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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문학 신인문학상 당선작
제19회 워싱턴문학 신인문학상 - 단편소설: 우수상
단편소설: 우수상 - 박세용
공리주의자
‘사람 하나하나가 각자의 행복과 쾌락을
위하면서 고통과 불합리를 회피하는 인간의 자연적인 행동이 개인의 집합체인 사회에도 이익을 가져다 준다’는
이론인 ‘공리주의’는 영국의 제레미 벤담에 의해
1789년 [도덕 및 입법 원리의 서론]라는
저서를 통해 발표 되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문구로 요약되는
이 사상은 그 이후에 발표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등 모든 이념과
사상에 어느정도 씩의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공리주의, 그러니까 벤담에 의해서 주장되고 가장 많이 통용되는 ‘양적 공리주의’의 가장 큰 모순은 사회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이익은 무시되어도 좋은가에 대한 물음이다. 결국에는
다수를 위한 사회의 시스템 발전만을 절대적으로 보는 공리주의의 모순으로 19세기식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나
20세기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현재의 민주주의는 다수를 존중하되 소수를 보호하는 식으로 발전해나가고 있다.
나는 공리주의의 신봉자였다.
나는 나를위해 공부했고 사회활동을 했으며 적당한 직장에 들어갔고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집을 사고 연비가 좋은 소형차를 구입했으며
골든 리트리버 한마리를 키우면서 일주일에 세번씩 아침마다 조깅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나의 건강은 만족스러웠고
직장에서의 성취도나 친구들과의 사회생활 역시 정상적이었다. 선거에 투표를 해본 적은 없지만 보수주의적인 민주당
성향이라는 이중적인 여피족 특유의 정치사상을 갖고 있었고 기독교라고 센서스에 표시를 하지만 교회에는 나가지 않는 불성실한 신자였다.
나와같은 생활을 하는 수백만의 젊은이들은 미국사회의 근간이었고 이런 삶의 집합체인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계 최고라는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라고 나는 지금도 굳게 믿고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실연을 당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헤어지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생각과 사상이 다를 수 있고 추구하는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에 마찰이 있을 수도 있다. 친구나
돈, 폭력과 마약등의 심각한 문제가 유발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대학을 들어가며 시작된 나의 이성교제 역시 대여섯번의 헤어짐을 경험해야 했다. 그 때마다 괴롭고
쓰라린 마음이 며칠동안 나를 짓눌렀지만 금방 회복되고 말았다. 헤어진 여자친구들과도 가끔식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구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끔찍하고 완벽한
실연이었다.
나의 연인은 싸이코패스였음이 분명하다.
그녀가 맺었던 경찰과의 인연이라 해봤자 지나치게 민감한 무인 과속 탐지기에 걸려서 얻게 된 두 세장의 과속티켓이 전부였다.
영리했고 사회적이었고 요리 역시 잘했다. 단지 다른 점은 나와 달리 영어보다 한국어가
훨씬 더 편했고 가족들이 모두 한국에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그녀가 싸이코패스라는 것을 확신한 것은 그녀가
나의 가슴에 부엌칼을 박아 넣었을 때 본 그녀의 눈빛 때문이었다. 가슴에 박힌 칼이 준 지나치게 커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고통은 뇌에서 분비된 호르몬에 의해 급격히 진정되었고 심장의 박동이 멈추어 가면서 나의 시야는 점차 눈부시도록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어쨌든 나에게는 왠 일인지 죽음이라는 현실보다는 내게 각인된 마지막 그녀의 눈빛이 더욱
가슴아팠다. 격정도 없고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 사라진 차가운 눈빛. 비록 일년도 안된 관계였지만 이정도까지 끔찍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 할 수 없었다.
