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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신인문학상 수필 부문 수상작/ 조은영, 신용교, 김인숙, 정지은

Author
문학
Date
2019-01-13 13:09
Views
3986
<수필부문 가작>


거울

-조은영


 
  벌써 13년 전이다. 가을 어느 날, 밤새 진통으로 소리조차 내기 힘든 순간이었다. 나와의 탯줄을 끊고 세상으로 나온 아이는 우렁찬 울음으로 신고식을 하였다. 이제 갓 태어난 아이가 눈을 뜨기도 전에 젖을 물어 자신을 지켜내는 법을 어찌 알았을까? 나는 그때 그 경이로움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실컷 배불리 먹고 잠든 아기의 미소며 잠에서 깨어 엄마를 보며 ‘까르르’ 웃는 모습이 모두 천사의 것이었으며 그런 아이를 담고 있던 나의 눈은 천국 그 자체였다. ‘어쩜 이리 예쁠까?’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 되어 속삭였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은 나를 설레게 한다.
나의 꿈과 희망과 휴식이었던 그 녀석이 어느새 열세 살이 되었다. 중년의 문턱을 넘고 있는 나와 사춘기 중심에 와 있는 아들 녀석은 더는 13년 전 그때의 엄마와 자식이 아니다. 자주 부딪친다. 아이의 어질러진 방, 잠겨진 방문, 불규칙한 식사 시간, 그리고 논리를 내세운 말대답은 나의 불안을 자극하고 화를 부추긴다. 어제도 숙제를 미리 해놓지 않아 늦게까지 잠을 못 자는 아들의 모습이 나를 자극하였다. 나는 ‘늦게 자면 키가 안  클텐데…’, ‘내일 학교 수업에 지장이 있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이 스치면서 불안이 올라왔다. 불안을 통제하지 못한 나는 흥분하여 과도하게 야단을 치고 말았다. 그 후 밀려오는 후회감에 말을 건넸다.
“내가 좀 흥분을 하긴 했어.” 하고 말을 하니
“많이 했지” 아들이 짧게 받는다.
“그래 좀 많이. 그래도 엄마가 너를 생각해서……” 나는 자존심에 반만 인정했다.
“나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엄마만 생각하는 거지…” 아들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모양이다.
“그렇게 콕콕 짚어야겠어?” 나는 비겁하게 방향을 바꾸어 공격해보았다.
“엄마를 생각해서……” 그는 어느새 나의 거울이 되어 있었다.
“내 문제는 내가 생각할게. 근데 네가 가끔 엄마를 미치게 만들어” 이 말은 안 해야 했다. 궁색한 변명에 남 탓까지.
“엄마가 자신을 미치게 하는 거야. 내탓하지마……” 아이는 어느새 나의 불안을 담아 낼만큼 커버렸다. 살벌하다. 살벌하게 지적하는 나를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도 살벌하다. 아이는 어느새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나의 불안, 미숙함, 불합리한 면도 함께 보여준다. 그 모습을 안 보려고 고집부리지만, 거울은 여지없이 비춰준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라고 묻는 말에 “왕비님이 가장 예뻐요.”라고 말했던 거울은 “이제 공주님이 제일 예뻐요.”라고 답한다. 변해버린 거울이 왕비를 화나게 하지만 사실 변해버린 건 왕비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아도 왕비는 화난다. 엄마가 최고라고 생각하며 간절한 애정의 눈빛을 보이던 아이의 눈빛은 이제 매의 눈이 되어 엄마의 모순을 직면시킨다. 
아이는 어려서 엄마에게 사랑을 속삭였지만 이젠 좀 컸다고 투쟁을 한다. 어려서 먹은 사랑이 과해서 혹은 부족하여 때론 적당하여 투쟁의 거름이 되었나 보다. 아이는 나의 심연에 묶어두었던 괴물까지 등장시키며 선과 악을 경험하게 한다.  독 사과를 꺼내든 나의 그림자를 비추며 아이는 자신의 허물을 벗고 생각을 키운다. 나는 부족함으로 제물이 되고 순종으로 애벌레를 키운다. 같이 싸우면서 서툴면 서툰 대로 그렇게 아이의 양분이 된다. 
아이가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추니 부족함을 대면하는 겸손함으로 나도 커가려나? 아이의 생각과 행동을 보여주려는 나의 거울이 어느새 그의 커버린 눈과 생각을 통해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춘다. 이 얼마나 신비로운 가르침인지… 나의 부족함이 자식의 그릇에 담기니 부끄러움도 잠시. 두 번째 탯줄을 끊어내려는 아이의 성장에 아프지만, 몹시 떨리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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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장려상>

