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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은 지키고 굳히는 것이다

Author
혜강
Date
2009-04-07 21:13
Views
16468
정형은 지키고 굳히는 것이다.



                                                                  이 봉 수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시조는 정형시(定型詩)라고 한다. 정형이란 형(型)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매사(每事)에 형이 정해지는 것은 수없는 반복과 시행착오를 거쳐 가장 편하고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것을 찾아내어 이를 검증하고 공인함으로서 이루어진다. 시조정형은 마치 산길이 형성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가형태이다. 처음에는 개개인이 각자 풀섶을 헤치며 가지만 차차 여러 사람이 같은 진로를 이용하게 되면 저절로 길이 난다. 이미 형성된 길에는 통행규칙이 있다. 질서를 지키며 샛길을 내지 말고 정도를 걸어야 한다. 정도를 지키며 굳혀야 큰 길(大道)이 된다. 정형은 지키고 굳히는 것이다.

 

[한국어는 교착어(膠着語)이기 때문에 말꼬리에 의미가 없는 접미어가 붙어야만 언어로서 제 구실을 다하게 된다. 체언에 조사가 붙어야 하고 용언의 어간에 어미가 붙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대개 3음 아니면 4음이 된다. 그러니까 한국시의 음수율은 3.4 아니면 4.4가 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김춘수 저 <시의 이해와 작법> P13)

 

따라서 시조정형은 한민족의 언어형태에 깊이 뿌리를 박고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스럽게 발달되어 온 시형식인 것이다. 이와 같이 3.4조 음보율을 기본으로 한 3장 6구 12음보와 종장의 절묘한 변화를 특징으로 하는 시조정형은 모든 시조시인들이 지키고 다듬어 더욱 큰 산을 만들고 바위같이 단단하게 굳힐 일이지 각자 중구난방으로 왜곡시키고 허물 일이 아니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시조정형보다 우월한 다른 정형이 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조가 아니다. 시조 정형을 흩트리거나 훼손한 시는 정격시조(正格時調)라고 할 수 없다. 시조라고 불러줄 수도 없지만 굳이 시조라는 이름을 붙여 약간의 대접을 해 준다면 파형시조 또는 변형시조라 해야 할 것이다. 한두 음보 부분적으로 형이 파괴된, 이 빠진 그릇 정도는 파형시조(破型時調), 많은 부분 파형을 하여 그릇의 모양이 변한 것은 변형시조(變形時調)라고 이름 지어 본다. 그리고 극히 일부 시조형식을 빌리기는 했지만, 형이 다 깨어져 버려 사금파리에 불과한 것은 의당 자유시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정격시조가 아닌 것은 모두 유사시조(類似時調) (또는 似而非時調)이다.

 

일본의 정형시에 비추어 본 우리의 태도를 따끔하게 질책한 시조 한 수를 소개한다.

 

시조 그리고 하이쿠

                                                  허 일

 

한 줄도 너무 길다!

섬뜩한 劍氣 앞에

 

석 줄은 너무 짧다!

律을 푸는 딸깍발이

 

눈동자

고 작은 窓이

온 宇宙를 여닫거늘

 

 

일본 하이쿠의 칼 같은 정형 앞에서 우리 시조는 너무나 여유 있고 느슨한 행복을 즐겼다. 그것도 모자라 3,4조 율격을 아예 무시하고 파격을 당연시하는 정형불감증에 걸려 있다.

"눈동자 고 작은 창이 온 우주를 여닫거늘" 명언이며 절창이다. 작아도 온 우주를 열어 보이거나 감출 수 있다. 짧다고 정형시를 못 쓰는 것이 아닐진대 시조 정형 파괴의 어떤 변명도 허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많은 시조시인들이 “정형대로 하면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려우니 한두 자 아니 여러 자라도 여유 있게 가감을 허용해야 한다. 시조는 융통성이 있는 정형시이다”라고 구차한 변명과 허황된 주장을 하면서 파격을 일삼는다. 정형으로 표현이 어렵고 글 솜씨가 모자라면 자유시를 쓰면 된다. 굳이 시조라는 간판이 왜 필요한가?

 

짧은 시조정형으로도 온 우주를 여닫을 수 있다. 한 자의 가감도 허용하지 아니하는 완벽한 정형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사이비시조를 도태시키고 정격시조만 정형시로 대우 받을 때 우리의 시조가 참다운 민족시로 시가의 중심에 자리 잡고 초.중.고 교과서를 석권할 것이다.