1년 전 쯤 갑작스레 시작된 워싱턴에서의
생활은 나름 뻔했다. 주중에는 중심부에 있는 직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가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 잠에 빠지는 일상의 반복이었으며 주말에는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고 금요일에 개봉하는 신작 영화를 보는 것으로 이어지는 데이트를
즐기던지 집으로 돌아가 친구 커플들과 같이 한 잔을 마시거나 혹은 남자들끼리 모여 라운지나 바에 앉아서 시가를 피우면서 지나치는 여자들을 보며
시시한 잡담으로 시작해서 시시한 잡담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뉴욕이나 시카고나 워싱턴 DC나 환경이 조금씩 다를 뿐 이 30대 초반의 삶이 영위되는 방식은 대게 유사했다.
나의 쾌락을 유지하며 사회를 구성하는 이런 공리주의적인 삶은 지루했지만 만족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내가 아무리 스스로를 이런 미국식 공리주의적 삶을 즐기는 미국인이라고 여기더래도 다른 친구들에게는 여전히 한국인이라고
인식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일랜드, 인도,
중국, 프랑스, 영국 등 다양한 민족적DNA를 가진 나의 친구들은 자신의 인종적인 특징으로 스스로를 자학하는 개그를 하거나 때로는, 다른
나라를 -특히나 자기 모국과 라이벌적인- 모욕하는 식의 유머로 친구들을
웃기곤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을 욕하고 한국인들의 김치냄새와 학부모들의 교육열을 비꼬곤 했다.
특별히 남들에게 내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자부하거나 다른 한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끈기, 높은 아이큐, 부지런함 같은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 따위를 내색한 적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워싱턴에 정착 한 지 반년이나 된 어느날 아이리쉬 친구가 버지니아 애넌데일이라는 곳에 한인타운이 있다고
말해줬을 때도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였고 어느날 주말 친구들이 함께 한국 음식을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도
그다지 끌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먹구름 때문에 저녁 무렵이 유달리
컴컴했던 그 주말 밤, 우리는 건물자체는 허름했지만 나름대로 깔끔한 어느 한식집에서 갈비를 시켜 먹는 것으로
그 날의 여흥을 시작했다. 부모님을 따라서 어렸을 때 한 번 나가본 서울에서의 기억이 났다.
우리들은 종업원이 소개해 준 노래방으로
2차를 갔다. 넓직한 방에 성능 좋은 스피커가 비치되어 있었다. 친구들 중 하나가 들을 때마다 지나치게 장엄해서 따분해지는 ‘마이 웨이’를 부르는 동안 나는
잠시 노래방 뒷편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로 향하는 복도는 좁고 길었다. 복도는 조명도 없이 깜깜했지만 통로를 따라 길게 배치된 룸에서 간간히 뿜어져 나오는 알록달록한 조명들 때문에 조금은 몽환적이었다.
오랫만에 먹은 한국음식과 맥주가 나를 기분좋게 했다.
그리고 그 길고 어두운 복도에서 나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긴 머리는 어두운 조명 아래서 잔잔히 빛나는 검은 물결처럼 유영했고 가녀린 어깨와
길게 뻗은 다리는 어느 핀업 모델의 그것보다도 현란했다. 나와 그녀는 서로 부딪히지 않으려 어깨를 비껴 걸었고
그녀의 긴 생머리와 내 어깨가 만난 그 찰나의 스침은 묘하게 아쉬웠다. 나는 볼 일을 마치고 친구들에게로
돌아왔고 비틀즈와 스팅의 노래 몇 곡을 부르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취기가 조금 돌고 있어서 오는 동안 계속
운전에 집중했고 음악도 틀지 않았다. 검은 도로를 보다가 그녀의 검은 머리가 생각났다. 큰 눈과 붉은 입술이 생각났다. ‘말이라도 걸어 볼 걸’이라고 혼자 되뇌었다. 집으로 돌아왔고 생수를 한 잔 마시고 침대에 누웠다. 다행히 잠에 쉽게 빠져 들었다.
