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회원작품
회원마당
작가소개 및 글
작가 저서
사진 자료실
이달의 회원작품
나의 비자금/ 김레지나
나의 비자금
정치인이나 경제인에겐 비자금이 치명적인 단어가 되고 부부간에도 상대방의 비자금에 대한 의혹이 가정의 신뢰를 무너뜨리기도 하는데 그런 비자금이 나에게도 있다.
나의 비자금은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장만할 때 생겼다. 집 계약 바로 직전에 극적으로 시세보다 2만 불을 싸게 살 수가 있어서 그게 나의 비자금의 터전이 된 것이다. 그러니 나의 비자금은 현금으로 장롱 속에 숨겨 있지도 않고, 은행통장에 잠겨있지도 않으며, 그저 내 마음속에만 투명하게 담겨있는 실존하지 않는 자금인 셈이다.
오일체인지를 하면 차 점검을 공짜로 해준다고 해서 혹했다가 결국은 970불을 냈을 때도 난 900불을 비자금에서 충당했고, 뉴욕 지하철에서 남편이 선뜻 20불을 걸인에게 주었을 때도 15불을 비자금에서 빼냈다. 최근의 예론 수도공사였다. 오래된 집이어서 목욕탕 물이 졸졸 새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 가 세 군데에서 줄줄 흐르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뉴욕에 사는 딸이 친구와 함께 방문하게 되어 샤워기를 꼭 고쳐야 할 형편이었다. 급한지라 몇 군데 알아보지도 못하고 수도기사를 불렀다가 1,470불을 내게 되었고 그중 1,000불을 또 비자금에서 축내야 했다.
이렇듯 금전적으로 부당하게 바가지를 썻다고 여겨질 때나 분에 넘치다 싶게 지출을 했을 땐 마음속에만 담겨 있는 비자금을 슬며시 넘겨본다. 하지만 비자금을 항상 축내는 것만은 아니다. 15년째로 아직도 건강하게 25만 마일을 줄곧 달려온 내 차 덕분에 3만 불을 비자금에 가산을 시켰다. 뜻하지 않게 금전적인 행운을 만났을 때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비자금에 보태는 걸 잊지 않는다.
손해 보고 싶지 않고, 억울함을 보상받고 싶어하는 심리는 누구나 마찬가지여서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땐 며칠간 씩씩거리며 분한 마음을 가누기가 힘들다. 때론 내 형편엔 과하다 싶어도 장식품이나 가구, 명품 등을 구입하고 싶은 물욕이 생길 때가 있는데 이럴 땐 욕심을 물리치지 못 하는 자신에 대해 깊은 자책감에 빠지는 수가 있다. 나의 비자금은 이런 울화감과 좌절감을 융화시키는 일을 충당해 준다. 뜻하지 않았던 행운의 기억은 억울한 나의 심통을 누그러뜨려 주고, 또한 행운이 있었으니 불운도 견뎌내야 한다고 나를 달래면서 삶의 굴곡을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나의 비자금은 또한 심리적인 치유를 해준다. 모든 일에 꼭 이겨야 한다는 욕심을 덜어주고 때로는 손해를 봐도 괜찮다는 여유를 갖게 해준다. 현관문을 여름이 되기 전에 빨리 교체하고 싶어서 더 많은 돈을 들여 주문하였는데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
배달이 되지 않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공돈 들어간 분통함에 목 메어 있지 않고 아직도 차분하게 기다리는 걸 보면, 지는 듯이 사는 것이 결국은 이기는 삶이라는 걸 깨닫는 것이 나이와 함께 오는 지혜이기도 하겠지만 정신적인 여유를 갖게 해주는 나의 비자금의 역할이 크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