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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스페이스'/2012경남신문신춘문예 소설당선작

Author
mimi
Date
2012-01-18 16:17
Views
7211

   박승룡화백님의_나비의_날개짓.jpg



                    프리스페이스                      


 

여자는 언제나 빙고 중이었다. 다이어리 속에는 월별 혹은 주간 계획의 메모지 대신 5×5의 표로 만들어진 빙고판이 끼워져 있었다.
거기에는 튀김덮밥 같은 점심 메뉴부터 누군가의 장례식까지, 여자가 하루 동안 해야 할 일들로 채워져 있었다. 장례식은 아주 드물게
일어났으므로 여자에게 특별한 일이란 머리 모양을 바꾸거나 내시경 검사를 받는 일 정도였다. 여자의 스물네 시간은 스물네 칸을
채우기에는 무섭도록 단조로웠다. 장보기 목록을 풀어쓰기도 하고 양치질을 양치질 1, 2, 3으로 늘어놓기도 했다. 빙고판의
항목들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어제나, 일 년 전이나 엇비슷했다. 여자는 빙고를 통해 자신의 일 년이 웨이브와 스트레이트의 반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머리카락을 말고, 펴는 일을 서너 번 반복하면 어느새 새해였다.
 


여자는 하루 동안 완성한 다섯 줄 빙고를 확인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매끼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아버지와는 분명히 다르게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이든 도무지 매듭을 짓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불면증이 있었지만 빙고를 완성한 날은 다른 날보다는 수월하게
잠이 들었다. 양의 숫자를 세듯 내일 해야 할 일들을 꼽아보았다. 입원한 최를 대신해 상담을 해야 하고, 퇴근 후에는 최의
병문안을 가야 한다. 여자는 ‘상담’과 ‘병문안’을 몇 번째 칸에 써넣어야 할지 고심했다. 일의 중요도에 따라서 적절한 칸에
배치해야만 빙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여자는 일의 순서를 결정할 때마다 가능하면 빙고를 완성시킬 수 있는 일부터 처리하곤 했다.
빙고를 완성하는 것은 여자가 하루를 매듭짓는 방법이었다. 


빙고판의 가로 세 번째, 세로 네 번째 칸에는 ‘상담’이라고 써져 있었다. 마침 교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시간은 일주일에 한
번뿐이었다. 최가 아니라면 여자는 지금쯤 커피를 마시며 실시간 검색어를 확인하고 있었을 것이다. 최는 이틀 전 퇴근길에 뺑소니
사고를 당했고, 사회과 과장은 최의 상담을 여자에게 맡겼다. 과장은 사회과의 선생이 자신과 여자 그리고 최가 다인 것을 강조하며,
가족 같은 우리가, 그러니까 여자가 최의 업무를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과장은 ‘가족처럼’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왜 집에
있는 가족을 두고 일터에서까지 가족처럼 지내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자는 일자리를 구하거나 방을 구할 때마다 ‘가족처럼
지내요’라는 문구가 있는 곳은 되도록 피했다. 부탁해요, 가족이잖아요. 용서해요, 가족이잖아요. 이해해요, 가족이잖아요.
얘기해요, 가족이잖아요. 그냥 해요, 가족이잖아요. 가족은 가족 그 자체로 이유가 되었다. 여자는 그런 가족이 친구들 사이에도
동료들 사이에도 하다못해 동호인들 사이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무서워졌다. 가족은 하나쯤 있어도 나쁘지 않겠지만 없어도
좋았다. 