나에게 검은 머리에 관한 패티쉬가
생겼다고 볼 수는 없었다. 검은 머리를 가진 여자는 내가 근무하는 회사에도 꽤 여럿이었고 그 중에는 꽤나
근사하게 생긴 일본여자나 모두가 눈독들이는 매력적인 쿠바계 멕시코 여성도 있었다. 노래방에서 그 ‘일’을 겪고난 이후에도 검은머리를 가진 여자들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여러가지 생각을 한 끝에 한국 여자를 만나보기로 결심했다. 지금까지의 연애 경험중에
한국 여자는 단 한번도 없었다. 부모님이 좋아했던 ‘한국인 며느리’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는지 한국 여자에 대해서만은 특별한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내가
스스로 어른이 됨에 따라 유전자에 내재된 민족적 본능이 발현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한국
여자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워싱턴 DC에는 꽤 많은 한국계 여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똑똑했고 친절했다. 한 달 만에 대
여섯 번의 블라인드 데이트를 하게 되었고 그녀들은 모두 나의 페이스북 친구로 등록됐다. 하지만 여자친구가
될 만한 만남은 가질 수 없었다.
글쎄.. 이런 속도로 진행된다면 시간이 모자를 지 모른다. 가슴에 커다란 칼날이 박혀서 심장이 정지된
채로, 뇌에서 산소가 모두 소비되고 남아있는 호르몬들이 말라 가면서 산소공급이 중단된 세포들이 괴사하기 시작한
이 시점에서 지나온 나의 모든 이야기를 정신나간 주정뱅이처럼 주절주절 대고 있다는 사실은 내 생에 마지막 순간에 대한 지나친 모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러분들은 내가 처음에 언급한 싸이코패스가 노래방에서 스친 그녀일지 아닐지가 궁금 할 것이다.
내가 그녀와 사귀게 됐는지 여부를 알고 싶어 할 것 같다. 그리고 내가 하려는 이야기
또한 결국 그것 뿐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대답은 모두 ‘그렇다’이다. 나는 그녀와 사귀게 되었고 그녀가 바로 방금 전 커다란 부엌칼로 내 심장을 찔렀다.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봉사
활동으로 한국인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튜터가 된 지 두 달 쯤 되어서였다. 블라인드 데이트로 만난 한국
친구가 한국어 좀 배우라며 한국인 대상 영어 튜터 활동을 소개시켜 줬고 검은 머리가 유난히 인상적이었던 그녀가 내가 가르치는 한국인 학생들 중
하나가 된 것이었다. 튜터라는 일 자체가 매력적이지는 않았지만 뭔가 시작한 일을 어지간해서는 그만두지 않는
내 성격 탓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초등학생 수준의 영어 문장을 읽고, 발음을 교정해주고, 한국말로, 영어로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거의 대부분인 이 봉사활동은 두달정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자연스럽게 혹은 운명적으로,
그녀는 내가 앉아있던 버지니아 어느 퍼블릭 라이브러리의 작은 스터디 룸에 기적처럼 나타났다. 그 이후로 우리는 매주 토요일 오전 열한시마다 만나게 되었다. 물론 나는 그녀가 내가 그날
밤 단번에 매혹당했던 바로 그녀였는지 확인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녀를 재회하게 된 스터디 룸에서,
나는 그녀와 간단한 자기소개를 나눈 뒤 영어로 정확한 날짜와 시간대와 장소를 얘기하며 그 노래방의 좁고, 약간은 몽환적인 긴 통로에서
스쳐 지나갔던 여자가 당신이 맞느냐고 직설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녀는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 생각 해 보고는
당당하게 그렇다고 이야기 하면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나도 로맨틱 코메디에나 나올 법한 만남에 당황스러워
했고 그 후로 영어 공부를 빙자한 만남은 데이트로, 그리고 어정쩡한 동거로까지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내가 왜 그녀에게 살해되어야 했는지는
모른다. 내 영혼이 이 몸을 빠져나가고 원귀가 되어서 그녀의 사생활을 파혜치거나 천국, 혹은 연옥 -지옥 갈 일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으로
흘러 들어가 그곳의 담당자에게 내 죽음에 대한 사실여부를 들을 수 있게 된다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 나는 아무런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드라마의 단골소재인 냉혹한 싸이코패스가
아닌 한 결혼을 약속한 연인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살해 할 수 있었을까?
