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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지워지다
Author
mimi
Date
2015-10-06 04:14
Views
9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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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지워지다
마경덕
몸을 쪼개고 쪼개서 시간은 모래로 변했다
척추마저 물러진 시간들, 제 나이를 기억하고 있을까
모래시계의 좁은 통로를 빠져나온 모래알처럼
누군가 오늘의 등을 떠밀어 지금(只今)이 밀려가고
내일로 이어지는 지루한 행렬
아무도 저 행군을 막지 못하였으니,
시간은 비대하고 거대한 몸뚱이를 가졌을 것이다
년도나 날짜를 기록하는 것은 시간의 한 귀퉁이에 끼적거린
낙서에 불과한 것,
모두 지워지기 쉬워서, 흘러간 것들을 그리워한다
나는 왜, 한 번도 나를 뒤집지 않았을까
내게 간을 맞추느라 탕진한 시절은 팽나무 그넷줄처럼 삭았는데,
계절끼리 담합해서 차례를 바꾸고 몸값을 올릴 수도 있었는데,
봄은 꼬박꼬박 지루한 얼굴로 나타났다
한동안 몸 밖에 나를 세워두고 고장 난 시간을 수리하지 않았다
물새울음을 긁어모아 적금을 붓고
모래무덤을 헐어 시를 써야한다고, 왜
나를 조르지 않았을까
한 장 한 장 인화되어 풀려나오는 기억의 눈금들
생의 바늘에 찔려 무딘 심장은 꿈틀거리며 이어지고
무릎이 닳듯 시간도 닳아서,
나는 소모품이었다
할당된 시간이 돋보기를 들고 반쯤 지워진 나를 읽고 있다
[출처] 반쯤 지워지다 - 마경덕|작성자 웹진 시인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