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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문학 신인문학상 당선작
제21회 워싱턴문학 신인문학상 소설부문 우수상
기분과 함께 살았던 남자
이선경
기분 탓일까. 분명히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혼자 살았고 방 한 칸 없는 작은 원룸에 남자가 아닌 다른 존재가 있다면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남자는 침대 겸용 접이식 소파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매트리스처럼 판판하게 펼쳐진 소파의 관절에서
삐익 소리가 났다. 남자는 눈알을 굴려 새벽 속으로 조용히 가라앉은 집 안을 구석구석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남자는 다시 베게 위에 뒤통수를 얹고 천장을 바라보며 누웠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린 후 두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일어났다. 그것은 망설임 없이 남자를 목표로 다가왔다. 얇은 눈꺼풀이 남자의 두 눈알을 무겁게 짓눌렀다. 남자는 이미 감은 눈을 더 꽉 감았다. 그것은 바닥에 앉아 양 팔을 소파에 얹고
턱을 괬다. 그렇게 바싹 다가앉아 남자의 옆얼굴을 보기 시작했다. 분명한 시선을 모른 척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남자는 결국 눈을 감은지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악몽에서 깨듯 번쩍 눈을 떴다. 남자는 텔레비전과 침대소파 사이에 놓인 테이블을 더듬어 스탠드를 켰다. 작은 전구의 노란 불빛은 동굴 속 성냥 한
개비처럼 남자를 일시적으로 안심시켰다. 남자는 이불을 어깨에 둘둘 말고 일어나 앉았다. 그 상태로 남자는 꾸벅꾸벅 졸다 아침을 맞았다.
남자는 뽀얀 피부를 돋보이게 하는 검은 머리카락에 왁스를 발랐다. 차분하고 세련된 헤어스타일이 고가의 검은
뿔테와 넥타이에 잘 어울렸다. 남자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어 기본 정장도 잘 어울렸지만 젊은 사람답게 적당히
몸에 붙는 것을 선호했다. 가볍고 실용적인 검은 백팩을 메니 남자의 출근 준비가 끝났다. 시원한 향수를 뿌려 기분까지 말끔해진 남자는 어서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는 거의 3분 동안이나 현관에 있었다. 오늘은 그냥 가자. 문고리를 잡고 있는 그의 구부정한 뒷모습은
고민스럽다가 점점 비장해졌다. 과감하게 그냥 가자. 남자가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가려는 순간
집 안에서 어떤 존재감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식칼이 남자의 등에 무지막지하게 내리꽂히는 상상을
했다. 그것은 칼을 빼내서 남자를 다시 찌르고, 찌르고 또 찌르고, 그러면 남자의 몸에선 엄청난 양의 피가 허리와 엉덩이와 다리의 곡선을 타고 바닥까지 줄줄 흘러내리고...
주르륵.
하얀 와이셔츠 안에서 등줄기를 타고 땀이 한 줄기 흘러 내렸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번쩍이는 구두를 벗었다. 남자는 빛바랜 이불이 동그랗게 뭉쳐진 침대소파와 각종 고지서들이 먼지와 함께 쌓여 있는 테이블을 지나 창문으로 향했다. 내려진 블라인드를 들어 뒤를 살피며 창문의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블라인드가 아니더라도 2층에 위치한 집 안으로는 봄날 아침의 햇살 줄기는 전혀 비춰들지 않았다. 남자는 뿌연 유리창 밖으로 옆 건물의 무수히
많은 창문들을 봤다. 창문 밖의 풍경은 온통 창문들뿐이라 풍경에 네모난 눈이 수백 개 달린 듯 했다. 남자는 블라인드로 방안을 더욱 꼼꼼히 가렸다. 창문 앞에 놓인 행거가 남자의 어깨에 부딪혔다. 고급 양복 자켓 세 벌이 철로 된 싸구려 옷걸이에 걸려 흔들렸다.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구겨진 와이셔츠와
넥타이, 무릎 나온 회색 추리닝 바지, 목이 늘어난 티셔츠가 행거에서 와락 떨어졌다. 남자는 그것들을 대충 발로 모아 구석으로 밀었다. 현관으로 돌아오면서 남자는 전원이 꺼진 중고
텔레비전의 화면을 흘끗거렸다. 진회색 화면이 거울처럼 남자와 집 안을 비췄다. 갑자기 담배꽁초가 가득 담긴 깡통 재떨이가 쓰러졌다. 남자는 그것까지 치울 시간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자는 가스 밸브가 잠겼는지 확인하고 몸을 구부려 다시 구두를 신었다. 남자는 일어서며 눈길이 가는 곳 아무 곳이나 닥치는 대로 노려보았다. 겁을 먹은 사람이 겁을 주려는 듯 다소 우스꽝스러웠다. 험악한 표정을 지은 남자는 거실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현관문을 열고 뒷걸음으로 조심히 나왔다. 남자는 집주인을 협박하면서 나오는 강도처럼 보였다.
