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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으로 빚은 하얀 영혼의 접시”

Author
mimi
Date
2011-02-23 22:14
Views
10955

 


                 나석중 시‘촉감’(문학의전당)  해설                       

                

              

                         “슬픔으로 빚은 하얀 영혼의 접시”

                                                                                                                                                             
                                                    마경덕(시인)

 

 


  
한동안 눈을 감고 어둠 속에 앉아있었다. 잠을 스쳐가는 빗소리가 나지막이 들리고 앞마당 묵은

살구나무가 빗물에 머리를 감고
시인은 잠을 털고 일어나 비를 맞으러 마당으로 걸어 나오고…순간

시인도 한 장의 적막한 풍경이다. 나석중은 차분하고 나지막한
어조(語調)로 풍경을 바라보다가

그 속으로 걸어들어가 번번이 풍경이 되고 만다. 시인은 시적대상에 초점을 맞추고 독자를 그 풍경

속으로 말없이 끌어들인다. 삶의 연륜과 관조(觀照)의 힘이 느껴지는 그의 시들은 애틋한 여운을

남긴다. 돗자리에 누우면 스며드는
골풀 냄새 같은 것, 산허리를 감고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같은 것,

빈가지에 홀로 우는 새 울음 같은 것, 구만리 허공을 헤엄쳐 온
안족(雁足) 같은 것…뼈가 저리는

이 쓸쓸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석중의 시편은 처량하고 맑은 여음(餘音)으로 하염없이 서럽다.

시적 사유는 명상적이고 고요한데 저릿저릿 온몸으로 퍼져가는 힘찬 기운이 있다. 그 서정적인 여음

속에 로뎀나무 숯불처럼 오래
꺼지지 않는 뜨거움이 있고 바람에 우는 대숲처럼 서늘한 기운도 있다.

고저와 강약을 아는 나석중은 시를 켤 줄 안다. 몸을 한
바퀴 돌아 나온 떨림, 그 떨림이 닿는 자리에서

다시 울림이 시작되어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눈물로 상처를 치유하는 시적
방법론이

나석중의 힘이다. 시인은 울림을 얻기 위해 몸을 조율하고 켜고 켠다. 당겨야 할 때와 늦춰야 할 때를

아는 나석중은
분명 울림통이 좋은 시인이다. 그가 연주한 시들은 누군가에게로 날아가 고요한

떨림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내 잠을 스쳐가는 빗소리

  앞마당 묵은 살구나무가

  머리를 감고 있다

 

  옷을 벗고 마당에 나와

  맨몸으로

  가뭄 끝 단비를 맞는다

  누군가 헝클어진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차디찬 볼을 핥아주던

  따뜻한 염소 혓바닥

 

  한밤중에 와 닿는

  비의 손끝

 

  이 달디 단 입맞춤을

  사랑에 주린 사람이 아니면

  알지 못하리라

 

                                                                        -「촉감」전문

 

  
살구나무도 사람도 모두 가물어 시의 무게중심은 ‘쓸쓸함’에 쏠려 있지만 그 무게가 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헝클어’짐을 통해
시인이 보여주는 것은 ‘주림과 메마름’만이 아닌 ‘외로움’이다.

외로움이 잠자는 시인을 일으켜 세우고 빗속으로 불러내어 머리를
쓰다듬는다. 촉감은 직접 몸에

닿는 것인데 그렇다면 닿지 못하는 것들은 얼마나 서러운 것들인가. 차디찬 볼을 핥아주던 혓바닥

같은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모처럼 쏟아지는 빗물에 살구나무가 찌든 머리를 감는 밤, 한밤중

옷을 벗고 나와 맨몸으로 받는 비의
손끝이 그대로 전해진다. 어둠 속에서 비를 맞는 시인의 맨발은

수만리 허공을 젓다가 바람에 부르튼 기러기의 발이다. 발로 뛴
세월이 한순간 멈춰 서서 비를 맞는다.

