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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신인문학상 소설부문 가작/ 박신지
소설-가작
백색왜성
-박신지
태수가 레스토랑 문을 닫고 나왔을 때는 저녁 11시 24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출퇴근 카드를 기계에 넣었다 빼고 좁고 긴 홀을 빠져나왔다. 홀은 불어난 몸무게 탓에 한달 전보다 더 좁아진 느낌이었다. 출입문 제일 위의 잠금장치까지 잠고, 문을 몇번 당겼다 놨다. 불꺼진 식당 안으로 출입문을 가득 메운 태수의 그림자가 얼비쳤다.
밖에는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었다. 땀에 젖은 태수의 머리가 거친 바람에 이리저리 날려댔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내내 태수는 예고에 없던 바람에 적잖은 당황을 했다. 분명 아침에 라디오에서는 바람이 분다는 이야기도 이렇게 기온이 뚝 떨어질 거라는 이야기도 없었다. 5년이 넘는 미국 생활동안 일기예보 정도는 무리 없이 알아들어 왔던 태수였다. sunny, cloudy 정도의 단어들은 어서오세요, 마실 것 주문하시겠습니까 등의 단어만큼 그에게 익숙해진 것이었다. 일기예보 하나 잘못들은 별거 아닌 일인데도 태수는, 자신은 이 사회에 영원히 속하지 못 할거라는 자괴감에 빠지고 있었다.
그는 확실히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것은 오전 근무를 펑크 낸 폴을 대신해 태수가 불려나오면서 부터였던 것 같았다. 새벽녘에나 겨우 잠이 드는 태수에게 아침잠 몇 시간은 태수가 유일하게 인식으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이었다. 태수가 일기예보를 잘못 들은 것은 이런 태수의 컨디션 탓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리 지은 나무들이 바람에 휘청거렸다. 태수의 사촌 형이 남기고 간 BMW X3의 단단한 몸채도 바람에 흔들렸다. 아랫 마을과 뚝 떨어진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그의 집은 월넛힐이라 부르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태수의 집을 비롯해 열채 정도의 집들은, 서로 엉겨 붙은 깨진 유리조각 같은 아랫마을의 모습과는 달랐다. 사실 낡고 오래된 태수네 집을 제외하곤 모두 꽤 괜찮은 집들이었다. 잘 관리된 널찍한 마당과 수영장은 주말이면 늘상 사람들로 붐볐다. 열 채 남짓한 집들은 그렇게 태수의 집을 경계하듯 등을 대고 떨어져 있었다.
태수가 무조건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사촌형이 한국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형수가 임신을 했는데 장모님 곁에서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고, 다들 미국에서 낳고 싶어 하는데 네 형수는 별나다고, 한 일 년이면 되지 않겠니, 하며 이 집을 넘긴 게 벌써 5년이 넘었다. 아기를 키우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고, 형수는 그 일을 혼자 감당하지 못하고 친정에 살다시피 했을 때쯤 둘째가 생기고 셋째가 생겼다. 사실 태수는 떠날 수만 있다면, 그 곳이 강원도 산골이든, 미국이든, 아프리카든 상관이 없었다. 그저 그를 둘러싼 그 곳을 떠날 수 있다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산다는 감정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차라리 산다는 것을 잘라낼 수 있다면 하고 바랐다.
오년 전쯤 캐리어 두 개를 양손에 끌고 이 텅 빈 집에 도착했을 때, 태수는 그의 마음처럼 웅웅 울리는 텅 빔이 좋았다. 더 이상의 가구도 물건도 채우지 않고 그대로, 사촌형이 버리고 간 그대로를 고수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거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가죽 소파 주변은 마호가니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널찍한 책장에 꽂힌 몇 권의 책들만이 태수가 채워 넣은 어떤 것이었다. 차가운 가구들은 그대로 굳어버린 사람의 동상처럼 그렇게 오고가는 태수를 응시했다.
