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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문학 신인문학상 당선작
제22회 워싱턴문학 신인문학상 소설 - 한연성
헤어짐에 즈음하여
1. 그 날의 기억
요즈음은 비가 너무 많이 온다. 늘 그렇듯 비가 오고 난 후, 새벽부터 찬란한 태양이 젖은 거리를 비추는 유리알 같은 상쾌함은 미국와서 즐기는 것 중의 하나가 되었다. 밤새 하늘이 구멍이라도 난 듯 내린 비는 다음 날 아침이면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씻어낸다.
그날도 아들놈은 밤이 늦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10시가 통행금지 시간이라고 본인이 말을 해 놓고도 늘 잊어버리기 일쑤다. 나는 늘 속으면서, 화가 나면서 그렇게 그의 십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밤 11시가 되어도 연락이 없다. 학교에서 일하는 나는 하루 종일 학생들과 씨름을 한 날이라 몸이 물 먹은 솜방망이 같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지난 3년 여 동안 아이는 늘 이렇게 나와 씨름을 했고 다신 안 그런다고 수없는 다짐을 하였다. 한 살 한 살 먹으면 나아진다는 선배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참고 있기가 어려울 정도로 나의 인내력은 바닥이 나 있었고 그런 와중에 아이와 나의 보이지 않는 불신으로
" 니가 그렇지 뭐!"
라는 말을 서슴없이 뱉어내는 모진 엄마가 되어버렸다.
공부가 하기 싫다는 아이를 잡고 울어도 보고 달래도 보고... 결국은 학교를 가지 않아 출석일수가 모자라 학교에서 나와야 하는 사태를 만들어 놓고도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무시한 채 학교를 자퇴한 그날도 새벽이 다 되어서야 들어온 아들.
나는 고등학교 교사로 청년기를 보냈다. 수없이 많은 탈선 학생들을 보았고 그때마다 그들을 선도한답시고 참 많은 질타와 충고를 했었다. 그러나 내 자식 앞에서 그것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린다.
"너 어디냐? 11시가 넘었는데 안 들어오고…?
"
최대한 기분을 가라앉히고 물었더니, 오늘 친구의 생일 파티에 가서 분위기가 너무 좋아 조금 늦어졌단다. 집 주변의 학교 친구집이라 금방 들어간다고 연신 '미안하다 '고 한다. 아이가 들어오려니 하면서 누었다가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너무 시끄러운 빗소리에 잠이 깼다. 유리창을 뒤흔드는 소리와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창밖은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온통 검은 바다와 같은 무한의 세계인 듯하다.
"왜 이렇게 비가 많이 오지???"
늘 평온하게 안방 너머에 있던 가로등마저 빛을 잃은 밤. 빗소리만이 들릴 뿐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그냥 잠시 깨어 빗소리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스스로 다시 잠이 들었다.
밝은 민트 빛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 오늘은 교회에서 수련회 답사를 가기로 되어 있어 새벽예배를 가야 한다. 시계를 보고 일어나 준비를 하고 방을 나오면서 아들의 방문이 열려 있음을 알았다.
"이놈이 외박을?
"
방안을 들여다보니 아들이 들어와 잠을 잔 흔적이 없다. 그저 남자들 특유의 냄새가 코앞을 훅 지날 뿐이다. 전에도 가끔 집에 안 들어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부엌으로 내려와 대충 아침 먹을 것을 준비해 놓고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적막한 집을 빠져나왔다.
