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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서/박현숙

Author
hyun*
Date
2010-10-01 12:45
Views
7512

 

텃밭에서

                                                                                                

- 박현숙 -

 

텃밭에 심은 채소들이 불과 며칠 사이로 그 빛나던 초록색을 잃고 있다.  햇빛 쨍쨍한 여름 동안 줄기 퍼렇게 내세우며 하루가 다르게 무성히 자라 오이와 고추, 토마토로 우리 집 식탁뿐만 아니라 식구들의 마음까지 풍성하게 하더니, 조석으로 서늘해진 가을 기운에 어느새 그 색이 현저히 바래지고 있다.   여름이 슬그머니 뒤 뜰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왠지 서운하고 무엇을 잃은 듯 가슴이 허전해짐을 금할 수가 없다.  어느새 가을인가. 

금년 봄에는 기어코 창고를 헐고 텃밭을 만들었다.  넓지도 않은 우리 집 뒤 뜰에는 장성한 떡갈 나무 두 그루가 터주대감같이 턱 자리를 잡아 뒤뜰 대부분에 짙은 그늘을 드리고 있다.  그나마 가장 햇볕이 잘 드는 곳에는 창고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그 자리를 눈 여겨 오다가 그예 창고를 헐은 것이다.  
편은 처음 하는 밭이라 제대로 밭을 가꿀지 걱정이 되는지 자꾸 밭 사이즈를 줄이고 나는 그 동안 벼르던 밭이라 욕심껏 크게 만들고
싶어 서로 싱갱이를 하다가 어느 정도 내 마음에 흡족한 크기에 합의를 한 후 가로 세로로 두껍고 긴 각목 여러 개를 겹쳐
직사각형의 반듯한 밭을 드디어 만들었다
.  마치 나만의 놀이터를 따로 가진 듯 마음이 설레고 기뻤다.  땅을 파니 붉고 딱딱한 점토질의 흙이라 검은 채소 흙과 부엽토, 모래를 사서 비율에 맞추어 골고루 섞어 흙을 부드럽게 하고, 부엌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는 따로 모아 매일 땅을 깊게 파고 묻었다.  이렇게 하면 땅에 거름도 되고 더하여 지구 환경보호에도 일조를 하는 것 같아 스스로 흐뭇하였다.  흙을 만질 때는 자연히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낮춰 땅에 가까운 자세가 되어야 제대로 일할 수 있다. 저절로 땅 앞에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일을 하다 보니 다른 일에도 나 자신을 곧추 세우기보다는 이러한 마음의 자세로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 늦게 흙 냄새에 흠뻑 취해 밭을 가꾸면서 이제껏 알지 못하던 또 다른 세계에 들어가니 머리가 개운해지고 덩달아 마음도 맑아지는 듯 하였다.  곧 주위 친지들에게 밭이 만들어졌음을 알리고 이름도 낯선 근대와 참나물 등 모종을 얻어와 밭에 부지런히 심고, 가게에 가서는 호박, 오이, 토마토는 물론 가지, 수박, 멜론 모종까지 사와 밭에 빼곡히 심었다.  작년에 이웃에게서 받은 옥수수 씨가 생각나 봉투에서 꺼내 심으며 과연 이 딱딱한 씨앗에서 옥수수가 싹을 틔울까 미심쩍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일시에 잘라내 듯 옥수수는 밤 새 비 온 어느 아침, 여리고 파란 줄기를 뾰족이 일 열로 내 세웠고 식구들의 탄성을 먹으며 구름에라도 닿을 듯 하루가 다르게 점점 더 그 키를 키웠다.  씨를 땅에 심으니 싹이 나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자연의 이치이건만, 처음으로 밭을 가꾸는 우리 식구에게는 텃밭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새롭고 충분히 감격스러웠다.  매일 아침 눈 뜨면 제일 먼저 뒤뜰로 나가 나풀거리는 채소 모종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퇴근하고 돌아오면 미처 옷을 갈아 입기도 전에 채소가 제대로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며 여름 한 낮의 더위에 잔뜩 갈증 나 있는 밭에 얼른 물 호스를 당겨 와 물을 주었다.  밭은 금방 그 물을 달게 쭉 들이마시고 생기를 되찾아 접힌 손을 펴듯 말려있던 채소 잎 가장자리를 활짝 펴 내 마음을 안도하게 하였다.  제일 먼저 오이가 노란 꽃을 수줍게 피우고, 곧 이어 그 보다 훨씬 작고 앙증스러운 고추 꽃이 하얗게 텃밭 한 쪽을 수 놓았다.  곧 이어 호박꽃이 질세라 납죽이 얼굴을 내밀고 이 꽃 저 꽃에 벌이 날라오기 시작하였다.  오이와 고추는 대견스레 열매를 맺어 아침마다 자랑스럽게 내어놓건만 왠지 호박 열매는 보이지 않았다.  누가 인공수정을 해주면 된다 하여 조그만 브러시를 찾아 꽃분을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기자니 공연히 마음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려 어느 꽃이 수꽃인지 암꽃인지 제대로 눈 여겨 보지도 못한 채 붓을 급히 여기저기 옮겼다.  그런데 어느 달빛 밝은 밤, 침실 유리창에서 밖을 내려다보니 토끼 두어 마리가 밭에서 오랫동안 있는 것이 보였다.  가만히 생각하니 범인은 귀여운 토끼였다.  호박이 조그맣게 열매를 맺은 걸 분명히 보았는데 다음 날 보면 가지 위에서 톡톡 목이 꺾이듯 짤라 지고 없었던 것이 생각났다. 이제 생각하니 동네 토끼가족이 밤마다 내 텃밭에 와 고 조그맣고 연한 호박을 야식하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어찌 알고 찾아 왔을까. 

소용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망을 밭 가장자리로 죽 돌렸고, 결국 호박은 토끼 가족에게 다 주고 하나도 수확하지 못한 채 여름이 지났다.  공들여 만든 밭에 가꾼 호박을 다 뺏기니 섭섭한 마음은 들었지만, 억울하거나 분한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은 다행히 첫 농사로 입안에서 아삭거리며 온 몸을 환하게 번지는 향기로운 오이와 싱싱한 풋고추, 그리고 정말 달콤한 토마토로 많이 행복했고, 상대가 너무 작고 예쁜 토끼이었기 때문이리라는 생각도 든다.  작은 짐승 앞에 어처구니없이 마음이 넓어지는 나를 보며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아무리 상대가 토끼였어도 만약 모든 결실을 다 빼앗겼다면 내 마음이 이렇게 여유로울까.  범인인 나는 내 수중에 무엇인가 있을 때에는 이것이 가능한 것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재물일 수도 명예일 수도 그리고 물론 자존심일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 옛 말에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하였던가.  무엇이든지 자신이 어느 정도는 갖고 있어야 남을 헤아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는 말 이기에, 결국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래도 상대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큰 사람임에 틀림없다.  마음이 여유로우면 한가위 추석 달이 아무리 크고 둥글다 해도 그 마음만 할까.  이지러져가는 달을 보며 이 어려운 때에 그대로 크고 둥글게 남아 주위를 환하게 비춰줄 마음이 그리운 건 비단 나 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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