눈물마저 가물어 눈물을 흘리듯 비를 맞는다. 이렇듯 처량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나석중의 시적 특질이다.

 

 

  엊그제 모란시장*에 가서 여기저기 기웃거린 적 있다

  사람과 상품과 시끄러운 소리가 요리조리 섞이는 걸 보는 재미로 어릴 적

  어머니 꽁무니를 놓치고

  그렇게 복작대던 여름 끝에 와서, 더위가 한풀 꺾이었다는 말은 한철 잊힌

  외로움이 다시 시작된다는 말

 

  홀로 산성을 오르는 길

  떡갈나무 숲을 지나 산사의 풍경 소리를 내고 살갗에 와 닿는 이 서늘한 바

  람은 지금 어디서부터 오는 길인가?

 

  불현듯, 더위가 한풀 꺾이었다는 말 속에는 짐승이 살찌고 나무가 마르고 나

  무 같은 사람도 꾸둑꾸둑 여위어갈 것이니

 

  하염없이

  빽빽한 토란잎 그늘에서 기어 나온 작은 풀벌레 같을 것이니

 

  *모란시장 : 성남에 있는 5일 장

 

                                           -「더위가 한풀 꺾이었다는 말」전문

 

   

  
“한풀 꺾인 더위”는 ‘한철 잊힌 외롬’과 맞물려 있다. 즉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삶이 치열하였다는

것인데 ‘치열’은 곧
‘일상’이요, ‘현실’일 것이다. 그동안은 잠시 잊었던 것들이바람이 서늘해지면서

되살아나, “짐승이 살찌고 나무가 마르고 나무
같은 사람도 꾸둑꾸둑 여위어 하염없이 빽빽한 토란잎

그늘에서 기어 나온 작은 풀벌레 같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시적 주체는
무성한 토란잎 그늘에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풀벌레’ 같은 ‘외로움’이다. 나무가 마르듯이 생각은 늘어 가는데 무엇인지도 모를


풀벌레 같은 것들이 다시 기어 나와 또 한철 몸을 말릴 것이다. ‘여름의 끝’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다니던 아이가
치맛자락을 놓쳤을 때의 기억으로 다가와 잠자는 고통을 흔들어 깨우고 시인은

그 고통에 기꺼이 몸을 내준다. 서늘한 바람은
토란잎처럼 무성한 ‘외로움’이 시작되는 계절. 시인은

‘외로움’과 자주 몸을 섞는다. 시인의 몸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저장되어 있다. 블랙홀과

같은 ‘구멍’에서 하염없이 솟아오르는 ‘슬픔’은 곧 詩로 환치된다. 시인에게 친밀한 ‘외로움’은 그를

담금질(quenching)한 ‘고통’의 기록들이다.

 

 

  그의 일생은 어느 여름날

  심심해서 던진 물수제비의 흔적이 아니었다

  그건 나무의 울음이었다

  나무가 울고 간 파문이었다

 

  붙박인 삶이라고

  사는 것이 고만고만한 나무는

  슬프고 괴로울 것 없을 것이라 단정하지만

  뿌리는

  하루에도 몇 리를 물 길러 나갔다 와서

  끙끙 앓는 것이었다

  생이 아파 우는 것이었다

  저 수만 마리 이파리들 뙤약볕 아래 나와

  아우성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우듬지에

  새의 둥지를 무상으로 세들이고 바깥소식을 듣긴 하지만

  저 산 너머가 궁금하여

  마음으로 가서 세상을 읽고 오는 것이었다

 

  한 덩이 파문을 던져보는 것이 소원인

  나무는

 

                                                     -「나이테를 위한 변명」전문

 

 

