토리(hi-story·역사를 허스토리herstory나
히스테리컬한 이야기hystory 등으로 바꾸는 방식에 빗대어 만든 조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안부에는 개인적인 소소한 안녕을
넘어선 어떤 윤리가 깃들어 있다.

 

  이 ‘안부에
깃든 윤리’는 “관계에선 의도하지 않아도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걸 깨닫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이런 상처를 알아채기 위해서는 독특한
감수성이 요구된다. 자신에 대한 의무와 타인에 대한 의무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상처를 감지하는 감수성뿐만 아니라, 자율성이든
자기창조든 아님 일상의 자잘한 욕망이든 우리의 사적인 추구가 어떻게 그로 인한 상처를 가리는지 깨닫는 감수성. 김애란 소설은 그런
상처를 둘러싼 지형을 어슴푸레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특별한 종류의 잔인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태도와 화법과
말투(tone)에서 드러나는 윤리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인식과 개념에 손쉽게 잡히지 않지만, 이런 윤리가 그려낼 세속은
기품 있는 개인과 품위 있는 사회에 가까워진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는 기품 있는 개인이 사는 품위 있는 사회란 ‘사람들이
서로에게 모욕을 주지 않고, 제도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모욕을 가하지 않는 사회’라고, 혹은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능숙하게 조절하면서 매주 자신이 절어 있는 해로운 관념들을 씻어낼 줄 아는 사람들과 중독된 채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 간의
차이가 계급을 구분짓는 새로운 구별법으로 부상”(하니프 쿠레이시, 『친밀감』)하는 세속이라고 느슨하게 말해 두자. 김애란 소설에
(쓰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새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상처를 줄이려는 기품 있는 개인들이 살아가는 세속의 속살을 은근하게
보여주는 점이다.

 

  편의적으로 해석해 버리곤 하는 「나는 편의점에
간다」를 이런 관점에서 잠시 살펴 보자. 그저 훔치는 사람이 아니라, 편의점으로 상징되는 무관심이 정상적인 세속의 규칙을 깨뜨리는
사람인 도둑 청년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가슴 위로 뒤집어져 올라간 여고생의 치마를 다소곳이 내려”준다. “거대한 관대”에 걸맞은
거대한 충돌과 사소한(?) 관심에서 나온 사소한 접촉이 겹쳐지는 이 장면을 어떻게 자리매김3)하느냐에 따라서 소설 전체의 해석은
달라진다. 개인의 기품과 사회의 품위의 바탕에는 존중이라는 가치가 필요하고, 존중은 표현하는 실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상기할 때, 장면의 자리는 선명해진다.

 

 이쯤해서 이 글의 제목인 ‘달려라, 그만’을 붙잡고,
기품의 소설로 김애란을 읽는 것이 기존의 비평과는 달리 어떤 가능성과 이어지는지 조금 우회해 보자. 「달려라, 아비」는 소설의
처음이 상상의 시작이 아니라 이미 반복이었다. 마찬가지로 소설의 끝도 상상의 마무리가 아니라 다시 반복될 것을 예고한다. 그런데
그간 「달려라, 아비」는 가족 로망스의 변형으로 읽거나 정신분석학적으로 읽거나 화해, 자기긍정, 명랑의 이야기 등으로 읽어 왔다.
하지만 그것은 이 소설이 트라우마적 상처를 품고 있다는 것과 화자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시점의 이중성을 간과한 채 김애란이 애써
피하고자 했던 틀로 되돌아가는 해석에 그친다. 기존 비평이 괄호에 집어넣은 무엇인가가 일관된 해석을 구성해내는데 비용으로
지불되어도 아깝지 않은 것인가.

