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문학 신인문학상 당선작
문학자료실
워싱턴 문학
오늘의 시
평론과 해설
문학 강좌
세계의 명시
우리말 바루지기
워싱턴 문학 신인문학상 당선작
제20회 워싱턴문학 신인문학상 소설부문 우수상
기억
정은선
가슴이 쿵쿵 뛴다. 누굴까?
창문 밖 처마 밑 빗소리에 섞여들려 오는 소리. 아이의 울음소리 인 것도 같고,
가녀린 여인의 숨죽인 울음소리 인 듯도 한데 궁금하지만 차마 창문을 열 수가 없다. 내다볼까? 하지만 울음을 그칠까 봐 창 밑에 앉아
빗소리에 섞여 간간이 들려오는 울음을 붙잡아 내려 애쓰고 있다.
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이젠 빗소리만 후드득 거린다. 창문을 조심조심 열어보니, 그곳엔 아주 작은 아이가 내복 바람으로 벽에 잔뜩 몸을 붙인 채
서 있다."왜 우니?" 했더니 대답 없는 아이는 빗속을
달려 도망친다. 가지마….
창문으로 들이치는 차가운 비바람을 맞으며 난 한참을 서서 그 아이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동녘에 뜨는 햇빛은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한다며 예고하고, 엊저녁의 비로 씻겨진 청명한 가을 하늘이 눈부시다. 창을 통해 보는 세상은 오늘도 요란하다.
새벽 등굣길 학생들의 재잘거림도 즐겁고
야채트럭을 붙잡아 놓고 이것저것 뒤적이며 수다스러운 아주머니들의 걸죽한 흥정도 행복하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내게 따사로움을 주고, 어제처럼 비가 내리는 날엔 빗소리에 취해 생각들을 정리하며 한층 마음이들뜨기도한다.시끄럽던골목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한낮인데 개 짖는 소리만 멀리서 들려올 뿐이었다.
어스름 저녁 놀이지고 퇴근하는 이들의 바쁜 걸음 소리만 들리더니
그렇게 하루는 또 지나 가는 듯 골목은 다시 조용해졌다.
가으내 들려 오는 귀뚜라미 소리가 가슴을 에고, 차가운 비가 온종일 내리는 날엔 더 눈물이 난다. 그곳엔 나의 눈물, 우리 모두의 눈물이 섞여 있음을 울어도, 울어도 그는 우리 곁에 돌아 올 수 없는데
이 울음은 부질없는 나의 한탄 일뿐이다. 가엾은 그 영혼은 지금은 그 소녀를 만나 그들의 사랑에 축배를 들고 있을까?
그의 가슴에 깊게 꽂은 나의 비수는 끝내 그들의 "사랑의 약속에 대한 맹세"를
이루게 해준 응원에 지나지 않는거 였을까? 그들은 그곳에서 행복할까?
이제 나는 엄마의 집으로 돌아왔고, 방 한편에 쌓여 있는 그와 나의 신혼살림들, 세평 반 정도 되는 나의 방에 아직 박스 채 쌓여있는
저것들을 언젠간 정리해야 할 텐데 혹시라도 ….그와의 추억이 불쑥 튀어나올까 봐
난 그 상자들을 열어 보지도 못하고 또 하루해를 보낸다.
또 눈물이 난다.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밀어내고 닦아내도
주체할 길이 없어 흐르는 대로 흐르는 대로 울고만 있다.
“덜컹, 덜그럭" "거기 누구세요? 밖에 누가 왔나요?"
소리가 난 창문 쪽을 쳐다보며 한동안 후들거리며 뛰는 가슴을 붙잡고 서 있었다. 아무 소리가 없는 걸 보니 바람이었나?
확인하고 싶지만, 창문을 열기엔 용기가 부족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난 매일 지하철 출구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단다.
지나가는 사람중에 누군가를 발견하려고 애쓰면서 여러 날을 그렇게
서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단다. 잡아끄는 엄마를 밀어내면서
하루 종일 그러고 서 있었더란다.
눈이 빨갛게 충혈된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애원하듯
“오지 않을 사람이다.” “이젠 올 수 없는 사람이다”.
