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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워싱턴문학상 신인문학상 수필부문 우수상
<수필부문 우수상>
보헤미안으로 살기
김 진
보헤미안적인 기질은 타고나는 걸까 아니면
후천적으로 길러지는 걸까. 성년이 되기까지 자주 이사를 하며 살아야 했던 환경이 나를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삶의 방식에 익숙해지도록 만든 건
아닌지. 아니면 나는 그렇게 살아갈 운명이었던 걸까.
집을 잃은 후 일 년 혹은 육 개월에
한 번씩 이사를 하며 살아야 했을 때 철없는 마음에도 그런 생활이 좋았을 리는 없지만 학교가 파한 뒤에 아침에 나섰던 동네가 아닌 낯선 동네,
낯선 아이들이 놀고 있는 낯선 골목을 지나 낯선 집을 찾아 드는 일에는 분명 어떤 설렘이 있었다. 저 골목을 돌면 어떤 새로운 세계, 좀 더 멋진,
좀 더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좀 더 향상된 어떤 "집"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건 알았지만 상대적인
빈곤감 같은 건 모를 때여서 그 가난은 오롯이 순수한 가난이었고 그래서 견딜만한 것이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나는 친구의 집에 놀러 가서 친구의
아버지를 봤을 때, 아, 세상에는 아버지들이 있지, 하고 문득 깨닫곤 했지만 그건 잠깐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소한 충격이었다.
중학생 때였나, 주민등본을 학교에 내던
날, 우연히 내 친구의 주민등록등본에 딱 한 줄의 주소만 적혀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친구가, 자긴 지금껏 이사를 해 본 적이 없으며 태어난 집에서
아직 살고 있다면서, 나도 이사 좀 해보고 싶어, 말했을 때, 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행마다 다 다른 주소가 기록된 내 등본의 남루함을 처음
자각한 순간이었다. 이사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살아왔다는 사실, 그게 몹시도 부러웠다.
친구의 집은 혜화동의 오래된 한옥들이
모여있는 골목에 있었다. ㅁ자 형태로 지어진 한옥마당의 작은 중정에는 철마다 꽃들이 피었으며 대청마루와 툇마루를 따라 한지 문이 달린 방들이 있었고
부엌과 화장실은 현대식으로 개량되어 있었다. 당시 새로 지은 여의도의 육십 평 아파트로 이사한 또 다른 친구의 집은 넓었다는 기억밖에 없는 반면에
혜화동 친구의 집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때때로 기억의 뻘밭에서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며 서글픈-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향수를 불러일으키곤 하였다.
이사를 많이 다니면 살림을 제대로 갖추고
살기 힘들어요.
타향살이를 오래했던 책 좋아하는 지인이
마음에 쏙 드는 서가가 있는 집을 방문하고 와서 자조를 섞어 이렇게 말했을 떄, 그이가 말한 살림에는 정신적 살림을 포함한 두 겹의 의미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뿌리를 내린다는 것, 정신이 깃든다는
것, 안정감, 자기 정체성이 흩어지지 않고 마치 한옥 뒤란의 장독 속처럼 풍성하게 숨쉬며 고요히 익어간다는 것. 이런 것들은 오래된 집-유년의
흔적이 쌓인 뜰과 처마의 기억이 없이는 어렵지 않겠냐고, 마음이 뿌루퉁해지는 날에는 나 자신도 쓸쓸히 되묻곤 하였으므로.
습관처럼 이사를 다니다가 이사가 그만
천성이 된 걸까. 결혼하고 내 집을 가진 뒤에도 이사는 끝나지 않았다. 이십 년 동안 자의 반 타의 반 한국에서 네 번, 국제이사도 세 번, 미국에서도
세 번을 이사하였다. 살림을 쌌다 풀었다 하는 과정에서 아끼던 물건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갔다.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많이 다닌 나는 그런 일에
익숙했다. 애착이 별로 없다고 할까. 어떤 물건을 잃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책만큼은 처녀적 읽던 것까지 다 짊어지고 다녔는데 미국으로
이사하면서 파주의 시댁 창고에 층층이 쌓아둔 책들이 어느 여름 홍수에 전부 수장되었을 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속상함은 제법 오래 남아있었다.
좋은 집, 예쁜 집에 가도 멋지다, 예쁘다
외에 부러운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손때 묻은 책들이 겹겹이 쌓인 책장과 길이 잘 든 가구가 있고 자연스레 놓인 낡은 물건들에서 오래된 사연들이
일상처럼 말을 걸어오는 그런 "집"에 가면 나는 비로소 빈곤감을 느낀다.
무언가에 깃든다는 것, 깊이 오래도록
관계한다는 것,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소중히 쓰다듬고 아끼는 무언가를 만들고 간직하는 일에 등한했던 내 삶. 가급적 얽매지 않고 최소한의
인연으로 살고자 했던 그 삶이 허깨비였으며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 아니었나 하는 자각으로 잠시 휘청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실감에 오래 머무르게 되진 않는다.
어쩌면 나는 천성이 유목민인지도 모르겠다. 한 곳에 뿌리내린 삶을 동경하면서도 오래 그렇게 살 수는 없는. 손바닥만한 내 땅을 갖게 된 지금도
푸른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에 로드리고의 안달루시아 협주곡이라도 들려온다면 어디론가 훌쩍 길을 나서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정착과 유랑. 두
개의 이미지가 늘 속에서 길항한다. 진정 부러운 그런 서재를 갖게 된다 해도 그 안에 오래도록 머물진 못할 것 같다.
단 몇 마디로 줄일 수도 있는 글을 왜
이리 길게 썼을까. 지인에게 나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우리 그냥 보헤미안으로 살면 어떻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