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단상 /박현숙
폭신하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겨우내 얼었던 땅이 이른 봄볕에 녹아 부풀어
보드랍다. 아, 어느새 봄이구나. 조금 걷다보니 아직도 차가운 날씨이긴 하지만,
문턱에 와 있는 봄기운에 겨우 내 웅크리고 있던 마음도 풀어지는지 멀리 사는
친구가 그립다. 2월에 태어난 그 친구는 이른 봄기운을 받으며 태어나서인지
늘 명랑하고 건강하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아무것도 두려움이 없는 푸른
20대였는데 어느새 인생의 정점을 지나 내려갈 길을 가늠하는 지점에 와 있다.
졸업하고 수십 년간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았건만 잠깐의 학창 시절
인연이 아직도 이어지는 것이 신기하다.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내가 그리워하는
것이 친구인지 아니면 그 시절인지 경계가 희미하다. 아니 어쩌면 둘 다이겠다.
지나간 것은 힘들었던 것마저 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느끼게 하니 참으로 묘한
것이 세월이다. 혹시 그리움이란 허상을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
하며 강가를 걷는다.
한참 걷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하얀 줄이 그인 긴 갈색 날개를 편 매가 가까이
에서 유영한다. 멋있다! 아, 저 자유, 저 여유! 머리를 한껏 뒤로 젖히고 선망의
눈길을 보내는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매 서너 마리가 나뭇가지 끝을 스칠 듯
낮게 날더니 푸른 공중으로 비상하고 한적한 공원에는 어제 내린 비로 잔뜩 물이
부은 강의 물소리가 넓게 채워져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강 중간에 놓인 바위
에 물줄기가 부딪쳐 하얗게 질린 모습으로 고함을 지르지만, 곧 제 모습을 되찾아
흐르는 모습이 누구 같기도 하여 빙긋 미소가 떠오른다.
지난 세월이 참 길다 싶다가도 한순간이라는 생각에 퍼뜩 정신이 든다.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을까! 삶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아직도 이 근원적인 질문을
내려놓지 못하고 때에 따라 정하는 행복의 기준에 스스로 당혹스럽다. 빈 가지 ㅜ
사이를 훑는 성긴 바람처럼 계절으 지냈고 무엇인가 잦을 듯이 내면을 들여다 보지만
구름처럼 수시로 변하는 내 마음을 쫓아가기는 이제 역부족이라는
생각에 잠시 허무해지는 마음을 털며 2월 강가를 홀로 걷는다.
어느 시인은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지만, 과연 그 행복은
무엇인가?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 사람들은 종종 주위에 널려있는 행복
의 세 잎 클로버를 지나친다고 한다. 아침에 부엌 창으로 밖을 내다보니 동트는
하늘에 분홍 구름이 풀린 리본처럼 길게 펼쳐져 있었다. 마치 단단히 묶은 어둠을
풀고 오늘이 눈 부신 해를 앞세우고 승전 장구 다가와 그것에 떠밀리듯 강가로
왔다. 걷다 보니 새끼손톱보다 더 작고 여린 움이 가지 끝에 터 있고, 무심코
고개를 들면 기다렸다는 듯 반겨주는 낮달에 가슴이 설렌다. 흥겨워진 마음에서
동요가 절로 흘러나오고 또한 강물 소리 나를 따르니 어찌 혼자 걷는다고 말할 수
있으랴. 나이가 들수록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야 한다는 말에는 어쩐지 쓸쓸함이
배여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삶의 정상에 오르기까지 숨 가쁘게 달려오느라
그동안 스쳐 지나던 것을 눈여겨보는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 나의 상처, 나의
내면에만 골몰하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삶과 아픔에 눈이 뜨고 동조하게 된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을 들여다보며 코끝이 찡하고 목이 멘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시사철 변하는 자연의 신비한 리듬에 사로잡혀 이리 행복해하니 행여 이 봄에는
행운의 여신이 나를 찾아오지 않으려나 슬며시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