바람을 헤치고 언덕을 힘겹게 올라왔다. 바람 소리는 언덕 아래 마을로부터 태수의 뒤를 바짝 뒤쫓았다. 깨진 유리조각이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는 듯한 바람이 불었다. 태수가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태수는 자전거 한 대가 대문에 기울어져 세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동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다 두고 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은 자전거의 형태를 갖췄을 뿐, 고철이라해도 무방할 행색이었다. 체인은 녹이 슬었고, 안장은 너덜거려 엉덩이를 걸면 바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대문을 통과해 차고로 들어가려면 낡은 자전거를 치워야 했다. 태수가 차문을 열어젖히자 거센 바람에 차 문이 쩍 벌어졌다. 쩍 벌어진 차문은 그대로 자전거에 움푹 패인 상처를 만들었다.
-에이씨.
자전거를 내려찍은 자동차의 문이 바람에 덜렁거렸다. 태수는 오른손으로 뒷목을 잡고 목을 한바퀴 돌렸다. 자전거는 태수의 대문에 단단히 매여 있었다. 이백 파운드가 넘는 태수가 힘껏 자전거를 잡아당기자 달랑거리던 벨이 뚝 떨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가까이서 보니 자전거의 타이어는 꽤 탄탄해보였고, 낡았지만 안장도 나름대로 쓸 만했다. 태수는 다시 차 안으로 가 자신의 핸드폰 번호와 미안하다는 쪽지를 썼다. 그리고 이 모든 게 바람 때문이라고 몇번이나 강조해 바람을 힐난했다. 태수의 차는 대문 앞에 코를 박은 채 처량한 모습으로 태수를 지켜봤다.
차가 드나드는 큰 대문 옆에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작은 쪽문이 있었다. 주로 차를 타고 다니는 태수에게 쪽문을 여는 일은 흔치 않았다. 막 이사를 왔을 즈음 누군가 던진 야구공을 가져다주러 나갔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거라고 태수는 생각했다. 그런데도 쪽문은 스르륵 잘 열렸다. 뻑뻑해 몇 번이나 기름칠을 한 대문과는 달리 쪽문은, 누구나 써왔던 문처럼, 쭉 열리더니 태수를 집어 삼켰다. 집어 삼켰다 함은, 바람에 쪽문이 거세게 닫혔기 때문이었고, 거대한 몸집의 태수 또한 그 바람에 중심을 잃고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강력한 모터를 따라 도는 원형샌드처럼 태수는 바람을 따라 그대로 정원을 가로질렀다.
정원에는 익숙한 냄새가 있었다. 오늘은 더 진하게 그 냄새가 났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가끔 날라오는 냄새지만 사실 태수에게는 익숙한 냄새였다.
-너만 원한다면 최상급으로 가져다줄게.
짧은 스포츠머리에 눈웃음을 짓는 인기 만점의 일본계 서버 폴은 그에게 떨을 태워볼 것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 폴은 레스토랑에 들어올 때면 언제나 실실 웃으며 마약에 취해 있었는데, 매니저는 폴의 단골손님들 때문에 그를 해고할 수 없었다. 주로 돈을 잘 버는 나이든 여자들이 폴을 불렀다. 폴은 일을 한다기보다 그녀들과 말상대를 해주고 특유의 눈웃음을 쳐가며 그녀들의 어깨를 살짝 만지곤 했다. 그녀들은 비싼 와인을 시킬 때마다 폴의 성난 팔을 한 번씩 쓰다듬었다. 단백질 파우더로 만들어진 폴의 근육은 왠지 텅 빈 풍선같아, 태수는 여자들이 폴의 팔을 만질때마다 그것이 터져버리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폴은 상체에 힘을 주고 한 잔 가득 와인을 따라놓았다. 태수는 레스토랑이 끝나고 집에 가는 주차장에서 폴과 그 여자들을 본 적이 여러번 있었다.
이 냄새는 폴에게서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태수는 그 냄새가 진하게 퍼지는 정원에 서서 한껏 숨을 들여 마셨다.
요란한 바람소리를 들으며 그는 가까스로 문 앞에 섰다. 자신도 모르게 문을 두드렸다. 그리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열쇠를 돌렸다. 컴컴한 집안을 더듬어 불을 켜고, 화장실로 향하며 옷을 하나씩 벗었다. 땀에 절은 옷들이 겹겹이 층을 이뤄 태수를 감싸고 있었다.