 
위의 시에서 ‘나이테’는 울음으로 환치된다. 파문처럼 둥근 테를 지닌 나무의 나이는 하루에도

몇 리를 물 길러 나갔다 와서 끙끙
앓는 ‘울음의 흔적’인 것이다. 붙박인 뿌리는 일상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억압된 삶이다. 육체적인 감각이나 마음에서
발생하여 언어로 표출되는

이미저리(imagery)는 사물과의 교감을 통해 이루어진다. 시적 대상이 몸에 들어 와 생성의 시간을

거치고 표출 되었을 때 울림은 더 커진다. 시적 묘사의 구조는 관찰이 작품의 중심축이다. 시인의

거시적 안목은 미시적 관찰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는데, 시인의 눈은 미세한 떨림도 놓치지

않는다. 시적 떨림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나석중은 자연을
끌어들이고 간접의 방식으로

대상과 이어진다. 자연에서도 그가 선호하는 것은 ‘나무’이다. 그래서 그의 시들은 담백한 ‘식물성’에

가깝다. 또 그가 즐겨 사용하는 시적 장치는 과거를 통한 현재의 반성, 즉 회고적 시점이다.

”한 덩이 파문을 던져보는 것이
소원인 나무”는 산 너머가 궁금하여 마음으로만 세상을 읽고 오는

소원을 이루지 못한 현재 또는 현실이며, 파문은 이루어야할
‘미래’이다. 그의 심정적 토로에는

낡아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을 ‘외로움’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보여주는데 심층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기반성은 간접적일 때 효과가 더 크게 느껴진다.

 

  이 비밀 언제 숨겨 놓았나

  서럽고 번쩍 반갑기도 한 이 울음 불혹의 나이테를 돌며 우는

   이 나무의 둥근 울음을 어떡하나

 

  잡목 숲을 지나 우리는 이 소나무 숲에 자주 들리곤 해서

  언젠가 삭정이 같은 몸 기대어 몸도 마음도 아파서

  그때, 그 여자의 제비꽃 입술 파르르 떠는 것 같았지만

  두 눈은 노란 민들레꽃처럼 웃고 있었지만

  나 오늘 혼자 어쩔 줄 모르네

  이 짙푸른 나무의 정적을 뚫고 들리는

  배고픈 아이의 옹알이 같은 이 나무의 오래 된 울음을

 

                                                        -「 나무의 둥근 울음」전문

 

  
나무는 죽어서야 제 몸에 숨긴 나이를 보여준다. 몇 해를 살았는지 그 나무를 심은 사람만이

나이를 알 수가 있다.
식수(植樹)날짜가 적혀 있지 않는 고목의 나이를 우리는 대략 짐작만 할뿐이다.

평생 제자리에서 맴돈 나무의 나이는 둥글다. 그것은
나무가 울었던 눈물의 흔적, 제 몸에 새긴 둥근

파문이다. 잡목 숲을 지나 이 소나무 숲에 자주 들리곤 하던 시인도 언젠가 몸도
마음도 아파서

삭정이 같은 몸 기댄 적도 있었다. 어느덧 불혹이라는 나이테가 생겨 다시 숲에 드니 노란

민들레꽃처럼 웃던 사람도
자취 없고 어쩔 줄 모르는 혼자이다. 그때서야 아이의 옹알이 같은

이 나무의 오래 된 울음을 듣는다. 울음에 익숙한 시인은
‘나무의 울음’ 까지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열어놓은 창을 통하여

  옆집 갓난이 울음소리가 나팔꽃처럼 넘어온다

  배가 고픈지 무서운 꿈을 꾸었는지

  보채며 우는 아가 울음소리에도 애 엄마는 어디 갔는지

  울음소리는 더더욱 가시에 찔린 듯 자지러진다

  안타까움을 넘어 은근히 부아 끓어오르고 가슴 졸이고

  지금 한밤중 남한산성 너머 잠 멀리 달아났어도 아가야

  제발 소용없는 울음을 멈추어라. 아가야,

  나는 아가를 마음으로 보듬고 간절히 다독여 준다

  아가는 울면서도 창 넘어간 내 마음을 받았는지

  금세 거짓말처럼 조용해진다. 적막해진다

  옆집 아가는 신통하다. 나도 이제 마음의 창 열어놓고

  집 나간 그를 맞아야겠다

 

   -「창」전문

 

  
창은 ‘소통’을 할 수 있는 ‘출구’이다. 창이 닫히면 ‘소통’은 끊어지고 창은 ‘벽’이 되고 만다.

