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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발자국/김영주

Author
janeyoon61
Date
2010-01-09 08:13
Views
7854


 



새로운 발자국

-김영주-                 

 


1. 다운프트(Downshift)족이라구?

 

랩탑을 열고 인터넷이 연결되었다는 뜻의 작은 아이콘이 푸른 빛을 발하면 구글 검색창을 열고 <......>이라고 타이프한 엔터 키를 친다. 관련문구가 들어있는 다양한 종류의 정보 창을 손에 잡히는 대로 열어본다.

[다운쉬프트라는 말은 원래 자동차 용어로써 저속 변속(變速)을 의미......경쟁과 속도에서 벗어나 여유있는 자기만족적 삶을 추구......생활의 패턴을 여유롭게 바꾸어 여가를 즐기고 삶의 질을 향상 시켜 만족을 추구......일과 생활에 건전한 균형과 행복감이 넘치는 삶 추구......원하는 형태의 삶을 위해 고소득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 뚜렷한 공통점......중산층 전문직이 많은 것도 특징 중의 하나......증권금융업이나 법조계, IT업계종사자들이 많다......연령층은 가족에 더 큰 가치를 두는 30대와 40대가 많다......]

 

어제 저녁 뉴욕에 사는 미영 언니랑 통화를 했을 때 그녀에게서 이 단어를 처음 들었다.

너도 <다운프트족>이구나!”

, 무슨 족요?”

------이라구. 전문직을 가지고 잘 나가던 사람들이 돈은 더 적게 받아도 스트레스를 피해 자기가 선호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요새 그렇게 부르더라구. 최근 유럽에서 시작된 사회현상이라는데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가 봐. 우리 회사팀에도 얼마전에 플로리다에 가서 케잌 데코레이션 비지니스 한다고 그만둔 젊은 여자 하나 있어. 아주 똑똑하고 다부진 여자 였는데. 케잌 클라스 다닌다고 행사 때 마다 케잌 하나 씩 만들어 오곤 하더니 어느날 자기 케잌회사 명함 하나 씩 나눠주곤 정말 떠나버린거 있지.”

언니는 IBM에서 연봉 이십만불을 받고 일하는 수퍼우먼 IT메니저이다. 케잌 데코레이션 비지니스를 위해 떠났다는 여자는 언니가 리더로 있는 IT팀에 수 많은 명석한 두뇌들을 제치고 수석으로 들어왔던 엘리트였다고 한다. 언니는 그 여자가 떠나버린 것이 못내 아쉬운 듯 그녀가 얼마나 훌륭하게 임무들을 수행했었는지에 대해 장황히 늘어놓는다. 몇 십만불의 연봉을 포기하고 IBM IT팀을 그만둔 여자라니! 뉴욕의 산골이 아니라 바닷가를 더 좋아하는 여자였나보다. 자기가 설 곳은 컴퓨터 앞이 아니라 따끈따끈한 빵이 모락모락 김을 내며 탄생되는 오븐 앞과 이벤트가 벌어지는 파티 장소라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을 여자. 지금 행복할까 그녀는?

앞으로 뭘 해볼 생각이니?”

차분한 어조, 조심스러운 질문이지만 내 가슴에 내려앉는 질문의 무게는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친구 소개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긴 했는데……”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마. 우선푹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 좀 재충전 되면 더 좋아하는 일을 시작할 기회가 분명히 생길거야

유능하지만 따뜻한 사람. 미영언니가 그렇다. 서른 해를 넘게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탁월하게 유능하면서 동시에 마음 깊이 자신과 다른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따스함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내 주변에서는 미영 언니가 유일하다. 언니는 자신의 일에 파묻혀 있는 것을 즐기고-어느 정도냐 하면 자신이 배아파 낳은 아기의 존재를 일하는 순간 깜박 잊을 수 있을 만큼!!-그 일을 즐기는 사람이 많지 않은 세계에서 언니의 존재는 점점 탁월해져가고 경쟁을 위해 목을 메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언니의 직함은 높아져만 간다. 언니는 그저 운전을 즐길 따름인데 회사에서 알아서 가장 최신형의 레이스카로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프로레이서가 된 것처럼.  

언니가 나에게 다운프트족이라고 이름 붙여준 것은 언니의 친절함이 묻어난 배려 깊은 말이다. 내가 고소득 연봉을 자랑하는 금융, 법조, IT계의 전문여성이었다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고, 현재 뚜렷하게 건전한 균형과 자기만족적 삶을 제공해주는 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명함을 내밀만한 처지도 아니다. 내가 7년동안 일하고3개월전 그만둔 회사는 메릴랜드 어룬델 밀스 몰 가까이에 위치한 조그만 엔지니어링 회사다. 연봉 72천이 내가 그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받은 연봉 액수였다. 그렇게 적은 월급이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7년 전 48천에 첫 연봉협상을 했던 25세였던 나는 그 사이 32세가 되었다. 머리카락은 윤기가 없어지고, 이마가 더이상 젊음으로 팽팽하지 않은 32. 72천에 내 모든것을 다 내어주고 싶지 않은 나이가 되어 버린 일까?

 

2. 경고등이 깜박 깜박……그리고 멈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요.”

회사를 그만두기 한달 전쯤 어느 주말 오전, 빨래를 개고 있 엄마 옆에 앉아 불쑥 던진 말이다. 빨래를 개던 손이 멈추었다. 엄마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여셨다가 꾸욱 다무셨다. 정적이 흐르자 열어놓은 창 틈으로 맑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려왔. 먹이가 풍성한 여름이 오고 있음을 축배라도 하듯 여러 마리의 새들이 한꺼번에 재재거렸다. 엄마는 한참 만에 입을 여시곤,

지금까지 공부한 것 아깝지 않겠니?”

천천히 빨래개기를 이어가는 엄마의 거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견딜수가 없어. 의미도 없이 화학약품 냄새나는 실험실에 아침부터 밤까지 갇혀있는 일 더 이상은 못 하겠어.”

