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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문학
Date
2015-07-06 18:36
Views
2298


새해 소망/양상수



  새해를 맞을 때마다 나는 신년의 각오로 들뜬다. 섣달 그믐날 밤이면 지난 한 해를 뒤돌아보며 반성하고 새해에는 꼭 성취하리라 계획한 일들을 일기장에 담는다. 그렇게 써 놓으면 당장에라도 이루어 낼 듯이 힘이 솟는다. 더 노력하고 발전하자는 새로운 결심,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멋들어진 각오는 슬프게도 작심삼일로 끝나버린다.


올해 맞는 새해는 예전과는 달랐다. 일기장 한쪽에는 “2014년 12월 31일, 고마운 한해가 지나간다.” 라고만 썼을 뿐 신년의 각오는 적지 않았다. 번번이 실패만 거듭하는 게 부끄러워서일지도 모르겠다. 대신에 지난 일 년을 곰곰이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성취한 것도 별로 없고 남을 위하여 봉사나 희생한 일도 많지 않은 그저 평범한 한 해였다. 그러나 뿌듯하고 가슴속이 따스해졌다.



  형부가 돌아가셔서 한국엘 다녀왔다. 어머니 장례식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19년 만의 방문이었다. 오직 언니와 함께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여행계획도 없이 급하게 떠난 길이었다. 언니네로 도착한 이튿날, 오빠의 작은 아들 T가 찾아왔다. 아내와 형, 형수, 누나와 함께 온 T는 내가 아주 미워하던, 다시는 만날 일이 추호도 없으리라 여겼던 조카였기에 그의 방문에는 적이 놀랐다. 게다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내마저 동반했으니. 그들에게서 절을 받으며 나는 미운 마음 잠시 접어두고 모두를 반갑게 맞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조카의 방문이 반갑고 고마웠다. 자기를 미워하는 고모와의 만남은 결코 쉬운 발걸음이 아니었을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이자 T의 할머니가 오빠네 댁에서 머물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이곳에서 13년을 우리와 함께 사시던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한국으로 가시겠다 하셨다.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듯하다. 아들이 있는 한국에서 죽어야지!”



  딸은 결국 딸일 뿐 이고나 하는 서러움도 있었지만, 마지막 염원을 거절하지 못하여 어머니를 보내드렸다. 그런데 어머니가 밤중에 울먹이면서 전화를 해오셨다. 오빠네 댁으로 가신지 이주일 만이었다.



  “나 미국으로 다시 가련다. T가 자꾸만 ‘할머니, 여기 누가 오라고 해서 왔어? 미국으로 다시 가요, 다시 가!’ 하니 나 데리러 와다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T가 수화기를 바꿔 받자 예전엔 써보지 못한 욕부터 나왔다. “야, 너도 인간이냐? 너 지금 배불리 먹고 잘사는 게 누구 덕분인 줄 알아? 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뼈 빠지게 고생하면서 일군 거야. 이 개만도 못한 XX 아 …” 실컷 욕을 퍼부었지만, 울분은 가라앉지 않았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튿날 어머니는 결국 언니가 모셔갔다.

그로부터 나에겐 지독한 미움이 생겼다. T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부르르 치가 떨렸고 위가 쓰렸다. 같은 피가 섞였다는 것조차 부끄러웠고,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 돼버렸다. 하지만 소식은 계속 전해졌다. 경찰관이 되었다느니, 어느 귀한 집의 예쁜 딸과 결혼했다느니, 진급이 척척 잘 되어서 아주 잘산다느니 … 하지만 ‘사람이면 사람인가, 사람이라야 사람이지’를 되뇌게 할 뿐 미움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번 고국 방문에선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겼다. 하루는 그의 아내와 쇼핑을 하게 되었고 훌륭한 점심도 대접받았다. 그녀는 다정했고 겸손하였으며 극진히 배려해주는 마음이 곱고 기특했다. 떠나오기 바로 전날엔 근사한 호텔에서 나를 위한 송별 만찬에 사 남매가 모두 참석했다. T가 주선한 모임이었고 식사비도 그가 챙긴 것이었다. 식사 후에 그의 아내가 건네준 선물 또한 나를 위한 배려와 정성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곳으로 돌아온 후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고맙다는 이메일을 그에게 보냈다. 그의 아내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화로 전했다. T를 미워하던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하며 용서와 이해로 바뀌는 듯하였다. 예기치 못했던 T의 방문이 무언가를 꿈틀거리게 했다면 그의 아내가 들려준 “많이 후회하고 반성하며 살아요.”라는 말이 굳게 닫혀있던 나의 마음을 열게 했나 보다.