여자는 자신의 일상을 번거롭게 만든 사고에 짜증이 났고, 평소에 일을 느긋하게 하는 최의 행동이 다시금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최가
여자처럼 상담을 서둘렀더라면 뺑소니사고를 당하기 전에 상담을 마쳤을 것이고, 여자가 최의 상담을 떠맡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늘
‘커피 한 잔의 여유를’ 하며 떠들던 최로 인해 여자는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잃어버렸다. 최의 책상은 여자의 마음처럼 어지러웠다.
시험지와 파일들이 널려 있었고 씻지 않은 머그잔에는 최의 립스틱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책꽂이를 뒤져 학생기록부를
찾아냈다. 최가 남겨 놓은 학부모들은 모두 특별 관리 대상자들이었다. 상담실장의 말을 빌리자면 불만고객들이었다. 실장은 한때
서비스강사였고, 고객과 서비스라는 말을 좋아했다. 여자는 불만고객들을 응대하기 전에 그들의 불만을 살펴보기 위해 학생기록부를
펼쳤다. 학원에 보낸 후 성적이 떨어졌다고 주장하는 Y의 부모, 막무가내로 개인 보충수업을 요구하는 J의 부모, 석 달째 학원비가
밀려 있는 상태에서 학원을 그만두겠다는 P의 부모. 실장은 늘 진정성을 가지고 고객들을 대하라고 말했지만, 여자에게 진정성은
학부모들에게 그들이 맡긴 물건의 하자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여자는 Y가 수업시간에 욕을 하고, 수업과 관계없는 질문을
하고, 수업 중에 문자를 하고, 지각을 밥 먹듯이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Y의 티끌 같은 장점들을 끌어 모아야 했다. 애는
착한데로 시작해 이해력은 좋지만 산만합니다로 본론을 환기시키고, 노력만 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아이입니다로 마무리했다. 호의는
언제나 적당한 허위를 포함하고 있었다. 여자는 J의 부모에게도 같은 말을 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아이들이란 다 비슷했다.


“선생님, 신입생 상담이요.” 

서무과의 김이었다. 여자는 빙고를 완성하기는 다 틀렸다고 생각하다 학부모 상담이나 신입생 상담이나 결국 다 같은 ‘상담’이 아닌가
하며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입 상담 매뉴얼과 교무수첩을 챙겨 일어섰다. 머리에서 피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의사는 기립성 빈혈이라고 말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3차 성징이 일어난 것처럼 자신의 여성성이 좀 더 깊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남자 선생들 중에도 서너 명이 여자처럼 기립성 빈혈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가 상담실로 들어서자, 광고전단지를 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새로 제작한 광고 속에서 선생들은 검은 정장을 입고 팔짱을
낀 채 꼭짓점 대열로 서 있었다. 맨 끝에 서 있는 사람이 여자였다. 원장은 가장 유능해 보이는 자세라고 우겼지만 학생들은
선생들의 얼굴에 선글라스를 그리며 무능하고 얼빠진 삼류 요원들처럼 보인다고 킥킥거렸다. 남자가 사진과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선글라스가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자주색 정장을 입었고, 머리는 올려 묶었다. 원장이 만든 이미지메이킹 매뉴얼에는
교육담당자로 보이기 위한 복장, 헤어, 메이크업, 자세, 표정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자주색 정장과 올림머리는 정답에
가까운 차림새였다. 원장은 신생학원의 의지를 각종 매뉴얼로 만들어 냈다. 선생들은 이러다가 숨 쉬는 것까지 매뉴얼대로 쉬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는 몇 학년인가요?”

“중학생이에요, 중학교 1학년.”

남자는 중학생 아이를 둔 것치고는 젊은 얼굴이었고, 어딘가 낯익은 얼굴 같기도 했다. 여자는 굳이 기억해내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아는 사이라 하더라도 남자가 여자를 기억해내지 못했으면 했다. 여자는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내는 일이 거북했다. 많이
변했다는 말도, 그대로라는 말도 결국 과거를 기준으로 삼은 인사였기에 어느 쪽도 편치 않았다. 


중학교 일학년 커리큘럼이 보이지 않았다. 파일을 몇 번이나 들추어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다급해진 손끝에 밀려난 교무수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첩 사이에 끼워두었던 출석부와 빙고판이 남자의 발께로 흩어졌다. 

“빙고네요. 어릴 때 참 많이 했었는데.” 