엄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가 더 굳게 입술을 다무셨다. 울 엄마의 좋은 점은 말을 많이 아끼신다는 점이다. 적어도결혼은 언제 할래?” 같은 말은 하지 않으신다. 엄마는 결혼제도를 믿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내가결혼이나 해버릴까?” 라고 싱거운 말을 꺼내면, 엄마는일단 좋아보이는 남자가 나타나면 적어도 삼년은 살아보고 결혼 할지 말지 결정해라고 말하신다. 결혼이 딸의 장래를 보장해주는 보증수표라는 믿음 따위는 전혀 없다.

어쨌든, 이 나이에 결혼을 못해서 소위 말하는 히스테리가 생겼다거나 집에서 스트레스를 준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라는 말이다. 엄마는 다만 나의 독립적인 삶을 위해서 경제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라신다.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될거야”,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불처럼 소중한 존재가 될거야……. 기억에도 없는 순간부터 내내 들었던 나를 향한 엄마의 주문이었다. 아빠가 술에 만취해 계집애가 쓸데없이 공부는 왜 해?”하면서 내 책상 위의 책들을 잡히는 대로 그러모아 문 밖으로 던져버려도, “낼 부터는 밖에 나갈 생각 하지 말고 엄마 옆에서 집안 살림하는거나 배워!”하고 며칠간 집에 가두거나 할 때에도, 엄마는 잠들기 전 내 머리맡에 앉아 내가 공부를 많이 하고 분명 훌륭한 사람이 될거라고 속삭이며 내가 훌쩍이다 잠들 때까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하셨다. 엄마는 엄마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내가 나의 길을 갈 수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셨다. 하지만 엄마는 나의 갑작스런 선고에 더 이상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어쩌면 엄마는 이런 종착역을 예상하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내가 공학을 전공했던 이유. 남자에게 기대지 않기 위해서 남자들이 하는 공부 남자의 직업을 선택했던 것. 우리 형편에 힘들지 않게 학비보조를 쉽게 받을 수 있었던 분야. 월급을 받으면서 대학원도 다닐 수 있는 분야. 내가 공학을 과학을 좋아하는가 이 분야에서 보람을 느낄수 있는가는 이차적인 문제였다. 그럭저럭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몇 년간의 젊음을 고스란히 바쳐 1인치쯤 되는 논문집과 함께 대학원도 무사히 마쳤다. 문제는 엔지니어로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나 자신의 영혼을 팔아 하루하루 사는 듯 내 내부가 고갈되어 말라가고 있었던 것이었. 그 일에 대한 열정의 기반이 너무 얇은 탓이었다.

 

본격적인 매릴랜드의 후덥지근한 여름 냄새가 실험실에 스며들기 시작했을 즈음, 1초도 더 거기 앉아 있을수 없이 숨이 막혀오던 순간 보스에게 전화를 했다. 아직 그 다음에 뭘 할지도 모르면서도 나 자신을 막을 수가 없었다.

본부 사무실에 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실 수 없을까요?”

무슨 일이지?”

실험실에서 일하는 것 그만두고 싶어요. 여기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너무 스트레스가 되요. 본부에 마땅한 포지션이 없을까요? 실험실 일만 아니라면 어떤 일이든지 열심히 할께요.”

“……”

어이없어할 그의 표정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했다.

갑자기 이렇게 말씀드려서 죄송한데요. 하지만 진심으로 실험실이 아닌 곳에서 일해보고 싶어요

수지, 이번 <에어포스 로켓엔진 인젝터 프로젝트> 3개월 뒤면 끝나. 조금만 더 견디고 그때 가서 이야기 하자. 그래줄 수 있지?”

아니오. 3개월 더 이렇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왔어요.”
뭐가 문제지? 왜 진작 의논하지 않고 갑자기 이러는거야?”

문제는……”

누군가의 쫓김을 당하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진다. 불끈 용기가 솟아 그의 사무실 전화번호를 꾸욱 꾸욱 누를 때의 기백은 어디가고 침이 마르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내 머릿속에 도는 말들은 너무 많은데, 그가 납득할만한 적당한 대답을 집어낼 수가 없다.

문제는 바로화학약품을 더이상 만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예요.”

우리는 그렇게 치명적인 화학약품을 쓰고 있지 않는데? 그리고 그런 약품을 안전하게 사용할 줄 아는 것이 화학공학하는 사람들이 학교에서 받는 트레이닝 아닌가?” 그의 목소리에 순간 싸늘한 기운이 감돈다. 가장 타당하게 들릴 수 있는 답일거라 퍼뜩생각해 낸 대답인데 화학공학 전공자로서는 정말 바보같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런 환경에 있는게 저에게 스트레스가 많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젠 되돌릴 수도 없으니 끝까지 가본다.

그럼 수지는 더 이상 여기서 일하면 안겠군. 당신이 원하는게 정말 실험실에서 일하는걸 그만두는거야?”

.” 보스의 고드름이 떨어질 듯 냉기 서린 질문에 다른 답을 찾지 못하고 결정적인 대답을 하고 말았다.

당장 내 사무실로 오게. 켈리에게 사직절차를 밟도록 지시하겠네.”

이것이 다시는 되새기기 싫은 구두사직서가 되어버린 대화였다.