밤새 내린 비로 거리는 온통 해맑은 어린아이 얼굴 같다. 새벽예배를 드리면서 아들의 미래, 딸들의 미래 그리고 남편의 건강을 위해 기도를 마치고, 스태프들과 함께 답사 여행길에 올랐다. 초등학교 동창인 최 집사는 미국에 와서 안정된 정착을 하여 연방정부의 카페테리아를 몇 개 가지고 재벌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그가 나와 한국의 초등학교 동창이라 하여, 전에 안면식도 없었지만 정다운 대화가 오고 갔고 더군다나 내 아들의 주일학교 교사인지라 말 한마디만 하면 서로 통하는 무엇인가가 생겨 차 안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미국에 일찍 와서 언어 문제가 해결된 친구라 무엇을 부탁해도 우리처럼 마흔이 넘어 미국에 온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미국에 와서 학교에 적응을 못해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기에 나의 아들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대화들을 나누었다. 2,000여 명의 신도가 속해 있는 교회이고, 2년에 한 번 있는 수련회라 큰 행사이다 보니 수련회 답사를 위해 많은 성도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재무를 맡게 된 나는 자연히 함께 답사를 가게 되었고 방 배정과 전체 행사 진행을 맡은 최 집사는
나와 함께 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듯 보였다.
2시간 정도 차를 달려 도착한 한 대학의 기숙사에서 방을 열어 보고 청소 상태며 앞으로 사용할
물품을 확인하고 있는데 최 집사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 교회로 빨리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아직 아무것도 확인된 것이 없는데 왜 벌써요?"
모두 침묵으로 움직일 뿐 누구 하나 말이 없다. 나만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연거푸 이 사람 저사람을 따라다니며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것도 끝난 게 없는데 왜 돌아가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 전화가 울렸다. 나는 한쪽 귀를 막고 전화를 잡아 그들과 좀 떨어진
곳으로 걸으며 누구인지 물었다.
"나, Dr.
Kim이에요.
지금 어디 계세요?
"
내가 다니는 학교의 교장이다. 오늘 하루 휴가를 내고 왔기에 그녀의 전화는 뜻밖이다.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계세요? 지금? "
"아니요, 학교에 무슨 일이 있나요? "
" 빨리 집으로 돌아오세요. 일이 좀 생겼습니다. 본인이 운전을 하나요?"
"아니요, 일행이 있습니다. 왜요?” 의아했지만 전화를 끊고 돌아서니 이미 모두 돌아갈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더 이상 사족이 필요치 않음을 느끼고 함께 차에 올랐다.
2. 영원한 이별
집에 도착하니 경찰 서너 명이 문 앞에서 서성인다. 순간 뭔가 느낌이 너무 안 좋다. 아들놈이 또 무슨 짓을... 전에 새벽에 경찰이 아들을 데리고 온 적이 있다. 친구 졸업파티를 하느라 좀 늦어진다던 날. 그는 경찰과 함께 집에 들이닥쳤다. 아마도 17살의 그가 친구의 졸업 파티에 간 날, 그 친구 집에서 부모가 없는 상태에서 술을 마신 모양이다. 일이 안 되려고 그랬는지 옆집에서 부부 싸움이 있었는데 남편이 아내를 때린 모양이다. 맞은 아내가 신고를 했는데 경찰이 집을 잘못 알고 옆집에 들이 닥친 것이다. 17-18세 학생들이 술을 먹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경찰이 그냥 놔둘리가 없었다. 우리 아이는 집으로 끌려오고... 그래서 가슴이 오그라든 적이 있었기에 경찰이 집에 온다는 것은 공포에 가까운 전율이었다. 차에서 얼어붙은 다리에 힘을 주어 내리자 한 경찰이 나를 보고 바삐 걸어온다.
"Eric 엄마인가요?"
"예, 제가 Eric 엄마인데요? 일이 잘못되었나요?"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길 해도 될지요?"
나는 열쇠를 찾아 문에 꽂다가 집에 딸들이 있음을 기억해냈다. 벨을 누르니 부시시 아이들이 나와, 경찰을 보고 나를 번갈아 보더니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긴장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곧 남편의 차가 주차장에 들어서고... 경찰이 나를 재촉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두려움이 가시지 않아 남편을 찾았다.
"Eric엄마랑 먼저 이야길 하고 싶은데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눈으로 들어가라는 시늉을 보내는 남편을 뒤로 하고 거실로 들어갔다.
"아들이 지난 밤에 들어오지 않았지요?"
"예, 무슨 일이 있습니까?
"
"차분히 들으세요. 지난밤에 집 주변에서 교통사고가 있었어요."
찬 물을 끼얹는 듯한 소름이 온몸에 퍼지면서 주먹이 쥐어졌다.