청명한 하늘엔 산뜻한 아침 햇살이 가득 퍼져 있었다. 남자는 하늘을 한번 보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골목길을 빠르게 걸었다. 몇 년 사이에 남자가 사는 오피스텔 건물 주변에는 최신식 고층 오피스텔이 단지를
이루며 지어져 올라왔다. 최하 24층에서 최고 30층짜리의 새 오피스텔들은 남자가 8년 째 월세를 내고 있는 14층짜리 낡은 건물을 동서남북으로 다닥다닥 붙어 포위하다시피 서 있었다. 정문 앞에 있던 길은 넓고 볕이 잘 들었었지만
그늘로 뒤덮이는 바람에 싱그러운 봄날에도 찬바람이 쌩쌩 부는 골목길이 되었다. 남자는 어서 도로변으로 나와 인파와 섞였다. 남자가 몰고 나온 골목길의 냉기도 따뜻한 기류를 만나자 다른 바람이 됐다.
남자는 지하철을 탔다. 환승을 한 번 하고 최종적으로 여의도 역에서 내렸다. 출근길의 사람들은 앞만 보고 빠르게 걸었다. 남자는 그들과 같은 스피드를 내고 있었지만
자꾸 여기저기 부딪혔다. 중년의 여자가 남자를 보며 인상을 썼다. 남자는 걸으랴 생각하랴 바쁜 나머지 여자의 분명한 멸시를 알아채지 못했다.
분명 집에 뭔가가 있어. 남자는 생각했다. 실체를 본 적은 없지만 분명해. 느끼기만 할 뿐이지만 분명하다고. 그것은 집 안 구석에 숨어서 남자를 지켜보기도 했고 어느새 아주 가까이에 다가와
있기도 했다. 예를 들면 등 뒤에서 멀찍이 혹은 뒤통수나 귀 옆에서 바짝 서 있었는데 전부 사람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이었다. 남자가 고개를 돌려 그곳을 살피면 존재는 사라졌다. 남자가 눈을 감으면 그것은 더 과감해졌다. 잠을 청할 때는 물론 머리를 감거나 세수를 할 때도 눈꺼풀 바로 앞까지 얼굴을 들이 밀었다. 그리고 남자가 눈을 뜨면 사라졌다. 그것의 시선엔 목적이 있었다. 먹잇감을 주시하는 맹수처럼. 관찰이 끝나면 그것은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물리적인 공격을 당한 적은 없지만 그것이 덮쳐오는 기분이 들면 남자는 온 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어쨌거나 실체가 없었으므로 남자는 그런 기분을 회피했다. 시선이 느껴지면 애써 그곳을 바라보지 않거나
빨리 잠들어라 잠들거라 자기 최면을 걸었다. 왕따를 당하는 사람의 심정과도 비슷하다. 집단 비웃음을 당하고 있을 때는 눈을 감고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기도하며 애써 그들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오면 남자는 실체도 없는 그것이 뒷다리에 힘을 주고 이빨을 드러내는 것을 느꼈고 결국 황급히 눈을 떠 허둥지둥
집 안을 살폈다. 그것이 사라진 공기 중에는 희미한 웃음이 향기처럼 남았다. 정말 기분 탓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만약 위험에 처한 이 기분이 그냥 기분 따위가
아니라면? 그 시선이 정말 어떤 존재의 것이라면? 귀신? 악마? 그런 건가? 분명 존재 하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그것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남자는 그 방법을 알 것 같았다. 그것이 공격을 해온다 싶을 때, 그 순간에 버텨보는 거야. 겁먹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리고 눈알만 대굴대굴
굴리는 게 아니라 의연하게 눈을 꾹 감고 그 기분을 극복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그것은 사라질까? 만약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 뒤에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남자는 한 쪽 어깨가 내려간 양복 자켓을 바로 입고 넥타이를 고쳐 맸다. 삐져나온 와이셔츠의 밑단도 바지 안으로 넣었다. 어느새 회사의 빌딩 앞에 다다라 있었다. 남자는 대형 증권 회사에 다니고 있다. 햇빛을 받으며 증권가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는 본사의 건물은 매일 봐도 뿌듯했다. 로비로 들어서며 남자는 경비에게 목례를 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직전에 있었다. 남자는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이 꽉 들어찬 엘리베이터로 달려가 힘껏 몸을 밀어 넣었다. 사람들이 끙, 소리를 내며 눈알을 굴렸다.
“미안합니다.”