 

  물론 시점의
이중성 등을 서술의 단순한 틀로 간주하고 서술 내용에 주로 관심을 기울인 비평이라는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그러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소설 속 인물들이 기품을 유지하려 하고, 때론 작가가 그들의 기품을 드러내려 하는데도, 정작 그 점에는 눈감은 채
해석을 한다면, 인물들은 적어도 두 번 비참해지기 때문이다. 한 번은 자신들의 처지와 한계 때문에 (이미) 소설 속에서
비참해지고, 두 번은 그럼에도 유지하려는 기품마저 존중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독자 곁에서 비참해진다.

 

  아비가 달리는
상상은 소설 바깥의 편견과 상처의 세속을 고려할 때 계속 가져가도 문제가 없겠는가. 필요할 때까지는 외려 그 상상을 더욱
키워가는 것이 낫겠는가. 언젠가는 그런 상상이 없어도 되는 때가 오는 것이 좋겠는가. 상상이 필요할 때까지는 아비가 달리고,
상상이 필요 없어도 되면 이제 그만 달리게 되는 것이 낫겠는가.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소설을 대하는 태도도 결정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이 글 제목에서 ‘그만’이 그만(only he)인지 그만(stop)인지 아님 둘 다인지는 미결정인 채로
남는다. 기품을 괄호치지 않는다면 이런 미결정 상태를 유지하고 거기에 따른 긴장을 간직하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가령, “누구도
정말이냐고 묻지 않고 누구도 거짓말이라고 대답하지 않”(「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은 채, 펼쳐진 허구적 진실을
깨뜨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해석.

 

 「종이
물고기」에서 글쓰기 방식에 주된 관심을 기울이는 것 역시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체류 외인인 ‘그’의 탁월한 브리콜라주 현장인
포스트잇 글쓰기에 관심을 두는 것은 분명 당연하다. 문제는 비평적 관심의 비중과 분별력일 텐데, 그것은 ‘소설의 인물’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낫다. 예를 들어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어린 빌리 엘리어트가 욕실과 권투장에서 연습하던 춤은, 나중에 커서
발레 무용수가 된 그의 춤추기의 기원과 방식을 보여주는 장면인 것인가. 하물며 소설마저도 이렇게 묻고 있다. “그렇다면 그나 나는
왜 이런 낭비를 하고 …… 당신은 왜 이 낭비를 아직도 견디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물음에 긴절하게 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응답의 하나가, 신문지로 도배‘된’ 방이었던 그의 처지(fate)를 포스트잇으로 도배‘한’ 방과 엮어 읽으며 그의
운명(destiny)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리라.

 

  신문지로
도배된 방에서 “점점 번져가는 검은 얼룩”에 “글자들은 …… 죽어나갔다.” 남루하고 어두운 현실에 들러붙은 ‘글자들’의 운명은
죽음이다. “그는 그 얼룩이 벽면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삼켜 버릴까봐 겁이 났다.” 가난이라는 계급적 운명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이
만들어갈 자율성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 겹쳐진다. 그가 태어난 “똥고개”, 가난은 냄새만으로도 두려운 것이니까. 하지만 아들은
“아직도 아버지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세속의 법칙을 따라가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그런 게임은 “잘해야 비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서만은 아니다. “얼룩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그곳에 ‘살게’ 만들어준 아버지의 고마운 미련함”과 실금을 막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창조해낸’ 아들의 우스운 절실함의 대비에서도 드러나듯이, “얼룩과 싸우듯 벽면 위에 신문지를 덧바르고 또
덧바르던 아버지”가 더 가난과 계급에 가깝다면, 실금과 싸우듯 벽면 위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또 붙이던 아들은 더 기품과 자율성에
가깝다.