‘빙고’라고 발음하는 남자의 입모양을 본 여자는 그가 누구를 닮았는지 기억해 냈다. 여자가 좋아하던 모배우였다. ‘아무개’의 모가
아닌 성이 ‘모’인 남자배우였다. 모배우는 ‘바다 이야기’라는 드라마로 데뷔했고, 주인공 친구의 친구 역할이었다. 주인공과 그
친구의 말에 ‘빙고’를 연발하는 가벼운 캐릭터였다. 모배우는 배우답지 않은 평범한 얼굴로 마트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심지어 여자
화장실에서도 본 듯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 평범하게 생긴 탓에 주인공의 친구가 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지만
평범한 얼굴 때문인지 일상 연기를 가장 잘하는 배우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모배우가 연기하는 역할은 극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처럼 느껴지곤 했다. 며칠 전, 과거에 활동했던 연예인들의 근황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모배우를 다시 보았다. 은퇴랄 것도
없이 브라운관에서 사라졌던 모배우는 P시에서 어머니와 함께 족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짧았던 연기생활보다는 실패를 거듭한 사업
이야기를 주로 하며 시청자들을 향해 ‘파이팅’을 외쳤다.


“학습용 빙고예요.”

여자는 수업시간이 끝나기 십분 전, 아이들과 빙고를 했다. 주로 소단원을 마무리할 때, 아이들이 졸고 있을 때, 그리고 여자가 졸릴 때였다. 아이들이 여자의 수업을 나쁘지 않게 평가하는 것은 빙고 때문이기도 했다. 

“비스트, 빅뱅, 카라, 슈퍼쥬니어…… 이것도 학습용인가 보죠.”

어디서든, 한류(韓流) 열풍이었다. 여자의 머릿속에도 한류(寒流)가 일어났다. 한류(寒流)는 다행히 지중해를 만났다. 여자는
남부유럽의 특징과 관련된 빙고판을 찾아내 남자에게 보여주었다. 지중해성 기후, 알프스 산맥, 반도, 올리브, 나폴리……. 


남자는 보통의 아버지답지 않게 꼼꼼하게 질문했다. 시험 기간의 보충 수업이나 야간 자율 학습 등에 대해서도 물었고, 나가는 길에 독서실까지 둘러본 후에야 돌아갔다. 

“저 사람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김은 선생들의 머리나 의상에 대해 참견이 많은 만큼 눈썰미는 좋은 사람이었다. 

“평범한 얼굴이잖아요.” 

“그런가…… 참, 선생님 저 오늘 병문안 못 갈 것 같아요. 실은 오늘 소개팅이 있거든요. 제가 벌써 두 번이나 약속을 펑크 내서
이번에도 못 나가면 정말 끝이에요.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학원 생활하면서 소개팅 시간 맞추기 어려운 거. 퇴근시간에 맞춰 나가도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은데 과일이랑 음료수까지 사다 놓고 가면 완전히 늦을 거예요.” 


“과일이랑 음료수는 내가 준비할 테니까, 걱정 말고 소개팅 잘해요.” 

여자도 학원 생활을 하는 동안 몇 번의 소개팅을 했다. 그리고 그중 두 명의 남자와 사귀었다. K와 L. K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다. 학원 일로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만나지 못하는 날이 많아도 늘 이해해주었다. 그런 K가 처음으로 불같이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직장 동료와 몰래 데이트를 즐기다 여자에게 들킨 날이었다. ‘너랑은 시간이 잘 안 맞잖아. 나도 질렸어. 이제
그만하자.’ 할 말을 잃은 여자 앞에서 할 말을 다한 K는 직장 동료와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L은 유도선수였다. 그는 굳히기에
들어가면 언제나 십자조르기 기술을 사용했다. 국가대표 선발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선수생활은 끝이 났지만 십자조르기 기술은
계속되었다. L은 술자리에서도 침대에서도 십자조르기 기술을 사용했다. 여자는 그저 체위의 하나로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L과
헤어졌다. 우습게도 L의 이별 이유는 여자 때문에 숨이 막힌다는 것이었다. 