 

내가 7년을 보낸 그곳에서 더 이상 있기 싫어졌던 것은 그 회사 탓은 아니었다. 업무분량이 상당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정도 혹은 그 이상의 일중독 생활을 하지 않는 엔지니어는 어디서든 찾기 어렵다. 그리고 그러한 오버타임 스케쥴을 회사가 공식적으로 강요한 적도 없다. 한가지 유일한 책임이라면 7 전 나를 고용했었던 것이겠다. 그때 이 회사든 어느 엔지니어링 랩이든 나를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다른 길로 갔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공부한 것이 아깝다고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 그 회사에서 정말 싫었던 것이 하나 있기는 있다. 그 랩을 나와 오른쪽으로 난 복도를 발자국 걸어가면 있는 그 화장실 거울! 그 거울이 정말 싫었다. 그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누렇게 뜬 얼굴, 가늘게 얼기설기 얽힌 붉은 실핏줄로 광채가 가려진 눈빛, 끝이 갈라진 칙칙한 머릿결…… 시간이 갈수록 더 나빠지고 있다는 그 느낌이 견딜수 없이 하루도 더 회사에 나오기 싫을 만큼 싫어졌다고 하면 내 보스는 뭐라고 했을까? 전 회사 직원들과 돈을 거두어 백설공주같은 하얗고 보송보송한 붉은 혈색의 여인 모습만 나타나는 마법의 거울을 사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서른이 되기 전까지는 괜찮았던 같다. 짓 단에 밴 기름때도, 각종 화학약품들이 튀어 군데군데 색이 바래고 소매끝이 타들어간 실험가운도. 매일저녁 실험보고서를 마무리하고 어둑한 밤 하이웨이를 1시간 달려야 하는 일도. 머리를 뜯으며 밤새 논문을 쓰는 일도. 내가 정말 열심히 살고 있다고 느껴져 뿌듯하던 순간도 분명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넝마처럼 낡고 벙벙한 실험가운에 갖혀 밤낮으로 기계하고만 씨름하는 일상이 싫어졌다. 급속도로 빠르게 변하는 테크놀러지의 세계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숨쉴 틈 없는 일과 속에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점점 큰 소리로 메아리쳐 올라오는 울림이 있었다.

무엇을 위해서 나는 이렇게 살고있는 것일? 누구를 위해서?’

공허한 마음이 바닥으로 치닫고 있었다.

국수주의에 머리를 흠뻑 적시고 있던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과학 발전을 통한 조국의 경제력 강화>라는 명분이 있었다. 내가 미국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맡아 진행하던 대부분의 연구 프로젝트를 지원하던 자금들은 미 국방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다름아니라 미 국방부 산하 군 연구소의 진두지휘 하에 진행되고 있던 방위산업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이 나에게 배당되었던 주 업무였다. <새로운 조국의 군사력 강화를 위해서>라는 사명감이 내 가슴팍에 새겨지기엔 머리도 가슴도 너무도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첫사랑의 열병이 지나고 나면 절대 다시 재현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새 나라에서 내 인생의 정착>이 내가 그 회사에서 청춘의 황금기를 보낸 보다 진솔한 이유일 것이다.

유명 과학 잡지에 논문을 발표하는 일도 몇 십만불의 연구자금을 따내는 성과도 이력서에 한줄 빛나는 것 외에 가슴깊이 내 삶의 의미가 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저녁을 먹는 일이 그리워졌고, 다른 옷들을 입고 다른 곳으로 가고싶어졌다. 그리고 남자동료들에 둘러싸여 눈에 쉽게 띄는 마이노리티로 지내는 것도 힘겨워졌다. 여자가 없는 공대생활부터 홍일점으로 지낸 것이 어언 십 수년이 되었지만 마이노리티로 산다는 것은 결코 적응되는 일이 아니다. 공유할 수 없는 시선의 칼날에 베인 흉터 자국만 늘어갈 뿐.

 

3. 바꿔 타기

 

오랜만에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 진현이와 연락이 되었다. 진현이가 바로 나에게 가구점 아르바이트 일을 소개했던 친구다. 가구점에서 일하고 싶다는 목적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인테리어 장식>이라는 분야에 대해서 호감도 있었고, 실용성과 예술적 가치를 동시에 갖추어야 하는   아이템을 가지고 세일즈 사업을 하는 현장에서 배우면서 부딪칠 기회는 즐거운 시도로 느껴졌다. 진현이는 박사 학위를 받을 즈음 임신을 하여 졸업하고 한동안 아기를 키우면서 근처 대학에서 강의 하나 하는 것으로 박사라는 이름의 갈증을 채우며 가구점에서 주말에 아르바이트하고 있던 차였다. 한번도 써보지 못한 졸업학위를 못내 아쉬워하며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아기가 프리스쿨을 갈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마자 연방 연구소직에 응시를 했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풀타임 일을 찾았다. 그녀는 내가 직장을 그만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에게 자기가 있던 자리를 권했고, 우린 기차를 바꿔타듯 서로의 인생을 바꿔탔다. 정말 타이밍이 절묘한 일이었다.


녀의 새로 시작한 풀타임 일이 얼마나 바쁠지 충분히 예상가능하기에 별 기대 없이 전화를 넣었는데 마침 아이 정기 검진도 있고
해서 하루 쉬고 있다며 병원검진은 아침 일찍 다녀왔으니 점심 먹자고 해서 여느 때와 같이 캐톤스빌 한국가게 옆에 있는 분식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
리콧시티에 사는 그녀와 볼티모어에 사는 나에게 딱 중간지점이 되는 곳이라 항상 그곳에서 만나 분식집에서 돌솥비빔밥을 한 그릇 씩
먹고 한국가게 내 빵집에서 파는 뜨거운 커피를 함께 마시는 동안 쫓기듯 서로의 일상을 보고하고 늘 짧은 만남을 아쉬워 하며
헤어지는 것이 정해진 대본 같은 우리의 만남이었다
. 그녀는 아이 때문에 바쁘고 나는 일 때문에 바빴으니까.

나는 진현이를 거의 몰라볼 뻔 했다.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찰랑이는 단발머리로 변화를 준 탓도 있지만 볼살이 많이 빠져 한층 여윈 모습이었다.

가구점 일은 어때? 할만해? 같이 일하는 미국 애들 좀 까칠하지 않니?”

자리에 앉기도 전에 딸아이를 의자에 앉히며 질문을 쏟아낸다. 그러다 얼핏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무는가 싶더니, 뭔가 신기한 광경을 갑자기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이 둥그래져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어 내린다.

뭐냐? 선보냐?”