아이울음이 나팔꽃처럼 넘어
오는 곳도 열린 ‘창문’이다. 아이에게 엄마의 부재는 절망에 가깝다.

자지러진 울음소리에 시인의 단잠은 남한산성 너머 멀리
달아나버렸다. 잠을 놓친 시인은 은근히

끓어오르는 부아를 누르고 마음으로 울음을 보듬고 간절히 다독여 준다. 창 넘어간 마음을
받았는지

아이는 금세 거짓말처럼 적막해진다. 마음의 창마저 열리는 시 한편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시인이

사는 그 집 창문에는 필시
색색의 고운 나팔꽃이 창을 오르고 있을 것이다. 아이의 울음을 받아 삼킨

나팔꽃의 분홍빛 귀는 먹먹해져서 아침마다 더 크게
뚜뚜-- 나팔소리를 문틈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서정시의 품격을 갖춘 나석중의 따뜻한 시편들은 ‘동정’ 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괜찮다

  몸 한구석에 귀뚜라미가 울어도.

 

  보이지도 않는 귀뚜라미는 왜 와서 우는지

  요즈음 보이지도 않는 아들에게 섭섭한 생각이 들 때

  나는 깜짝깜짝 뉘우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나에게 서운한 때 많았을 것이라고.

 

  그러니 아들아 너는 걱정하지 마라

  모든 게 철부지 해 가는 이 느티의 심사

  너도 일가를 이룬 나무, 몰아치는 비바람 잘 견디며

  귀뚜라미처럼 괜히 와서 우는 일 없도록.

 

  해가 짧아지면서 오른쪽 무릎에서 악기 소리가 나지만

  몸이 알아서 현 한 줄 심심치 않게 튕겨주는 일

  이제 뼈가 닳고 가슴이 바트는 일도

  괜찮다. 괜찮다

 

                                                                     -「느티나무」전문

 

   
적인식의 최종적인 완성은 이성적 분석보다는 감성적 교감일 것이다. 자신에게서 출발하여

타자를 거쳐 돌아오는 원점회귀는 ‘우리’는
‘한 몸’이라는 걸 말해준다. 늙은 느티나무의 뿌리는

떠나간 자식에게 닿아있다. 해가 짧아진다는 것은 겨울이 가까이 오는 것이고
한해가 저문다는

것이니 생의 황혼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무릎이 ‘운다’는 것은 ‘뼈가 닳고 가슴이 바트는’ 일이다.

부모를
떠나 일가를 이룬 자식에게 몰아치는 비바람을 잘 견디라고 당부하는 시인은 상처 많은

늙은 느티나무다. 무릎의 통증도 “몸이 알아서
현 한 줄 심심치 않게 튕겨주는 일”이라고 괜찮다.

괜찮다 위로한다.

 

 

  그러고 보니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눈물이 약이라는 말을 하고 싶구나

  그 눈물이

  내 몸 한구석 남은 상처 하나까지

  꾸둑꾸둑 마르게 하고 있다

 

                                                                      -「그믐께」부분

 

 