다른 선생들보다 서둘러 나왔지만 시간은 벌써 열 시가 훨씬 지나 있었다. 두 번째 과일 가게 역시 간판이 꺼져 있었다. 과일
가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상가가 문을 닫은 상태였다. 보통 직장인들의 라이프 사이클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었다. 여자는
살아오면서 쓸쓸함과 불편함이 크게 다르지 않은 감정임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감정에 너무 많은 언어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감정은 좋고, 싫음 두 가지뿐인데 말이다. 마트는 아직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마트에서는 불빛조차 친절했다. 여자는 퇴근
후면 자주 마트를 찾았다. 마트는 늦은 밤 산책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다. 도시 어디에서나 찾아가기 쉬웠고, 안전했고, 무엇보다
지루하지 않았다. 여자는 음료수 세트를 계산한 후 보관함이 있는 후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거스름돈으로 받은 백 원짜리 동전 세
개를 10번, 39번, 97번 보관함에 차례대로 집어넣고, 문을 잠근 뒤 열쇠는 가방에 챙겨 넣었다. 두 걸음쯤 뒤로 물러나
보관함을 쳐다보며 줄을 헤아렸다. 하나, 둘, 셋. 앞으로 두 줄이면 빙고가 완성되었다. 여자가 다시 열쇠를 가져다 놓을 때까지
직원들이 알아채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마트의 보관함 관리는 ‘경고문’과는 달리 허술한 편이었다. 


최는 원장과 실장 그리고 과장에게 차례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자신의 상담과 수업을 도맡아하고 있는 여자에게는 고맙다는 말은커녕
왔냐는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여자를 불쾌하게 만든 건 생각보다 멀쩡한 최의 상태였다. 여자는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를 좋아하진 않지만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매달 이만 원씩 기부를 했고, 동물을 싫어하지만 방송에서 학대당하는
동물을 보면 눈물을 흘렸다. 최가 사지 중 하나라도 부러져 누워 있었더라면 여자는 최의 수업을 기꺼운 마음으로 했을 것이다.
병원을 나오면서 원장은 여자에게 며칠만 더 수고해 달라고 말했고, 가족 같은 사이에 당연한 일이라며 과장이 끼어들었다. 병원
밖에서 가장 밝은 곳은 장례식장 앞이었다. 선생들은 문상객이라도 된 듯 무리 지어 서서는 누구도 먼저 자리를 뜨지 못했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집에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죽이는 일이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몸의 운동성을 최대한 죽여야 했다. 물소리를
죽이고, TV 볼륨을 죽이다, 숨소리를 죽여 가며 이부자리에 들어가는 것. 그래서 학원 선생들은 종종 외로웠고 자주 술을 마셨다.
그런데 먼저 회식을 하자고 말한 것은 엉뚱하게도 원장이었다. 원장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학원 근처의 식육식당으로 전화를
걸었다. 공포영화를 보고 혼자서는 잘 수 없다며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선생들을 잡아끌었다. 


식당의 일층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났다.
주인여자는 주방 앞에 놓인 탁자에서 파무침을 만들고 있었다. 회식은 물론이고 학원 선생들은 점심이나 저녁까지 이곳에서 해결할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주인여자는 같은 탁자에서 채소를 손질하거나 찌개용 돼지고기를 썰고 있었다. 원장이 ‘제수씨’하고 부르자
주인여자는 ‘예’하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십여 분이 흐른 뒤, 주인여자의 남편이 고기를 썰어가지고 올라왔다. 불이 꺼져 있던
일층은 정육점이었다. 부부는 학원사람들이 올 때마다 육질이 좋은 고기를 내놓았고, 밑반찬에도 신경을 썼다. 특히 남자 선생들은
조미료 맛에 질렸다며, 늘 부부의 식당을 이용했다. 식당에는 모양이 제각각인 탁자가 열 개쯤 있었고, 탁자마다 그림체가 다른
화투패들이 붙어 있었다. 원장은 언제나 비광이 붙어 있는 탁자에 앉았고, 여자는 늘 그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선생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최가 당한 뺑소니 사고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최는 퇴근길에 학원 앞 건널목에서 사고를 당했지만
사고현장에서는 아무런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최 역시 흰색 승용차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최의 사고 이야기는
이미 최라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고, 최의 뒷담화에 가장 신이 난 사람은 가족 같은 부장이었다. 