 

그러면 시조정형의 그릇에 담긴 글은 모두 시조인가?

현대시조는 형식도 중요하지만 내용이 현대시라야 한다. 언어를 현세어(顯勢語)와 잠세어(潛勢語)로 대별해 볼 때 뜻을 그대로 전하는 현세어로만 쓰여진 글은 산문에 불과하고 시조의 그릇에 담았다는 사실만으로 현대시조라고 할 수 없다. 시적표현은 잠세어를 동원한 표현으로서 [함축적인 의미전달이 안되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 없다] (김춘수 저 前揭書)는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현대시를 변용(變容)의 미학’이라고 하는 말과 같다.

오늘 날 많은 시조들이 형식과 내용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백인백색(百人百色)으로 무질서하게 발표되고 있어 시조의 장르가 해체위기에 처해 있음을 느낀다.

 


이상의 논조에 터 잡아 08년 2/4분기 시조단을 일별(一瞥)하여 본다.

 

4월호에 자유시 42편 시조 9편이 실렸다.

시조 9편중 신익교의 [바다로 떠나며], 장금철의 [아내를 부르는 초혼(招魂)] 등 2편은 정형을 갖추었고, 정표년의 [어이없어서], 송길자의 [욕망의 나무](사설시조), 趙豪英의 [대왕 세종송(大王世宗頌)], 이정자(자헌)의 [나이테], 유상용의 [부모], 김은숙(연강)의 [불씨], 모상철의 [귀무덤을 보며] 등 7편은 파형 또는 변형시조들이다.

 

5월호에는 자유시 42편, 시조 10편이 실렸다.

그 중 김수자의 [장미] 1편만 정격시조이고 홍승희의 [잡초], 이민영(석우)의 [채석강], 안을현의 [증손녀 백일잔치에서], 문복선의 [가락동 어시장], 박순화의 [하회(河回)의 촌가], 이원식의 [동그라미 속으로] 등 6편은 한 두 음보를 파형한 시조이며, 김교한의 [잠들지 않는 강], 원용문의 [농부], 김진길의 [가마오름 지하요새] 등 3편은 많은 부분 파형을 한 변형시조이다. 특히 이민영의 [채석강] 첫째수 종장은 3.4.4.3으로 시조 종장을 크게 벗어나고 있다.

 

6월호에는 자유시 55편, 시조 7편으로 시조는 더욱 초라해졌다.

그 나마 홍진기의 [유통기한] 1편만 정격시조이다. 조혜숙의 [봄에 띄우는 편지]는 1음보가 파형이고 김만수의 [벽(壁)], 조홍원의 [가얏고], 유권재의 [봄길], 신익현의 [산(山).5040], 이태순의 [남한강,물빛]등 5편은 많은 부분을 파형한 변형시조이다.

 


2/4분기 전체를 통 털어 시조의 점유율은 16%도 채 안된다. 그나마 정격시조는 시조의 15%, 전체 시작품의 2%에 불과하다. 내용면에서도 주제에 대한 천착(穿鑿)이나 기발한 시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형상화되지 아니한 서술형 현세어로 쓰여 있어 괄목할만한 작품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고도 시조가 초.중.고 교과서에 많이 실리고 전 국민의 애송시이기를 바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원간문학 08.4월호>

 

     불씨

                                                                           김은숙(연강)

타 버린/ 재가 되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우리네/ 사랑도/ 이쯤에서/ 놓아 주자

하얗게/ 타 버린 후에야/

너를 태울 수/ 있다니

 

살아오는 동안/

아픔도/ 기다림도/ 있지만

우리가 언제/

저토록/ 뜨거운 가슴/ 나누어 보았니

산다는/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잖아

 

산은/ 외로워/ 강에 눕고/

강도/ 외로워/ 소리 내어/ 흘러 가는데/

하얗게/ 타 버린 후에야

너에게/ 가는 길이/ 보인다면/

오늘/ 뜨겁게/ 타오르자.

 

 

3.4조 음보율은 아예 무시하고 완전히 자유시를 쓰고 있다. 1연과 2연은 억지로 3장 6구 12음보의 틀에 구겨 넣어도 3.4조 기본 음보는 첫 행 한군데 외에는 찾아 볼 수 없고, 특히 셋째 연은 3장인지 4장인지도 알 수 없어 시조와는 거리가 멀다.