  
시인의 상처를 다독여주는 것은 ‘눈물’인데 시를 구축(構築)하는 도구로 쓰이는 “울음”은 시인이

이 세상을 건너는 한 방법이다.
시인의 인식이 진실에 도달하는 순간 감동은 확산된다. 구체성이

사라진 추상성은 공허한 이야기가 되어 독자에게 닿지 못하지만
언어라는 시의 질료가 구체성을

가질 땐 시적 감응(感應)을 불러일으킨다. 내 몸 한구석 남은 상처 하나까지 꾸둑꾸둑 마르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눈물’인 것이다. 현실 속에 침윤(浸潤)된 화자의 슬픔은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긍정’은 ‘부정“보다 더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믐‘이라는 말에는 ‘끝’이라는

말과 ‘끝’의 앞인 ‘시작’ 도
들어있다. 화자는 ‘가버린’ 것보다는 ‘다가’ 올 것이 있어 절망하지 않는다.

그 긍정의 ‘힘’이 시인을 일으켜 세우고 막막한
세상을 건너게 하는 것이다.

   

  낯빛이 옥잠화인 이 여자

  이 여자의 아랫입술 아래 왼쪽 볼우물 기슭에

  저 반짝이는 참새 눈망울 같은 점 때문일까

  무슨 점이냐고 내가 물으니

  식복(食福)을 가져다주는 점이라 한다. 이어 말하기를

  이 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평생 밥 먹고 사는 데는 걱정 없었다고 파르르 웃는데

  얼핏 눈가에 그늘 한 잎 나부낀 것 같아서

  나는 엉뚱하게도 그 식복에 입을 대고 싶다

  이 점 데려다가 인생의 불씨를 새로 던지든지

  그냥 마침표를 찍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저 안개 걷힌 호수에 돌멩이 하나 풍덩 던지고 싶은

   점· 점· 점· 모를 점이다

 

                                                                         -「점(點)」전문

 

 

 
시인은 고요한 호수인데 돌멩이 하나를 풍덩 던진 건, 바로 낯빛이 옥잠화처럼 흰 여인이다.

식복(食福)을 가져다주는 입가의 점,
평생 밥 먹고 사는 데는 걱정 없다고 웃는데 얼핏 눈가에

그늘 한 잎 나부낀다. 엉뚱하게도 그 식복을 데려다 인생의 불씨를 새로
지피고픈 욕망은 식복을

부르는 점이 아니라, 얼핏 눈가를 스쳐간 ‘그늘’인 것이다. 동병상련이라 했던가. ‘그늘’의 뼈저림을

아는 시인에게 여인의 숨은 ‘그늘’이 연민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마치 점은 마침표 같아서 시인은

오래 떠돌던 마음에게 마침표를
찍어주고 싶은 것이다. 위 작품에서도 시인은 ‘숨겨둔’

‘슬픔’을 ‘점’이라는 것으로 슬쩍 가려두고 있다. 직접 드러내지 않는
은근한 ‘슬픔’이 시의 맛을

더해준다. 이와 같은 연민은「개복숭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지지리, 어디서 끌려갔던 울음 삭이고 있을까

  그 여자 말없이 꽃 필 때는 누가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 여자 잎 내고 말 더듬거릴 때만 해도 참 복숭아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 여자 어느 날부턴가 일본위안부처럼 종적이 묘연해지곤 했는데

  알고 보니 익지도 않은 연둣빛 그 처녀의 순결이 문제였던 것이다

  따 먹으면 눈도 맑아지고 고목에 회춘까지도 돌아온다는 헛소문이 돌면서

  오늘도 어느 중늙은이가 산성 오르는 후미진 곳에서

  뻔뻔스럽게 그 여자 훑어가는 것 보았다

  이름이 천하면 명은 길다 하였건만 그렇게, 지지하게

 

                                                                     -「개복숭아」전문

 

  
‘개’라는 말이 붙는 것들은 대개 만만하고 천한 것들이다. 복숭아 축에도 못 끼는 개복숭아는

이름에 걸맞게 산성 후미진 곳에
산다. 이름이 천하면 명은 길다는데 회춘을 하고 싶은 어느

중늙은이가 그만 그 여자를 훑어가고 만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훑다’라는 ‘행위’이다. ‘훑는’ 다는

것은 ‘함부로’라는 말과도 통하는 말이다. 채 익기도 전에 그만 지지하게 명을 다한
‘개복숭아’에게도

말 못할 ‘슬픔’이 배어있어 마치 돈 몇 푼에 늙은이에게 팔려가는 가난한 집 어린 처자와 같은 것이다.