이층으로 나있는 나무계단에서 낡은 나무의 쇳소리가 이어졌다. 꾹꾹 눌러진 나무가 다시 힘겹게 올라오는 소리가 집으로 울려 퍼졌다. 옷가지와 함께 몸에 밴 음식냄새가 더욱 진하게 흘러내렸다. 양말, 바지, 타이, 셔츠. 마지막으로 속옷만 입고 화장실 앞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그는 한참동안 자신을 바라보았다. 거칠어진 볼을 그만큼 거칠어진 손으로 부비적거렸다. 덥수룩한 수염과 한껏 나온 배, 내려앉은 눈초리 모두 거기에 있었지만 그 어떤 것을 바라보는 건 아니었다. 뜨거운 물에 몸이 녹았다. 그가 뱉은 소리는 물 속으로 들어가 없어졌다. 멜로디인지 자신도 모르는 기도말이였는지, 기도였다면 누굴를 위한 것이었는지 모를, 그런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뿜으며 그는 샤워를 끝냈다. 알 수없는 소리의 잔음이 태수의 귀에 머물렀다.
태수는 맥주 한 캔을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뜨거워진 몸이 차가운 맥주 방울과 부딪쳐 태수를 어지럽혔다. 단숨에 한 캔을 끝내고, 두 번째 캔을 따 다시 들이켰다. 그리고 세번 째 캔을 들이켰다.
태수의 귓가에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검정색으로 빼입은 무언가는 중요한 일을 수행하듯 옷깃을 들었다 놨다하며 누군가와 신호를 주고받는 것 같기도 했다. 분명 태수 집이었다. 자신의 집인데도 태수는 몰래 숨어든 사람 마냥 어딘가에 숨어 그 무언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무언가의 눈빛은 날카롭게 집안 곳곳을 바라봤다. 태수는 행여나 그 눈빛이 자신에게 머물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허연 눈동자를 낮게 내려 깔았다.
그 무언가가 노리는 건 돈이나 물건이 아니었다. 태수가 아무렇게나 쌓아 둔 상자 속 돈 뭉치를 그 무언가는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놨다. 무언가가 원하는 건 태수였다. 태수가 더욱 낮고 조용하게 숨을 쉬는 통에 목구멍이 갑갑해지는 것을 느꼈다. 바람 소리 같은 태수의 콧바람 소리가 살짝 새어 나왔을 때, 그 무언가가 휙 돌아섰다. 태수는 소스라치듯 억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남은 맥주가 카펫 위로 흘러 내려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 태수의 몸은 소파에 반만 걸쳐져 시체처럼 퍼져있었다. 태수는 입가로 흐른 맥주를 닦아냈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꿈이 아닌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태수는 빈 캔을 집어 들어 식탁에 놔두고는 서둘러 침대로 향했다. 불 꺼진 일층을 지나 이층으로 올라오는 길이 서늘했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거실에서 조는 법이 없었는데, 오늘은 정말 피곤한 것이라고, 그러면서도 나이가 들긴 들었구나라며 아까 본 자신의 나체를 떠올렸다. 건조한 손바닥을 얼굴에 비벼 마른세수를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몇 개 안되는 물건 중 하나인 이불을 돌돌 말아 덮고 태수는, 그럴 일 없겠지만, 오늘만은 아무 꿈 없이 푹 잘 수 있기를 기도했다. 한국에서 건너온 지 오년이 넘었는데도 이 이불에서는 여전히 한국냄새가 났다. 이불을 말아 얼굴을 파묻었다. 자다 깨서 그런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암전된 도시마냥 아무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고요함으로 뒤덮였다. 꿈과 현실의 갈라선 문을 여는, 바로, 그때였다. 방 밖 어딘가를 빠르게 지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사촌형이 떠나기 전까지, 그러니깐 태수가 이 큰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 이개월 동안 머물던 아파트는 작은 원룸이었다. 크기도 작기도 작았지만, 워낙 방음이 안 되는, 낡은 아파트였다. 옆집의 말소리가 가감 없이 들리는 때가 많았다. 말소리라면 괜찮겠지만, 옆집의 섹스소리는 정말 듣기 힘든 고역이었다. 여자와 남자의 간단한 영어 단어들은 더욱 신랄히 태수의 귀에 꽂혔다. 남자의 격렬한 움직임이 여자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그들의 목소리는 파닥파닥 거리는 뭍 위에 물고기 같다가 곧 강한 빛을 내며 폭발해버릴 듯한 우주의 어느 유기체 같기도 했다. 그 소리가 명확히 들려올수록 태수는 더욱 이불을 돌돌 말아 온 몸에 휘감았다. 최대한 몸을 구부리고 귀를 틀어막았다. 