 

작품의 내용은 불씨, 삶, 산, 강이 아무런 연관성 없이 추상적으로 나열되었을 뿐 형상화 되지 못하고 있다. 시적 논리가 단절되고 센티멘털리즘으로 자기함몰에 치우쳐 있다.


 

2. 계간지의 작품들

 

(1) [계절문학]

한국문인협회에서 발간하는 계간지인 [계절문학] 08.여름호에는 자유시 34편에 시조9편으로 비교적으로 시조가 많이 실렸다.

그 중에서 박부산의 [전주 한옥마을], 이봉수(필자)의 [바람], 김태희의 [할머니 산소에서]등 3편은 시조정형을 갖추었고, 정완영의 [흩어진 눈발자국], 김옥중의 [그저 구름인 것을], 김숙자의 [천리향], 최영균의 [새벽에], 김창현의 [봄바람], 張龍福의 [退江에 서서] 등 6편은 파형 또는 변형시조이다.

 

<계절문학 08여름호>

 

흩어진 눈발자국

                                                                                                           정완영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스님은/ 우리 후인을/ 타이르기를/

아무리/ 텅 비워 둔/ 눈벌판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흩은 발자국/ 찍지 말라/ 당부했지만/

 

시답잖은/ 세상살이/ 흩어도/ 못 본다면/

누가/ 이길을 일으켜/ 나를 세워/ 줄 것인가/

눈밭에/ 흩고 온 발자국/ 저 좀 보소/ 매화꽃 같네/

 

 

3자 또는 4자를 써야 할 곳에 2자 또는 5자의 음보를 쓴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첫 구를 한자어의 표현대로 [西山大師 休靜/ 스님은/]으로 읽어도 음보율이 맞지 않다. 3장 6구는 갖추었지만 3.4조 기본율격을 크게 벗어난 변형시조이다.

첫 수는 내용상으로도 현세어로만 구성된 산문에 불과하다.



 (2) [새시대시조]

 


계간 <새시대시조>여름호의 작품들도 대다수가 파형 또는 변형시조이다. 정격시조는 가물에 콩 나듯 찾아보기 어렵다. 두 작품을 대비해 본다.

<새시대시조 08여름호>

                    

                           꽃 보기가 부끄럽다

                                                              채명호

 

공원 앞 벚나무가

꽃 피려고 줄을 섰다

몇 달 동안 준비하여

시험치는 학생처럼

꽃들은

성적이 없나

긴장없이 피가 돈다.

 

열흘 간 짧은 축제

아낌없이 털어내고

적어도 만족하는

그들 욕심 부럽구나

저마다

욕심이 가득

꽃보기가 부끄럽다.

 


약간의 어색한 표현이 있지만 형식과 내용을 잘 갖춘 정격시조이다. 19C형 서정시를 탈피하고 T.S엘리엇의 시론을 원용한 객관적인 상관물(수험생)을 병치하여 시적인 세계를 잘 펼쳐 보이고 있다. 벚꽃축제를 맞이하여 오랫동안 시혐준비를 한 수험생들처럼 담담하게 줄을 서서 열흘간의 시험을 치르고 욕심 없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벚나무들을 보면서 욕심으로 가득 찬 시적화자는 한 인간으로서의 부끄러움을 소박하게 실토하고 있다.

<새시대시조 08여름호>

 

-낱말 새로 읽기.34

                                                          문무학

‘덤’은/ ‘더하는 마음’의/

준말이/ 아닐까/

 

땀내/ 물씬 풍기는/

난장 바닥/ 모퉁이에서/

 

고향땅/

사투리처럼/


푸근하게/ 안기는/

 

초장과 중장이 3.4조 시조율격이 아니다. 변형시조이다.

[‘덤’이란 말은 고향땅 시골장터(난장바닥) 모퉁이에서 땀내 물씬 풍기는 사투리처럼 푸근하게 들리는(안기는) ‘더하는 마음’의 준말이 아닐까?] 이것은 현세어로만 된 산문이다.



산문을 행,연을 지어 시형식으로 모양만 내면 시가 되는가? 쉽게 쓰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산문을 도치법을 써서 앞뒤를 바꾸어 놓고 단어 한 두 마디 이해하기 어렵게 바꾸어 놓았다고 시인가?