원장은 뺑소니 현장의 증거를 수집하듯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뺑소니 사고와 학원의 경영난이 가진 연관 고리를 파헤치고
있었다. 그는 뺑소니 사고를 인간의 부도덕이 아닌 신의 부주의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학원의 터가 세다는 것은 여자가 출근을 한
첫날부터 줄곧 들어왔던 이야기였다. 선생들은 전에 있던 학원들이 줄줄이 망해나간 것도, 학원 뒷마당에서 어떤 사내가 목을 맨 것도
모두 학원의 터가 센 탓이라고 여겼다. 여자의 생각은 달랐다. 터가 센 것이 원인이라면 온 도시의 터가 센 셈이었다. 사람들은
장기불황으로 일어나는 문제들을 터가 센 탓으로 돌리고 싶어 했다. 오히려 그 편이 해결 가능한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장기불황 앞에서는 사람들은 한없이 무기력해졌다. 이년 전에 자살한 여자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새벽녘 참을 수 없는 요의가 느껴지던 날이었다. 여자는 코끝에 맴도는 냉기를 느끼며 몸을 뒤척였지만 결국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부자리에서 빠져나오자 웅크리고 있던 한기가 여자의 몸을 덮쳤다. 요의를 느끼며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 아버지가 목을 맨 채로
늘어져 있었다. 가랑이 사이로 찬바람이 지나자, 여자는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매듭 한번 제대로 묶었네.”


웃의 연락을 받고 출동한 119대원들이 수건걸이 쪽의 매듭에 가위질을 하며 말했다. 아버지 생애에 단 한 번 제대로 지어진
매듭이었다. 아무리 용을 쓰고 살아도 일의 매듭들은 언제나 제멋대로 풀려버렸다. 아버지는 학교도 다 마치지 못했고, 직장에서도
떠밀려 나왔고, 결국 결혼 생활도 끝이 나 버렸다.


여자는 불판의 열기와 사람들의 불콰해진 얼굴, 기름 섞인 눅눅한 공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선생들은 소문과 과장을 황금비율로 섞어
신나게 흔들었다. 이야기가 회오리쳤다. 원장은 폭탄주를 마신 듯 나가떨어져 있었다. 선생들은 남의 이야기라 신나게 떠들었지만
떠들수록 자신의 이야기 같았고, 그럴 때면 밤길을 혼자 걷는 사람처럼 중얼중얼했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눅진한 공기
사이로 사박사박 눈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여자가 무채를 썰고 있었다. 칼이 무를 스치며 도마에 닿을 때마다 새하얀 무채가
수북이 쌓여갔다. 여자는 그 무채 속에 손을 담그고 싶었다. 


‘선생님 덕분에 소개팅 잘 했어요. 제가 밥 한 번 살게요. 참, 그리고 아까 그 사람 누군지 기억났어요.’ 

김의 문자였다. 여자는 답장은 보내지 않은 채,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회식 탓인지 선생들은 대개 푸석한 얼굴로 출근을 했다. 마지막까지 자리에 남아 있었다던 초등부 막내 선생은 민낯을 하고 있었다.
남자 선생들이 막내 선생의 화장기 없는 얼굴을 놀려댈 때마다 공기 중에는 알코올 냄새가 무겁게 떠다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여자는 다이어리를 들여다보며 오늘 해야 할 일을 확인했다. 어제는 결국 빙고를 완성하지 못했다. 빙고판은
대부분 장보기 목록들로 채워져 있었다. 학원 안에서 생기 있게 움직이는 사람은 서무과의 김뿐이었다. 김은 몇 번씩이나 교무실을
들락날락거리며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선생님, 지금 바쁘세요?”

“네, 조금요.”