그들의 강렬한 삶의 소리는 태수를 더욱 움츠려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는 그 작은 원룸이 아니었다. 방금 태수가 들었던 발소리는 옆집의 소리가 아니었다. 발자국 소리는 자주, 또 가까이 들려왔다. 두 손에 이불을 꼭 쥔 태수의 이마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분명 태수가 잠든 줄 알았을 것이다. 그의 집은 늘 어두웠다. 물에 잠긴 듯 무거운 자주색 커튼은 걷혀지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 태수의 집이 비었거나, 아니면 그가 깊은 잠에 빠졌을거라 생각한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다. 태수는 밖에서 들려오는, 카펫을 스치는, 소리를 내려하지 않지만, 인간이 수백만 분자의 공기입자를 뚫고 지나가며 들려올 수 밖에 없는 최소한의 소리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나자 태수는 바로 태수가 머무는 이 집에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뜨니, 신경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시 눈을 감고, 두 손은 이불을 쥔 채, 모든 신경을 죽이고 오직 귀의 신경만을 곤두세웠다. 한껏 예민해진 귀의 신경도 눈을 가린 아둔함에 몽롱해지기도 했다.
그 무언가는 문 앞 쪽에서 거실 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나무 계단은 이번만큼은 바짝 긴장을 한 듯 꽁꽁 얼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의 방에서 발소리가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 느껴졌다. 귀만이 열려있었지만, 무언가의 존재는 들린다기 보다 느껴지는 무엇이었다. 태수는 이상한 살기도 느꼈다. 문 밖의 무언가의 손에 들린 것이 칼인지 총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태수는 그 무언가가 자신을 해하기 위해 준비한 그 물건에서 전해오는 살기를 느꼈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공포로 온 몸이 떨리고 땀이 주르륵 흘렀다. 거대한 그의 몸이 수분을 머금고 매트리스 속으로 더욱 푹 잠겼다. 이제 거실 쪽으로 이동한 그 무언가는 태수가 있는 방문을 열고 빠르게 그의 목을 베거나 조르거나 혹은 머리통을 날려버릴 타이밍을 기다리는 듯 숨을 죽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무언가가 침입했다는 확신에 이어 이제 태수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태수는 죽음을 확신했다. 몇 분 후면 아니 길면 몇 시간이 지나면 태수는 죽을 것이다. 문 밖에서 태수를 기다리는 그 무언가의 습격으로 그는 머나먼 타국 땅에서 죽어갈 것이다. 그의 죽음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시체는 저 무언가에 의해서 솜씨 좋게 치워질지도 모른다.
애당초 애를 써가며 연장시킬 인생은 아니었다. 잠을 자려 애쓰고 그러다 자기도 하고 알람을 듣고 일어나 일을 했던 것이 태수의 일상이었다. 일상은 어느새 인생이 됐다. 무엇이 태수를 붙잡고 있는지, 왜 저것의 침입에 의문이 드는지 태수는 문득 궁금해졌다. 힘껏 쥐고 있던 이불을 턱 끝까지 내렸다.
태수가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으로 떠나겠다고 오수에게 말한 것은 출국 이틀 전이었다. 오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술 한 잔 하자고 연락도 없이 태수를 찾아왔다. 오수에겐 항상 술 한 잔이 필요했다. 오수의 눈빛은 맞은 편 의자가 빈다는 데에서 오는 공허함 때문이라고, 태수가 떠난다는 슬픔 때문은 아니었을 거라고, 태수는 끝까지 그렇게 믿었다.
오수는 부모님 덕에 대학교 교직원 자리를 얻어 일찌감치 취업을 했다. 오수는 화학을 전공했지만, 원래 시를 쓰는 걸 제일 좋아하는 놈이었다. 오수의 시의 대부분은 회환이었고, 슬픔이었고, 그리움이었다. 오수는 에너지를 잃고 부표하는 사람처럼 삶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친구들은 그런 오수에게 니가 얼마나 행복한 놈인줄 아느냐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태수 또한 대학원을 진학한 상태였다. 장학금을 받고 들어간 데다, 두 명 정도 고액과외를 하니 형편도 넉넉했다. 태수는 오수와 친하게 된 것은 모두 이런 상황이 맞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친구들은 둘을 보며, 똑같은 놈들이라고 했다.