불과 엊그제까지도 우리는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고 다음 달에 내 생에 두번째로 가게 될 한국에서 치뤄질 약혼식에 대해서 구체적인 계획을 나눴다. 나는
그녀가 살았다는 강원도 영월이라는 지방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그녀의 부모님이 살고 있다는 주소를 구글을 통해 인공위성 사진으로 찾아 보았다.
그녀는 내가 그런 일을 하자 정색을 했지만 나는 별로 괘념치 않아 했다. 경제적으로
윤택치 못했다는 것이 그녀의 컴플렉스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한 나는 얼마 전에 그녀가 미국에 관광비자로
입국 한 후 기한이 넘도록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해결책을 찾아 여러 기관을 수소문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내가 이런 이야기를 말했을 때 상당히 우울해 했지만 침착하게 자신이 미국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여기에서의 삶이 너무나 만족스럽고 이제는 나를 떠나서 한국으로 돌아 갈 수는 없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야기 했다. 그녀의 진심에 나 역시 감동 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침대에 반 쯤 걸터앉은 상태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녀를 포근히 안아주었다.
오해하는 몇 분들을 위해 한가지 말하고
싶은 점은 그녀가 고작 영주권 때문에 나를 죽였다고 생각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서류상이라도
결혼하지 않았으며 결혼 했다고 쳐도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상태로 육개월은 지나야 그녀에게 미국 영주권이 나온다고 알고 있다. 지난 서너달 동안 지속된 우리의 관계 속에서 파악한 그녀의 성품이나 인성을 통해서 나는 그녀가 바르고 정직하고 신용할만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를 죽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나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소설이나 영화속의 끔찍한 살인마처럼 나를 말 그대로, 먹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나에게 접근한 킬러였던 것일까? 혹시 나도 모르는 나의
과거를 알고 도저히 살려둘 수 없었던 것일까? 그 정도로 사고가 진행되자 나는 나의 과거를 뒤짚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밝힌 내 의견에서 수정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몇 문단 전 쯤에서 내가 죽은 후 지옥으로 갈 리는 결코 없을 것이라고 단언 했었지만 사실
그것은 나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국법에 근거해 나를 ‘중죄인’으로 규정할만한 위법사항을 저지른 적이 있다. 살인이다. 그것도 꽤 많이, 정확히 말하자면 네 건이나. 나는 나의 부모에게 사기를 치고 다른 주로 도망갔던 한국인
하나를 토막내서 깊은 숲 속에 묻은 적이 있었으며 나를 왕따시켰던 백인 아이 하나를 죽인 후 갈아서 돼지 사료로 이용한 적도 있었고 내게 인종적인
모욕을 주었던 외설스런 인도인 하나를 처리한 후, 역시 돼지 사료로 이용 했으며 나의 이런 비밀들을 파혜쳐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꽤 많은 액수의 돈을 요구하던 동료를 자동차 사고로 위장해 살해했다. 그 중 마지막 살인을
빼면 무척 쉬웠고 일말 통쾌하기 까지 했다. 예상은 했지만 음주운전 적발 경력이 있던 동료를 취하게 만들고
나와 함께 탄 차를 운전하게 만들다가 적당한 하이웨이에서 운전대를 꺾어 전복시키도록 만드는 계획은 퍽이나 힘든 일이었다. 요즘 차들이 꽤 튼튼한 탓에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어도 좌석에서 튀어 앞유리나 천정에 머리를 박으며 목이 부러지지 않을 가능성도 제법
컸고 그 사고로 나까지 큰 부상을 당할 가능성도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동료가 사망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기억상실증이나 반신불수 정도의 결과만 나와도 좋겠다고 빌었다. 하지만 사고 직후, 다행히도 그 동료는 “fucking asshole”이라는 유언을 나에게 남기고 현장에서 사망했고
나는 지긋지긋한 몇차례의 경찰조사와 보험회사 면담을 겪고 시카고를 떠나 여기 워싱턴 DC로 이사 한 것이었다.