 

  “포스트잇들이 그동안 벽면에서 서서히 진행되던 균열을 모두 가리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선택한 자기
창조의 과정이 처한 이중구속을 드러낸다. 자신을 둘러싼 한계인 벽면에 균열을 일으키지만, 동시에 자신의 현실적 삶의 조건을
비용으로 치르게 되는 곤경. ‘그’에게 남은 것은 자기 서사를 발명해서 자신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데 다다른 딱 그만큼의, 상큼한
희망이 아닌 “입냄새” 나는 희망 뿐이다. “가쁘게, 그러나 팔딱팔딱” 뛰는 희망이자, 현실의 한계인 담에서 “금방 떨어”지고,
“다시 떨어”지는 희망. 이런 희망이라는 조건에 갇힌 그에게, 빌리 엘리어트가 발레 무용수로 탈바꿈할 기회를 만들어준 로열 발레
스쿨은 무엇이고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만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품는 것이 “그것은 어쩌면 희망 때문일 것”이라는
‘그’의 말을 무력한 외마디로 끝나게 하지 않는 길이다.

 

4.

 

  이 슬픈
세속에서는 애써 존중을 실천하려 해도 개인이 기품을 갖는 것과 사회를 품위 있게 만드는 것 사이의 틈새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살아남는 것이 시급한 세속에서 시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개인들로서는 우선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것 외에 달리 뾰족한
방법이 있을까. 김애란의 인물들이 개인의 탈바꿈과 사회의 틀바꿈 중에서 아직까지는 전자에 주목하는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한계에서 기품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세속에 대처하고 있다.

 

  이런 김애란의
인물들은, 비록 스스로 말하는 소설적 “정직”(김애란은 『달려라, 아비』의 ‘작가의 말’에서 “소설 안의 어떤 정직”을
언급한다)의 산물이라고 하더라도, 과잉-개인화되어 거대한 사적 영역을 갖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과소-사회화되어 작은 공적 영역을
갖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기품의 차원도 서술이나 사건이 아니라 인물의 태도와 화법과 말투(tone)에서 연하게 드러나므로,
개인적 품성으로 축소되거나 사회적 예의로 흐려질 위험이 있다. 여기에 가로등 시점―핫하지도 쿨하지도 않은 채 은근하게 조명하는,
인칭의 시점이라기보다는 색채와 온도의 시점―이라 부를만한 김애란의 독특한 시선이 겹쳐지면 그런 의심은 커진다. 개인적으로 은은하되
사회적으로 희미하고, 사적으로 따스하되 정치적으로 미적지근한 인물들. 그래서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는 데는 빠르지만 성찰을
자극하는 데는 느리다는 비판이 여럿 눈에 띈다. 딱히 뭐라 할 것 없는 온당한 지적이지만, 그럼에도 되묻고 싶다. 그것은 김애란의
한계인가 아니면 오히려 독자의 실패인가.

 

  기품의 차원을
소설 안-밖에서 외면하지 않고 김애란이 그려내는 인물의 ‘두께’를 만나게 되면, 타인을 이전처럼 무심하게 대하기가 조금은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이제 그 사람은 여전히 어떠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단지, 그러한 사람인 것만은 아니니까. 성찰과 변화를
끌어내는데, 상품의 소비가 아닌 마음의 사용, 그런 마음-씀을 독려하고 고양시키는 영감을 주는 가치(inspirational
value)로는 정녕 부족한 것일까.

 

*

 

  “가난한 집에서는 아기가 운다.”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극도의 가난을 주제로 한 글쓰기 연습
수업에서 대부분의 학생들 글에서 아기가 울더란다. 아기가 배고파서 울거나, 아기가 자기 똥 위에서 울거나, 아기가 병이 나서
울거나, 아기가 …… 울거나. 정형화된 전형성은 때론 공감을 일으켜 위안과 축복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가난한 집에서 일제히
아기가 울 때에는 이런 축복은 그대로 저주가 된다. 지금껏 김애란 소설을 다룬 비평에서는 ‘일제히’ 아기가 울었던 것은 아닐까.
다시 읽어낸 비평에서도 아기가 ‘참신하게’ 울었다는 소문에 그친 것은 아닐까.