김이 몹시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개팅에 대한 김의 수다를 듣고 싶지 않아 핑계를 댔지만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은 없었다.
여자는 빙고 파일을 클릭했다. 최근 들어 빙고판이 작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르네상스의 시기를 거친 아이들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나 ‘바르톨로뮤 디아스’ 같은 것으로 칸을 채우기 시작했다. 서양 근대 사회의 발전과 변화와 함께 빙고도 발전하고 변화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빙고를 통해 점점 많은 말들을 하고 싶어 했다. 수업 시간이 끝나기 십 분 전에 시작된 빙고는 종종 쉬는
시간까지 이어졌다. 아이들은 점점 신중해졌고 스물네 칸을 채우는 시간도 더디어졌다. 사람들은 빙고의 결과가 순전히 운에 달려
있다고 믿지만 아이들에게는 운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빙고는 가로 세로 다섯 칸, 총 스물다섯 칸으로 이루어지고, 중앙의 한
칸은 프리 스페이스(Free space)로 비워둔다. 다섯 칸씩 가로, 세로, 사선으로 연결하고 다섯 줄을 가장 먼저 완성하는
사람이 이긴다. 지역마다 동네마다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화투와 달리 국제 룰을 따른다. 승리의 관건은 스물네 칸을 무엇으로
채우는가에 달려 있다. 우선 다른 아이들이 떠올릴 만한 보편적인 대상을 파악하고, 자신만이 알고 있는 차별화된 대상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적절한 배열. 마지막으로 가위 바위 보를 잘해야 하는데 이것은, 운에 맡긴다. 빙고 역시 다른 게임들처럼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유리하다. 


끝내지 못한 빙고판을 걷을 때마다 아이들과 여자 사이에는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곤 했다. 아이들과 빙고를 시작하고부터는 쉬는 시간에
동료들과 짬짬이 나누던 대화도 사라졌다. 대화의 내용은 금세 잊히거나, 괜한 말을 했다는 후회가 뼈에 사무치는 말들이었다. 차라리
대화가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종종 성인의 육성이 그리워질 때가 있었다. 


여자는 카트에 맥주를 담으며 빙고판의 가로 두 번째, 세로 다섯 번째 칸에 써져 있는 ‘맥주’에 동그라미를 쳤다. 마지막 두 줄이
동시에 완성되었다. 여자는 맥주를 계산을 하면서 천 원짜리 지폐를 백 원짜리 동전으로 교환했다. 늦은 시간이라 보관함이 있는 후문
쪽으로는 드나드는 사람은 적었다. 여자는 마지막 남은 두 줄을 확인하기 위해 보관함을 바라보았다. 68번 보관함은 잠겨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손님이 많은지 잠겨 있는 보관함이 많았다. 이런 날이 더러 있어 보관함으로 빙고를 완성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68번 열쇠만 있다면 마지막 두 줄이 동시에 완성되었다. 다른 보관함으로 빙고를 완성시킬 수도 있겠지만 여자가 원하는
것은 68번이었다. 


“저기요…….” 

입구 쪽에서 낯익은 남자가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며칠 전 학원에서 만난 모배우를 닮은 남자였다. 

“돌려드릴게 있어서요. 실은 저…… 학부형이 아니에요.”

“알고 있어요. 파파라치죠.”

김의 성화에 못이긴 여자는 결국 김과 함께 저녁을 먹었고, 길고 지루한 소개팅 이야기가 끝이 나서야 남자의 정체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김이 두 달 전 일하던 학원이 불법영업으로 신고를 당했고, 인근에 있는 학원들도 마찬가지였단다. ‘그 원장 성질이 장난
아니거든요. 주변 학원 CCTV 녹화 테이프까지 다 모아왔다니까요. 그걸 또 제가 했어요. 결국 남자 얼굴 확인하더니 잡히면 가만
안 둔다고 난리를 치더라고요. 제가 학원을 옮긴 게 다 그 원장 때문이라니까요.’ 김은 원장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쪽으로는 유명한 분이던데요.” 

“아, 네, 아뇨. 그리고 이거 받으세요.”

남자는 여자에게 메모리 카드를 내밀었다.

“이걸 왜 돌려주시는 건가요?”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근데 이제 좀 조심하셔야 될 것 같은데…… 얼굴 알려지고 그러면 위험하지 않아요?” 