"그런데...요?"
"미안합니다. 이런 이야길 전해드리니 유감입니다."
"……"
"아들 이름이 Eric맞지요?"
"네, 맞아요."
"지난밤 교통사고로 아들이... 아들이 돌아가셨습니다."
“ …….???”
“What are you talking about????”
“Who???
What happened??? …… ???”
무슨 말을 하는지... 내가 영어가 짧아서 잘못 들었다. 아니 정말 잘못 들었다. 잘못 들었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니 또 그 자리… 그가 말을 한 그 자리이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그렇게 바닥을 뒹굴다가 눈을 뜨니 또 꿈이 아닌 현실이다. 이건 정말 꿈이다. 이건 아니다. 잘못 들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다. ........!!!!!
사람들이 모두 둥둥 뜨는… 하늘을 함께 나는 날고 있다. 아들의 모습이 나의 손을 잡으려고 함께
날며 엄마를 부른다. 꿈이다. 이건 꿈이다. 불과 하루 전에 기분이 좋다고... 좀 늦을 거라고… 곧 들어온다고 나에게 말을 했는데... 이건 아직 꿈이 안 깬 거다.
많은 사람이 집에 오고...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시간이 지났다.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고 자려고도 했고 어지럼증에 시달리다 길바닥에 쓰러지기도 했다. 아이가 돌아간 마지막 흔적이 보고 싶어서 울음을 쏟아냈다. 집 가까운 곳이니 다른 사람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찾을 수 있을 듯하여 찻길을 미친 듯이 걸어 돌아다녔다. 차가 시끄럽게 내 주변을 지나고 나의 생각은 오로지 그곳이 어디인지에 머물러 있었다. 내 아이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 어디인지 찾아내는 것이다. 어렴풋이 전봇대 주변에 꽃다발이 놓인 자리를 찾았다. 한 길에 우뚝 선 전봇대. 반은 부러져가는 그 자리는 밤비로 주변이 말끔한데 하얀 꽃다발과 내가 사준 아이의 모자가 걸려 있었다. 모자를 보자 나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아 소리를 지르며 울음을 쏟았다. 꿈이다. 정말 이건 꿈이다.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한 여자가 내 곁에서, 주저앉아 부끄러움도 잊은 채 오열하는 나를 안으며 나의 귀에 대고 묻는다.
"내가 너를 위해 기도를 해도 되겠니?"
아무런 이야기도 못하고 목이 쉬도록 쏟아내는 내 핏빛 눈물로 범벅이 된 나의 얼굴을 안고 기도를 시작하는 그녀. 아프다. 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아... 너무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다.
하늘을 날아간다.
아들의 손을 잡기 위해 나는 하늘을 날아간다.
훨훨 날아 그의 하얀 얼굴을 보고 그의 손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내 아들은 나를 오라 하면서 어디론가 손짓을 하며 날아간다.
함께 가자!!! 내 아들!!!
햇살이 유난히 따갑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뜨니 비스듬히 전봇대에 기대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지런히 놓여진 꽃들을 하나 하나 만져보았다.
"내 아들아! 엄마가 미안하다. 엄마가 미안하다."
그 비가 오는 새벽에 그 차가운 빗속에서, 어둠 속에서 엄마를 부르며 식어갔을 아이를 생각하니
정말 미쳐서, 미쳐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 비가 내리는 밤에 잠시 내가 깨었을 때, 내가 잠에 취해 자다가 빗소리에 깨어 창문을 내다 보았을 그 시간이 아들이 이 세상을 등지고 하늘나라로 가는 시간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참으로 질긴 인연으로 더 오래 볼 듯하여 매일 더 나아지길 고대하며 싸우고 하던 시간들.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아이의 자유를 속박하고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그를 바꾸어 보려고 무진장 싸움도 했건만... 이렇게 허망히 나를 버리고 하늘나라로 가버릴 것을. 조금 더 사랑한다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네가 나의 삶의 전부라고 왜 매일 말하지 못했을까? 아이가 좋아하던, 사고 싶다던 모든 것을 왜 사주지 못했을까? 이렇게 헤어지고 말 것을...