맨날 티셔츠에 기름때 묻은 청바지 차림만 보다가 스커트에 롱 부츠를 신고 있는 내 모습을 본 진현이의 반응이었다. 순간 내 얼굴이 붉어졌지만 짐짓 태연한 척했다.

흠흠뭐 먹을래?” 이야기를 슬쩍 돌린다. 솔직이 말해서 너무도 바쁜 시간을 쪼개가며 이 자리에 나왔을 진현이 얼굴을 대하고 보니 내가 이런 옷을 꼭 한 번 입어보고 싶었다는 둥 하는 이야기들을 재재거릴 의욕이 물거품처럼 사그라든다.

돌솥 먹자. 여기 그게 제일 낫잖아역시 오늘도 돌솥비빔밥이다. 갈비살을 얹은 돌솥비빔밥 두 개를 사서 쟁반에 들고 자리에 오니 진현이가 지갑을 열고 돈을 꺼낸다.

됐어. 내가 살게. 가구점 일을 알선해 준 보답!.”

……우리 사이에 뭘 그 정도 가지구 밥을 사고 그러냐? 가구점 쥐꼬리만한 급료 내가 다 아는데……”가구점 일이 급료도 적고 은근히 노가다인데다 까다로운 손님들 비위까지 맞춰야 한다고 불평이 많던 그녀였지만 이젠 친구의 일이다 싶은지 평소 레퍼토리를 줄줄 읊으려다 말고 주춤하며 내 눈치를 살핀다.

그래도 내겐 지금 이 일이 그나마 붙잡을 지푸라기야. 너한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생각보다 나한테 일도 잘 맞는 것 같고. 너는 어때? 바쁘겠다. 아이도 아직 어려서.”

말도 마!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졌어. 첨엔 애 프리스쿨에 떼어놓고 일가는 게 어찌나 어렵던지. 일주일 동안 울고 불고 난리였어. 아침마다 전쟁을 치르고 눈물 글썽한 애를 억지로 떼놓다시피 하고 출근해서는 보스 눈치 살피랴, 새로 맡은 일 파악하랴……”
쪽 살이 빠져 볼 뼈를 앙상히 드러내며 그간 있었던 일을 한숨 섞어 하소연하는 진현이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신경 써 주어야 할
아이가 있는 진현이의 어깨에 지워진 풀타임이라는 책임의 무게가 짓누르는 느낌이 그대로 내게 전해지는 듯해서 그녀와 같이 있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

집에서 하겠다고 들고 온 직장 일이 있어 가서 일해야 한다고 밥을 먹자마자 부랴부랴 일어서는 진현이에게 한국가게로 금방 뛰어들어가 사 들고 나온 커피 캔을 하나 손에 쥐어주고 아쉬운 마음을 숨긴 채 헤어졌다. 진현이에게 아이가 생긴 후로 늘 우리의 만남은 이렇게 정신 없고 짧을 수 밖에 없었지만 왠지 이번엔 조만간 진현이의 얼굴을 다시 보기는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슬프고 외로운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동안 만나기만 하면 이런 저런 프로젝트에 주말도 없이 바쁘다고 징징대는 나와 헤어져서 돌아가는 진현이의 기분은 이런 것이었을까? 아마도 내가 지금 느끼는 것과는 달랐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때의 진현이에게는 가보지 않은 길이었고 지금 나에게 진현이의 길은 짐작이 가는 길이니까.

 

4. 이제 어디로 갈까?

 

치카치카 양치질을 정성들여 하고 초록색 스웨터를 꺼내입는다. 오늘 가구의 모토는 크리스마스이다. 가구뿐 아니라 이나 꽃병등의 모든 집안 장식용품, 인테리어 관련 도서까지 판매하는 이 가게는 계절이나 절기에 따라 전문 디자이너가 와서 가게를 적절하게 장식한다. 회사가 정해주는 컨셉대로 일하는 직원들도 옷을 맞추어 입고 . 아직 땡스기빙도 지나지 않았지만, 상점들은 할로윈에서 바로 크리스마스 절기로 건너뛰었다. 초록색 상의와 대조를 이루도록 붉은 악세사리를 하고 검은 바지를 맞추어 입었다. 옷에 향수를 살짝 뿌리곤 볼티모어 다운타운에 있는 가구점 <SU CASA(당신의 집)>로 향했다.

초겨울이 벌써 입성한 듯 볼티모어의 저녁거리는 뿌연 가로등 아래 매서운 바람이 불어치고 봉지와 종이 조각들이 길잃은 영혼처럼 여기저기를 떠돈다. 가구가게 입구에 파킹을 하고 큰 정면 유리문을 여는 순간 세찬 바람이 내 몸을 수욱 밀어넣고 다시 문을 쾅 닫는다. 가구안의 벽걸이 장식들이 동시에 파도에 밀린 해초처럼 딸랑인다. 평일저녁 치고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미국사람들 중에는 크리스 마스 쇼핑을 아주 일찍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요즈음은 가구보다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위한 붉은 색 그릇, 테이블 보, 양초등의 테이블 액세서리들이 선물용으로 많이 나간다. 덕분에 일하는 사람 모두 너 나 할것없이 선물포장을 해주는데 일하는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다. 커미션 노트엔 11월이 시작된 이후로 기록할 것이 없다. 커미션 노트란 150불 이상의 가구를 팔때마다 그 가격의 5%를 커미션으로 받는데 그 커미션을 매번 기록해 두는 장부를 말한다.