나의 이런 과거를 그녀가 알아차렸을
가능성은 극히 적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알았더라도 나는 나의 과거를 당당하게 그녀에게 납득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를 협박한 동료를 처리한 일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나의 아버지를 자살로 몬 사기꾼을 살해한
일은 정당한 복수였다. 그 사기꾼이 울며불며 나에게 되지도 않는 영어로 목숨을 구걸하던 순간 나는 오히려
최대한 잔인해지자고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민 와서 같이 고생하는 동료의 돈을 사기치고 알량한 법을
근거로 배째라는 식으로 나왔던 그 철면피 같은 사기꾼 때문에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나서였다. 어린 시절 백인 아이를 죽인 후 겪은 오랫만의 살인이었기 때문인지, 나는 꽤나 흥분하며 지나치게
잔인하게 그를 처리했다. 중학교 때 같은 학교에 다녔던 백인 아이나 삼 사년 전 길거리에서 만났던 인도인을
죽였던 이유는 모두 그들이 나에게 퍼부은 인종적 모욕 때문이었다. 모두들 알다시피 인종적 증오범죄는 미국
법으로도 꽤나 무겁게 여겨지는 종류의 것이다. 나는 법질서를 위해 그 행위를 했다며 스스로 정당화 시켰다.
사체를 돼지사료로 쓴 것은 어린 시절 읽었던 매혹적인 ‘한니발’이라는 소설의 영향이었다.
네 번의 살인이 나를 지옥으로 데려간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내가 나를 변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지금 여러분께 떠벌이는 것 처럼
능숙하게 내 자신을 합리화 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별 상관 없다. 다만, 나는 왜 내가 살아오면서 거의 유일하게 사랑했던 그녀가 나를 살해했는 지 알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의식은 얕아지고 모든것이 평안해진다. 일단 여기까지
주절이자. 안녕, 여러분. 사랑하는
벗들이여. 태어나는 것 만큼 죽는 것도 부질없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엄마, 아빠.. 연서야.. 사랑해.
나는 그의 끊어진 숨소리를 확인했다.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고 말았다. 바닥에 미리 깔아두었던 플라스틱 탓에 그의 몸에서
퍼지는 검고 붉은 피는 부엌의 바닥
타일에 스며들지 못했다. 갑자기 눈물이 나려 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은 저지른 거지?” 내가 그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쩌면 단순했다. 내 몸에 들러붙은 원귀들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무당으로 꽤 유명했던 내가 어학연수를 한다는
핑계로 미국으로 오게 된 것은 어쩌면 오늘 일 때문이었을 지도 몰랐다.
나와 십오년을 함께 하며 내 몸에
기생하고 있었던 몸신들은 인천공항을 떠나서 태평양을 지날 때 쯤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내 몸은 불덩이처럼
끓어 올랐다가 식기를 반복됐고 비처럼 쏟아지는 식은땀과 오한은 기내방송을 통해 불려서 나를 진찰했던 의사에게 전염병일지도 모른다는 오진을 하도록
만들었다. 귀신은 큰 물을 건널 수 없다는 흰소리는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행기에서 정신을 잃은 후 미국의 어느 병원에서 깨어난 내 몸에서 15년 간 붙어 있었던 몸신들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나를 그동안 먹고살도록 도와주었던 그들에게 일말 미안한 마음은 없지 않았지만 귀신이
떨어져 나간 몸은 지나치게 상쾌했고 미치도록 행복했다. 여러가지 검사를 통해 내 몸에서 아무런 병원균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예정대로 나는 미국에 체류할 수 있게 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커뮤니티 칼리지에 등록해서 영어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
언니. 고마워.
한국에서 내 일을 돌봐주었던 언니는 나와 함께했던 몸신들이 미국으로 가는동안 떨어졌다는 소식에 허탈해했다. 언니는 내게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했다. 노한 신들이 내가 인천으로 돌아오는
순간 내 몸을 산산조각 낼 지도 모른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용한 무당으로 꽤 많은 돈을 벌었던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한 이유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중병을 앓고 있던 그를 사랑한 순간 모든것이 잘못되기 시작했다.
