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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추천 수필 - 어느 시인이 남기고 간 여운/유양희

Author
문학
Date
2017-02-08 12:48
Views
1321

어느 시인이 남기고 간 여운


 

유양희

 


     잠결에 들리는 빗소리가 문정희 시인의 강의 소리처럼
들린다
. 몇 시간 전에 문 시인의 강의를 듣고 돌아와 잠들어서 그런 것 같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어느 시기가 되면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것일까?


6년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국제펜클럽미주연합회 주최의 해변문학제 초청 강사로 그녀를 초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 그때 워싱턴에도 들릴 수 있는지 알아봤으나 학술대회가 있어서 곧바로 다른 나라로 떠나야 한다고 해서 참 서운했다. 그런데 정유년 정초에 마침 이곳 조지 워싱턴대 한국학연구소 오프닝 행사를 위해 문 시인이 한국에서 문인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녀가 이곳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워싱턴문인회 초청으로 ‘시인으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한 특강이 있었다.


 


      그날따라 나는 우리 국토안보부 직원들과 계약 사업체
대표들이 온종일 토론하는 행사에 참석해야 해서 특강 시간에 늦을까 봐 아침부터 조바심이 일었다
. 고심 끝에
마지막 세미나는 생략하고 모임 장소인 우래옥으로 향했다
. 몹시 춥고 주말이 아닌 화요일 저녁인데도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 해마다 겨울이 오면, 예기치 않은 폭설에 갇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오히려 운명적인 행복한 순간을 꿈꾸게 했던 그녀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와 같은 시의 영향력이 클 것이다
. 그 시의 일부를 소개한다.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한계령쯤을 넘다가/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오오 눈부신 고립/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현실이라는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우리에게 어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남은 생애 전부를 거는듯한, 이 얼마나 낭만적이고 운명적인 사랑인가.


 


      우리가 사는 워싱턴을 ‘지구의 수도’라고 일컫던 그녀,
“시대가 불행할수록 시인에게는 행운이다. 상처나 슬픔이 작가에게는 글을 쓰게 하는
자산이다”라는 역설에 불현듯 내 안에 오랫동안 잠들었던 문학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
, 지난날들에 대한 회한이 내 어두운 심연에서 안개처럼 피어 오르는 것 같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데도 늘 뭔가 ‘이게 아닌데’ 하는 공허감에 가슴 시릴 때가 있다. 늦기 전에, 아니 이미 늦었지만, 그동안 막연히 쓰고
싶었던 글을 이젠 어떻게든 써야겠다는 불씨를 지펴줬다
.


 


     글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문학이 뭐길래 이토록 오랜 세월을 전전긍긍하며 짝사랑하는가. “시는 마치 아름다운 기생
같아서 내가 애걸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지가 찾아와야 한다”는 그녀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 마치 무당이
신 내리기를 기다리듯 내게도 불꽃 같은 시 한줄기 찾아오기를 기다려온 지 수십 년이 지났건만 그 날은 오지 않았다
. 당연하지 싶다. 아무런 내공이나 삶으로 체득한 안목도 없는 상태에서 그럴듯한 언어의 유희만을
지속하고 있는 것 같은 나 자신에게 무시로 자괴감이 들곤 한다
. 나와 같은 이들에게 그녀는 “많이 읽어라.
진정한 부자는 언어의 용량이 큰 사람이다. 끊임없는 상상력을 위해 독서가 최고다.
자꾸 써라.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써라.” 하고 한껏 용기를 북돋워 줬다. 그렇다. 그녀의 에세이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의 서문처럼 지금 우리에게 갈증처럼 필요한 것은 고도의 수사학이나 아련한 정서 따위가 아니라
, 바로 축 처진 서로의 등을 뜨겁게 두드려주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에게 숨어있는
열정을 일깨워 주는 일이야말로 문학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 “현대인에게 시란 우물 같은 것,
아껴둔 우물에서 바가지로 떠먹는 물과 같다던 문정희 시인. 지금쯤 한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우주와 같은 책상에 앉아 글을 읽거나 쓰고 있을 것 같다


 


     최근에 그녀가 쓴 ‘치명적 사랑을 못 한 열등감’이라는
산문집 제목을 생각한다
. 그녀만의 자신만만함, 열등감조차도 당당하게
책 제목으로 쓰는 작가 정신이 부럽지 아니한가
. 지금까지 수많은 한국의 유명한 문인들이 이곳 워싱턴을 다녀갔다.
여느 작가들을 만났을 때보다 그녀를 만난 후의 여운이 내 가슴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은은하게 멀리까지 퍼지는 향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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