시작했던 첫날 얼떨결에 300불 짜리 오토만과 800불 짜리 와인 바를 하나 팔고 55불이 누적되어 있는 것은 노트를 펼쳐보지 않아도 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 사실이다. 첫날 커미션을 받고 계산을 해보니 급료가 거의 기본급의 두배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너무 흥분에 들떠 엄마께 알리고우리딸이 말도 잘하고 똑똑해서 뭐든 잘하는 구나하고 말씀하시게 만들었지만 사실은 그게 나의 세일즈 실력이라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다. 가구가게에 들어오는 고객들 중에는 따로 세일즈를 하지 않아도 이미 필요한 정보수집을 마치고 특정 가구를 사겠다고 결심하고 오는 고객들도 상당수 있는데 그들이 들어와서 누구에게 말을 하느냐는 그 세일즈맨의 운일 따름이다. 그날 나는 그저 거기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특별히 한 일이라곤 고작 고객이 원하는 가구가 가게 창고에 들어와 있는지 확인해 준 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55불이라는 커미션을 받았다.

기대도 없었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는 사이 받게 되었던 그 커미션 이후로는 다시 그와 같은 기회가 없었다. 가구를 살듯 살펴보는 손님들 주변을 배회하며 도움을 줄 기회를 엿보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러려고 마음을 먹고나니 생각보다 사람들은 가구사는 결정을 쉽게 내리지 않고, 같은 먹이를 노리는 같은 시간대에 일하는 동료 세일즈맨들과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도 상당했다.

가구가게의 뒷방은 넓고 화려한 매장 플로어와 대조적인 공간이다. 좁고 긴 공간 양옆으로 물건박스들이 산적해있고 왼쪽 끝엔 사장과 매니저가 쓰는 컴퓨터가 놓인 책상이 있고, 오른쪽 끝엔 직원들이 한명씩 돌아가며 도시락을 먹거나 쉴 수 있는 테이블이 하나 있다. 테이블 옆에 캐비넷을 열어 옷과 가방을 걸고, 케비넷 문에 붙어있는 조그만 거울조각에 비춰가며 찬 바닷바람에 트실트실해진 입술에 꿀냄새가 나는 립밤을 바르고, 심호흡을 크게 두번 한 후 큰 철문을 밀어 열고 매장으로 나간다. 극을 위해 꾸며진 세팅장을 걸어나가는 연극배우 처럼.

매장플로어는 밝은 조명아래 가구와 장식품들이 가득하다. 줄리와 데이나가 손님선물을 포장하는 일로 분주히 손을 움직이고 있다. “수지, 넌 그냥 손님들 맞고 플로어를 돌아봐 줘. 여기 포장하는 일은 우리 둘이면 된것 같아서비스 데스크로 가까이 다가가자 데이나가 지친 기색으로 말한다. 데이나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노련하고 눈치가 빨라 여기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가게 사장이 풀타임을 주었을 만큼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이런 가게에서는 베네핏이 주어지는 풀타임을 얻는 자체가 큰 승진. 그녀의 커미션 장부는 벌써 두페이지를 넘어서고 있는 걸 얼핏 본 적이 있다. 

 

“Hi, how are you? How can I help you?”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처음에 어색하고 머뭇거리던 손님을 맞는 인사가 두어 달이 지난 지금은 여느 세일즈맨처럼 빠르고 매끄럽게 흘러나온다. 한 중년부부가 저녁을 먹고 와인을 한 잔 걸친후인 듯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붉고 후덕한 웃음을 띄며 훅 불어치는 바닷바람과 함께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온다.

플로리다에 있는 별장에 놓을 가구를 찾고 있는데 등나무로 만들어진 오토만 혹시 있나요?” 최근 별장을 마련한 듯 목소리에 흥분감이 서려있다. 안정되고 여유있는 중년의 문턱에 마침내 다다른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만족감과 뿌둣함이 질문에 묻어난다.

마침 이번 주에 들어온 오토만 중에 등나무 제품이 있어요.”

붉은 스웨이드 카우치 앞에 커피테이블 대용으로 놓여진 등나무 오토만으로 이 중년부부를 인도하면서 가격표를 슬쩍보니 500불이다.

 어머나! 이 디자인좀 봐요. 우리집 카우치랑 너무 잘 어울리겠어! 우리가 찾던 거예요. 이렇게 살짝 안으로 들어갔다가 바닥이 스커트 처럼 넓어지는 이 모양이잖아요!”

여자의 목소리가 흥분감으로 잔뜩 고조되었다. 흰머리가 끗한 남자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가득 번지며 나에게 한쪽 눈을 찌긋 윙크를 던진다. 나도 따라서 미소를 입가에 띄우는 동시에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 치며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뭐부터 하더라. 가구를 팔아본지 한참이 되어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맞다. 일단 이 가구가 창고에 남아 있는지 확인해야한다.

원하시면 저희 창고에 이 제품이 남아있는지 혹은 더 주문을 해야 하는 상황인지 알아봐 드릴 수 있어요. 창고에 있으면 내일 당장 배달이 가능하구요. 주문을 더 해야 하면 1-2주 기다리셔야 하구요.”

숨을 쉬지 않고 말을 했나보다. 숨이 찬다.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입을 살짝 열고 조용히 천천히 큰 숨을 들이킨다.

한 번 알아 봐 주세요

부부는 붉은 카우치에 앉아 다시 한 번 등나무 오토만을 이리저리 쓸어본다. 마음이 변하지나 않을지 그들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힐끗 살피며 서비스 데스크로 종종걸음쳐 간다.

저 등나무 오토만 창고에 더 있는지 알아 보려는데...”

있어.” 하며 이미 나와 손님들간의 대화를 짐작한 눈치 빠른 데이나가 <등나무 오토만 3>라고 적 창고물품목록을 보여준다. 다시 종종 걸음으로 그 부부에게 가서 소식을 알린다

창고에 이미 들어와있는 제품입니다. 급하시면 내일 오전 창고 여는 시각에 바로 픽업하실 수 있어요. 볼티모어 안에 사시면 댁으로 배달해드릴 수도 있어요. 물론 무료로요.”

자선이라도 베푸는 듯 얼굴을 활짝 펼쳐 미소지으며 고개를 상냥하게 끄덕이고 있는 내 모습이 문득 낯설게 느껴진다.