이미 강을 건너 먼 곳으로 떠났다고 그들은 내게 말해 주었고,
난 그가 떠났다는 그 말이, 무슨말 인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이번 막차에는 그가 조금은 지친 그러나 환한 미소로 내 앞으로 곧장 걸어올 텐데… 남편은
퇴근길에 글 한장 남기지 않고 달려오는 지하철 앞으로
뛰어들어 형체조차 알 수 없게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고 그들이 말해 주었다. 난 변기를 붙잡고 토해내고, 울다가 토하고 또 토했다.
차라리 내 옆에서 조용히 눈을 감지, 그의 선택에 몇 날을 울던 나는
금이 쳐져 있는 어느 곳도 넘어갈 수가 없었다.
햇빛이 맑은 날 난 살짝 열린 창문으로 또 그 애를 보았다.
너무 놀라 창 옆으로 몸을 돌렸다. 조금 후 다시 내다보니 그곳엔 아무도 없다.
난 창을 조금 더 열어 살펴보니 멀리 가는 그 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날 왜 울고 있었는지 궁금했는데.. 밝은 아이의 얼굴을 보니 안심이다. 오후의 햇빛은 방바닥에 길고 눈부시게 늘어져 있다.침대 위에 이리저리 뒹굴 거리며 누워있었는데,
누워서 내려다본 방바닥에 또 다른 그림자가 창문에 걸쳐져 있다.
몸을 휙 돌이켜 창문 쪽을 보니 한 아이가 서 있다.
그 애다. 눈이 마주쳤고 나를 발견한 그 애는 또 쏜살같이 사라진다.
난 벌떡 일어나 창문 쪽으로 갔다.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꽃이라도 키워볼까?
창문에 매달아 놓고 물도 주고 햇빛 드는 쪽으로 이리저리 옮겨 주기도 하고
살랑살랑 흔들며 대답 해줄 때 끝도 없는 이야기들을 들려줄까?
가마득히 먼 옛날이 그립다. 그곳에 가면 아직 그 친구들이 있을 것 같고
빈 교실에 반갑게 나의 손을 잡아끌고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들려줄 것만 같다. 순수하고, 즐거웠던 때를,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싶은데
대문 닫히는 소리에 돌아누웠다.
방 문앞, 매일 밀어 넣는 밥상엔 엄마의 메모가 있다.
"맛있게 먹고 힘내, 사랑해"엄마가…
계산대를 내려다본 채 낮은 목소리로 수줍게 인사를 건네는 그 남자.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거스름 돈을 내밀며 어서 받아 주기를 간절히 원 하는것처럼 나의 코앞에
들이밀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난 직장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며 오랜 시간을 그 카페에 앉아 있었는데
계산대에서 마주 하고서야 대학 동창 블루를 알아보았다
동료들과 저녁 내내 수다 떠는 동안 그가 주문을 받았고, 커피를 내려 우리 테이블에 올려놓고, 리필도 해주고, 더 필요한 것 없는지 물어보러 왔었는데 난 그를 알아보지 못했었다.
전신에 훅하고 불덩어리가 지나간 듯 난 갑자기 고열로 혀가 마비되고
머릿속은 하얘져 버렸다. 가만,이름이 뭐였더라?
블루
이럴 땐 이름을 반갑게 불러주며 태연한 척을 해야 되는 건데
“연희야 오랜만이다”. 끝을 흐리며 작아지는 그의 목소리.
떨리는 목소리는 나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였다.
국문과 재우. 그렇게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었던 이름. 겨우 그의 기억을 가슴에서 지워 냈는데. 내가 대학 때 그렇게 쫓아 다니던 그 사람.
그가 이렇게 내 앞에 서 있다.
오리엔테이션의 설렘, MT를 마치고 분주했던 입학식 후, 긴 교정의 언덕을 걸으며 대학 신입생이 되어 꿈처럼 나른하면서도 달콤한 느낌을 알아갈 때였다. 본관에서 나와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 벚꽃 잎이 막 떨어질 때니까. 아마도 학교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은 4월이었다.