케이팝과 한민족

 
                                                                                        -신용교



  한국의 케이 팝이 지구촌을 누비며 세계의 젊은이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팝이란 음악 장르는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코리안 팝, 그러니까 케이팝은 오히려 동양을 넘어 서구로 향해 그 인기의 고공행진을 하고 있으니 한민족이 세계 대중음악의 주체가 되어가는 듯한 묘한 자부심으로 가슴이 끓어오르고 있다. 앳된 한국의 어린 가수들을 보고 세계인들이 열광하며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에 뿌듯한 자랑스러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반면 이런 폭발적 반응이 잘 이해되지 않아 한편으론 당황스럽기도 하다. 넓적한 한국인의 얼굴 형태가 매력이 없어 보였는지, 얼굴 이곳 저곳을 성형하여 국적 없는 외모가 되어 버린 아이돌…. 이들이 보여주는 절제함 없이 마구 흔들어 대는 춤사위와 애매모호하게 뿜어내는 가냘픈 목소리가 세계인들을 감동시키고 때론 눈물까지 흘리게 하고 있으니, 도대체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것일까?
 
그러나 한 영국의 동아시아 역사학자는 케이팝의 성공을 확신에 찬 어조로 두 가지 단어로 요약하였다. 그는 K-pop에 담겨있는 ‘다채로움과 강렬함’ 이 세계적 대중화의 이유라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지구상에서 다채롭고 강렬한 음악이 오직 K-pop 뿐이었던가? 눈길 가지 않는 너무 흔한 평가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만약 그냥 던진 말이 아니었다면 그 영국 학자가 말하고자 했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강렬함으로 이야기 하자면, 젊은층의 욕구 불만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Rock이 있다. Rock에는 그 초창기부터 Band의 형태가 있었다. 당대의 거물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 오프닝을 장식했던 버디 홀리를 시작으로 하여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친 비틀즈에 이르러 확립된 Rock band의 형태가 바로 그것이다. 비틀즈가 이룬 Rock의 글로벌화를 말하지 않고 대중음악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연 K-pop은 이런 Rock에 견줄 만한 그 강렬함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음악 자체가 복합적이면서 때론 즉흥적인 면이 강해 작곡부터 연주까지 높은 난이도를 요구하는 Jazz가 또한 있다. 유럽의 오랜 역사를 통해 꾸준히 개량된 화려한 전통 악기에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과 화성이 조합된 이 장르는 시작부터가 혼합과 다채로움 그 자체였으며 결국 미국 의회에서는 Jazz를 미국의 국보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그 다채로움은 세계 각국의 전통 음악과 지속적으로 결합하면서 이 순간에도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키며 끊임없는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과연 K-pop은 이런 Jazz에 견줄 만한 그 다채로움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 비교 평가를 위해, 글로벌적 검증을 이미 받은 위 두 가지 음악 장르의 성공적 요소를 다시 직시할 필요가 있다. 두 음악이 보여주는 혼합적 다채로움과 폭발적 강렬함은 그 영국의 역사학자가 말했던 K-pop의 보편적 특성과 같기 때문이다.
 
