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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수필문학회 추천 수필 - 삶의 가지치기/김레지나
삶의 가지치기/김레지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뒷뜰 언덕받이에 50여 년의 세월을 짊어지고 서 있는 플라타너스(sycamore
tree)에 눈길을 보낸다. 플라타너스는 어린 시절 기억 속의 학교나 공원엔 어김없이
한두 그루가 터줏대감인 양 자리 잡고 있었고, 또한 가지가 잘 다듬어진 한국의 가로수로 많이 심어져 넓은
잎이 주는 여름의 그늘과 가을의 낙엽이 주는 낭만으로 많은 시와 노래 속에서 사랑을 많이 받은 나무이다. 이 집에 이사 올 결정을 한 요인 중의 하나가 어릴 적 추억 속의 나무가 뒤뜰에 있어서 마음을 포근하게 해준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가로수처럼 가지를 잘 다듬어 주지 않은 나무는 이제 그 가지가 문어발처럼 벌어져 우리 집
지붕은 물론 옆집의 지붕으로 뻗어 가는 통에 비바람이 심하게 치는 날엔 행여 가지가 부러져 지붕을 뚫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밤잠을 설치게 되었다. 아쉽긴 하지만 결국 나무를 잘라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고 크리스마스 휴가 때 집에 와서 한 번 더 보고 난 후 자르라는 아이들의
요청에 따라 새해를 넘긴 후로 날짜를 잡았다. 워낙 큰 나무인지라 하루에 일을 끝내지는 못하고 여러 날이
걸려야 하는 모양인데 먼저 작은 가지들을 하나씩 잘라내면서 일을 시작하였으나 일정치 못한 겨울 날씨 관계로 지금 며칠째 많은 가지들을 잃고 몸채만
덜렁 서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작은 가지를 하나씩 쳐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내 삶의 가지도 쳐 내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 되어 요사인
아침마다 앙상해 보이나 동시에 당당하고 겸허해 보이는 플라타너스를 바라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면서 나의 가지들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언제쯤
나의 가지를 털어내야 하나 하는 마음의 갈등을 느낀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맞아 모였던 아이들을 돌려보내면서 서운한 마음에 가슴앓는 심정으로 도려낸 플라타너스 나무의 가지를 바라본다.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옷가지, 집가지, 차가지 등 물질적인
가지야 아무 때나 날 잡아 털어낼 수 있겠지만 이제까지 삶의 중심이었던 자식가지는 과연 어떻게 잘라낼 수 있을까?
이제는 명실상부 사회인이 된 아이들의 삶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서야 될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바짝 뒤쫓고 있는 나의 모습에 당혹스런 헛웃음도 지어보지만 밤이 되면 행여하는 마음으로 전화 소리에 귀가 꽂힌다. 마음의 포근한 디딤돌인 아이들이긴 하지만 내 어릴적에 갈구했던 모든 규제로부터의 해방감을 생각한다면 이제는 너무 매어놓지 말고 풀어주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며칠간의 무소식엔 심사가 뒤틀리고 노심초사하며 병을 키운다.
이제는 아이들보다 부부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걸 알기에 때론 아이들에 대한 대화는 안 하기로 약속도
해 보지만 몇 분 후엔 다시 아이들의 이름이 입에 달려있고 아이들이 떠난 둥지가 텅비어 어찌보면 실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기대고 있었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제 따뜻한 겨울날이 오는 때 우리 집 플라타너스의 흔적은 기억 속으로 스며들겠지만 나의 가지는 언제
어떻게 쳐내야 할지의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