남자가 쾌활하게 말했다. 잠시 후 남자는 다시 큰 소리로
“내리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사람들이 다시 끙, 소리를 내며 눈알과 함께 발을 굴렀다.
남자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팀장에게 인사를 하고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종이컵에 커피 믹스를 탔다. 자켓을 벗어 의자에 걸친 뒤 남자는 종이컵을 들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흡연 구역에는 남자의 동기 한 명과 후배
한 명, 그리고 가장 친한 백 차장이 막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남자가 반기며 걸어갔다.
“형!”
“일찍 일찍 다녀 인마. 과장씩이나 되가지고.”
백 차장이 씨익 사람 좋은 웃음을 건넸다. 남자는 라이터 불을 켜서 백 차장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 자신의 담배에도 불을 붙였다.
후우.
남자들이 뿜은 담배 연기는 공중에 흩어져 도심의 경치를 흐렸다.
저녁 7시. 남자는 퇴근하는 팀장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팀장이 나가고 10분 뒤에 남자는 양복 자켓을 입었다. 빌딩의 유리문을 열고 나옴과 동시에 남자는 사람들의 물결에 합류했다. 그것은 아침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렀다. 검은 정장과 검은 머리의 물결은 폭이 넓고 경사가 가파른 지하철역 출구 계단과 두 개의 에스컬레이터를 뒤덮으며 폭포수처럼 우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남자는 출구 1미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검은 물결은 박힌 돌을 피해가듯 갈라졌다 다시 모였다. 남자는 퇴근길까지 사람에 치이고 눌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기진맥진해서 도착한 집이 그 속을 알 수가 없고 악한 무언가가 느껴져 신뢰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휴대폰의 벨이 울렸다. 남자는 전화를 받았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를 때 남자의 양쪽 입
꼬리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오늘밤 저녁과 술을 함께 할 사람이 생겼다. 운이 좋으면 집에 혼자 가지 않을 수도 있다. 남자의 눈동자에 급격히 생기가 돌았다.
남자는 인도에서 벗어나 도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빈차라고 불을 밝힌 주황색 택시가 남자 앞에
급하게 정차했다. 자동차들이 뒤에서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렸다. 남자가 택시의 앞좌석 문을 열고 기사에게
물었다.
“청담이요.”
택시기사가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외로 꼬았다. 남자는 승차거부를 당할까봐 초조했다.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재빨리 몸을 접어 택시에 넣었다.
차가 막힌 탓에 택시비가 2만원이 넘게 나왔지만 남자는 만족했다. 도심에서 택시를 타는 것은 빨리 가기 위함이 아니라 편하게 가기 위함이니까.
나무로 된 문이 삐걱 소리를 냈다. 오래된 웨스턴 바를 지향하는 술집의 사장은 벽 곳곳에 미국 국기, 현상금 수배 전단지, 웨스턴 모자, 장식용 권총과 장총 등을 흐릿하고 작은 조명
아래 걸어 놓았다. 빛이 거의 없는 실내의 어둠 속에서 새끼 손톱만한 형광 보라색 전구들이 천장에서
반짝였다. 뭐니 뭐니 해도 이곳은 바텐더들이 서 있는 기다란 카운터 뒤 벽면 중앙에서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달러 표시가 압권이었다. 그것은 풍만하고 굴곡진 몸매를 자랑하는 서양 여자 둘을 합쳐 놓은 크기였다. 필름이 끊긴 다음 날에도 남자는 그 황금
달러 모양만은 생생하게 떠올렸다.
세월이 흐른 팝송이 흘렀다. 노래는 느리고 차분했지만 높은 볼륨으로 사람들의 말소리를 흩트려 놓았다. 남자의 등 뒤로 문이 닫히고 문 밖의 세상은 사라졌다. 눈 깜빡하자 다른 세상이 펼쳐진 이 기분, 어렵지 않게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이 착각은 언제나 남자의 마음을 평안하게 했다. 이민을 가볼까. 호주나 미국으로. 남자는 버릇처럼 그런 생각을 또 했다. 남자는 회사 동료들과 하루에도 몇 번씩 이민 이야기를 한다.
검은 티셔츠와 스키니 진을 날렵하게 차려입은 미남 바텐더 둘이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저들은 언젠가 유명 모델이나 배우가 될 지도 모른다. 남자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남자의 친구들은 역시나 그곳에서 제일 크고 넓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친구 3명이 동시에 남자를 보고 손을 들었다. 모두 남자의 대학교 동기들로 유부남 두 명은
대형 은행에, 아직 미혼인 한 명은 대형 화재보험 회사에 다니고 있다. 윤기 나는 검은 소파에는 8명 정도가 앉을 수 있었는데 벌써 여자들이 그들과 합석해 있었다. 허벅지까지 올라간 치마 아래 그녀들의 하얀
다리가 꼬여 있었다.