K-pop은 그 다채로움을 위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난립하는 수 많은 음악장르를 필요에 따라 선택하면서 적절히 조합하기 시작했다. 그런 K-pop을 분석해 보면, 음악의 초반부에는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분위기 전환에 용이한 Hip-hop을 채용한다. 그러다 어느덧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에 따라 무난한 일반 Pop으로 변환을 꾀하다가, 결국 청취자에 뇌리에 각인될 만한 강력한 음률의 정점을 찍기 위해 감성 폭발에 탁월한 Rock으로의 변신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한 곡의 노래 속에서 모두 이루어지고 있다. 이뿐만이아니다. 곡 중간중간에 들려오는 EDM의 인공적인 기계음은 오히려 음악이 후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소 유치하며 때론 거추장스럽다. 물론 요즘엔 전자음을 사용하지 않는 음악은 거의 없다. 하지만 K-pop에서 사용되는 EDM의 표현 방식은 일부러 고전적 기계음을 추구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이다. 여기에 한국인에게 친숙한 Ballad와 Folk는 물론이고, 2000년대 초 미국에서 발생된 군악 같으면서도 빠른 비트의 중저음이 특징인 Trap의 요소까지 과감히 한 곡의 노래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리고 마구 섞어 뒤흔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파격적 시도를 주저하지 않은 K-pop에 세계는 지금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이런 특성은 음악 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두드러진다.
 
에베레스트를 처음 정복한 이는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이다. 그 때가 1953년이었고 사실 그는 네팔의 셰르파족인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올랐다. 그 후로 24년이 지난 1977년, 한국의 고상돈 대원이 세계에서여덟 번째로 그 에베레스트에 오르게 된다. 뒤늦게 그 경쟁에 합류한 것이다. 그 10년 뒤인 1987년, 허영호 산악인이 한국인으로서 다시 그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도전을 계속하여 추가로 남극점과 북극점에 이르면서 세계 3극지를 모두 정복하고 7대륙의 최고봉을 모두 완등하면서 세계 7대륙 3극점을 네번째로 모두 정복한 인간이 된다. 그 이 후 산악인 사이에서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팔천 미터가 넘는 히말라야 14좌가 이탈리아인 메스너 한 사람에 의해 모두 무산소로 완등되자, 한국의 엄홍길은 그 14좌에팔천 미터가 넘는 2개의 봉우리를 더해 16좌를 채워 등반에 성공하고, 김창호는 그 14좌를 모두 메스너와 같이 산소통을 메지 않은 채 무산소로 오르면서 동시에 최단 기간 완등 기록까지 더한다. 그리고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오은선은 세계 최초로 여성으로서 14좌 완등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박영석은 이전 허영호의 기록에 14좌를 더해 세계 7대륙 3극점 14좌를 모두 정복하며 ‘True explorers grand slam’을 달성하는 최초의 인류가 된다.
 
대부분의 극지들은 장소별로 주로 서구인에 의해 정복되었다. 뒤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비록 더 이상 최초로 정복할 여지가 남아 있지 않은 이 조그마한 지구라 할지라도, 한국인은 한 개인에 의한 복합적 정복의 다채로움으로 극지 정복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 이제 음악이 가세하고 있다. 다채롭다는 K-pop의 이름으로 말이다.
 
다채로움과 강렬함은 또한 음식에서도 발견된다. 원래는 궁중 음식이었다가 수라간 상궁들에 의해 궁중에서 반가로 전해지고 다시 반가의 음식을 모방했던 민중들에 의해 한국의 전통음식으로 자리 잡은 비빕밥 역시 그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이 음식은 한 종류의 음식이지만 그 안에 여러가지 재료들이 뒤섞여야 되는 그야말로 갖은 식재료의 혼합형 음식이다. 바로 다채로움을 향한 민족적 특성이 식생활에서도 나타난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이 비빔밥에 없어서는 안 될 아주 독보적인 존재가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고추장이다. 이 고추장 덕분에 서로 성질이 동일하지 않은 모든 식재료들은 동일한 한가지의 방향성을 소유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매운맛이며 동시에 맛의 강렬함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보편적 한국 음식 비빔밥은 그 다채로움과 강렬함을 그 미각의 바탕에 이미 깔아 놓고 있었다.
 
