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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Author
mimi
Date
2013-05-21 06:52
Views
13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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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배정웅
 
 

 

        어느 날 헌책방에서 표지가 새 책 같은

시집 한 권을 샀네

책갈피를 넘기자마자

맨 처음 미지의 세계를 열듯이 이 책을 펴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 하나

범행의 흔적처럼 손때와 지문과 체취 한 줌

깊이 남겨 놓았네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는

거품 부글거리는 잉크의 늪에서 수분을 길어 올려

시의 행간 사이사이 군데군데에

내가 본 협궤열차의 레일 같은 물뱀 꼬리 같은

좁고 긴 선도 그어 놓았네

내가 아는 서울의 한 여류시인은

시와 이별하기만 하면 자신의 불행은

끝이 날 것이라고 어렵게 어렵게 고백했는데

아마도 이 시집의 자궁을 열어

대담하게 언어의 처녀막을 건드리고 간 사람은

이제 막 불행을 맛보려고 했던지

아니면 오래 전부터 불행의 가시에

몸과 마음이 내내 찔려서

낭자한 피 같은 밑줄의 흔적을 이렇게 남겼으리

그런 그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전혀 알 길 없지만

차마 시와 결별하지 못해 고뇌와 슬픔이

하마 더 깊어진 나처럼

어쩌면 짧디짧은 생의 잠

밤이면 숲의 어둠을 쪼는 붉은가슴울새처럼

불면으로 뒤척이고 있을지도 모르네

 

* 송찬호 시인의 시 「만년필」에서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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