  2015년의 첫 달엔 거창한 신년의 각오 대신에 소박한 소망을 해본다. ‘건강한 날들,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 채우는 한 해이기를 …’ 가슴에 맺힌 지난 20년 동안의 아픈 응어리가 녹아나며 따스해지는 건, 기필코 샌디에고의 따스한 햇볕 때문만은 아니리라.




고통을 안은 이들에게/송윤정



  누구나 고통을 겪고 다시는 그 고통을 돌아보고 싶지 않다.


그 고통을 표현해 낸다는 것은 살과 뼈를 뚫고 곪아 들어간 상처를 쑤시어 파 내는 작업이다.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간에 위치한 벨라루스는 역사상 많은 침공과 수도인 민스크가 11번에 걸쳐 초토화가 되었던 슬픈 역사를 지닌 나라다. 2차 대전을 통해 전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고, 전후 7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전 인구가 9백만명이 조금 넘는 수준으로 전쟁 전 1천백만명에 달했던 인구에 못 미치니 그들의 고달팠던 역사를 짐작케한다.



  지난 2주간 민스크에 머물러 일하는 동안 주말에 미술관에 갔다. 국립 혹은 시립미술관이려니 생각하고 들어섰는데, 미술관을 다 돌아보고 나서야 그들에게 국민영웅으로 여겨지는 ‘미하일 사비트스키’라는 화가의 미술관임을 알게 되었다. 미술관에 들어서니, 네 명의 여 직원들이 나를 멀뚱이 바라보고, 나는 영어로 입장료가 얼마인지 묻는데 그네들은 벨라루시안인지 러시안인지 모를 언어로 뭐라고 말하고, 그렇게 난감히 서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내 뒤로 두 여인과 한 젊은 남자가 들어섰고 그들이 내가 하는 영어를 알아 듣고 통역을 해 주었다. 전시실에 들어 서며 그 중 한 여인이 자신은 ‘마리아’이고 딸 ‘스테이시’와 조카’일리아드’와 함께 왔다고 소개를 하고, 친절하게도 마리아와 스테이시는 그곳 큐레이터와 나를 따라 다니며 큐레이터가 설명하는 것들을 영어로 통역하여 주었다.



  그들의 통역을 통해, ‘미하일 사비트스키’는 2차 대전 중 1942년에서 전쟁이 끝나는 45년까지 나치 캠프에 수용되었었고, 그 때의 경험- 인간의 잔혹함과 광기-를 많은 화폭에 담아 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자신의 아이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죽고 고통을 당한 그 경험을 통해 또한 많은 작품들을 남겼는데, 그는 그러한 고통의 기록들을 남김으로서 인류와 후세에 이러한 일들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꿈꾸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들을 돌아보며 ‘어쩌면 그는 그의 골수에까지 박혀 있는 그 고통들을 파 내어 화폭에 담아냄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하며 견디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는 이의 아들은 10여년 전 20대초반에 이라크전에 나가서, 전쟁터에서 죽은 미군들의 군사표를 수거해 오는 일을 맡았는데 전쟁이 지나 30대 중반에 이른 현재까지도 그 죽은 시체들의 악령들에 시달리며 약물복용과 그로 인한 신체 마비 등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니, 내가 좋아하는 의사이면서 작가인 레이첼 나오미 레멘의 <식탁에서의 지혜>라는 책에 실렸던 한 청년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대학에서 운동선수로 잘 나가던 그 청년은 골육종이라는 병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고, 수술 후 그는 한동안 절망과 분노로 가득 차 망가진 삶을 살다가, 사고로 병으로 이런저런 이유로 신체의 부분들을 잃은 많은 이들에 대한 글을 읽고 그들의 삶을 재건하기 위한 일에 몰두하게 되고 그러던 중 만난 유방암으로 두 가슴을 절단한 21세의 여인을 만나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레멘은 그 청년의 이야기 끝에 “고통은 삶을 때로는 분노로, 혹은 비난과 자기연민으로 몰고 가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사랑하고 삶을 섬길 수 있는 자유를 안겨 준다”고 했다. 그녀의 이 말처럼 미하일 사비트스키의 그림들은 참혹한 광경들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생애 마지막 10여년 동안 그의 신앙과 성서에 근거한 그림들을 그렸고, 그의 전시관 한 쪽은 벨라루스의 어머니와 아이들, 추수, 곡식 등등의 평온한 일상과 민속의 흥겨움을 그린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순간들에 놓일 때, 예수님이 너무 형이상학적으로 느껴질 때, 미하일 사비트스키의 그림들을 바라보며 인간은 그러한 순간들도 견디어낼 수 있었음을 기억할 수 있기를. 그리고 여전히 삶과 세상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음을 기억하기 바라며, 크고 작은 고통들을 안고 살아 가는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한다.



