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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추천 회원작품
<시>
눈물겹다 /김행자
하늘이 조금 더 가까와진
새로 이사온 메리옷스빌 낯선 서재에서
창밖 빈 들을 내려다 보니
눈길 닿는 곳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저마다 모여 옹기종기 세들어 살다
이제 때가 왔다고
노루꼬리만한 하루 해 다넘어간다고
노랑나비 흰나비떼 허공에 불러놓고
몸 뒤집어 가을 햇볕에 열매들 익히느라 한창 분주하다
제 몸의 마지막 물 한 방울까지 다 뽑히고도
만삭의 몸 흔들어 몸 풀 자리 엿본다
서로서로 어루만져 토닥거려주며
이제 등이 굽어 바람 가는 길 자주 놓쳐도
오로지 장엄하게 산화할 일 하나로
산다
아무도 눈여겨 보지않아도
제 할일 다하고 눈 지그시 감은 빈 들의 잠언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사방에 누워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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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 박양자
바람이 오소소 불었습니다
바람길 트느라
듬성듬성 쌓아올린 제주 현무암 검은 돌
제 갈 길 가도록 숭숭 뚫린 담장
돌 틈이 내어준 길 따라간 바람은 바다의 등을 토닥거렸습니다
밭 울타리 촉촉한 담쟁이도,
버짐처럼 번진 마른 이끼도,
세월만큼 엉겨
거친 바닷바람 휘몰아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가두지 말아야 하는데
빗장 질러놓고
틈새 없이 쌓아놓기만 한 후미진 생의 울타리
이리저리 허둥대다 와르르 무너져 내린 내 안의 돌담
흩어진 돌 조각마다 희미하게 새겨진 때 묻은 내력들
내 숨죽인 비명과 말라버린 울음이
돌 사이 비집고 스며 나왔습니다
샛바람 짓치는 돌담 구멍으로 바라보는
빈 들판은 참 넉넉하고 고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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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8 / 서윤석
누가 초인종을 눌렀는가
낙엽이 딩구는
초가을 밤
이승에선
백 일이 지났는데
육신의 흔적 잠 재울 수목 찾아
친구여 바람처럼 꿈처럼 오셨는가
풀벌레 우는 이 밤
문 활짝 열어 놓으니
은하수 쏟아지는 빛살 가득한 뜰에
허허 웃으며 서 있는 자네 모습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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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
가을 소묘素描 / 박현숙
국화 향이 그윽하다. 가을창가에 앉아 유리 찻잔에서 서서히 꽃을 피우는
국화 차를 들며 뒤뜰을 바라본다. 이미 수확을 끝내어 텅 빈 텃밭에 꽃을 보려고
남겨둔 들깨 나무만 두 열로 서서 계절을 지키고 있다. 하늘은 실핏줄이 보일 듯
맑은데 모든 것이 야위어가는 기운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늦봄에 오 시인의 밭에서 가져 온 부추가 아직 더위가 한창일 때 놀랍게도 하얀
꽃을 피워 올렸다. 그늘 진 밭에서 한 올 한 올 올라오는 연한 부추를 차마 먹지
못하고 바라만 보다 어느 아침에 보니 그 가느다란 몸 끝에 위태롭게 꽃을 피웠다.
오, 그 애잔한 의지라니……. 작은 꽃잎은 눈물을 머금은 듯 맑아 한동안 가슴이
저렸다. 식물 중 잎을 먹는 것은 계절이 지나야 꽃을 피우는 것을 집에서 식물을
키우며 뒤늦게 알게 되었다. 봄에 잎을 먹는 신선초는 한 여름 내내 내 가슴
높이까지 키를 키우더니 여름이 채 가기 전에 노란 등을 가지 끝마다 올려놓았다.
이제 저 들깨 나무도 꽃을 피우면 제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씨를 맺을 것이다.
고추나무, 호박과 같이 꽃을 먼저 피우고 그 꽃이 지며 열매를 맺는 식물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잎을 식물로 주는 것은 시들기 전에 그 기운을 모아 꽃을 피우고 씨로
제 자신을 남기는 자연의 이치가 새삼 경이롭다. 없어지는 듯 하지만 그것은 다음
생명을 위한 소멸인 것이다.
