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시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안경을 새로 바꿨더니 일순간에 어스름이 걷히고꽃들이 제 빛깔을 내며 내게로
걸어온다
이상하다, 점점 심각해지는 노안인데 안경 하나로 어둠 속의 것들이 되레 또렷이 보이기 시작하다니이제야 개안(開眼)이
되는 것일까
창밖은 이미 캄캄한데 갑자기 먼지 낀 책상 위가 환해지며 꼭꼭 닫혀 있던 책들의 문이 열리고 경전 속 활자들이 횃불처럼
빛나는 시간, 나이 든다는 게 허무한 일만은 아닌가 보다 언뜻 한 점의 먼지가 된 내가 보이고 별들이 서로에 대한 그리움으로
반짝이는 밤, 캄캄한 허공을 뚫고나온 흰 팔 하나 지나가는 구름을 부지런히 걷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