 

 
다시-읽기(re-read)가 다시 읽기(read again)와 다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잊고-읽기(un-read)가 요구될지
모른다. 그간의 비평적 관점을 잊고 김애란 소설 그 자체가 품고 있는 가능성을 읽어 내는데 이 짧은 시론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김애란의 가난한 집에서는 ‘아기가 울지 않는다’. 지금껏 김애란 주위에 아기 울음소리가 가득했더라도, 걱정 말자, 기회는
많으니. 무엇보다 김애란 소설은 “쓰기를 재촉하는 텍스트”(바르트)니까.

 

 

 각주

  1)이 글에서 기품(decency)은 아비샤이 마갈릿의 논의와 연관되지만 그의 논의를 그대로 따라가지는
않는다. 기품은 개인적 품성의 차원에 한정되지 않고, 계급이나 정의와 더불어 그리고 그 이후에 부각되는 사회-정치적 주제이다.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decent society)는 정의로운 사회보다 실현 가능성이 있으며 규범적으로도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굳이 준별해서 미리 말하자면 김애란의 인물들도 정의로운 사회보다는 품위 있는 사회 쪽에 가깝다. 아비샤이 마갈릿,
『품위 있는 사회』, 신성림, 동녘, 2008.

 

  2)홍성욱의 설명에 따르면, 토머스 쿤 식의 사료 읽기란 “텍스트에 드러난 명백한 오류를 발견하고 이를
이해하는 것”이고, “텍스트의 모든 구절이 이해되고 텍스트에 있는 모든 변칙적인 점이 사라질 때까지 이런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홍성욱,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 기술』, 문학과지성사, 1999. 4장을 볼 것.

 

  3)이런 논의에서는 딱 들어맞지 않더라도 개념적인 설명보다 소설을 소설로 밝혀 주는 것이 훨씬 소설적
가치에 어울린다. 이 소설보다 늦게 2006년에 나온 이사카 고타로의 『마왕』에는 “커다란 홍수는 막을 수 없다 해도, 그래도 그
속에서 소중한 것은 잊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치마를 올려주는 사람’을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 속 인물들은 ‘시체가
되어 광장에 거꾸로 매달린 무솔리니의 애인 클라라의 치마가 뒤집혀지자, 이 광경을 보며 즐거워하고 흥분한 군중 사이로 한 사람이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치마를 올려주고 자신의 허리띠로 묶어서 뒤집히지 않도록 해주었다’는 대화를 나눈 후에
이렇게 덧붙인다. “사실 나는 늘, 최소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치마를 올려주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사람들이 날뛰고 소란 피우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겠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무섭기도 하고. 하지만 최소한
있지, 뒤집힌 치마 정도는 바로잡아줄 줄 아는, 뭐 그게 무리라면 치마를 바로잡아주고 싶다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고
생각해.”

 

 

 

 

[당선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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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권 밖에 있어 다른 관점이 보였다”

 

   지난달 21일 경향신문 회의실. 평론부문
심사위원들은 당선작을 뽑은 후 당선자에 대해 비상한 호기심을 보였다. 당선자의 필명은 ‘제혜석’, e메일 ID는
‘ironist’. 의미심장한 필명과 ID를 가진 당선자는 “국문과 전공자로 보이지 않는다” “도발적이고 참신하다”는 평을
받았다.

 

  당선자의 본명은 박준석씨(37). 박씨는
“평소 ‘혜석’이란 이름을 좋아했는데 ‘제’를 붙이니까 ‘내 해석, 재해석, 온갖 해석’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어 필명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ID에 대해서는 “한국 사회에서 아이러니가 부족하다”며 “ ‘대문자 진리’가 많은 나라에서 그걸 비트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박준석씨는 ‘프리터 족’(고정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이다. 경희대학교 국제통상학부를 중퇴한 뒤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왔다. 박씨는 “학사 경고를 연달아 세 번 받아 제적당했다. 공식적 사유는 ‘학업 능력 미달’ ”이라며 “ ‘대한민국
고졸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다”고 말했다. 박씨는 당선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화를 했을 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다.