오늘은 화재보험 놈이 쏘기로 했다. 남자는 평소보다 술을 더 많이 마셨다. ‘낡은’ 웨스턴 바라고 하기엔 술과 안주의 가격이 심하게 비싼 편이지만 많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이곳을 찾았다. 밤이 깊어질수록 음악 소리는 더 커졌고 어느새 빠른 비트로 바뀌어 있었다. 술집은 이제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볐다.
“지희? 재희? 잘 안 들려!”
남자는 긴 생머리를 밝은 갈색으로 물들인 여자에게 과하게 몸을 기울였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살며시 거리를 뒀다. 남자의 눈앞에서 작은 샤넬 귀걸이가 반짝였다.
“... 혜요! 지혜요! 선배님! 저도 그쪽에 있어요!”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오른 볼륨에 파묻혀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하얗고 얇은 목에서 향수 냄새를 맡았다. 쿵. 쿵. 남자의 뱃속에서 커다란 북이 울렸다. 뜨거운 피가 돌고 기분이 한 없이 위로 위로
올라갔다. 남자가 여자의 귀에 대고 너 정말 예쁘다고 소리쳤다. 여자가 남자를 살짝 밀며 푸핫, 하고 웃었다. 남자의 옆얼굴이 자꾸 볼에 닿자 여자는 난감한 듯 코를 찡긋했다. 그러나 화를 내진 않았다. 여자는 어렸고 상냥했다. 남자의 두 눈에 여자의 환한 눈웃음이 가득
담겼다.
남자는 여자와 단둘이 일본식 주점에 있었다. 은행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까마득한 학과 후배야. 00일보 신입 기자고. 증권부. 정신 차리고 곱게 보내. 여자가 물었다.
“누구에요?”
“어. 아까 친구들.”
“뭐래요?”
“너랑 잘 해보래.”
여자는 이번에도 푸핫, 이라고 말하듯 웃었다.
“선배는 왜 여자 친구가 없어요?”
“그러게. 왜 없는지 나도 모르겠어.”
남자는 술집을 세 군데나 옮기면서 집에 가야한다는 여자를 붙잡았다. 결국 여자는 만취했고 그쯤 되니 남자도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내 오피스텔 여기서 금방인데. 한잔 더 하고 갈래? 불금이잖아.”
“와우. 콜 입니당! 아, 옛날 생각나네요... 선배들 자취방에서 술 퍼마시다 수업 못가고 그랬는데. 이힛. 학교 앞에 000 편의점 아시죠? 선배도 거기서 술 엄청 샀어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빨리 여자를 눕히고 싶었다. 여자가 깡총깡총 뛰었다.
“증권가 너무 삭막하지 않아요? 으으. 언론사도 그렇게 나이스 하진 않지만.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다르더라고요. 의기소침 해졌달까? 그런데 선배는 처음 봤는데도 오래 본 사람
같고 말도 잘 들어주시고 믿음직스럽고... 이래서 학연 지연 찾는가 봉가? 악.”
여자가 넘어졌다. 힐이 벗겨졌지만 여자는 보도블록 길바닥에 앉은 채로 깔깔거렸다.
남자가 여자에게 키스했을 때 여자의 눈은 거짓말처럼 커다래졌다. 남자가 여자를 침대로 던지다시피 데려가 옷을
벗기고 섹스를 하는 동안에도 여자는 흐느적거리면서 남자를 밀쳤다. 하지만 취한 손과 발은 주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잠깐만요... 선배님... 저는...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마침내 남자가 몸을 떼어 내자 애써 웃으려 했던 여자가 울었다. 남자는 여자를 위로해 줄 정신이 없었다. 여자도 계속 울 정신이 없었다. 두 사람은 골아 떨어졌다.
2주 만에 처음으로 남자는 깊은 잠을 잤다. 다행이 주말인 다음 날은 늦게까지 푹 잘
수 있었다. 얘가 아침까지 내 옆에 잠들어 있을까. 그렇다면 정말 좋겠다고 남자는 여자를 보며
생각했다. 아까부터 욕실 안에 누군가 숨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남자는 어제 만큼 신경이 곤두서지 않았다. 술이 잔뜩 취한 것도 있겠지만 집 안에 다른 사람이 함께 있을 때면 그것의 존재감은 희미해졌다.