저희 벤으로 내일 오후에 픽업할께요. 그건 그렇게 하고 여기 이 등나무 의자는 얼마예요? 이 의자 두개 창고에 있는지도 좀 알아봐 주시겠어요?” 하며 부인이 오토만을 사이에 두고 붉은 카우치와 기역자를 이루며 놓여있는 등나무 의자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심장이 더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한다. 들릴것만 같아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한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알아봐 드릴께요.”

창고 물품 목록을 재빨리 훑어내려 <등나무 의자 2>라고 적힌 것을 확인한다. 오늘 밤은 운명의 여신이 나에게 미소짓고 있음이 확실하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친다. “창고에 딱 두개 남아 있어요!” 이젠 매장은 이 중년부부 외에 다른 손님이 없이 한산해져 줄리와 데이나도 이쪽만 쳐다보고 있다. 다크 초콜릿이라도 입안에 물고 있는 듯 씁쓰름한 눈빛을 하고 있다.

어머! 너무 잘 됐다. 우리가 그 등나무 의자 다 살께요. 내일 다 함께 픽업하는 걸로 약속잡아 줘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로 계산할거예요.”

 

세 가구의 총 가격은 택스를 제하고 도합 2000불이 나왔다. 따라서 커미션은 100! 하룻밤에 백 불을 만들었다! 문밖까지 달려나가며 정성스런 배웅으로 손님을 보내고 커미션 장부에 기록을 하려고 데스크로 다가가니 데이나는 뒷방에서 휴식중인지 자리에 없고, 줄리는 데스크에 두 팔꿈치를 얹고 인테리어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다.

네가 그 손님들을 맞게 된건 그저 우연일 뿐이야, 운이 좋았을 뿐이라구!” 불만스럽다는 듯 줄리는 보고 있던 잡지를 후르르 넘겨 덮어버리고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을 한다.

우리 중 누구라도 한사람은 손님을 맞아야 했고, 두 사람은 선물포장일을 했어야 했으니까.” 이제 스무살이 갓 넘은 줄리는 예쁜 얼굴의 미간에 세로로 주름을 잔뜩 세우고 있다. 불편한 공기가 줄리와 내가 서 있는 데스크 주변으로 흐른다. 끼익하는 소리가 정적을 깨며 뒷방으로 통하는 철문이 열리고 데이나가 매장으로 걸어나온다. 데스크로 오지 않고 저쪽으로 걸어가 손님들이 흐트려놓은 침대 세팅과 쿠션들을 정리한다. 100불을 내가 독차지하면 줄리와 데이나는 억울함을 느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까지 이 곳에서 일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불편한 기분으로 일하고 싶지도 않고 반목의 씨앗을 키우고 싶은 생각은 더더구나 없다. 나는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 위해서 나에게 맘 편하고 즐거운 일을 찾기 위해서 이 모든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럼 이렇게 할까? 우리 셋이 오늘 생긴 커미션을 나누자.”

줄리의 얼굴이 순간 붉어진다 싶더니,

? 네가 번 커미션이잖아.”

내 눈을 보지 않고 볼멘소리로 말한다.

아니. 나는 들어온지 얼마 안돼서 정말 잘 몰랐어. 너와 데이나가 그 자리에 있어서 서류랑 카드 결재 하는 거랑 이렇게 저렇게 도와주지 않았으면 아마 손님을 놓쳤을거야. 너희 도움이 컸어. 나누는 것이 옳다고 봐.”

커미션 장부를 펼쳐 줄리와 데이나와 내 이름 앞으로 오늘 받은 커미션의 삼분의 일 값을 각각 적어 넣는다. 솔직이 정말 옳은 결정을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마음을 조이던 불편한 공기는 거두어진 듯 하다.

가게 문 닫을 시간이 다가와 레지스터를 열어 돈계산을 하며 크레딧 카드 머신 영수증을 뽑고 있는 줄리와 마루를 쓸고 있는 데이나의 얼굴을 흘깃보니 피곤한 기색이라도 약간의 미소가 입가에 번져 있는 듯도 하다. 가구를 팔며 긴장을 하고 심장이 하늘로 솟구쳤다 땅으로 떨어졌다 방망이질 쳐대서인지 피곤이 갑작스레 덥쳐왔. 12시가 가까운 시각 밤이 이슥한 가로등만이 환한 이너하버 밤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오면서 왠지 전쟁에서 지고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보 같다는 말이 자꾸 입에서 맴돌았다. 바보 같다 바보 같다 바보 같다…… 일이란 건 이렇게 전쟁 같은 순간을 견디고 돈을 받아야만 하는 것인가? 행복한 일이란 게 있을까? 없을까? 시간은 자꾸 가는데…… 나는 미아가 되어버린 듯 나의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듯 갈피를 잡을 수 없다. 

 

5. 유혹

 

아직 5월이지만 여름 밤의 열기가 조금씩 골목길을 메우기 시작한다. 가구가게 맞은편 정원식 스테이크 레스토랑 앞에 세워진 장난감 같은 노란 램브라기니 스포츠카가 눈길을 끈다. 차는 잘 빠진 청년 같은 이미지지만 아마도 차의 주인은 머리 결이 희끗한 인생말기의 문턱에 다다른 중 노년일 것이다. 미국에선 오렌지족-부모의 재산으로 부유한 삶을 즐기는 사람들-을 아직 본 적이 없다. 물론 젊은 사람이 연예인으로 혹은 영화작가로 성공하거나 월 스트리트에서 탁월한 금융 기술로 돈방석에 앉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여긴 캘리포니아도 뉴욕도 아니다. 돈이 웬만큼 있다 해도 누가 십억을 호가하는 저런 차를 턱 하니 살 수 있단 말인가? 멍한 눈을 하고 가게 밖을 보고 있는데 가게 안으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들어온다. 어디서 봤더라.

수지!”

월터!”

내가 떠나온 회사에서 내 보스였던 월터다. 갑자기 내 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부끄러운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내 얼굴이 왜 이렇게 반응하는 걸까? 다른 사람도 아닌 월터를 이곳에서 마주치다니!