교정을 지나 정문 밖, 우리 과 친구들이 모여있을 카페로 가던 중에
곤색 골덴 남방이 잘 어울리던 한 남자애가 축구부의 훈련을 구경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혼자 계단식 운동장에 앉아 있던 그는 짙은 곤색옷과 상반된 흰 얼굴.
봄날의 내리쬐는 햇살을 마주하고 있어서였나
하얀 얼굴에 섬세한 콧날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아름다운 남자라니…내 취향은 아니다." 라며
난 돌아서 친구들이 모여 있을 카페로 달려갔다.
그렇게 스치듯 한번 본 얼굴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반듯한 이마에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그를 나는 찾고 있었다.
교정을 오가며 축구장을 지날 때면 그가 앉아 있지나 않을까 자꾸 쳐다보게 되었고. 그가 앉았던 축구장을 한 바퀴 돌아보기도 하고,
10층 실기실 창가에 서서 혹여라도 그가 교정을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한 달여 가 지나던 어느 날 강의 시간을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있던 나는,
청남방을 입고 멀리서 걸어오는 그를 눈으로 쫓고 있었다.
가을볕이 내리쬐던 언덕을 천천히 걸어오는 그,
찻잔 속의 식어버린 커피처럼, 온기 없던 그의 흰 얼굴
선뜻 마시기는 싫은데 남기고 갈 수 없는 아쉬움이 배어있다.
진한 블루가 어울리는 그의 흰 얼굴 난 그를 블루로 이름을 붙이고
매일 블루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랑 있는지, 학교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과도 다르고 아직 얘기도 해보지 않았으니 취미도 알 수 없었다.
말이라도 붙여볼 방법을 생각하다. 고루하지만 동아리에서 주최하는 자선 커피 티켓을 들고 그의 앞으로 갔다.
열 장이나 팔아야 하는데 아직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부득이 물어보는 거니 날 부끄럽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두 장만 사라고 했다.
그는 편안한 미소를 띄며 대답 대신 주머니를 뒤적여 지폐를 꺼내 보였다.
난 그의 옆에 앉으며 잔돈이 없는데 내일 만나면 주겠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엷은 미소를 짓는다. 아름답다 이사람
난 정신을 가다듬으며 미술학과의 이연희라고 날 소개하고 무슨 과 인지 물어봤다. 국문과 최 재우라고 또박또박 말하는 그의 입술이 나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겨우 정신 차렸는데
또 아찔해진다.
며칠을 미루다 남 은돈을 주며 만났고, 자선 커피를 팔며 그가 오기를 기다리던 그 카페에서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주문을 핑계로 그의 옆에
서 있었다. 감사 인사와 공강을 핑계로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도 되는지 물어보니 흔쾌히 허락한다.
그 또한 다음 강의 시간까지 혼자 있을 참 이었다고 손에 든 책 한 권을 내려놓지 않은 채
나를 올려다본 그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난 학교 곳곳을 찾아다니다 우연을 가장한 복도에서의 만남과,
때론 도서관에 앉은 그를 발견하고 그의 앞에 숨죽이고 몇 시간을 앉아 그가 일어설 때까지
기다리고 있기도 했었다.그 후 난 매일 이유를 만들어 만났고 가을이 왔다.난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옆에 있는 것만 으로도 행복했다.
그는 알고나 있을까? 나의 우연을 가장한 수많은 만남 덕에, 우린 제법 만나면 반가웠고
교정 안의 숨은 공간들을 우리 것으로 만들었다.
더는 그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우리의 익숙한 장소에 약속처럼 함께 있었다.
어느덧 그의 시간표에 맞춰 나의 강의 시간을 조절하고 봄과 여름이 지나갔다.
사랑을 하는 것. 숨죽여 기다리는 걸까'''사랑하는 이를 배려하는 게 사랑일까?
그를 위한 배려란 결코, 요구하지 않는 건가? 함께
있음을 감사하며
난 그의 아름다운 입술이 혹시라도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늘 떨리는 맘으로 그를 만났다. 그는 또 책만 읽고 있다. 옆에 있는 나를 알고나 있는지,
저녁 어둠이 내려 앉는 줄도 모르고 한참 동안 멍하니 잔디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컴컴한 교정엔 우리만 남아 있었고 차가워진 가을바람은 그가 일어서기를 기다리며 앉아있기엔 너무 추웠다.