신통력은 점차 사라져갔고 실수 투성이에 하는 일 마다 풀리지 않았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나보다 내가 사랑하게 된 남자를 욕하기 시작했고 결국 시든 꽃처럼 사그라진 그를 떠나 보내고 나는 내가 하던 일을 그만 둘 때가 되었다고 느끼게
된 거였다. 나는 우연히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같은 거대한 첨탑이 얕으막한 신전처럼 생긴 박물관들과 어울러진
워싱턴 DC 중심부가 찍혀있는 엽서를 보았고 그 곳으로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의 도피성 유학은 시작 되었다.
영어는 쉽지 않았다.
오히려 영어 연수를 하러 온 한국 아이들 틈에 끼게 되면서 한국에서는 접해보지 못했던 한국식 젊은 문화를 체험하게 되어
버렸다. 그들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그들과 함께 노래방에 놀러 갔다. 인터넷을 통해 자동으로 노래방 기계에는 한국과
같은 실시간으로 최신곡들이 자동으로 다운로드 된다고 한다. 인터넷 따위 잘 모르면 어떠냐고 생각하던 나였다.
노래 가사보다는 불교경전이나 주문 같은 것에 더욱 빠져 있었던 어렸을 때가 생각나서 피식 웃음이 났다. 남들보다 조금 민감한 감각 때문에 지난 서너시간 쌓인 고기며 맥주 냄새가 거슬렸다. 나는 같은
수업을 받는 지연이가 생뚱맞게 영어노래랍시며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를 부르는 틈을 타서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물을 틀어 간단히 얼굴을 씻고 입을 행궜다. 비누는 없었지만 조금은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화장실 문을 열었다. 길고 어둡고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조명탓에 약간은 몽환적인 복도에
검은 그림자가 줄을 지어 서 있었다. 하나는 온몸이 조각난 한국 아저씨, 목에 졸린 자국이 있는 백인 아이, 머리에 총을 맞은 인도 남자, 그리고 목이 꺾여 부러져 있는 백인 남자. 그렇게 넷이었다. 그들은 길고 어두운 통로에서 일렬로 늘어 선 채로 나를 바라 보았다. 그들의 시선을 피하려
나는 고개를 숙였다. 형체가 없는 그들의 영혼을 뚫으며 복도를 걸어오는 한 남자를 보았다. 내가 한국에서 떠내 보냈던 그 병약한 남자와 많이 닮아 있었다. 나는 어깨를 한쪽으로 비키며
그에게 통로를 양보했다. 하지만 그와 살짝 닿은 순간 내 몸이 열려버렸다. 원혼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게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고 말았다.
그들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들을 죽인 그 남자에 관한 이야기, 그들이 살면서 본 것들,
먹은 것들, 먹고싶은 것들 따위. 식욕과 성욕에
굶주린 그 귀신들은 살해당해 온전히 묻히지 못한 탓에 구천을 헤매고 있었다. 생각과는 달리 미국의 귀신들과
한국의 귀신들은 별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니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언니는 잡귀들을 제거하는 주술들을
잔뜩 넣은 파일들을 보내주었다. 별반 소용은 없었다. 공부는 할 수
조차 없을 만큼 두통은 여러날 계속 되었고 무엇을 먹던지 토해내는 생활이 반복 되었다.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나고 운명처럼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무료 영어과외라고 찾아 간 자리에서 나는 그를 재회했고 그가 나를
특별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그를 만나게 된 후 잡귀들은 무언가 모의를 하는 것 처럼
잠잠해 졌다. 나도 그를 만나며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를 만나면
한동안 두통이 잠잠해 졌고 그와 함께 잠자리를 가지면 잡귀들이 온갖 기운을 나에게 가져다 주었다. 언젠가
잡귀들은 그를 파멸시키려 들 것이었다. 어느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몸을 이용해 그를 해하려 들 지
몰랐다. 나는 점점 무서워졌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버렸고 어느새
그는 나와 결혼을 꿈꾸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나를 데리고 워싱턴
DC를 구경시켜 주었다. 무당이었던 나는 거대한 남근을 닮은 워싱턴
모뉴먼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 탑이 서있는 언덕에는 한여름에도 싸늘하다싶은 바람이 줄기차게 불어오고
있었다. 거대한 양기 주변에 모이는 음기라고 나는 생각했다. 미국의
수도에 있는 죠지 워싱턴을 위한 기념탑을 왜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따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태양신 아몬의 아들로써 그 아버지 아몬 레에게 헌정하는 봉헌물에는 항상 여자를 상징하는 거대한 문이 함께 조성된다. 풍수지리를 공부했던 나는 그 여자의 상징물이 정반대에 있는 국회 의사당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풍수지리가들이나 세계를 좌지우지한다는 음모론 속의 조직이나, 실제로 이곳을 설계한 미국 역사속의 건축가들이나
고대 이집트의 신관들이 일맥으로 상통하는 어떤 지혜를 공유하고 있었다. 내가 그런 상념에 젖어있는 동안에도
잡귀들은 여전히 내가 사랑하게 된 이 남자에게 복수 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우리는 그 거대한 워싱턴 DC의 오벨리스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는 사진속의 내가 우울해보인다고 놀렸다.