(3) [시조문학]

계간 <시조문학>여름호에도 파형 또는 변형시조가 많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정격시조가 다른 문예지보다 많아 보기에 좋다.

다시 읽고 싶은 시조로 소개된 이지엽의 [하동가는 길]은 1연 15행의 자유시라 함이 마땅하다. 수의 구별도 없을 뿐만 아니라 3.4조 음보는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2~9자의 불규칙한 음보로 일관하고 있다.

정위진의 [할미새의 변], [국보 1호를 떠나보내고], [커피를 마시며], [까치설날에], [물망초(勿忘草)]등 5편은 2자 또는 5자의 음보가 한두 군데가 아닌 변형시조이다.


양점숙의 [홀씨의 바람], [섬 그 진실], [화재]등 3편도 변형시조이다. 대표적인 예를 든다.

<시조문학 08여름호>

 

                            홀씨의 바람

                                                                                                  양점숙

 

줄행랑치는/ 봄날/ 안개비/ 자욱했다/

이별인줄/ 몰라/ 바람의/ 뜻을 몰라/

축축한/ 날개를 세워/ 한 떨기/ 잎새 속으로/

 

새까맣게 탄/ 그리움/ 달무리로/ 차오르니/

바라보는 것도/ / 만국기처럼/ 흔들리다/

완강한/ 씨 내림에 밀린/ 그 봄의/ 꽃샘바람./

 

 

3.4조 기본율격을 벗어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 변형시조이다 (밑줄 친 곳).

한떨기 잎새속으로 떨어진 홀씨가 꽃샘바람도 밀어내고 씨 내림을 한다는 진술을 어렵게 풀어내고 있다. [이별], [바람의 뜻], [그리움], [바라보는 것]등 정서가 物化 내지 형상화되지 않고 추상적인 서술에 그치고 있다.



 <시조문학 08여름호>

 

                     폭죽놀이

                                                               김복근

 

새 한 마리

날아올라

빗금을 긋고 있다

그 뒤를

따라가는

새 한 마리

또 한 마리

여물어

씨방 터지듯

빈 하늘

맴을 돈다.

 

 

흠 잡을 데 없는 정격시조이다.


폭죽이 밤하늘에 솟아올라 터지는 광경을 새가 날아오르는 장면으로 형상화하여 실감있게 그려내고 있다. 어슬픈 서정이나 낭만주의가 머리를 들이 밀 틈을 주지 않고 ‘시는 시자체로 보아야 한다’는 T.S엘리엇의 말처럼 시에 대한 객관론적 관점에 입각하여 쓴 작품으로 보인다. (김병택 편저 <현대시론의 새로운 이해> P9참조)

 

3. 중앙시조백일장의 작품들

 

(1) 08.4월 (심사위원: 이승은, 홍성란)

장원:

     자마이카 혹은 사랑에 대한 미련 (마하연)

본래도 소홀한데다// 지난 겨울엔 더 더욱이// 찬 곳에 그냥 두고// 본체만체 그렇게//

잎사귀 누렇게 되길// 바란 것은 아닌데//

 

버리고 돌아서니// 아니다 싶은 생각// 푸른 빛 거의 없지만// 아니 조금 남기도 한 듯//

다시금 돌보아 주면// 싹이 날지, 어떨지//

 

차상 :

      시인 (김 원)

향기만 남겨두고// 그냥 지는 꽃잎이다// 빈손으로 왔다 간// 바람 같은 무명 시인//비운다.// 타고 간 배의// 짐이 되는 달빛마저.....//

 

차하 :

       섬마을 아이들(김상아)

 

아버지를 저 바다에 묻어둔 아이들// 뭍에 나간 엄마마저 가슴에 묻고 나면//

꽃다운 청상으로 늙은 할머니만 남는다//

 

그리움도 파도에 쓸려 가면 좋으련만// 밀물마다 두 눈 가득 차오르는 눈물방울//

저 멀리 배만 보여도 행여나 엄마일까//

 

할머니 젖가슴에서 엄마냄새 나는 날은// 아빠가 꿈속으로 찾아와 주신다고//

바다를 용서해버린 바다 같은 아이들//

 

 

(2) 08.5월 (심사위원 : 박기섭, 이지엽)

 

장원 :

       아버지의 운동화 (김보람) 

            