매일 그는 이렇게 나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게 한다.
내가 맘에 없음을 이렇게 표현하는구나 하고
난 슬며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익숙해져야 하는데, 애절한 나의 사랑을 들키지 말아야 하는데
더이상, 참기엔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 너무나 애달프다.
그만하자.
힘들게 한걸음, 한걸음 옮기면서 나의 사랑이 이렇게 무너져 내림을 예감했다.
더는 뒤 돌아보지 않으리라.
그의 허한 눈길에, 다독이고 따뜻하게 덮어주려 한 나의 사랑이 부질없음을 알기에
이제는 진정 그를 떠나리라.
울면서 난 한 걸음 한 걸음 그 층계를 밟아 내려오고 있었다.
“연희야!” 하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았을때, 그의 입술은 이미 너무 가까이 다가왔고 쿵쾅거리는 나의 심장은 이미 주저앉아 버렸다.
우린 그 층계에 앉아 서로의 영혼을 빼앗기라도 할 것처럼 키스를
하고 있었다. 나의 첫 경험은 그렇게 황홀하게 가을밤을 수놓았다.
잔디밭에 누워 본 하늘은 가마득했고 수많은 별들은 너무 어지러웠다.
나의 20살, 아름다운 두근거림으로
그 밤에, 더는 거스를 수 없고, 더는 아름다울 수 없는 나의 첫사랑과의
정사는 수많은 별빛 속에 숨겨져
아무도 보지 못한 그대로 밤은 깊어갔다
며칠을 그를 찾아다녔지만 볼 수 없었고 어느 날 등교길에 만난 그는 이따 학교 앞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의 말에 난 하루종일 들떠서 교수님들의 말씀이 전혀 들어 오지 않았다.
카페 구석진 곳에 앉아 그를 기다리는 동안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유리문이 빗물에 젖어 밖의 불빛만 어스름이 보이고
"끼이익"하며 바닥을 긁는 문소리가 가슴에 생채기를 내듯 아프게 들리면서 블루가 입구에 들어섰다.
그의 어깨 위로 부터 흐르는 빗물이 바닥으로 "툭"하며 떨어지고,
비를 맞아 파래진 그의 입술에서, 따뜻한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자리에 앉으며 그는 “미안해”라며
말문을 열었다.
테이블 위, 흔들리든 촛불에 그의 흔들리든 눈동자.
“안돼!” 난 속으로 외치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애써 씁쓸히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서 난 벌써 그가 하려던 말들의 모든 의미를 알고 있었고
알고 있으니 더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눈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난 일어나 카페의 문을 힘겹게 열고 쏟아지는 빗속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가 하려던 말을 듣기가 겁이나 도망치듯 그곳을 나와 쏟아지던 빗물을 맞으며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종이로 만든 여자였었나 난 엊저녁 비에 망가져 쓸 수 없는 종이 인형처럼
구겨져 버려 빛을 잃고 버려졌다.
열에 들떠 바짝 마른 나의 입술에 남아있던 그날의 기억을 애써 붙잡으려 했지만 그의 싸늘한
말들은 그 모든 것들을 덮어 버리고
일어나려해도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난, 며칠을 학교에 갈수 없었다.찾아보지 않으니 보이지도 않았다.
잊어야 한다. 더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다음 해 난 편입을 해 다른 학교로 옮겼고, 이제야, 막 사회 초년생이 되어 열심히 살고 있는데, 그가 또 내 앞에 이렇게 서 있다.
미안해서 인지 그의 수줍은 성격 때문 인지 한마디 내 이름만 부르고 또 그렇게 조각처럼 서
있다. 동료들을 먼저 보내고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천천히, 천천히 커피 한잔을 만들며 내가 앉은 테이블로 오기를 주저하고
있다. 이제 나는 어른이 되었고 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
꽤 오랜 시간을 그를 기다리며 앉아있었다.
한참 후 그가 큰 컵에 향 좋은 커피를 내 앞에 내려놓으며 앉는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마주한 그를 바라보니 그는 여전히 아름답다.