실로 오랜만에 남자의 꿈속에 그녀가 등장했다. 남자가 많이 좋아했던 그 여자가. 여자가 휴가 때 발리에 가자고 말했다. 풀 빌라 어때. 남자가 망설이자 여자가 말했다. 아 짜증나. 증권 영업을 하던 그 여자는 남자보다 3살 연상이었다. 그녀는 사귄지 6개월 정도 되자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난데없이 부모님이 나타났다. 네 형 결혼식 치루고 이제 여윳돈이 없는데 우리 막내는 어쩌니. 엄마가 미안한 듯 말했다. 남자는 아들 금융권 취업했어 무슨 걱정이야 라며 영구처럼 웃었다. 남자의 입 안엔 이빨이 하나도 없었다. 남자는 그 여자와 1년을 만났다. 헤어진 뒤 3개월 후 여자는 소개로 만난 남자와 결혼을
했다.
남자는 그 뒤로 나이가 어리거나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들을 만났다. 큰 무언가를 원하지 않는 여자들이었다. 남자는 도구와 대상으로서 여자가 필요했다. 방금 섹스를 한 저 여자 후배처럼. 남자는 긴장과 불면에서 오는 분노와 화를 어떻게든 발산해야 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존재를 느끼고
싶지 않아 자주 여자들을 집에 데려왔다. 남자는 여자를 볼 때 어떻게 하면 이 여자를 집으로 데려가 격렬한 섹스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했다.
여자 후배는 남자의 희망과는 반대로 40분 후에 깨어났다. 남자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더 자고 아침에 가라며 매달렸지만 후배는 말도 안 된다며 발딱 일어나 정신없이 가방을 찾았다. 그녀는 비틀거리고 벽에 부딪히며 집 안의 모든 불을 켜기 시작했다.
선배. 저는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앞으로 선배를 자주 마주칠 텐데. 어떻게 봐야할지. 너무 괴로워요. 여자 후배는 오전 7시부터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남자는 숙취로 괴로워하며 잠도 없는 애라고 중얼거렸다.
남자는 하루 뒤에 답장을 보냈다. 집에 잘 갔니. 나도 이런 경우 처음이야. 괴로워하지 말고 앞으로 편하게 지내^^. 여자 후배에게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남자도 앞으로 연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남자와 여자 후배는 암묵적으로 동의를 한
것이다.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자. 그렇게 지내다가 우연히 지인들과 함께 길에서 마주친다거나 식사자리가 생기면 오랜만이라며
서로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을 것이었다. 다른 여자들과 남자가 그러는 것처럼.
장이 마감하고 모두가 한가해지는 오후였다. 남자는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믹스 커피를
홀짝이며 웹 서핑을 했다. 모니터 구석에 쪽지가 날아들었다. 미친 새끼. 너 걔 건드렸냐? 은행에 다니는 친구였다. 남자가 답장을 쓰려는데 또 다른 쪽지가 날아들었다. 형. 대박. 이거 뭐야? 오늘 한 잔? 지점에서 일하는 후배 놈이었다. 뭔데? 남자가 답장을 날렸다. 후배 놈이 다시 쪽지를 보냈다. 찌라시였다. 깨끗한 이미지의 미남 배우 P의 추잡한 성생활, 미모의 국회의원 M의 이혼 배경은 섹스리스, 탑 여배우 A의 스폰서는 대기업 그룹 총수 C회장, 이미 두 번이나 아기를 지웠다는 부연설명, 국민 천사 국민 여동생 가수 B는 사실 개 싸가지에 애연가라는 근거 없는 루머들이 지루하게도 길게 적혀 있었다. 증권가 찌라시는 화려한 게스트 라인업을 자랑한다. 출연자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유명인 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 찌라시 맨 마지막에 유일한 일반인 남자가 등장했다. 여의도 00증권 총무 팀에 근무하는 35세(남) 박0훈 과장의 지저분한 여자관계가 도를 넘어섰다고 했다. 남자는 어리둥절했다. 제일 지저분하고 자극적인 내용만을 선별해 담는 찌라시에, 이 쓰레기통에, 왜 내가 들어가 있는 걸까. 남자는 더 읽어 내려갔다.
‘일명 한국 월가의 카사노바로 통하는 박 과장은 사내 여직원들은 물론 타 증권사, 거래소, 은행, 증권부 여기자들까지 닥치는 대로 꼬셔 잠자리를
가져왔음. 대기업 스펙, 명품을 두른 훈훈한 외모로 여자들에게 접근, 믿음직스러운 언행으로 신뢰를 준 뒤 술을 먹여 집으로 데려가 잠자리를 가졌다고. 술에서 깨어난 여자들은 모두 실망감을 금치 못했는데 그건 고시원을 방불케 하는 낡고 좁은 독방에서 눈을 떴기 때문. 심지어 박은 집에 귀신이 있어 무서우니 아침까지 함께 있어 달라며 울었다고. 여자들은 그가 정신병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하고 있지만 더러우니 피하자는 주의. 이미 여의도 일대에는 박에게 넘어갈 여자가 남아있지 않음에도 최근 00일보 증권부에 신입 여기자가 들어왔고 동문이란 것을 알아낸 박이 이를 이용해 바로 낚았다고 함. 이 여기자는 박의 실체를 알고 난 후 고소하겠다고 길길이 날뜀. 실제 성폭행으로 고소를 준비 중이라고 함. 한국 월가의 정신 나간 카사노바, 그의 말로 역시 낡고 좁은 감옥 독방이 제격일 듯.’