어디선가
울음을 삭이고 있을 힘없고 가련한 것에게 시인은 마음이 끌린다. 시인은 소멸해가는 낡고

빛바랜 ‘존재’들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지만 뻔뻔스러운 그 행위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힘없는

약자일 뿐이다.

 

 

  그러나 마침내는 주름지고 속으로는

  힘없이 삭아들겠지.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사랑과

  햇빛의 단단한 압축을 풀며 새빨갛다 못해

  검어져 가는 지독한 향내 발산하며 한 번 더

  내 손이 닿기 전에 서녘으로 사라지겠지

  나의 저물녘에 낙관 하나 번쩍 찍어놓고

  그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히,

  조용히····

 

  -「금성(金星)」부분

 

 
햇빛의 단단한 압축을 풀지 못한 사과 한 알이 시들어간다. 한때 햇볕은 사랑이었지만 그 햇볕으로

숙성한 사과의 끝은 ‘죽음’과
‘소멸’이다. 상큼한 향기도 이젠 악취를 풍기는 검은 빛이다. 시인이

사랑했던 것은 어쩌면 그가 평생 짝사랑해온 ‘詩’가
아니겠는가. “여윈 손 안에서 펄떡이던 슬픈

사랑은 희고 작은 영혼의 접시 위에 아직 살아있지만 저물녘에 낙관 하나 찍어 놓고
손이 닿기도 전

조용히 사라질 것이라고 말끝을 흐린다. 끊어진 말의 꼬리가 왠지 서러운 여운을 남긴다. 시인은

‘저물어’가는
것들에게 오랫동안 초점을 맞추는데 이와 같은 맥락은「늙은 호박」에서도 볼 수 있다.

 

 

  그냥 늙었다는 말보다 단단히 쇠였다는 말이 옳으리라

  탱탱하다/잘 익었다/윤기 돈다

  살면서 웬만큼 바람 드는 일쯤은, 열 받는 일쯤은

  끄떡없을 것 같은 묵언으로 꽉 찬 노련함이 보인다

  잠시 이깟 늙은이를 뭐에 써먹을까 생각했던 일이 미안하고

  송구해 지는 이 둥근 몸통 속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중지 마디를 구부려 톡톡 비장품을 두드려보니

  곯아 터지지 않은 맑은 음악이 통통 튀어 오른다

  이미 두어 차례 서리를 맞고도 대지의 탯줄 끊지 않은

  아직도 수유 중인

  이 늙은 아이를 며칠은 더 두고 봐야겠다

 

                                                                   -「늙은 호박」전문

 

 

 
찬바람에 쇠어버린 호박은 실팍해서 한 아름이다. 꽉 찬 묵언이 그 안에 있다. 이깟 늙은이를 뭐에

써먹을까 생각했는데 두드려보니
맑은 음악이 통통 튀어 오른다. 두어 차례 서리를 맞고도 탯줄을

매달고 아직도 수유 중인 늙은 아이는 바로 시인 자신이 아닌가?
시와 더불어 사는 노시인의 마음은

늘 아이처럼 해맑다. 며칠은 더 두고 봐야겠다는 것으로 시의 ‘가능성’을 남겨둔다. 식지 않는
시를

향한 ‘열정’이다. 시인의 몸을 두드려보면 태어날 시들이 통통 튀어오를 것이다. 문청시절 가슴앓이를

할 정도로 시에
빠졌다가 문단의 좋지 않은 풍문을 듣고 실망해 40년을 절필했다는 시인은 다시 그

청년의 때로 돌아와 밤을 지새며 시를 쓴다.

