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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로사와 귀공녀
치마로사와 귀공녀
최영권 신부 (성프란시스 한인성공회)
작열하는 태양, 불어대는 열풍, 지면마저 용암으로 뒤엎은 듯 뜨거움의 쓰나미 속에 갇혀있는 듯 한 긴 여름이었다. 음악감상이 삶에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도 어떤 음악을 들어야 할 지 분간하기 힘들어 자신의 음반 컬렉션 앞에 서서 이것 저것 만지작 거리다 최종적 선택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양보 없는 더위의 긴 행렬 앞에 녹초가 된 심신은 그 웰빙의 의욕을 잃은 듯 지쳐있기 때문에 그날 그날의 자신의 기분 코드 조차도 가늠하기 쉽지 않아서이다. 그런 이유인지 필자 역시 이번 여름에는 한장의 음반도 손에 만져보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날 한 지인이 어느 공원에서 찍었다며 내게 온갖 아름답게 만발한 꽃밭 주변에 호랑나비들이 날아다니는 사진 몇 컷을 한 줄의 짧은 부제와 함께 보내왔다: “호랑나비가 여름을 찬미하는 곳.” 순간 난 망치로 머리를 한대 얻어 맞은 듯 멍해졌다. 마치 영영 사라져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어떤 느낌의 기억이 데자부(Deja vu) 현상으로 다시 내 앞에 돌아와 있는 것이다. “왜 나는 내가 여름의 주인공이 되려 하는가?” 역으로 돌아온 화두 앞에 선 나는 순간 번쩍이는 깨달음이 가져다 주는 명료한 영험함 앞에 겸허이 나의 부끄러움을 시인할 수 밖에 없었다. “오 여름!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당신의 주변을 여름향기로 가득 채운 가운데에 꽃밭에 모인 호랑나비들의 찬미를 받으시는 당신 귀공녀. 봄의 화창함이나 가을의 화려함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당신만의 단아함으로 아름다움을 겸손히 드러내는 참 귀공녀. 당신을 덥다고 짜증내고 비웃고 경시했던 저의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문득 음악방으로 가 도메니코 치마로사 (Domenico Cimarosa
1749-1801, Italy)의 음반을 집어들었다. 그의 소나타 No. 7 in C
major [Tempo di Menuetto] 가 불현듯 생각났기 때문이다. 모짜르트의 화려한 경쾌함이나 베에토벤의 중후한 독백도, 또는 브람스나 슈먄의 독일적 낭만의 흐느낌도 흉내낼 수 없는 단아한 아름다움이 나의 지친 심신을 쉬게 해준다. “당신 귀공녀는 치마로사를 통해서도 이미 내게 아늑하고 포근한 사랑의 메세지를 보내고 있었는데 나는 어처구니 없이도 당신을 늘 원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4분의 3박자 템포 디 메뉴엣또로 사뿐 사뿐 걸어오시는 귀공녀. 얇디 얇은 호랑나비의 날개를 통해 보는 세계, 영묘한 프리즘의 비전. 그 비전이 음으로 펼쳐진다. 그 날개만큼이나 엷은 하모닉 텍스쳐 (Harmonic Texture)
와 싱글 레이어 (Single Layer)
멜로디는 치마로사만이 선사할 수 있는 여름의 선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의 개성이 강하거나 또는 넘칠 때는 그 아름다움 자체가 미학을 수용하는 감성의 한계에 위협적인 무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비운 마음에서 바다가 아닌 냇물에 그물을 뿌려 음을 낚는 치마로사의 음악은 귀공녀가 선택한 마음임에 분명한 것 같다. 불과 2분 17초라는 짧은 곡이 끝나갈 때에, 때 맞춰 창가를 통해 쪽빛이 든다. 햇님도 프리즘을 통해 귀한 선물을 보내오시나보다. 여름,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