여름 무더위를 막기 위해 닫아 두었던 유리창문 셔틀을 활짝 열고 창 가에 둥근
테이블을 갖다 두었다. 이제 이 자리에서 저물어가는 계절을 읽으며 쓰리라. 봄,
여름 계절이 흐르는 동안 식물은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여문 열매를 맺는데 무엇
하나 내 놓을 것이 없는 빈 손은 부끄럽기만 하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을 쓴다면서
제대로 쓴 글 하나 없이 어느새 가을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분주하였던 날들을
뒤로하고 가을, 그 적막한 고요로 들어서는 계절을 읽으며 정화된 글을 쓰기 바란다.
뒷집의 아름드리 도토리나무에서 떨어지는 도토리를 쫓아 어린 칩 멍크들이
쪼르르 달려가는 곳으로 시선을 함께 달리기도 하다가 새집에 가득 넣은 먹이를
찾아 온갖 새들이 들고 나는 하늘 한 편에 피어나는 뭉게구름을 보며 잠시 숨을
고르기도 한다. 부지런한 새들은 이미 오후 네 시가 되면 저녁을 먹는 듯 온갖 새가
날아 와 기울어가는 가을 햇살아래 모이를 쪼는 것을 보다 새가 모이를 쫀다는
한국어의 묘미에 사로잡힌다. 가만히 보니 주둥이로 새집의 모이를 톡톡 건드려
반은 바닥에 떨어뜨리고 반은 입에 넣으니 단순히 모이를 먹는 것이 아닌 듯 하다.
네 마리만 앉을 수 있게 만들어진 새집이어서 미처 거기에 앉지 못하는 새들과
모이를 나누기 위하여 떨어뜨리는 것일까? 그들의 세계가 궁금해진다.
어느새 새들의 저녁이 끝난 듯 하다. 더 이상 새가 날아오지 않아 마음 놓고
뒤뜰로 나갔다. 조금씩 가을빛을 끝에 머금기 시작한 잎들을 보며 산천을 장악하던
한여름의 시퍼런 초록, 그 위세 당당했던 모습이 생각났다. 여름 햇살은 난폭하였고
세상을 다 점령할 듯 날로 왕성해지는 검푸른 숲은 두려웠다.
사람도 그렇다. 자신의 주장이 강한 사람을 보면 차 한잔 함께 마시기가 주저되고
눈빛이 유순한 사람을 만나면 마음의 빗장이 저절로 열리게 된다.
가지에 걸터앉은 바람이 나무를 흔든다. 알이 꽉 찬 도토리를 더 이상 붙들고
있을 수 없다는 듯 후드득 후드득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뒤뜰 여기저기를
울리는 것을 들으며 장성하여 떠난 아들을 생각한다. 그래 크면 부모를 떠나야지,
식물도 저렇게 보내는데…….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가운데 흑장미 한 송이가
계절을 잊은 듯 피어 있다. 저 흑장미도 가을을 타는 걸까. 겹겹의 붉은 꽃잎으로
화려하게 핀 장미이건만 시월의 장미는 알 수 없는 서러운 기운을 뿜고 있다. 그
시선을 피해 아래를 보니 과꽃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방그레 웃고 있다.
“그래, 가을은 역시 과꽃이야.”과꽃은 우리네 둥근 밥상 같은 꽃이다. 둥근 나무
밥상은 나에게 늘 유년의 그리움을 불러 일으키고 그곳에는 엄마의 따뜻한 목소리가
언제나 함께 있어 시도 때도 없이 눈시울을 붉게 만든다.
일어서며 무심코 왼편을 보니 담장 밑에 국화가 시야에 들어 선다. 국화는 서리가
내리기 전 맑고 차가운 날씨에 펴야 향이 가장 좋은데……. 어느새 피기 시작하는
국화를 안타까워하며 마시던 국화 차를 들여다 본다. 아직도 향이 은근하다. 아마도
이 국화는 시들기 바로 전인 겨울 초입에 꽃의 마지막 기운이 모인 것을 따서 말린
것이리라.
가을은 모든 것이 영면永眠 하는 겨울의 문턱에서 더 빛을 발하고 꽃은 지기 전이
가장 향기로우니 이순耳順이 가까운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살아야
하는지 이 가을에 문득 다시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