 

 

  그래서 춘천은 젊지

  ‘춘천’이란 ‘봄내’나는 말이지

  물오른 춘천에는 봄 처녀인 소양강처녀가 살지

  송어의 속살 같은 그녀에게

  버들가지 하나 드리웠으나

  빙어 같은 마음 한 마리 얻질 못했지

  소양 댐에서 피어나는 물안개 같아

  다가서면 저만치 물러서고

  물소리에 젖은

  낮달 하나 가슴에 떠 있었지

  강을 타고 온 외로움이 발목을 적시는 곳

  흥얼흥얼 새로 난 혈맥 위를 밀물 쳐 가면

  춘천은 저 아스란 강 끝, 처녀림 빼곡한 섬

  콧노래 부르며 자리 펴기 좋은

  ‘춘천’은 ‘봄내’나는 말

  그래 춘천은 젊지

 

                                                                -「춘천(春川)」전문

 

 

 
춘천이란 말에서 ‘봄’냄새가 나고 ‘물 냄새’가 난다. 춘천에는 물오른 봄이 있고 소양강 처녀가 있다.

피어나는 물안개 같아
다가서면 저만치 물러서는 물소리에 젖은 낮달 하나 가슴에 떠 있다. 시인은

젖은 낮달 하나 품고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환한
대낮에 낮달을 기억하는 이는 몇이나 될까?

어둠이 몰려오면 캄캄한 하늘의 등대가 되는 낮달, 시는 시인에게 어두운 세상을 건너게
해줄

‘등대’와 같은 존재이다. 길을 가다 낮달을 만나면 왠지 모를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리는 시인은

희미한 ‘낮달’마저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낮달과 같은 ‘꿈’을 품고 시인은 수많은 봄을 건너

버렸다. 어느 날 시인은 춘천에 가서 다시 ‘봄’을 보았다.
메마른 마음에 물이 올라 “영혼의 하얀 접시”

에 싱싱하고 ‘촉감’이 좋은 시를 담을 수 있을 것이다.「딸그락딸그락」이란
작품에서도 시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붕~ 붕~ 

  조금 전, 여객선 뱃고동 울리며 넘어간 수평선 끝자락에 아직도 몇 알의 알섬들 풍뎅이같이

가물가물하다.

  이도 저도 더 나아가거나 물러설 수 없는 데까지 흘러온 각진 제 몸과 마음이 있다

 

  닦고

  깎고

  용맹정진하고 있는 몽돌 밭이 있다

 

   예까지 와서 그들은, 한세상 되는 대로 살고 싶은 생각도 불쑥, 불쑥 나기도 하겠지만, 그때마다

철썩, 철썩 서로 뺨을 때리며 기울어 가는 정신을 깨운다. 일으킨다

  내 몸도 기꺼이 거기에 섞이어 온몸 몽그라지고 둥글어진다

  딸그락 딸그락····

 

                                                                -「딸그락딸그락」전문

 

  
몽돌은 스스로 제 살을 깎는다. 수없이 파도에 구르며 모난 몸을 다듬는다. 몽돌이 깊은 바다를

두려워하랴. 한세상 되는 대로
살고 싶은 생각이 불쑥 치밀 때면 그때마다 철썩철썩 뺨을 때리며

기울어 가는 정신을 일으킨 시인의 의지는 몽돌처럼 단단하다.
나석중의 시편 곳곳에 깔린 ‘낡음’과

‘소멸’의 슬픔은 ‘허무’로 이어지지 않고 ‘깨달음’과 ‘완성’으로 이어진다.

 

  하얀 ‘영혼의 접시’를 가진 시인, 그 작은 접시를 붙들고 홀로 먼 길을 걸어온 시인, 그러나 판은

벌어졌다. 드디어 ’시‘와 샅바를 잡고 한 판 겨뤄볼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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