지난 가을 그 회사를 떠난 이후 한 번도 보스나 회사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회사 다니는 동안에는 집에서도 회사일과 사람들 생각을 떨칠 수 없어 이만 저만 스트레스가 아니었는데 그렇게 잊을 수 있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크리스마스 때 카드를 보내거나 한 번쯤 전화해서 새해 인사를 할 수도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자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든다. 7년 동안이나 함께 일했는데도 회사 밖에서 만난 적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어 지금 이 가구 가게를 배경으로 함께 서 있는 것이 서먹하다. 옷도 깔끔하게 늘 잘 입고 어딘지 모르게 16세기 르네상스 그림에서 본 것 같은 고전적인 귀족 분위기의 그의 얼굴은 매력이 있으면서도 거부감이 들게 만들었다. 그 거부감은 아마 그가 다른 남자동료에게 내뱉은 이 말을 듣고 난 이후 더 구체화 되었던 것 같다.

좋은 학교 나오고 돈 많이 주는 직장 찾아 다니는 거 다 큰 집에 벤츠 타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자 모두 이 프로젝트에 달려있으니까 다들 내년에 이사 갈 큰 집, 멋진 벤츠를 생각하면서 힘내자고.”

그날 오후 4-5시쯤 사무실에 어둑한 그림자가 밀려드는 그 순간 그가 이 말을 내뱉었을 때 그의 부하직원 누구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따지면 그는 꿈을 이미 이룬 것 같다. 그는 하버드를 나와 안정적인 회사에서 입사 15년 만에 헤드 사이언티스트 자리에 앉았고, 너른 싱글하우스에 살며 매끈하게 잘 빠진 벤츠를 운전하고 있으니까. 물론 중고를 산 거라고 했지만.

 

네가 직장 그만두고 다른 일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 걸?”

, 인테리어 디자인 쪽으로 해보고 싶은데 공부하기 전에 먼저 실제 현장 경험을 쌓아보려고 이일 저일 하고 있어요.”

이젠 더 이상 내 보스도 아닌데 묻지도 않은 대답을 변명처럼 주절거리는 내가 한심하다.

뭐 찾는 거 있으세요, 도와드릴까요?”

어머니 생신이어서. 어머니 바로 여기 페더럴 힐에 사시거든. 생신 선물 고르는 중이야.”

이름있는 화가라는 그의 어머니를 말하는가 보다. 아들 둘을 다 하버드에 보낸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 이름있는 화가라는 타이틀까지 놓치지 않은 여자. 세상엔 참 대단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나름대로 오랫동안 힘든 공부를 하곤 엔지니어 직장 스트레스를 감당 못해서 7년 버티고 물러나 이곳에서 그런 어머니가 받을 선물을 골라주고 있는 내 처지가 순간 서러워진다. 주인공이 선물 고르는 것을 도와주는 도우미 역할의 엑스트라인 것처럼……

어머님께서 특별히 좋아하시는 거 있어요?”

글쎄일본 풍 가구나 그릇을 좋아하시는데, 여기 그런 물건들 있어?”

저기 부엌가구 쪽에 사케 세트랑 찻잔 세트가 있어요. 한 번 둘러 보실래요? 제가 함께 가서 찾는 거 도와드릴게요.”

손가락으로 위치를 가리켜주는 서비스만으로도 충분한 상황에서 보스와 한 공간에 있으니 7년 동안 몸에 밴 부하직원의 비굴한 습관이 여지없이 돌아와 몸에 철썩 들러붙는다. 다행히 다른 손님이 없다. 부엌가구 코너는 가게 입구에서 반대쪽으로 끝까지 걸어가 오른쪽으로 돌면 누군가의 진짜 부엌인 듯이 차려져 있다. 부엌 찬장 선반에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그릇세트들이 옹기종기 진열되어 있어서 더 그런 느낌이다.

곁에서 두리번거리며 따라오던 월터가 헛기침과 함께 말문을 연다.

나도 그 회사 그만 두려고 하고 있어.”

그를 향해 돌아섰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내 얼굴은 멍해져 있다.

내 회사를 차리려고. 전부터 생각해 둔 것이 있거든. 혹시……전에 하던 일 계속 해볼 생각 없어? 우리 에어포스 프로젝트 그게……정부에서 그 인젝터 대량 제조하는 회사로 키우라고 자금을 100만불 지원하기로 결정했거든. 그 프로젝트 들고 나와서 내 회사를 만들려고 하는데. 네가 같이 일해줬으면 해서. 하겠다고 만 하면 지난 번에 네가 받던 연봉에서 30%까지 올려줄 생각이 있어.”

명함과 함께 어느새 주머니에서 꺼낸 날렵한 볼펜으로 명함 뒷면에 숫자를 휘갈겨 쓴다.

내 핸드폰 번호야. 다음주까지 네 생각을 알려줘.”

멍하게 서있는 나를 뒤로하고 그는 가뿐한 걸음으로 부엌코너를 둘러보고 한쪽에 진열된 장식장에서 사케세트를 하나 집어 들더니 계산대 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문득 정신을 차린 내가 재빨리 좇아갔지만 그는 이미 계산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가게 문을 빠져나가고 있다.