“워낙 평범한 얼굴이잖아요. 절 한 번 보고 기억하는 사람이 잘 없어요. 그래서 조금 전엔 좀 놀랐어요, 단번에 알아보셔서.”

“혹시 모배우 알아요? 예전에 ‘바다 이야기’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 친구의 친구로 나왔던…….” 

“아, 기억나요. 그 사람 연기 정말 잘했는데, 요즘엔 왜 안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족발집을 한대요.”

“근데, 그 배우는 왜요?”

“둘이 닮았어요.”

“아…… 참, 이거요.”

가방을 뒤적이던 남자는 무언가를 꺼내 벤치 위에 줄을 세웠다. 가로줄에는 6번, 7번, 8번, 9번, 10번 열쇠가 9번 열쇠를
이은 세로줄에는 39번, 69번, 99번, 129번 열쇠가 놓여 있었다. 마트의 보관함 열쇠들이었다. 남자에게도 68번 열쇠는
없었다. 


“두 줄이면 완성이던데요.” 

“혹시 절 따라다닌 건가요?”

“……파파라치니까요.”


침대 아래에는 옷가지와 빙고판들이 널려 있었다.

남자는 원더걸스보다 소녀시대의 멤버들을 좋아했다. 메밀 소바와 파스타, 잔치국수 같은 면류를 좋아하고 완자나 죽처럼 갈아 만든
음식은 싫어했다. 심지어 팥빙수까지. 가장 좋아하는 색은 코발트블루지만, 코발트블루를 제외하고는 주로 따뜻한 계열의 색상들을
좋아했다. 노래는 즐겨 부르지 않는지 스물네 칸을 다 채우지 못해 끙끙대다, 애국가로 마지막 칸을 채웠다. 말할 수 없는 비밀과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처럼 성장기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좋아하고 사진에 관한 에피소드가 많은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책은 잘 읽지 않는다고. 


여자와 남자는 가끔씩 만나 함께 빙고를 했다. 카페에서 만나기도 하고, 식당에서 만나기도 하고, 모텔에서 만나기도 했지만 한 번도
같은 장소에서 만난 적은 없었다. 대개 여자가 먼저 연락을 했지만 장소는 언제나 남자가 정했다. 남자는 언제나 새로운 장소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여행블로거였다. 블로그의 이름은 ‘프리 스페이스’였다. 처음 그 이름을 봤을 때 여자는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빙고의 프리 스페이스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블로그는 일주일에서 반나절까지, 시간별 여행코스를 추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며칠씩 걸리는 여행지보다는 한나절이나 반나절이면 충분한 도심 속의 데이트 코스였다.
여자는 그 도심 속의 데이트 코스를 함께 다녔다. 남자는 실물보다 근사한 사진을 찍었고, 음식 역시 실제보다 맛있어 보이도록
촬영했다. 그리고 맛이나 위생, 분위기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기록했다. 사람들에게 가장 반응이 좋은 것은 모텔 후기였다. 블로그에
소개된 가게들 중에는 매출이 꽤 올라서 남자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주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일회용품법이나 식품법
위반으로 벌금고지서를 받게 되었다. 남자는 신고 포상금을 받기 위해 두 가지 촬영을 했고, 가게는 홍보를 받는 동시에 신고를
당했다. 여자는 그 두 가지를 함께 하는 것이 비인간적으로 느껴졌지만 남자는 신고만 하는 것보다는 홍보라도 해주는 것이 오히려 더
인간적이라고 말했다. 