사실 남자는 항상 불명예스러운 소문에 시달려왔다. 동기들이나 백 차장에게서 가끔씩 그런 소문에
대해 들을 때마다 남자는 그냥 웃었다. 그게 뭐가 대수인가, 젊은 남녀가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해왔다. 남자는 여자들의 실망감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욕실의 샤워기 수압은 점점 약해지고 냉온수가 잘 조절되지 않았는데 여자들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극도로 뜨겁고 차가운 물세례에 비명과
욕설을 내질렀다. 거래처 은행의 창구 여직원이 왜 옆의 오피스텔로 이사를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방세가 훨씬 비싸니까, 대신에 남자는 결혼 자금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여자들의 실망감은 기분이고 감정이다. 남자는 감정이 눈앞에 실체를 가지고, 그것도 공개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분명 존재한다. 남자는 다음날 병가를 냈다.
남자가 병가를 내고 집에 있다고 말하자 여자 친구가 집으로 찾아왔다. 둘은 2주 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현관문을 열어주며 남자가 물었다.
“오늘 수업 없어?”
여자 친구는 하늘로 쭉쭉 솟아 오른 남자의 뻗친 머리카락을 보았다.
“다음 주로 미뤘어.”
여자 친구의 입술은 광택이 흐르는 핑크색이었다. 그녀가 남자를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왔다. 도시적인 단발 커트 머리가 봄비에 젖은 풀 향기를 풍기며 찰랑거렸다.
여자 친구는 실패한 피아니스트였지만 전문 과외 선생으로 연봉이 남자보다 높았다. 남자는 동갑내기인 여자 친구를 10년 동안 알고 지냈다. 그동안 둘은 사귀었다가 헤어졌다가를 반복했는데
이상하게도 인연의 끈이 아주 끊어지지는 않았다. 이제 연애의 탄력은 늘어질 대로 늘어진 면 팬티 같았지만 둘은 최근 5년 동안 만남을 이어왔다.
여자 친구가 집 안을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 역시 남자의 집을 좋아하지 않는다. 약간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녀는 하루 종일 방에서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영화를 보다 잠자는 것이 지겹다고
말했다. 여자는 나가서 커피숍이라도 가자고 졸랐다. 남자는 싫다고 버텼다. 남자는 여자와 결혼을 하려면 백 원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이유를 댔다. 그러면 여자는 치사하게, 라고 말하며 경멸하듯 남자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내가 언제 결혼을 재촉했느냐, 너가 버는 그런 푼돈은 모아 봤자다, 먹는 데나 쓰는 거다, 라고 쏘아붙였다. 집에서의 데이트가 매번 이런 식으로 끝나다보니 여자 친구는 언젠가부터 남자의 집에
절대 오지 않았다.
남자는 몸에 이불을 둘둘 감고서 다시 침대소파에 누웠다. 여자 친구는 죽이라고 쓰여 있는 하얀 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투명 매니큐어를 바른 짧은 손톱이 깨끗하고 단정했다. 한 손에는 장지갑과 외제 차 로고가 박힌
키를 들었다. 그녀가 주방으로 가자 물소리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 고소한 냄새와 함께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졸린 눈을 하고서 역시 이 여자와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자 친구는 테이블 위에 죽을 가져다 놓고 창문 쪽으로 걸어가 블라인드를 걷더니 낑낑거리며 창문을 열었다. 손에 먼지가 묻었는지 으웩, 하는 소리를 냈다. 남자가 몸을 반쯤 일으키며 말했다.
“놔둬. 어차피 햇빛도 바람도 안 들어와.”
“이렇게 다 쳐 닫아 놨는데 그럼 뭔들 들어오겠니? 텔레비전 좀 켜. 넘 조용해.”
남자는 순순히 리모컨을 눌러 텔레비전의 전원을 켰다.
남자는 여자가 끓인 죽을 먹었다. 남자가 좋아하는 참치 죽이었다. 여자는 남자 옆에 앉아 종편 채널의 뉴스를 보았다. 강도 살인이 일어났는데 일가족 4명이 모두 식칼에 찔려 죽었다. 혼자 살던 옆집 청년의 범행이었다. 여자 친구는 또? 라고 투덜거리더니 다 먹었으면 나가자고 말했다. 그때 남자의 휴대폰이 울렸다. 병가는 무슨. 도망간 거 아니죠? 편하게 지내?^^ 미친 거 아냐? 여자 후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여자 친구가 굳어진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가 말했다.