 

  그는 도서관과 다양한 시민 강좌와 세미나를
통해 필요한 공부를 했다. 시립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을 오가며 “도서관 서가에서 기술 관련 서가를 제외한 모든 서가”를 섭렵했다.

 

  문학평론에 도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 문학과
영화 평론에 관심은 있었지만 써놓고도 그냥 지워버리기 일쑤였다. 올해는 친구의 응원과 권유에 힘입어 신춘문예에 처음 응모했다.
김애란의 소설에 대해 ‘기품’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한 평론으로 주목을 받은 박씨는 “김애란에 대한 모든 평론을 거의 다
봤는데 내가 본 것과 많이 다른 것 같아 글을 쓰게 됐다”며 “문학 제도와 전통의 밖에 있기 때문에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가 많이 두꺼워져서 저 같은 시민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대중지성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아카데미 바깥에서 공부하고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유투브를 통해 예일대 강의도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 열어주지 않는 국내 대학보다는 예일대가 훨씬 나은
것이죠.”

 

박씨의 존재는 한국 사회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로 보인다. 그는 꼭 하고 싶은 이야기로 “일반 시민에게도 대학 도서관 문을 열어줄 것”과 “늘 내게 힘이 되어주는
조카 현지·재우·수안에게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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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키워드로 작품 해석 돋보여”

 

  

  총 35편이 응모된 문학평론 분야는 작가론,
작품론, 주제론 등 다양한 방향에서 젊은 세대의 감수성을 2000년대 작가 중심으로 접근해보려는 응모작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동시대성을 파악하려는 현실감각과, 그런 현장성을 통해 문학의 본질에까지 삼투해 들어가려는 의욕을 보인 글이 많았다. 이런 과정에서
대상 텍스트에 대한 성실하고 설득력 있는 분석과 해석이 주조를 이루었지만, 도발적이면서도 새롭게 문제 제기를 시도하는 모험과
도전이 다소 부족했다는 한계가 공존했다. 서론에서 본인이 중심 틀로 제시한 키워드나 문학이론들을 본론에서 잘 체화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201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심사를
맡은 평론가 이광호씨(서울예대 교수·사진 왼쪽)와 김미현씨(이화여대 교수)가 응모작을 분석하며 의견을 나누고 있다. | 정지윤기자

당선작으로 최종 논의된 글은 총 3편이었다.
소위 ‘미래파’ 중심의 많은 시 평론 응모작들 중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서정의 진화와 무의식의 향연-황병승론>은 황병승
시의 새로운 서정의 모습을 모순된 주체의 의식과 무의식의 갈등에서 찾으면서 권위나 제도를 거부하는 시인의 본능에 주목한
글이었지만, 커다란 틀에서 시인의 위치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특화시키는 작업이 다소 미흡했다. <‘우리’를 이탈한, ‘우리’
세계의 낯선 이야기-박민규론>은 이기지 않는 야구, 외모를 보지 않는 사랑, 공이 아닌 폼을 보내는 탁구가 중심인 박민규
소설이 환기하는 국가나 인류 등의 ‘우리’라는 집합적 위치를 깊이 있게 문제 삼았지만, 작품 해설적인 서술로 흘러 기존 논의들과의
차별점을 스스로 무화시키는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달려라,
그만-김애란을 ‘기품’의 소설로 읽기 위한 하나의 시론>은 글의 형식이나 텍스트 접근 방식이 다소 투박하고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김애란 소설을 계급이나 정의의 문제로 확대될 수 있는 ‘기품(decency)’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나가는 패기가 돋보였다. 특유의 감각으로 김애란 소설이 지닌 ‘세속의 속살’과 ‘소설적 정직’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점도
매력적이다. 이 글에 내재한 가능성들이 꾸준한 노력을 통해 제대로 결실 맺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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