삶의 영역이 만주에서 한반도로 자꾸 축소되어 살아왔던 한민족에게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는 주로 대륙 아니면 섬나라였었다. 성격이 다른 외세에 대항하여 살다 보니 우리와 다른 '남'에 대해 지나치게 배타적이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 배타성은 생존의 요구였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삶의 철학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외세의 수용없이 독자 생존이 어려웠던 상황 속에서 그 외래문화를 수용해야 하는 것도 동시에 요구되어 졌었다. 이렇듯 배척과 수용이라는 모순된 문화를 꾸려야 했던 한민족에게 그 배척과 수용은 강렬함과 다채로움으로 그 이름만 바뀐 채 우리 골수에 녹아 들어가, 결국 민족 생존의 아픔과 극복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게 된, 한민족 문화의 정서가 되어 버린 것이다.
 
1년에 2차례나 빌보드차트 1위를 기록한 그룹과 인물이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 프랭크 시나트라, 비틀즈, 그리고 레드 제플린으로 모두 서구인이었다. 여기에 최초로 동양의 앳된 어린아이 같은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이 가세하며 신한류의 세계적 역사를 쓰고 있다. 동방의 작은 나라가 대단하다고 세계는 아우성치지만 사실 이제 시작인 듯하다. 정보화시대의 주인공은 플랫폼 문화를 즐길 줄 아는 자이다. 다양한 지역으로 부터 기차를 타고 역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외없이 밟아야 하는 플랫폼...... 이것은 온라인이 보여주는 다채로움의 정확한 현실이다.
 
다채로운 음악장르가 녹아 있는 K-pop이 온라인을 통해 지구촌에 울려 퍼질 때, 많은 이들은 자국에서 흔히 들었던 귀에 익은 음색을 어디에선가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다양한 종류의 세계인들을 사로잡는 K-pop의 첫인상이다. 그리고 그 찰나적 친숙함에 감춰져 있던 중독성 있는 강렬함은 성공적으로 그 찰나를 뇌리 속에 장기간 묶어 둔다.
 
마치 다채로움의 극치를 이룬 빅데이터의 방대한 정보를 그 수 많은 가능성들을 하나의 강렬한 확실성으로 채택하여 그 선택을 독려하는 인공지능의 놀라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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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부문 장려상>