-떠돌다 떠돌다 가끔 살아만 있어라.
오수는, 가끔, 살아있으라고 했다.
태수는 눈물이 났다. 언제부터 삶은 이렇게 묵직해져 버린걸까.
태수는 천천히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눅눅한 이불을 걷어내니 차가운 공기와 땀방울이 만나 몸이 으슬거렸다. 뒤로 넘어간 옷자락을 잡아 당겨 매무새를 정리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쓱 한 번 헤치고 나서 태수는 핸드폰의 손전등을 켜고,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방문 밖은 컴컴했다. 손전등이 비춘 빛을 따라 눈을 쫓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2층 난간에서 서서 거실을 비췄다. 짧은 불빛은 거실까지 미치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았다. 왼손으로는 1층으로 이어진 난간을 붙잡고, 오른손으로는 빛을 비춰가며 태수는 낡은 나무 계단을 내려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수록 죽음의 서늘함에 오한이 들었다. 거실은 적막했다. 태수의 그림자조차도 집어 삼킨 적막이었다.
태수는 참았던 공기를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천천히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에는 사촌형의 낚시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었다. 차고와 통하는 지하실은 본래 커다란 스크린이 설치된 가족 공간이었다. 피아노와 런닝머신이 각 귀퉁이를 차지했지만, 태수는 그저 몇 번 힐끗 쳐다본 게 전부였다. 손전등은 피아노의 앞, 뒤, 옆을 열심히 비췄다. 그렇게 런닝머신을 비추는 불빛을, 꼼꼼히 태수의 눈이 따라가고 있었다. 애초에 이 집에 한번도 산 것 같지 않은 눈으로, 태수는 유심히 집을 바라봤다. 지하실을 지나 차고를 살피고, 올라와 주방과 연결된 세탁실을 차가운 불빛으로 들어내고 있었다. 집도 시간도 태수에겐 버거웠다. 낯선 풍경은 태수를 더욱 싸늘하게 만들었다. 어느 곳에도 무언가의 흔적은 없었다.
태수는 다시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이쯤 되니 태수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도의 순간은 짧게 끝나 버렸다. 태수가 방문을 닫기 무섭게, 빠른, 좀 전의 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발자국 소리가 카펫을 스쳤다. 그 소리와 함께 태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방문 앞에서 아직 채 손도 떼지 못한 오른손을 문고리에 남겨둔 채. 태수는 그 순간 자신도 이 집의 가구들처럼 굳어질 수 있겠다는, 그러면 자신의 눈은 그 어떤 가구의 눈빛보다 날카롭게 집을 노려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가 지나자 다시 소리는 잠잠해졌다. 태수는 부여잡은 손잡이를 놓고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발걸음은 너무 씩씩해 마치 이제 막 잠에서 깨 아침을 맞이하러 가는 사람의 모습같았다.
창문을 가린 두꺼운 커튼을 걷어냈다. 대문에 매여 있던 자전거가 쪽문 앞으로 옮겨져 있었다. 두꺼운 자물쇠도 태수의 쪽지도 사라진 듯 보였다. 태수는 대문 너머, 언덕 아래 마을을 너머 어딘가에 그의 시선을 가져다 두었다. 먼 하늘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도 싶었다. 그리운 향기를 맡고 싶었다. 그 향기와 어울리던 그 무엇도 그리웠다. 코를 찡긋 위로 치켜 올리자 그제야 눈이 촉촉해졌음을 알아챘다.
이젠 시간이 됐다. 태수는 직감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태수가 삶이란 테두리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던 그때가 잘못이었고, 그가 삶이라 칭하지 않았던 그 전의 미숙한 시간 그 모두를 부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든 걸 부정하다보니 결국, 어느 것 하나 부정할게 없어졌다. 결국 그것이었다.
태수는 몸을 돌렸다. 문 밖에 서 있는 그 무언가는 이제 시간이 다 됐는지,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태수는 다만, 몸을 곧추 세우고 빠르게 달려오는 그 발자국 소리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