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워싱턴문학신인문학상 수필 부문 수상작]
*가작 : 그래도 펭귄은 날고 싶다! (이규성) *장려상: 나는 구닥다리다 (유명숙)
그래도 펭귄은 날고싶다!
-이 규성 (李 揆成)-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엄부자모(嚴父慈母)를 당연한 것으로 알고 그런 가정분위기 속에서
살아왔다.
말 그대로 양친 중에서 아버지는 자녀들을 좀 엄하게 다스리고 어머니는 인자하게 달래주는 사람이 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요즈음처럼 부모의 역할이 바뀌어가고 있는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서 는 엄부(嚴父)가 아니라 대부분의 가정이 엄모(嚴母)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말은 바뀌더라도 서로 다른 쪽의 역할을 보완해 주면
좋을텐데 그게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요 즈음의 아버지들은 말썽 부리는 아이들을 볼 때 마다 소리친다.
너 엄마한테 일러 줄 거야!”
과거에는 어디에서든지 아버지는 엄했고 어머니는 상대적으로 자애로웠다. 이러한 부모의 역할이 핵가족 시대로 접어들면서 엄모자부(嚴母慈父)로 변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세상이 변하고 그 변화의 여파 속에서 여권이 신장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증가하면서 남성들의 자 리가 좁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거에는 금녀의
지역이라고 여겼던 공군의 전투기 조종사까지 여성들이 찾이하고 나서는 시대이니 이제 남성이라는 우월한 자리에서 군림하던 시대는 가고 양성 평등 사회로
접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여성중심의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가정과 사회문화의 변화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소의 조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어떤 사람을 가족이라고 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모(83.4%), 외삼촌 (81.9%)이
고모나 삼촌 보다 많다는 사실과 함께 토요일, 일요일이면 며느리들이 시댁이 아니라 친정 집으로 가는 확률이
높다는 현실상황은 이 사회가 서서히 모계사회로 변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인 통계자료는 없지만
필자의 경험으로도 지금 미국을 방문 하시는 어른들의 대부분은 딸이 초청해서 오시는 분들이 많고 또 이민 온 사람들의 경우 시댁식구들 보다는 친정식구들을
초청해 오는 경우가 더 많은 현실은 이러한 변화의 조짐을 뒷받침 해주는 근거가 아닌가 생각된다. 딸을 둔
사람은 비행기 타고 아들 둔 사람은 버스타고 다닌다는 웃으갯 소리가 과히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예전 우리 사회에 회자(膾炙)되던 군사부 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있다.
이때의 아버지(父)는 임금과 함께 귀한 존재로
대접을 받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師影不可踏)”는 말도 있는데 이때 스승은 대개 남자가 대부분이어서 스승님 하면
으례 남자 선생님을 떠 올리게 되어 그 권위와 위상을 짐작케 한다. 그 외에도 남자들의 위상이나 그 권위를
의미하는 글이 나 말들은 수 없이 많아서 우리 나라에서 한 때는 남성들이 한창 위세를 떨치던 시절도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이제 세월은 흐르고 또 바뀌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탓인지 나라에서는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사람들이 대통령에게 막말을 해 대고 학교에서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선생님을 두들겨
패기도 하고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학교붕괴와 함께 스승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지경에 이른 세상이 되었다.
이제 그 좋았던 남자들의 세상은 가고 새로운 분위기인 여성시대가 우리 앞에 거창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제 남자들끼리“우리 집에서 한잔 합시다”라는 약속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내의 입에 서“잘들 해 보셔!”라는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남아일언중천금 (男兒一言重 千金) 이라던 그 남 자들의 약속은 모시바지에서 방귀 새듯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 하기 위해 직장 생활을 하던 지난 수십년간 일식(一食) 님과 이식(二食)씨로 대접 받으면서 별 탈없이 사이좋 게 살아왔었는데 어느 날 정년퇴직을 하고 하루 세끼
밥을 집에서 먹으면서 부터“삼식이 xx”가 되어 버린 남편은 이제 노숙자
처럼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한끼를 해결해야만 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어질고 부드러운 어머니 보다는 더 강한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전사(戰士) 같은 어머니 를 갖게 되었고 남자들은 옷 매무세를 단정히 하고 에티켓과 요리를 배워야
하는 신(新) 아마조네스 의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남자들은 항상“아내들”이 약속을 하면 아내의 치맛자락에“젖은 낙엽” 처럼 착 달라붙어서 그냥“쫄래 쫄래”
따라 가기만 하면 되는 세상이 되었다. 엊그제 한국보건사회 연구원 발표한 여론 조사결과에서도
여성의 71.8%가“늙은 남편을 부담스러워한다”지 않던가?
그래도 남편들은
“엄부자모(嚴父慈母)”란 “자신에게 엄하고 자식을 꾸중하려면 먼저 자신을 돌아 보라는 말”이라고 억지 해석을 하면서까지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애를 쓴다. 물론 그런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나 아내의 기분에 따라 집안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며 남편은 의무와 책임은 있으나 권리 는 없는 존재가 된 이 마당에 아버지로서의 가부장적 권위를 잃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노력을 해 보 기는
하지만 그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날고 싶은 펭귄이 눈물겹게 날개짓을 해 보지 만 그 두발은
땅에 붙어서 영 떨어질줄 모르는 것처럼………..