소중함이 있는 곳


-정지은

 
  참 재미있는 그림이라는 생각에 나는 그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전 이태리의 플로렌스를 여행하며 그 화려했던 이태리 르네상스 문화를 섭렵하겠다는 욕심에 이른 아침 줄을 서서  문 열자마자 들어 간 그 곳 미술관을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중이었습니다.
화가의 이름은 카라바지오였습니다. 자신의 원래 이름도 미켈란젤로였지만 자신보다  앞선 위대한 조각가이며 화가였던 미켈란젤로의 그늘에 가려 자신의 이름 대신 자신이 태어난 고향의 이름인 ‘카라바지오’라 불리는 이태리의 또다른 천재 화가 중의 한명입니다.
‘ 의심하는 토마스’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죽었다고 믿었던  예수님이 제자인  토마스 앞에 나타나 자신이 부활한 예수이라는 것을 토마스에게  알리고 그를 믿게 하려하는 상황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을 보며 생각 했었습니다. 그림대로라면 토마스는  운이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의심스럽고 자신이 믿지 못했던 것을 이제 믿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당장 토마스 자신의 눈 앞에서 예수님이 직접 자기가 죽을 때 난 상처를  보여주고 손으로 만지게까지 하였으니  이쯤 되면 제 아무리 토마스라도 안 믿을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카라바지오의  뛰어난 상상력에의한 상황 설정일테지만 말입니다.
나는 요즘 나에게 가족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언제든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으니  힘든 일도 힘들지 않게 넘어 가곤하는 것같습니다. 이렇게 가족들이 나에게 힘이 되어 줄수 있는 것도 우리 가족들이 서로 믿고 그 것을  바탕하여 사랑으로 의지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돌아보니  내가 태어나고 자란 한국을 떠나 이곳 미국에 온 지 벌써 10년을 훌쩍 넘었습니다. 이쯤되면  미국이 내 삶의 터전이라 여기고 편안히 지내야할텐데 어쩐 일인지 항상 마음은 내가 자란 그 곳을 향해 있는 것 같아 나 스스로 안타깝고 불안하기도 했었습니다.  나이 많으신 어머니가 그립고 내 형제들이 보고싶어서 그러려니 위안도 해보지만 가끔 마음이 울적해지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럴 때면 가끔 카라바지오의 이 그림이 다시 생각나곤했었습니다. 뭔가 아닌것같고 의심스러울 때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깨우침은 무엇일까하는 생각에서 일테지요. 내 손에 확실히 잡히지 않는 그 답이 그 그림 속의 토마스에게 처럼 확실히 다가올 수는 없을까하고요.
그러면서 그림을 다시 펼쳐보던 어느 날, 나는 문득  카라바지오가 진심으로 우리에게 하고픈 얘기가 뭔지 알 것 같았습니다 .  카라바지오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의심으로 가득찬  토마스에게서 의심보다는  믿음의 소중함을 강조하여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그동안 쌓아온 시간들이 주는 믿음은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믿고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는  내 가족들과 함께하는 이 곳이  얼마나 소중하고 편안한 우리의 보금자리인지는보지 않고 만지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토마스의 손을 잡아끌어 자기의 상처에 대어보이는 예수의 손을 왜 카라바지오가 그림의 한 가운데 힘주어 그렸는지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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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장려상>