“일.”
여자 친구는 관심 없다는 듯 텔레비전으로 다시 눈길을 돌리며 나가자고 말했다. 남자가 답장을 보냈다. 찌라시 봤다. 네가 쓴 건 아니지?^^ 내가 쓴 거면 뭐 어쩔 건데. 뭐? 이런 경우가 처음이야? 미친. 찌질한 새끼. 엄청 유명하드만. 나이를 그 따위로 처먹었냐. 행동 똑바로 해라. 상습 성폭행으로 고소할 거니까. 남자가 일어서며 여자 친구에게 말했다.
“나가자. 나 샤워 좀 하고 올게. 기다려.”
욕실로 들어온 남자는 손이 약간 떨렸다. 남자는 옷을 전부 벗고 세면대에 물을 세게
튼 다음 변기 뚜껑 위에 앉았다. 그리고 문자를 보냈다.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다음 주에 만나서 이야기하자.^^ 전송을 하자마자 답장이 왔다. 지랄. 동문회에도 전부 알릴 거야. 너네 본부장하고도 점심 잡아 놨어. 너 잘못 건드렸어. 인간이 우습냐. 개새끼. 남자는 세면대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리고 일어나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남자는 눈을 감고 쏟아지는 물줄기의 수압과
온도 변화에 신경을 집중했다. 갑자기 차갑고 갑자기 뜨겁고 갑자기 세차고 점점 미지근하고 약하고 또 갑자기 뜨겁고
갑자기 차갑고...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비닐로 된 샤워 커튼을 흔들었다. 바람? 남자는 욕실에 창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훗, 하고 웃었다. 남자가 뒤를 돌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 또 다시 바람이 불어 샤워 커튼이 날렸다.
남자는 씻는 둥 마는 둥 한 후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밖이 조용했다. 텔레비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남자는 생각했다. 현관문을 잠갔던가. 옆집에 누가 살지. 어떤 미친놈이 다짜고짜 집으로 들어와 칼로 여자 친구를 찌르고 남자가 나오기를
문 앞에 바짝 붙어 서서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피범벅이 된 칼을 움켜 쥔 피범벅이 된 손과
희번득 뜬 눈... 남자는 욕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 앞에 누군가 있었다.
똑. 똑. 똑.
노크 소리에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악, 소리를 질렀다.
“야. 뭐야? 왜 그래? 다 했어?”
남자의 벗은 몸에서 땀이 흘렀다. 더운 수증기 속에서 남자는 추위를 느꼈다.
여자 친구는 남자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자고 가지 않았다. 금요일 밤이라서 친구들과 약속이 잡혀 있다고
했다. 남자는 전혀 아파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 친구의 동정심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대신 밤 9시까지 남자 옆에 있어 주었다. 여자 친구가 나가자마자 남자는 집 안의 온도가 싸늘하게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친구들과 백 차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유부남들은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친구들은 여자와 있거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아픈 건 괜찮냐. 무슨 일인데. 지금은 좀 늦었고. 담주에 회사에서 얘기하자^^. 백 차장은 정말 좋은 형이었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이는 주말에 사적으로 남자를 만나주지 않았다. 남자는 보낸 문자를 다시 읽었다.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당황스럽네.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지 않나. 우리 둘의 문제잖아. 전화 좀 줄래. 지금 어디니. 지금 만나자. 답 기다릴게. 휴대폰 화면에는 남자의 말풍선들만 둥둥 떠 있었다. 여자 후배는 답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최신영화가 담긴 USB를 텔레비전 USB 포트에 꽂았다. 형사 액션 물로 남자가 좋아하는 장르다. 남자는 자주 이렇게 혼자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시작 되고 남자의 옆에는 어느새 무언가가 다가와 앉아 있었다. 남자는 그 존재를 모르는 척 했다. 그것은 연민이 담긴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영화에 집중했다. 어느새 남자는 영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주 잠깐이나마 그는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모든 회사원들은 같은 꿈을 꾼다. 어서 주말이 오기를. 그러나 남자는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것과 그리고
내일도 다시 주말이라는 것이 싫었다. 주말에는 강제적으로라도 가야할 곳이 없었다. 남자는 라면을 끓여 먹고 설거지를 했다. 빨래를 하고 건조대에 널었다. 그동안에도 남자는 계속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남자는 찬물로 샤워를 했다. 샤워기 아래 서서 이 집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났었다 거나 아니면 은둔형 외톨이
같은 녀석이 자살이라도 한 것은 아닌지 부동산에 물어보러갈까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가 새 건물에 입주했던 1호 입주자라는 것이 떠올라 그만 두었다. 그렇다면 터가 좋지 않은 걸까. 풍수지리? 아니면 억울하게 죽은 군인이나 민간인의 시체가 묻혀있는 땅 위에 지어진 건물이라던가.