기대하며 기다리며/정애경



 
요일 아침, 오늘은 어떻게 옷을 입을까...라는 생각에 잠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붙박이 옷장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들을 밀쳐가며
이것저것 건드려 보다가 얼룩무늬 블라우스와 치마를 꺼내어 매치시켰다. 생각을 해보니 지난 주 월요일에 입었던 모양과 색상이
그대로 손에 잡히고야 만 것이다. 거듭되는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겹치기 일쑤인 작은 일들이 어찌 이것뿐이겠는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주말을 잘 보내고 나니 새 힘을 얻어 더욱 더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기대를 하며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옷을 입는다. 막 태어난 아기는 배냇저고리를 입게 되면서부터 사람의 아기로 구분이 되기도 하고
성장하면서는 타의나 자의에 의해서 옷을 입게 되기도 한다. 어쩌면 이러한 점이 사람과 동물이 다르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의복이 인간에게는 첫 번째 필수품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세기 때, 아담과 이브는 제일 먼저 나뭇잎으로 몸의 일부분을 가리며 의복을 대신 하였다. 그 후 인간은 점차 지혜와 방법을
터득하며 짐승을 잡아 양식과 의복을 해결하기도 하였는데 털과 가죽을 사용하여 걸쳐 입기도 하고 옷을 만들어 입기도 하였다. 또한
자연스럽게 옷을 통하여 남녀를 구분하기도 하였다.




 
의복의 변화와 표현은 말할 수 없이 다양하고 또한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 개인의 상황과 성격에 의해 표현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흘러 내려온 의복의 역사를 보면 민족과 종교와 문화를 각각 특색 있게 표현할 수 있는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색상과 모양으로
시간의 흐름을 알게 하기도 한다.




 
요즈음 길거리에 나서보면 별 희한한 옷들을 볼 수가 있다. 한 쪽 팔만 붙어있는 웃옷이 있는가 하면 다리의 모양도 없을 정도로
짧은 핫팬츠에 투명한 치맛자락이 길게 달려있고 또한 삐뚤어져 있어 잘못 잘라냈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더구나 이런 모양이 처음이 아니라 옛 부터 즐겨 입었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역사 속 당시의 상황과
배경이 재현되어 현재와 혼합하여 묘한 창작이 늘 싹트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창
작은 어렵고 모방은 쉽다.”라는 말이 있다. 옛것도 있되 새것도 옛것에서부터 전해져 올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거듭 말하자면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고 하니 이 순간의 창작도 철저한 모방인 것 같다. 다만 새롭게 여기는 나의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고국 나들이/이춘옥



 
칠 사이에 목이 부쩍 굵어진 남편이 환자복을 입고 병원을 휘적휘적 돌아다니는 걸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옵니다. 2주 남짓을 줄곧
하얀 쌀밥에 고춧가루 투성이인 김치와 김치찌개가 남편 몸무게에 기여하는 바가 클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디를 가든지 기본 입맛은
챙기는 양반이라 잡곡 하나 섞이지 않은 숙소의 하얀 쌀밥이 마음 놓고 남편 몸에다 진을 치는 모양입니다. 심한 알레르기와
비염으로 숨쉬기도 불편한 남편이 드디어 오래 참아 왔던 수술을 결심하고 한국에 왔습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햇살과 산들거리는
바람이 온몸으로 휘감아 도는 한국의 4월은 그 상쾌함이 현기증이 날 정도입니다. 유난히 봄을 많이 타는 나는 그동안 개나리가
노릇노릇한 한국의 봄을 만나면 늘 진하게 취하곤 했습니다.