그러면서 내 볼을 꼬집던 그가 지금
여기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나는 잡귀들을 저주하며 내 목으로 칼을 가져갔다.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몸에서 빠진 핏물을 처리하고 시간을 들이며 그의 몸을
정성스레 닦고 집안을 청소했다. 주변 이웃 사람들이 모두 잠들었을 새벽 한 시 쯤 나는 그를 차 옆자리에
앉히고 운전대를 잡았다. 아침 햇살에 그의 눈이 부시지 않도록 썬글라스를 끼워 주었다. 그렇게 나는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아이오와의 교외에 있는 그의 어머니 댁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미국에 온 지 사십년이 됐다는 그의
어머니는 정갈한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그를 맞았다. 키우고 있는 하얀 색 푸들 두마리가 조금씩 부패하기 시작한
그의 몸을 냄새 맡고는 주인 곁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그의 아들이 세번 째 살인을 한 후로 처음으로 자신에게
모든 것을 고백했었다고 말했다. 6.25때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자기 아버지의 업보가 아들에게 물려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나를 죽여도 좋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헛웃음을 지으며 오히려 아들이 결혼한다고 전화 했을 때 언젠가 당신을 죽이게 될까봐 무서웠다며 마루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았다. 아들이 경찰에 잡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조심스럽게 되뇌었다. 오래된 집은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였다.
이웃 집이라 해봤자 자동차로 오 분 정도 달려서야 나타나는 한적한 시골이었지만 주변을 의식한 우리는 해가 지고 어두워
져서야 뒷마당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깊고 넓직하게, 땅속으로 향한
오벨리스크를 완성하고 우리는 그의 시체를 묻었다.
흙으로 파묻은 그 자리는 감쪽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가 어릴 때 썼다던
방에서 열시간이 넘도록 깨지 않고 편안한 잠을 잤다. 그의 유령은 나를 찾지 않았다. 그가 나를 미워하기 바랬다. 내 몸에 붙었던 잡귀들은 정화되지 않고 악귀가 되어서 어딘가로
떠나가 버렸다. 나는 그 잡귀들에게 지고 말았다. 내가 왜 그 하찮은
잡귀들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야 했는지 억울해 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항상 자신을 공리주의자라고 말했다.
모두의 편향된 행복을 위해 소수는, 어쩔 수 없이 억울해져야 하는 것이었다.
회사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그를
수소문 할 것이었다.
행방이 묘연해진 이웃이 자랑하던 약혼녀를
그들은 의심 할 지도 모른다.
워싱턴 디씨에서 아이오와까지의 긴
여정동안 사체를 옆자리에 태웠던 내가 누군가의 카메라에, 혹은 무인 단속기에 기록되어 있을 가능성은 심각하게
컸다.
지금 그의 어머니가 내가 잠든 방을
향해,
커다란 부엌칼을 들고 잠든 내 숨결을
따라,
한 발, 한 발 다가오고 있을 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도 묘하게 그에게 전도받은
공리주의자일 지도 모른다.
혹은, 왜 나는 지금 여기서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꿔가며 잠들어
있는 것일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