학원은 계속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건물 주인이 두 번이나 찾아왔고, 월급은 한 달이 지나서야 입금되었다. 선생들 중 일부가
이미 다른 학원에 스카우트 되었다는 말들이 나돌았고, 원장은 타고 다니던 외제차를 팔았다. 일주일에 한 번이던 회의는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었다. 회의가 잦아지는 만큼 선생들은 권태기에 접어든 연인처럼 딴생각을 했다. 나왔던 의견들만 계속 쌓여갔고,
의견들은 분리수거도 힘들 정도가 되었다. 여자는 다이어리에 빙고판을 그렸다. 스타강사, 전단지, 도서상품권, 원어민 선생님,
최신형스마트폰, 전교일등들……. 이 중 몇 개는 한 줄 빙고가 되기도 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석 달째 학원비가 밀려 있는 P는
끝내 학원을 그만두었다. 수업시간에 욕을 하고, 수업과 관계없는 질문을 하고, 수업 중에 문자를 하고,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Y와 J는 여자에 대한 교사 평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욕 같은 비속어를 쓴다.’, ‘수업과 관련 없는 이야기를 한다.’,
‘수업 중에 문자를 하는 것 같다.’, ‘수업에 늦게 들어온다.’ 회의실에 혼자 남은 여자는 원장에게 욕 같은 비속어를 들어야
했다. 


“선생님, 괜찮아요?”

김이 어디까지 들었는지 위로하는 표정으로 다가왔지만 여자는 뭐라고 대답해줄 기분이 아니었다. 

“발밑에 수맥이라도 흐르는지 요즘은 일어서기만 해도 어지럽네. 학원 터가 세다는 말이 사실인가…….” 


은 무안한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김에게 그건 그냥 기립성 빈혈이라고, 남자 선생들도 서너 명이나 가지고 있는 특별할 것도 없는
증상이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빈 신호만 계속될 뿐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기는 아예 꺼져 있었다. 마트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심지어 여자 화장실에서도 남자와 닮은 사람을 보았다. 여자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음식, 색깔, 노래, 영화 같은 것이 다였다. 그가 어디에 사는지도 몰랐다. 아는 주소라고는 블로그
주소뿐이었다. 블로그에는 P시의 바닷가 사진이 업로드되어 있었다. 남자는 가끔 지방으로 출장을 떠났다. 여행사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여행지를 홍보하는 일을 맡아했는데, 여자는 그것을 출장이라고 불렀고 남자는 그렇게 부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자신이 꼭
직장인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남자는 지방에 내려갈 때마다 여자에게 문자를 남겼다. 문자를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그에게서 온 문자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스팸문자함까지 살펴보았다. 대출 광고들 사이에서 남자의 문자를 찾아냈다. 


‘P시로 가는 중이에요. 바다이야기의 모배우가 운영하는 족발 집을 찾아가서 인증샷 올릴 테니 기다려요.’ 

여자는 모배우의 집에 벌금고지서가 날아드는 상상을 한다. 모배우는 진짜 화가 난 표정을 연기할 것이다. 

여자는 며칠 동안 남자의 블로그를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매듭짓고 있었다. 빙고판의 스물네 칸을 채울 만한 일들도 점점 사라져갔고,
반복되는 일상으로 칸을 메우는 것에도 지쳐버렸다. 불면증을 핑계로 남자의 블로그만 밤새워 뒤적거렸다. 여자는 어느새 남자의
행방을 좇고 있었다. 남자는 기다려주지 않고 너무나 많은 곳을 앞서 다녔다. 가끔씩 남자의 뒷모습을 만나게 될 때도 있었지만 곧
멀어지고 말았다. 빙고에서 프리 스페이스는 일종의 비상구이고, 블로그 ‘프리 스페이스’는 홍보와 신고가 자유롭게 교차하는 남자가
편집한 세계였다. 여자는 P시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한 후 의자에서 일어났다. 기립성 빈혈 때문인지 불면증 때문인지 딛고 선 바닥이
점점 기울어졌다. 어지러웠다. 가방을 챙겨 방을 나서는데 발바닥을 차갑게 누르는 것이 있었다. 남자가 준 69번 보관함
열쇠였다. 여자는 나머지 열쇠까지 모두 챙겨 밖으로 나왔다. 


마트에 도착한 여자는 천천히 보관함 쪽으로 다가갔다. 68번 키가 돌아와 있었다. 여자는 68번 보관함을 열었다. 그리고 빙고를
완성한 9번, 36번……129번 열쇠들을 모조리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열쇠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68번은 프리 스페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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