우리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난 그의 조각 같은 콧날을 바라 보는 게 좋다.이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을 가까이 바라보며
빗소리같이 후드득 내려앉는 그의 젖은 목소리가 좋다.
축축이 젖은 그의 목소리, 그는 늘 “괜찮니?” 라며
말을 띄운다.
그의 이마와 콧날과 젖은 입술에 내려앉은 그늘이 안쓰러웠고,
이 아름다운 남자의 머리칼을 쓸어 올려 그늘을 걷어주고 싶었다.
아니, 따뜻하게 안아 그의 눈물이 흐르는 뺨에 입술을 갖다 대고 싶었다.
카페엔 조용한 어둠만 조명등 아래 낮게, 낮게 드리웠고
그의 나지막하고 느린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첫사랑의 이야기를 내게 하려 한다.창백한 그의 얼굴, 담담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있는 눈
그가 고등학교 때 입시학원에 다니면서 알게 된 여학생을 3년 동안 사귀었었다고 했다. 매일 방과 후 학원을 같이 다니며 늘 서로를 격려하며 입시준비를
했었다고,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고운 여자 였었다고
늘 걷는 것 조차 힘들어하던 그 아인 백혈병이었고 대학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 간절하던 그녀가, 수능 몇 달을 앞두고 결국 백혈병으로 죽어버렸다고
곁에서 지켜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워
많이 힘들어했다고 슬픔으로 그해엔 입시도 못 치루고, 그다음 해 대학에 들어올 정도로 마음 아파했다고, 해를 넘기고, 힘들었던 스므 해를 거치며
학교에 겨우 입학을 했고 늘 혼자서 힘겹게 학기 초를 보내는 동안
멀리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나를 의식하게 되었고
아무도 받아들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내가 귀여워 보이더라고
너를 갖고 자신이 죽일 만큼 미웠고 후회가 됐더라고 날 사랑할 자신이 없으면서 계속 만남을
지속 할 수 없어 헤어지려 했었다고
떨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말하는 동안 그는 날 한 번도 쳐다 보지 않았다.
멀리 창밖에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멍한 눈으로 그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하마터면 그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 했다.
정말 잊으려 노력하며 열심히 살았는데
이 아름다운 남자가 말을 하는동안 난 그를 안아주고 싶다니…
4년이 지난 우리에게 아직도 끈이 남았던가…
“괜찮아, 됐어, 힘들면 더 말하지
않아도 돼, 제발 그만해!”
겨우 의자를 붙잡고 일어서 앞만 보려 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하고 얼른 문을 열고 나왔다.
난 괜챦지 않았다. 툭 하고 눈물이 떨어진다.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가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그를 보았다.
지금 카페 안이 바쁜 시간 아닌가? 못 본 척 길을 건너려는데 그가 "연희야" 라고 나지막이 부른다. 혼자 뒤쳐진 나는 그의 앞에 마법처럼 끌려가 마주 서 있다.
몇 달 동안 애써 그 카페 앞을 피해 돌아서, 돌아서 다녔었는데
그가 부르는 나의 이름.그 한마디에, 난 떨리는
맘으로 그의 부름에 달려 그 앞에 서 있다. 그 또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연희야. 난 네가 왜 이곳에 오기를 두려워하는지 알아. 힘들어 하지마. 내가 미안해.” “네가 불편 할까 봐
카페를 내놓았으니
이젠 애써 돌아서 다니지 않아도 될 거야.”라고 한다.
난 퇴근 후 집에 가던 길을 돌아서 그의 카페안 구석 자리로 가 앉았다.
카페 안의 커피 향이 좋다. 종업원 대신 그가 와서 주문을 받는다.
“뭐 마실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편한 목소리로 말이다.
난 며칠을 망설이고, 망설이다 들어온 저 유리문인데
그는 향좋은 커피를, 내가 앉은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그도 앉는다.
내가 거부할 수 없는걸 그는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조용히 앉아만 있다.
그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 않으면서, 나의 대답을 기다린다.
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분주히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바라 보았다. 그들의 모습은 살아 있었다. 목표가 있었다.
차가워진 가을바람에 바짝 코트 깃을 여미고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한참을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다 난 일어서서 그곳을 나왔다.