소리를 아무리 질러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았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래서 나를 찾아와 불러 깨웠을 텐데....나는…나는. 아들아! 미안하다. 이 엄마를 용서해다오. 내 품에 안고 너를 보내야 하는데...
돌아다 보니 흥건히 패인 흙 위에 모래가 듬뿍 덮혀 있다. 아마도 나의 아들이 탄 차가 사고를 내면서 많은 흔적을 남긴 듯하다. 전봇대가 휘어져 쓰러지기 직전이었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이미 친구들이 사고 지점을 알고 그의 소지품과 꽃다발을 가져다 놓았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체와 같이 작은 글씨로 아들의 이름과 이니셜이 있는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쏟고 있었다.
3. 잘 가라 내 아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것은 아주 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게 이렇게 허망할 수가...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아침이다. 많은 사람이 검정색 정장을 하고 밝게 웃고 있는 아들의 사진 앞에 머리 숙여 인사하는 장면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갑자기 오열에 주체할 수가 없다. 제발 한 달 전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제발.
라스베가스의 5월은 참으로 찜통 더위였다. 조카가 라스베가스의 호텔을 잡아 결혼식을 한다는 말에 즐거운 반면 걱정이 앞섰다. 모든 가족이 모이는 자리인데 그들의 경제능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의 처량한 신세며, 학교에서 적어도 1주일을 결근을 해야 하는데 한국에서의 교사생활을 생각하면 나에겐 결근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망설여지고 있었다. 그 당시 라스베가스란 도시는 말로만 듣던 곳이라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상황이 편하지가 않았다.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 아들은 함께 있는 것을 싫어했다. 한국에서 반장을 할 정도로 그나마 나름 잘 나간다고 하던 녀석이 미국에 오면서 서서히 달라지고 그런 상태를 본인도 힘들어 했던 모양이다. 이 시기에 사춘기까지 맞물리니 통제불능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아들이 왠일인지 사촌이 라스베가스에서 결혼한다는 말에 선뜻 자기도 가고 싶다고 했다. 미국으로 이사를 한 후에 여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이번 기회를 빌어 여행다운 여행을 하자는 생각도 있었다.
비행기표를 예매하기 전 주에 아들이 자기는 올해 대학을 가야 하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한다고
선언을 하고 머리부터 잘라야 한다고 긴 머리를 빡빡 깎고 들어왔다. 공부 안 하겠다고 선언을 한 지 2년 여가 지난 후라 나의 마음 속 즐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채 자라지 않은 아들과 두 딸을 데리고 라스베가스 여행을 하면서 아들은 그 더위에 후버 댐이 보이는 아름다운 곳에서 독사진 한 장을 찍었다. 그 사진이 지금 그의 18세의 영정 사진이 되었다.
푸른 셔츠에 빡빡 깍은 머리... 웃고는 있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은 얼굴이 왜 나의 가슴을 이렇게 후벼파는지. 제발 한 달 전의 즐거웠던 그 시간으로 돌아갔으면... 그래서 그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다면...
아침부터 비가 쉬지 않고 내린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제 더 이상 한 하늘 아래서 눈으로 볼 수가 없다. 문밖에서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리고 차마 나갈 수 없어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층계를 오르며 저음의 목소리로 "엄마!" 하던 말들이 귓전에 생생하다. 가라지를 열면서 들어오던 발소리도 선명하다. 아들의 흔적이 완연한 곳에서 그의 냄새도 맡을 수 있다. 하늘색 넥타이를 매고, 즐겨 신던 그러나 너무 아껴 매일 신지 않고 들여다만 보던 운동화를 신고, 새로 사서 아직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한 셔츠를 입혀서 그렇게 단장을 시킨 후에 하늘나라로 보냈다. 손목엔 친구들이 만들어 준 색실 팔찌를 걸어 주었고 아끼던 모자를 씌워 주었다. 이제 가면 다시는 못 보는 내 아이... 물건을 사달라고 할 때마다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 사라고 혼내던 시간들이 야속하다.