 

6. 선택


벌써 가구 가게에 일한지도 아홉 달이 넘었다. 가게가 제일 한가한 월요일 저녁 8시부터 9시 사이엔 가구에 관한 교육시간이 있다. 이 시간에 일 스케줄이 없는 직원들도 배우고자 하는 의욕을 가진 이들은 꼬박 꼬박 참석하여 교육을 받는다. 의무는 아니지만 가구를 팔면서 손님의 질문들을 받다 보면 대답할 수 없었던 궁금한 사항들이 생기고 더 잘 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제대로 한 번 배워보자는 생각에 나도 지난 달부터 교육시간에 빠지지 않고 있다. 가구에 대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는 기회다. 사장이 직접 강의를 한다. 오늘 교육의 제목은 저가 가구와 고가 가구의 차이점이다. 사장이 두 개의 식탁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 저가 가구들과 고급 가구점에서 파는 가구들은 나무의 재질도 그러하지만 조립방식 자체에 들여진 공이 다르다고 하며 그가 두 개의 식탁을 뒤집어서 보여주었다. 한 식탁은 볼트와 너트로 다리가 이어져 있고, 다른 하나는 힌지 처리가 되어 있었다. 사장이 힌지처리가 된 식탁을 가리키며 이 것이 더 고급품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사장은 우리 가게 가구의 주 공급원인 인도네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의 가구회사들의 리스트가 있는 종이를 나눠주며 각 회사의 평판과 가구의 특징을 짚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원목으로 만든 가구와 합판으로 만든 가구 제품들의 장단점과 보수 유지 요령도 일러주었다. 사장의 조언들을 종이 앞 뒤로 빼곡히 적어가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보물인양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의 말을 경청했다. 이 가구점을 차리기 위해 수년간 동남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를 발로 뛰며 공부한 사장의 지식엔 아직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정보가 필요한 손님들 앞에서 풍월은 조금 읊을 수 있는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배운다는 것은 재미있다. 그리고 이런 공부는 엔지니어링 보다 쉽고 내 생활의 범주 내에선 더 실용적인 것 같다.

교육시간이 끝나고 모였던 자리를 정리하면서 사장이 물었다.

전직이 엔지니어라고 했었죠? 가구에 대해 배우는 것 재미있어요?”

. 손님 맞으면서 모르는 게 많아 늘 매니저를 불러야 하는 것이 불편하고 평소 궁금한 것들도 많았는데 이렇게 사장님께서 교육시간을 주시니 참 좋은 것 같아요. 많이 도움돼요.”

사장은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리고 있다.

사장님, 그럼 저는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잠깐 수지양. 내가 뭐하나 물어볼까요?”

“……”

지난 번에 디자이너가 오지 않아서 수지양이 매니저를 도와 부엌 방을 꾸몄다고 들었어요. 매니저에게 물어봤더니 수지양이 배치한 것이라고 하던데 사실이에요?”.

…..……
니저님이 손이 필요하신 것 같아서 조금 도와 드린다고 한 것이 저도 모르게 장식하는데 너무 신이 나서 여쭤보지도 않고 가구배치를
이리저리 바꾸고 장식물을 여기 저기서 옮겨와 꾸며서 안 그래도 매니저님께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한 말씀 들었어요
.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꼭 여쭤보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에요. 내 말은 그게 뭔가 독특했어요. 수지양의 손 끝이 스친 공간마다 따뜻한 집처럼 아늑하면서도 화려한 생명력이 살아나는 느낌을 주었다고나 할까?

……”

내가 제안 하나 할까요? 다음 달부터 디자이너 대신 수지양이 각 절기 컨셉을 정해서 한 번 가구가게 전체 장식을 맡아서 해보겠어요? 보수는 더 올려줄 수 없지만 수업 하나 수강료를 내어줄게요. 이 근처에 MICA라는 미대에 가을 학기마다<인테리어 디자인의 개요> 수업이 있는데 한 번 들어볼 시간이 되겠어요? 그 수업을 들으면서 수지양이 그 분야에 대해 어떻게 느끼게 되는지 한 번 봅시다. 그 이후의 일은 그 때가서 이야기 다시 하구요. 만약 수지양이 그 분야에 뛰어들 마음이 있으면 졸업 후 우리가게 전문 디자이너 겸 인테리어 디자인 컨설턴트로 적어도 5년은 일하겠다는 계약을 조건으로 인테리어 디자인 과정을 밟는데 필요한 학비를 지원하겠어요.”

어머나, 어머나! 내게 이런 기회가 오다니! 지금 이 가게의 매니저 제니도 이렇게 사장이 키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난 가구도 데이나 만큼 잘 팔지도 못하고 아직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나 초보인데 사장님이 이런 제안을 해주시다니……!

 

날아갈 듯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칭찬을 받은 어린 아이처럼 신이 나서 우쭐거리는 마음에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엄마가 끊여놓으신 김치 감자탕을 먹으며 사장님의 제안과 앞으로 경험하게 될지 모르는 전문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대해서 재잘재잘 떠들었다.

막상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우니 차가워진 밤공기처럼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 앉았다. 내일이면 지난 번 가게에서 월터를 만난 지 이주일 째지만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며 아직 그에게 전화하지 못하고 있다. 엄마 앞에서 가구점에서 일어난 일들은 모조리 떠들어 대면서도 월터를 만났던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양 갈래로 길이 갈라지는 시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순간.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했던가! 지금의 작은 선택이 가져올 미래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겠지. 한 길은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이 보일락 말락 좁은 길. 인테리어 디자인을 좋아하게 될까? 지루해지지 않고 끝까지 공부해 낼 수 있을 만큼 적성에 맞고 잘 할 수 있는 일일까? , 륙 년 뒤나 되어야 풀타임을 해서 월급을 제대로 받고 생활할 수 있을 텐데. 그 땐 내 나이 마흔을 바라보고 있을 텐데…… 다른 한 길은 지금까지 공부하고 일하며 수도 없이 왔다갔다해서 익숙한 대로변처럼 넓은 길. 이미 경력도 있고 당장 안정적인 월급도 보장되어 있다. 모래사막에 내던져 진 것 같다. 저 모래사막을 지나면 기름지고 살기 좋은 가나안 땅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져보려고 하지만 언제 다다르게 될지 모르는 기약할 수 없는 그 땅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 대는 떠나온 곳으로부터의 다시 돌아오라는 유혹. 이 밤에 나는 친구 진현이가 그리워진다.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다. 그녀의 다부지고 낭랑한 음성,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그녀의 충심 어린 조언이 그립다. 하지만 오늘 밤은 너무 늦었다. 사실 난 그녀가 뭐라고 할지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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