몇 달이 소리 없이 또, 지나가고
난 또 그의 카페 앞에서 문을 열까 말까 주저하며 서있다.
문밖을 하염없이 쳐다보던 한 남자.그의 눈과 마주쳐 난 돌아설 수가 없었다.
주문처럼, 주술에 걸려 마법에 이끌린 오필리아가
요정을 따라 미로로 들어가게 되고 오필리아의 환상에 동조하듯이 신비로운 모습에 이끌려 들어간
환상처럼 난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
문을 밀고 들어오는 나를 일제히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장갑을 벗으며, 어떤 남자의 뒷모습이 그려진 판화를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그가 커피를 테이블에 올려 놓으며 마주 앉는다. 얼은 손을 커피잔에 모아쥐었다.
카페 안의 따뜻한 느낌이 좋다. “이 그림이 내게 자꾸 물어보네”
지금 행복하냐고? 누구 작품이야?
“내가 한 거야” 그는 많이 편안해진 목소리로 무심히 대꾸한다.
그는 대학 재학중에 신춘문예에 당선돼 상금으로 카페도 시작하게 되었고, 인세도 조금 들어온다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설명을 했다.
그는 요즘 들어 그의 이야기를 내게 한다. “가까워지고 있는 걸까?”
그는 여전히 푸른색의 셔츠를 즐겨 입고 있었다.
“난 아직도 너의 이름보다는 블루가 먼저 떠올라. “했더니 그가 살짝 웃는다.
우린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모텔로 갔다.
불빛에 흐르던 그의 등과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난, 쉼없이 흐르던 통곡과도 같은 몸짓으로 그에 대한 사랑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사랑의 그 존엄한 이름 앞에 난 그를 사랑했음을,
그 어느 것도 내가 원했던 이 사랑과 맞 바꿀 수 없음을, 몇번이고 느끼고, 그리고 깨달았다.
우린 결혼했다
그의 웃음이 날 받아 주겠다는 의미인 줄 알았다. 내게 미안해서 카페를 처분 하려 할 만큼 날 배려 하는 줄 알았다.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함께 앉아 있는 그가 이제는 날 원한다는 건 줄 알았다.
결혼 후에도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컴컴한 어둠 속에서 가끔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늘 공허한 그의 눈빛은 날 안절부절못하 게 죄인으로 만들었다.
우린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그는 저 먼 그녀와의 추억과 함께 공존하고, 그곳에 살고 있었다. 나로서 채워줄 수 없는 그의 심장에 칼이라도 꽂아 피가 철철 흘리는걸
보고 싶었다.
초혼(招魂)이라도 불러 그 고운
여자애를 만날 수 있다면 널 이렇게 잊지 못하는 이 사람을 함께 데려가라고 외치고 싶었다.
온종일 그는 나와 앉아서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지만
그는 날 너무 외롭게 했고 숨 막히는 고요함은 날 미치도록 만들었다.
그는 늘 낮고 처절하게 "미안해요."를 외치는 그 노래를 틀었고,
그날 카페서 처음 들었을 때 난 그것이 내게 미안하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그 고운 아이에게 바치는 진혼곡이였던 걸까.
전설 속의 아틀란티스를 향해 항해하는 그의 눈동자 안에
그는 그녀의 환영을 쫓으며 허공에 손을 흔들고 있다.
또 가을이 왔고 그녀가 죽은 기일이 다가온다.
그의 그늘진 얼굴에서 난 또 그녀의 환영을 보았다.
며칠을 밥도 안 먹고 슬퍼하는 그를 참아낼 너그러움이 이젠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난 그에게 될수 있는 대로 큰 목소리로 악다구니를 쳤다."가, 그녀에게 가 버리라고…" 그날, 그는 그렇게
용기없어 겨우 질질 끌던 삶을 마감했다. 나의 도움으로… 처음으로 한 사람을 절실히 사랑했고
나에게 가장 소중한 그 사람을 내가 밀어 낸 거다.
지하철 승차장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택한 그곳.
오늘도 이방에 갇혀 내가 했던 말들에 후회하며 울고 있다.