탁.
분명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였다. 남자는 물을 뚝뚝 흘리며 허겁지겁 욕실의 문을 열고 나왔다. 현관문도 창문도 잠긴 그대로였다. 남자는 손에 들린 수건으로 젖은 머리와 몸을 닦으며 침대소파에 앉았다. 거뭇해진 눈 밑을 하고 남자는 스르륵 옆으로 누웠다. 남자는 발가벗고 있었기에 온 몸으로 이불의
감촉을 느꼈다. 그렇게 선잠이 들었다.
무언가가 침대소파에서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것은 검은 덩어리였는데 평면에 있어야할
그림자가 일어나 부피를 가지고 입체적으로 돌아다녔다. 그런 검은 덩어리들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것들은 남자가 잠이 든 것을 확신하는 듯 유유히 집 안을 걸어 다니다가 잠깐씩
남자에게 들러 얼굴을 마주했다. 주방에서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어디선가 개가 짖었다. 남자는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깊은 잠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결국 꿈의
호수에 까무룩 머리통까지 담그고 말았다. 여자 후배가 남자의 옆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비겁한 새끼. 너 사실은 되게 겁나지. 남자가 되뇌었다. 기분 탓이야. 집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 여자 후배가 남자의 가슴을 짓누르며 귓가에
속삭였다. 쪽팔려? 실수했다고 말하는 게. 귀가 먹먹했다. 남자는 모든 것이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집에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불안하고
우울하고 자기혐오 같은 기분들이겠지.
남자가 눈을 떴다. 짧은 꿈이었지만 남자는 거기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남자는 확실히 기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것들과. 대체 어떤 이유로 감정이 육체의 바깥으로까지 나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는 문득 용기가 생겼다. 귀신도 악령도 아닌 자신의 기분이라면 남자는 그것들과 정면승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잘 되면 그 기세를 몰아 후배에게 전화를 걸 것이었다. 실수했고 후회한다고, 미안하다고 말을 해야 했다.
새벽 2시 반. 무언가가 움직였다. 발소리를 죽이고 방안을 돌아다녔다. 남자는 눈을 감은 채 겁을 먹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가 만들어낸 기분이야. 그러니 내가 사라지게 할 수도 있어. 그것은 남자의 머리맡에 서 있었다. 물끄러미 남자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저러다 갑자기 남자를 덮치려들 것이었다. 그러면 또 남자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이것은 어제까지의 패턴이다. 오늘은 저것을 무시할 것이었다.
맞은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텔레비전 앞인 것 같았다. 남자는 눈을 떠서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확인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믿어야 했다. 정신병자처럼 언제까지고 기분에 휘둘리며 살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남자는 계속 누군가의 시선을 무시하며 잠에 빠져들려고 노력했다. 털썩. 행거에서 옷가지가 떨어진 것 같았다. 아니 떨어졌다. 그제야 남자는 뭔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감지했다. 눈의 장막 너머에 분명하게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남자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스탠드의 불을 켰다. 그리고 그곳엔 정말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은 꿈에서 본 덩어리들처럼 검은 색이었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복면을 쓰고 부엌칼을
들고 있었다. 잠든 줄 알았던 집 주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불을 켜자 놀란 강도는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남자의 복부를 흉기로 찔러댔다.
남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몸통에서 빠져나온 기분들이 실체를 가지고 눈앞에 나타나는 것보다 지금이 더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남자는 칼에 찔리고 있는 자신의 몸뚱이가 상상이 아니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극도로
두려워졌다. 죽는 건가. 고통 속에서 남자는 생각했다. 진짜로?
열려진 창문으로 솔솔 봄바람이 들어왔다. 하얀 블라인드가 부드럽게 달칵 달칵 소리를
냈다. 진짜구나. 남자는 죽고 있었다. 강도는 허둥대지도 않고 집 안을 뒤졌다. 남자는 생각했다. 그러면 알 수 없는 그 존재들과 그 시선들도 내 죽음과 함께 소멸되는 것일까. 강도는 흠칫 놀라더니 남자의 얼굴을 여러 번 발로 걷어찼다. 이제 이 집에서 더러운 기분들에 둘러싸여
홀로 있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3D 그림자. 안녕. 남자는 힘을 빼고 편안하게 두 눈을 감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남자는 진심으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