유리창에 빗방울이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누구도 한마디 하지 않는
차 안에 앉아 달려가는 차들을 느낀다. 시간이 이렇게도 허무할 수가... 앞 차의 흔들림을 보면서 가슴이 너무 아프다. 아... 차라리 나도 함께 갈 수 있다면...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어도 감각이 없는 눈물이 손등에 떨어진다. 눈을 감고 내 손을 잡은 남편과 두 딸이 저승사자처럼 나를 지키고 있었고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터라 정신이 흐릿하다. 잠이 들었나 아니면 의식이 없었나.... 나를 부축하는 사람들에 의해 나는 의자에 앉혀졌고 눈 앞에 넓은 창이 먼 바다의 풍경처럼 눈에 들어온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남편이 우는 것을 보지 못한 터라 생소하게 그의 우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한줌의 재로 사라져 버린 내 젊은 날의 희망이요, 내 삶의 전부인... 내… 아… 들!!
한동안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4. 내 마음 속의 부활
낚시를 참 좋아했던 아들과 함께 가던 바다에 그를 안고 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 한줌의 재로 변한 아들을 보내면서 목이 쉬도록 아이를 불렀다.
"잘 가라!!! 엄마가 정말 미안하다.
네가 원하는 것 다 못해 주어 미안하고...
엄마가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고…
내 새끼로 태어나서 고생만 한 것 미안하고...
내 아들!!! 사랑한다! 잘 가라!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면
엄마 용서하지 마! 사랑해!
내… 아…들!!"
땅바닥에 철썩 주저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내가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너무 창피하고 슬펐다. 시간이 되면 배가 고픈 것도 이해가 안 되고 밤이 되면 잠이 오는 것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식이 돌아갔는데 이렇게 자연의 현상들이 느껴지는 게, 동물 같은 생명에의 끈길진 사투가 정말 싫었다.
어느 밤엔 한참 엎드려 울다가 어둠 속에서 깨었는데 탁자에 올려진 액자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힘들게 목회를 하시던 여성 목사님께서 보내주신 그림이 들어 있는 액자다. 액자 안에 들어 있는 그림이 창문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다. 무엇일까? 경황이 없어 제대로 열어보지 않았던 것들이 아주 생소하게 보인다. 연한 하늘색이 번져 있는 바탕에 누군가 서로 끌어 안고 있는 모습.
눈에 번쩍 뜨이는 그림...
고행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돌아간 예수님이 내 아들을 안아 주고 있는 모습이다. 전기에 감전된 듯한 전율이 온몸을 감싸면서 혼미하던 기억의 편린들이 하나로 모아지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5. 내가 만든 환경
여자는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면서 어른이 된다는 선인들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아름답게 살면 꽃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 우아하게 고상하게.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 보고 밤새 열이 나는 아이를 안고 가슴을 에이는 고통을 느껴보지 못했다면 어른이 되기엔 부족하다고 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내 배로 낳은 자식이지만 내 맘대로 되지 않아 눈물의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면 역시 어른이 되기는 부족하다고 들었다.
긴 사춘기를 앓는(?) 자식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초라한 자신의 무능을 느끼며 얼마나 자학을 하였는지. 미국에 와서 살면서 “먹고 사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 여겨 늘 아이 앞에서 부모란 존재는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여서 더더욱 미안하고 할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보다 나은 아이가 되길 바라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자만은 뭐였는지.