가슴이 싱숭생숭 영락없이 연애하는 기분이 됩니다. 그토록 은밀한 느낌은 왜 오는 건지 모르지만, 미국에서는 느껴 볼 수 없는 야릇한 감정입니다. 그리고 이제 2014년 4월, 그리던 한국의 봄 한가운데 다시 서 있습니다.




  
이번 여행은 전에 없던 한국에서의 홀로서기입니다. 물론 며늘아기가 꼼꼼하게 정리해 준 홀로서기의 지침서가 든든한 도우미로 대기
중이긴 합니다. 사당역 근처에 미리 정해 놓은 숙소가 있어 밤늦게 도착해 짐을 풀었습니다. 24시간 밥과 김치가 준비되어 있다는
이곳은 우리 부부가 한 달 정도 머무를 은밀한 거처입니다. 1인용 메트리스 하나 달랑 놓인 방바닥이 남편 손바닥보다 작아 보이는
이곳에서 앉은뱅이 냉장고와 책상 위의 투박한 텔레비전이 한동안 우리가 누릴 호사입니다. 사당역에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은
동네지만 관악산을 등지고 있어 공기가 맑고 조용합니다. 일요일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산을 오르내리는 등산객들이 다문다문 있어
높직하게 뻗어 있는 동네길이 크게 적막할 새는 없습니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조용히 숨어 지내기로 한 이번 한국여행은 우리 온
가족이 입을 모아 비밀리에 모의한 일입니다. 방문해야 할 친척들을 대강 꼽아도 매번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라 병원을 전전해야
하는 이번 여행을 처음부터 번거롭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이런 음모를 알 리 없는 우리 둘째 동서는 내가 좋아하는 곶감을
사서 보낸다며 주소를 재촉해 어물쩡 몇 주를 넘기느라 진땀을 뺏습니다. 달력을 꽉 메운 크고 작은 일들이 어지간히 끝나고 나면
차분하게 친지 방문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하루 종일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사당역 4번 출구는 해가 기웃해질 때면 온통 먹거리 포장마차가 줄을 섭니다. 꼼장어, 어묵, 홍합탕, 튀김, 뿌연 등불들이 하나 둘 불을 밝히면 어둠이 막
내리려던 사당역 거리는 활기가 돕니다. 집으로 향하는 도시인들의 지친 하루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입니다. 도대체 미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이 진기한 풍경이 눈이 오는 겨울에도 계속되는지 궁금합니다.



  
먹음직스럽게 보인 닭꼬치에 재미를 못 본 우리 부부가 그중 만만하게 들리는 곳은 붕어 빵집입니다. 기름지지 않아 좋고 크게 달지
않아 좋은 붕어빵을 난 지금도 여전히 좋아합니다. 검은 세라복에 하얀 넥타이를 매고 책가방을 못 이겨 끙끙대던 여학생 시절이
있었습니다. 중학생이 돼서도 밥을 우적우적 이기지 못하는 막내딸이 안타까운 어머니가 아침이면 이따금씩 용돈을 쥐어 주시곤
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 먹으라는 붕어빵 값입니다. 그토록 그리던 한국의 봄 한가운데 서서 왜 늘 가슴이 먹먹해지는지 나는 압니다.
그렇게나 진하게 취하곤 했던 한국의 봄도 어머니가 늘 불어 주시는 입김이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올봄에는, 동네 담 모퉁이에
피어오른 소담스런 목련이 내 먹먹한 가슴을 애써 토닥여 줄 때도 한결같이 찾아오던 싱숭생숭은 영 소식이 없습니다.



  
마누라 속마음이야 짐작할 리 없는 남편입니다만 33년을 한솥밥 먹는 처지라 그나마 같아지는 건 입맛인가 봅니다. 하고 많은 음식
중에 붕어빵이냐고 핀잔 주지 않은 남편이 신기할 때가 있습니다. 어차피 잘 먹지도 못하는 소주병 끌어안고 청승 떨 재주는 애초
없는 두 사람입니다. 혀 꼬부라지게 늘어놓을 시답지 않은 얘기 또한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도 뜨거운 붕어 한 마리 후후 불며
걷다가 기어이 한마디 툭 던집니다. 먹거리 많은 한국에서 우린 웬 궁상이냐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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