난 그를 사랑하긴 한 걸까? 그의 아픔을 보듬을 준비를 하기는 했던 걸까?
왜, 후회는 모든 것이 떠난 후에야 그 울타리를 그리워하는 걸까?
그를 향한 그리움, 혼자서 떠났을 그의 여정에 먼 발치서 그의 아픔,
고독, 슬픔을 외면하고 있던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몇 날 며칠을 엉엉 소리 내 울고 말았다.
그 아인 가끔 나의 창문 안을 살펴보고 간다. 점점 그 아이가 반갑다.
이 방안에 아지랑이가 오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풀처럼 파릇파릇한 그 아이가 지나가면 창문 안으로 풀 내가 가득하다.
“오빠 ! 나도 가면 안 돼? 나도
갈래.”골목 저 끝에서, 그 아이가 울면서 오빠에게 매달린다.
나도 데려가라고 오빠 따라가고 싶다고 했지만
오빤 "남자 애들만 갈 수 있어" 라며 뛰어가고,
그 아인 오빠의 등 뒤에다 대고 “가서 물에나 빠져 죽어라”. 해 버렸다.
또래의 남자애들과 우르르 몰려간 지 얼마 안 됐는데
강가서 빨래하던 아낙의 외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아이가 강에 빠졌어요.”
그 아이의 아버지가 허둥지둥 강 쪽으로 달려가고
그 아이도, 그 아이의 엄마도 울면서 뛰어간다.
"뭔 소리야?" 하며 몇몇 대문이
열리고 골목이 시끌하다.
“같이 빠진 형제 많은 다른 애들은 다 살았는데 죽은 아이만 2대 독자래.”
“어쩌나 쯧쯧 안됬구만….”
그 아이는 그 후 한동안 볼 수가 없었다. 그 아이가 보고 싶다. 아이가 걱정된다. 저녁때 살짝
가서 보고 올까
나에게 조금의 용기가 있으면 좋으련만 남편 죽인 여자라고 쑤군거릴까 봐 겁난다. 그날 난 대문간에 서서, 망설이고 서 있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밤새 고민하다 새벽녘에 그 아이의 집 대문 앞에 섰다.
어스름, 아직은 어두운 그 대문 앞 주황색 대문이 낯설지 않다.
그 옆에 시멘트 쓰레기장도 있고
울 아버지도 철문이 녹슬까 봐 주황색으로 칠했었는데
엄마가 출산이 임박해 아버지는 더운물을 한솥 올려놓으시며 우리 더러,
나가 있으라 하고이모는 우는 나를 업고 대문 밖을 막 나설 때 보았던
그 대문. 그때는 그게 무슨 색인지 몰랐었는데
난 커서야 그색이 주황색이었던걸 기억하게 되었다.
그 아이의 집, 대문이 나의 기억 속의 그 대문처럼 똑같이 따뜻한 이 느낌.
후득후득, 심장이 또 뛰기 시작하고, 어지러워…그만 집에 가야겠다.
불장난으로 팔각 성냥 한 통을 다 태운 오빠를, 버릇을 고친다며 커다란 손등으로 때려 줬는데, 며칠 후, 죽을놈인줄 알았더라면
때리지나 말 것을 하며 서럽게 울던 아부지. 나 에게도 오빠가 있었는데
그 오빤 나의 손을 잡고, 시내에 있던 중앙 시장을 지나 생연리에 들어설 때까지,
내가 길을 잃을세라, 땀이 찬 손을 꼭 잡고 걸어왔었는데
아버진 자전거로 퇴근하시며 어쩜 저리도 이뿐 남매가 뉘 집 아이들일까 하며
가까이 와보니 아 글쎄! 우리 집 아이들이더라고 몇 날 며칠을 두고 자랑스럽게 얘기하셨었는데
꿈이었나 싶게 울 오빠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들었던 기억도 이제야 어스름 생각난다.
그것이 상실인줄이나 깨달았을까 하던 아주 어렸던 내게도 꿈이면 나타나 내 손을 잡고 그렁그렁
눈물 고인 눈으로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오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일어나. 네잘못이 아니야. 난 아주
행복한곳에 있어.