그래도 이
시대의 펭귄은 땅 바닥에서 먼지만 일으키는 힘 없는 날개짓을 할 지언정“ 아!,옛날 이여!”를 외치면서 저 하늘을 향해 높이 날고 싶은 꿈만은 아직도 접지 않고 가슴에 끌어안고
있다.
---------------------------------------------------------------------------------
난 구닥다리다
-유명숙-
겨울이 오고 있다. 한 해의 끝자락이다. 잊혀졌던 얼굴들이 그리움에
묻혀 가슴에 스친다.무얼하며 살고 있노라고 묻고,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나누며 스산한 내 마음도 전하고 싶다. 나, 편지가 쓰고 싶다.문방구에 들러 몇시간을 뒤적여
곱고 예쁜 편지지와 형형색색의 펜들을 고르고 나면 무슨 큰일이나 끝낸것처럼 뿌듯하다. 내방 작은 전등이 켜진 책상에 앉아, 달빛과 별빛을 머리위에 두고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의
낮은 음악을 깔고 앉아, 설레는 마음으로 첫줄을 쓴다.
그리곤 읽는다. 글씨는 잘 써졌는지 첫 시작이 자연스러운지 다음에 써
나갈 내용에 걸 맞을지…. . 아니다, 너무 노골적인것 같기도 하고 생뚱맞기도 한것 같고… 버린다.
예쁘고 고운 편지지가 구겨져 버려진다.몇번이 버려진다. 한줄만 쓰여진것도 있고, 중간까지 쓰여진것도 있고, 어떤건 제법 한장을 다 채웠던것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버려졌다.다시 내 마음을 이쁘게,
꾸밈 없이, 온전히 전하고자 집중한다.색이 고운 종이위에 날랜 펜의 움직임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펜이 지나간 자리위로
귀엽고 앙징맞은 글씨들이 재잘대고 앉았다. 제법 가지런하다.한장이 메워지고 두장도 메워졌다가 세장도 메워져 간다. 어느 새 끝인사를 하고 나니
네장째다. 펜을 놓으니 가운데 손가락 위쪽 살이
움푹 들어가 있다. 약간 찌르르 하다.어떤 글들이 내 마음이 되어 펼쳐진걸까
중간에 한번도 점검치 못 한 것이 불안하다.한번 읽기로 한다.
애정이 담긴 호칭에서 부터 살가운 첫인사,
고마웠던 순간들, 좋은 점들, 닮고 싶은 것들이 한번도 얘기한적 없었다는 핑계를 달고 부끄럽게 쓰여있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노란 수줍은 고백도 있고 어쩌다 생긴 오해로 섭섭했던 순간들,
또는 그게 아니였노라 해명한 것들이 안타깝게 적혀있다. 그리곤 오늘같이
스산한 바람이 이는 날이면 내 마음을 누군가에게 살짝 들키고 싶다는 이유를 달고 그 누군가가 당신이라며
편지를 쓰게된 동기를 어줍게 밝힌채 끝난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닥 나쁘진 않은거 같다.
그 다음은 장식이다. 각양 각색의 펜들을
종류별로 색깔별로 나열하곤 하나 하나 빼들어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곳을 칠하고,
허전한 곳엔 서툴게 디자인한 기호와 선으로 메꾸어 보고, 캐릭터도 표정 살려 그려넣고
“화이팅” 이라고 대문짝 만하게 써 넣으면 끝이다.멀찍이서 한번 본다. 알록 달록
정신 없지만 그런데로 재미있다. 편지지를 한번 두번 정성껏
접는다. 꽤 두껍다. 봉투에 넣어 침을 묻혀 봉한다.오래 되어 손때 묻은 수첩을 펼치니
주소가 빼곡하다. 받을 사람의 주소를 적고 혹시 되돌아 올 지 모르니 내 주소도 정확히 적는다.화룡점정하듯 우표를 붙인다.끝이다.
어느새 몇 시간이 훌쩍 갔다. 책상위에 내일 부쳐질
편지봉투가 불룩하게 자리잡고 있는것을 보니 뿌듯하다. 편지는 아침에 바로 우체통에 넣는다. 조금 지체하다간 봉투를 뜯고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나고 정말 그랬다간 끝이다. 어찌나 유치하고 부끄러운지 도대체 보낼 수가 없다.
편지를 보내고 하루 하루가 갈수록 내 마음은 설렌다. 편지는 잘 도착했을까
?받아보고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 답장은 했을까 ?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설렘의 시간을 즐긴다. 우체통을 하루하루 확인하며
답장을 기다린다. 그래서 받아든 답장은 얼마나 달콤했던지…
지구 반대편으로도 수십, 수백통의 메일을 클릭 한번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보낼 수 있고, 문자로 매 순간을 서로의 상황을 생중계하듯 할 수도 있고
, 화상 전화에 ,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도 발달한 편리하고 빠른 이런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난 그 길고 오랜 설렘이 그립다.난 구닥다리다.곧 성탄절이다.마음을 전할 이들의 이름을
적는다. 인쇄되어 있는 인사말에 싸인만 해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길지 않아도 내 진심어린 글을 담아, 명필은 아니지만 내 개성이 묻어난 필체가 담긴, 작은 카드를 보내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