남편은 온실의 화초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은 성장기를 보낸 듯하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하얀 얼굴이 꽤 품위가 있었고 뭐 그닥 매력이 있지는 않았지만 공부 잘하는 모범생 정도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에 나에게는 없는, 그래서 늘 갈구하던 그 무언가가 있어 보였다. 남자만이 최고인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대우 받지 못하고 자란 서러움을 가진 나에게 그는 온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남녀공학을 다니면서 그저 친구 이상으로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그리 연인이라는 감정이 없던 사람이라 ‘그냥 잘 자란 친구' 정도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런 그가 나에게 지극정성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 당시에 대학 등록금을 낼 능력이 없어 공부보다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던 나에게 그는 기둥서방 노릇을 했다. - 기둥 서방이라 함은 도서실을 잡아 주고 집에 데려다 주고 때마다 끼니 해결해 주고... 늘 나에게 그는 자기 도시락을 나누어 주었다. 늘 바빠서 정신을 못 차리는 나의 엄마가 근사한 도시락을 싸 줄리 만무하고 나도 김치 하나 달랑 담긴 도시락을 들고 다니는 것은 싫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닌 달랐다. 달걀 후라이 - 그 당시엔 비싼 반찬 중의 하나 -를 해서 도시락 위에 덮어 가지런히 도시락을 싸 주셨다. 점심 때가 되면 나를 찾아 먹이려고 캠퍼스를 누비던 남편.
그러나 이런 정성을 나에게 들이던 그의 이면에는 늘 엄마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기질이 있었다. 힘든 일을 안 하려 하고 일이 생기면 부모의 도움 없이는 해결을 못하는... 그런데 인생이 뭔지 그런 것마저도 나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무슨 일이든 늘 내가 해야 하고 앉아서 쉬는 것은 죄악이라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손가락에 물을 튕기며 사는 사치를 누려보지 못했다. 어떤 일이 생기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그러면서 우리 두 사람은 대학을 졸업하면서 친구에서 좀 더 가까운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고 결혼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자기 자리에서 영역이 확고해질 무렵 미국에 오면서 생활이 고달파지자 이런 관계가 서로 맞지 않음을 깨닫게 되고 아이가 10살을 넘기면서부터 우리는 정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싸웠다. 어린아이 같은 사고를 하는 남편과 살면서 나에게도 힘든 시간을 대화하고 위로 받고 싶은 시간이 있었지만 그는 그럴 상대가 되어 주지 못했다. 사춘기에 돌입한 아이에게 우리의 자리는 어떻게 보였을까. 아이가 물 위에 기름처럼 떠도는 시간에도 우리는 자신의 문제 해결에 바빠서 그 혼자 겪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을 돌아보지 못했다. 그러면서 늘 '너를 위해…'라는 말로 아이를 괴롭혔다. 이 얼마나 위선자의 모습인가. 내 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부초처럼 흔들리면서 아이에겐 정착을 바라는 이 어리석음. 그렇게 아이가 나를 겉돌게 우리가 스스로 환경을 만들고 있었다.
6.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다
몇 달 동안의 우울증 치료로 조금은 지쳐 있을 무렵 자연은 봄이 오는 소리에 부산하다. 중요한 업무 외에 밖에 나가는 일이 줄어들어 창문 앞에까지 와 있는 봄을 느끼지 못했다. 테라피스트에게 갑자기 느낀, 겨울을 지난 만물의 기지개 소리를 듣노라고 이야길 하니 그녀도 무척 반가워하는 눈치다. 이제 그녀와 만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조금씩 인지하기도 하고. 작은 아이들이 갑자기 부쩍 커 버린 느낌을 받으며 대학 준비에 이제 나도 한몫을 할 수 있었다. 학원을 알아보고, 책을 사고... 나도 이제 겨울을 지난 대자연처럼 나에게도 또 다른 아이가 있음을 보기 시작하였다.
그런 중에 아들 친구의 마지막 공판을 앞두고 친한 사람들과 나의 감정을 교류하면서
결국은 그 자리에 가야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마음 속에 생기는 슬픔을 단단한 동아줄로 묶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용서라는 생각만 가지고 며칠을 지냈다.
"엄마! 힘들면 안 하셔도 돼요. 그러나 리처드 오빠가 우리 오빠의 멘토였고 나쁜 마음은 아니었잖아요. 사고지."
이제 18살이 된 나의 딸 아이가 나에게 한 말이다.
아주 가끔, 삶의 질곡으로 힘이 부칠 때 나를 도와 줄 사람을 보내 달라고 기도할 때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나에게 주는 사람. 그럴 때마다 내 옆의 이 두 딸이 나에게 지나가듯 던지는 말이 나의 상처를 치유한다.