사람을 찾습니다


-김 인숙
 
  내가 초등학교 6학년, 그러니까 1971년 여름 방학 중 어느 날, 벼르고 벼르다가 그날 친구와 난 청량리에 있던 메리아 펜팔 협회라는 곳을 가기로 했다. 그 시절도 조기 교육열때문에 영어라는 걸 과외수업을 통해서 배우기 시작했기에 마치 우리가 영어를 잘 하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우리도 미국 친구라는 걸 만들어 서로 편지하며 지내자는 거였다. 누구의 아이디어였는 지는 생각이 나지않지만 우리 둘 모두 동의 했었고,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 당시 ‘어깨 동무’라는 아이들 잡지에 난 광고를 찢어 주머니에 넣고 우린 집을 나섰다. 우리가 살던 곳은 구로동이라는 서울의 변두리였고, 친구 집까지는 걸어서15분 남짓 걸렸다. 엄마에겐 친구 집에 가서 논다고 하고 버스비만 달랑 갖고 집을 나섰다. 서로의 중간인 구로동 버스 종점에서 만나 버스를 타고 서울역까지 가서 다시 청량리 가는 버스를 갈아탔다. 두리번거리며, 이사람 저사람에게 길을 물으며 드디어 우린 부푼 가슴을 안고 펜팔 협회 문을 두드렸다. 주춤하며 가장 가까이 앉아있던  아가씨에게 가서 광고를 내밀며 말했다.
-영문 펜팔하려고 왔는데요.
-영어 할 줄 아니?
-조금 할 줄 알아요.
-그럼, 집에서 도와줄 사람이 있니?
-아니요.
-나중에 더 크면 와.
-우리 영어 할 수 있어요. 광고에 초보자도 할 수 있다고 했는 데요.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안돼. 나중에 다시 와.
광고라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알기엔 우린 너무 어렸던 것 같았다. 억울하고, 화나고, 기가 막힌 걸 참으며 우린 밖으로 나왔다. 터벅 터벅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서울역으로 우릴 데려다줄 버스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차는 오지않고 사람들만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차를 기다리는 것에만 신경을 썼지 사람들이 하는 대화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순간, ‘호회요’하는 소리에 귀가 갑자기 뚤렸다. 사람들이 웅성 대는 걸 느꼈고, 그들이 서서 신문을 읽고 있는 걸 알았다. 그들 말이 무장공비가 노량진 근처에 나타났단다. 노량진? 그건 우리집 가는 길인데 하는 생각에 가슴이 털컥 내려않았다. 김일성이 서울에서 환갑잔치를 할 거라는 둥, 항상 우린 북한이 언젠가는 남침을 다시할 거라는 소릴 들으며 살아왔었다. 그 당시 내겐 무장공비 나타난 것이 전쟁난 거나 다름이 없었다. 교통은 차단되어서 버스가 다닐 수 없단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친구와 난 버스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걷기로 했다. 우선 서울역으로 가기로했다. 어린 마음에도 서울역은 모든 것이 통하는 곳이기때문에 그 곳에 가면 뭔가 수가 생길 지도 모른 다고 생각했다.
서울역에 도착했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버스 정류장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 하기에 바빴고, 아무도 어린 우리들에게 신경을 써줄 사람은 없었다. 한참 후에 버스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어른들 말이 제1한강교 (지금의 한강대교) 전 노량진까지만 운행한단다. 어른들이 하나둘씩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친구와 나도 노량진 근처까지만이라도 가기로 결정했다. 일단 그곳에 가면 버스는 못가도 걸어 갈 수는 있으리라 싶었다. 어찌 어찌하며 버스에 겨우 승차를 했다. 이미 밖은 어두웠다. 평소에도 눈물이 많은 나는 차에 올라서도 찔끔찔끔 울었다. 내가 우느라 친구도 울었는 지 어쨋는 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한 언니가 우는 나를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엄마한테 말도 안하고 왔는데 버스가 없어서 집에 못가요.
-어디 사는데?
-구로동이요.
-혹시 노량진 쯤 가면 버스는 안다녀도 택시는 다닐지도 몰라.
-택시요? 택시 탈 돈도 없는 데요?
그 언니는 자기 지갑을 열더니 돈을 꺼내주었다.
-이거면 택시 탈 수 있을 거야.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갚아요?
-괜찮아. 안갚아도돼.
-꼭 갚을 께요. 어디로 찾아가면돼요?
-정 갚을려며, 노량진에 있는 독일빵집으로 와서 미스 리 찾아.
그리곤 그 언니는 우리보다 한 정거장쯤 먼저 내렸다. 우리가 노량진에 도착했을 땐 하나 둘씩 버스가 정상 운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우리집 가는 버스가 보였다. 친구와 나는 택시 생각은 잊어버리고 버스로 달려갔다.  그리고 우린 밤 늦게서야 집에 도착했다. 여느 때 처럼, 친구집에서 늦게 왔다고 난 엄마한테 무지무지하게 혼났다. 엄만 감히 내가 서울의 다른 쪽에 있었으리란 상상도 못하셨고,아직까지도 난 한번도 그 때일을 말한 적이 없다. 그건 친구와 나의 진짜 비밀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난 독일 빵집에 가지 않았고, 그 돈을 갚지 못했다. 처음에는 다시 버스를 타고 혼자 어딜 간다는 게 두려웠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다 보니 새삼스럽게 찾아간다는 게 왠지 쑥스럽게 느껴졌고, 아직도 그 언니가 거기에 계속 다니고 있을까, 얼굴은 기억할 수 있을까 하는 구차한 이유를 스스로 들이대고, 결국 난 그 독일 빵집 근처를 지날 때마다 내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왜 난 용기가 없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난 먼 타향에 살고있고, 그나마 그 빵집 앞을 지나갈 기회조차 없어져 버렸다. 그리곤 수십년이 지난 몇 해 전에서야 그 날이 실미도 사건 날이었다는 걸 알았다.
이미 거의 반세기가 지난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힘들게 사는 한 빵집 종업원이 차에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한 순간의 망설임 없이 선뜻 내준 그 때 그 고마움을 어찌 잊겠는가. 오늘도 난 꿈에서 나마 그 언니를 다시 만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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