늘 오빠와 손잡고 다녀 혼자선 아무 곳도 갈 수 없었고 방에 틀어박혀 오빠의 모습을 낙서로
그려대는 동안에도 해는 바뀌고 봄이 왔다.
난 학교에 입학을 했고 "장 영"이라는 뽈이 커다란 선생님이 무서웠고,
오빠 없이 나선 길이 무서워 학교 가던길에 방으로 도로 숨어들어와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엄마는 매일 멍한 눈으로 천장을 보며 누워 있었고
배가 고파 찬장을 뒤져 쉬어버린 찬밥을 먹고 토하는 나를 멍한 눈으로 쳐다 보고 계시던 엄마의
눈빛은 얼핏 기억이 난다.
배고프다고 징징대던 우리에게 아버지가 밥에다 간장, 참기름을 넣어 비벼주던 저녁밥들. 오빠가 죽고 다음 해 여동생이 태어났고,
엄마는 윗목으로 밀어내며 죽어 버리라고 덮어놓은 두꺼운 솜이불 속의 갓 태어난 아기를, 아버진 할머니 방으로 데려가 손가락 사이에 낀 때를 수건으로 닦아내고, 분유 한 통 사다가
젖병에 담아 한 병 다 먹이시고
꺽꺽 급하게 먹는 아기 등을 어루만지며 트림 시킨 후에야
할머니옆 따뜻한 아랫목에 눕히고 방을 나섰다.
젖을 안 먹이던 엄마는 또 임신했고 이듬해 남동생을 낳았다.그제야 돈을 벌어야겠다고
3년째 버려뒀던 이 층 결혼식장을 청소하라고 인부들을 고용했다.
시끌벅적, 건물 다듬기를 끝내고 우린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슬픈 기억을 털어 내기 위해 부모님은 그 집에 더는 있을 수가 없었다.
기억은 자꾸 저 먼 곳으로 날 데려가곤 한다.
그곳엔 큰언니, 작은언니 죽은 오빠, 여동생,
오빠를 대신해 태어난 여동생, 남동생, 그리고
부모님. 오빠의 상실을 못이겨 서로를 할퀴고 상처 내며 싸우시던 그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장난치며 서로 배를잡고 웃어대던 그들이 그립다.
밖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저곳에 가서 치열한 삶을 살아보고도 싶다.
그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의 죽음을 위로하지도 못한 나는 어둠 속에서 울고만 있었으니까.
그가 떨어진 승차장에 국화라도 가져다 놓고 싶다.
그의 짧은생에 언젠가는 미안해하지 않고 그의 선택을 위해 잘 가라고 인사하고 돌아올 수만
있다면. 이 무거운 마음이 조금 덜어질 수는 있을까.
숨이 막혀온다. 밖에 나갈 수만 있다면’’’.
그 아이가 풀 냄새를 풍기며 창문에 서 있다.동그란 얼굴,
동그란 눈망울에 살짝 이가 보이는 그 아이의 모습은 너무 사랑스럽다.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더는 도망치지 않는다.
그 아인 나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어서 일어나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다.
난 허둥지둥 문을 열고 신발을 찾아보았지만 댓돌 위엔 신발 한 켤레 보이지 않았다. 돌아서 창문을 보니 그아인 벌써 사라지고 없다.
골목에 신발장수가 오면 운동화 한 켤레를 사야겠다. 가볍고 편한 걸로 말이다. 그 아이가 부를 때 난 얼른 신발 끈을 묶고 그 아이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가겠지.
달력을 보니 그가 죽은 지 8개월이 되었나 보다. 내가
숨어들었던 이 방안에
작은 소녀의 위로가 새싹이 되어 파릇파릇 싱싱한 냄새가 되고부터 다시 세상이 궁금해졌다.
문을 열고 툇마루에 나가 앉아 햇빛을 마주하니 따사롭다. 코끝이 찡해온다.
먼저 그가 안치된 곳에 가보리라. 가서 그곳에서 마음껏 울고 오리라.
그리고 너무너무 사랑했노라고 말하리라.
그녀에게 가서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리라. 그리고 곧 태어날 우리의 아기에게 당신은 아주 행복한곳에 있다고 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