쌍둥이라는 이야길 듣고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일은 많고 아들은 어리고 시어머니께 아들을 맡기며 받는 정신적인 고통으로 허덕이던 시간. 일이 힘들어 유산을 거듭하던 차에 생긴 내 딸들.
그렇게 안 좋은 몸 상태인데도 아이들은 잘 커서 9개월을 채우고 태어났다. 더 이상한 것은 그렇게도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가 거짓말처럼 8개월 검진을 할 때까지 쌍둥이인 것을 몰랐다.
담당 의사가 종합병원에 가 보라는 애매모호한 이야기로 나의 피를 말리게 했던 아이들.
그 딸들이 지금의 내 삶을 지탱해 주는 지지자가 될 줄 그때는 전혀 몰랐고 단지 시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존재로만 여겨졌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오빠의 그늘에 가려 엄마의 관심 밖에서 스스로 살아나야 함을 배웠을 것이고
어느 곳에 가서나 뒤지지 않았지만 얌전하고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심을 받지 않아도 되는 모범생들이 되었다. 나는 늘 아들의 매일 달라지는 행동에 촉각을 세웠을 뿐 조용하고 늘 협조적인 딸들은 나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런 아이들이 나에게 이렇게 충고를 한다.
7. 자유를 찾아서
마음을 찢는 고통으로 검사가 손수건을 들고 훌쩍이면서 진행을 못했다. 머리가 허옇고 피부 색이 다른 판사가 훌쩍이는 것이 다르게 보이지 않음은 모두가 자식이란 존재 앞에서는 같은 마음인 듯하다. 잠시 휴정이 되고 몇 분 후에 다시 진행이 되었고 경찰이 둘러 서 있는 법정은 금방이라도 사고를 낸 리치를 데리고 갈 듯한 분위기였지만.... 난 그 느낌을 읽을 수 있었다. 리치가 구속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난 선처를 바랬고 그들은 나의 바람을 받아들여 주었다. 마지막 판결이 나고 비록 사람이 죽은 운전의 결과지만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나은 결과가 나왔고 그 자리에서 집행유예와 봉사활동 명령이 내려졌다. 비록 긴 시간의 그것들이지만 구속이 되어 교도소에 수감이 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홀가분하게 법정을 나올 수 있어 좋았지만 한편으로 마음은 쓸쓸하기 그지 없었다.
딸들이 나의 등을 두드리며 '엄마! 정말 잘하셨어요!' 하는데 그들의 눈에 눈물이 그렁한 것을 보니 그들도 나와 같이 오빠를 향한 허전함이 있는 듯했다.
모든 것이 잘 된 일이지만 난 허전함과 쓸쓸함에 마음이 아렸다. 앞서서 나를 아는 듯하다. 그냥 이 자리에 내가 있으면 안될 듯한데 왜들 이러는가? 엉엉 울고 싶었다. 그러나 가슴이 막힌 듯 아프기만 하고 더 이상 울음이 나오질 않았다.
아... 눈이 부시다. 이젠 모든 것이 다 끝났다. 그러나 우리 아들은 어디에 있는지. 모래를 손으로 한 움큼 쥐면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 남는 게 없는 것 같은 마음으로 두 딸과 터덜터덜 거리를 걸었다. 아무도 먼저 말을 건네지 않음은 서로가 같은 마음이리라.
“엄마! 배고파요…”
딸들은 그저 나를 쳐다보며 밝게 웃어보였다. 오빠가 없는 자리를,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엄마를 바라보며 저희들 나름으로 힘들었을 이 아이들을 생각하니 그저 고맙고 이쁘기만 하다.
"맛있는 거 먹자. 오빠가 좋아할 거야. 자기 친구 도와줘서 말이야."
"엄마는 괜찮아요?"
"안 괜찮아. 그..런..데.. 앞으로 괜찮을 거야..."
힘써 웃고 있었지만 울고 있었다. 나처럼 울고 있었다.
한 아이의 손을 힘껏 쥐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의 손도 마저 쥐고 말했다.
"이젠 오빠를 편하게 보내주자... 그게 오빠가 원하는 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