진흙인지 먼지인지 야윈 발을// 물고 있는// 뒷굽 닳은 운동화 아버지의// 얼룩들이//

제 가슴 어린 섬돌 위// 아픔으로 남습니다//

 

구긴 지폐 손에 놓고 쓸쓸히// 돌아서며// 밤 새워 적으셨다는 부치지 // 한 편지//

정말로 길고 슬픈 꿈// 아직도 꾸십니까//

 

먼 길을 홀로 걸어 딸은 이쯤 // 서 있는데// 지줏대에 기대 있는 대추나무// 볼 때마다//

깊어진 두 눈자위에// 맑은 물이 고입니다//

 

차상 :

       독도법 (김대룡) 

            

순찰중인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어느 중년 남성의 느닷없는 노상방뇨//

와중에 오줌은 흘러 길 위에 길을 만든다//

 

유속이 느려진 때 묻은 발걸음에// 고장 난 나침반의 자침은 휘청인다//

갸우뚱 몸을 기대는 바스러진 저 뒷굽!//

 

탐색 범위 좁혀가는 아뜩한 좌표면 위// 아딧줄*에 엉켜버린 기호들이 풀어내는//

지도 속 등 푸른 경계, 몇 올의 새치 같은// 귀가의 얕은 골로 굽이치는 등고선//

지상의 한 모서리에 고여 가는 시간들이// 축척의 깊어가는 밤, 골목길을 밝힌다//

 

*아딧줄 : 바람의 방향을 맞추기 위하여 돛에 매어 쓰는 줄

 

차하 :

     꿈꾸는 교실 (송영일)

             

노을이 길을 내자// 하늘 따라온 구름이// 한낮을 몰고 간// 밤의 기호로 떠올라//

시간의 간극을 잰 듯// 별빛으로 누워있는 곳//

 

저곳에서 좌표 하나// 끄집어내 촛불 켜놓고// 마침맞게 쏟아놓아// 반짝이는 활자들을//

손안에 펼쳐진 책 속// 깃발로 꽂아놓는다//

 

집착하면 할수록// 먼 곳 있는 마루누리에// 산등성이 넘어가는// 늦바람 꽃술 흔들어//

연초록 우거진 숲 속,// 씨방 가득 채운다//

 

 

(3) 08.6월 (심사위원: 박기섭, 이지엽)

 

장원 :

        새만금 소묘 (박솔아)

 

뚝 멈춘 갈필 끝에 섬 두어 곳 나가 앉고// 저물도록 꿈틀대는 저 바닷물 역마살로//

눈 감은 갯벌을 다시 일어서라 매질한다// 혀옇게 진을 치는 해무같은 긴 거품띠//

거 너무 졸고 있는 발동선 닻 내리다 말고// 방조제 안쪽에 갇힌 붉은 울음 듣고 있다//

 

차상 :

        개밥바라기 (김영희)

 

초승달 내려 앉은 아르테미스 석상앞// 소녀의 가슴 언저리 은화살이 꽃힌다//

수묵의 어둔 하늘에 점묘화로 뜨는 별// 어머니 손때 묻은 마당비 쓸어 보다//

몽땅해진 자루마냥 땅에 붙은 그림자로// 목탄 빛 밑그림 위에 하늘금을 긋는다//

언제든지 손 뻗으면 가 닿을 유혹의 중심// 노을빛 문지르면 떠오르다 사라지는//

활짝 편 두 팔 사이로 피어나는 환한 꽃//

 

차하 :

        오후3시 (장현수)

 

마치 꼭// 닭 가슴살.// 뽀얗게 길이 난// 퍽퍽한 구름을// 함빡 물어// 소화 중인// 사내의//

두 눈 속에도// 몽롱히// 구름// // //

 

 

필자의 종합평 :

2/4분기 중앙시조백일장의 작품들 역시 시조정형을 많이 벗어나고 있다.

총 9편의 작품중 4월 차상 김원의 [시인] 한편을 제외하면 모두 파형 또는 변형시조이다. 그 중 김보람의 [아버지의 운동화]는 비교적 정형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치지 // 한 편지//]로 부적절한 행갈이를 하여 음보율을 파괴함으로서 정격시조의 자격을 상실했다. 장현수의 [오후 3시]는 3.3조 음보 사용으로 음보율에 약간의 손상이 있지만 거의 완벽한 정형임에도 불구하고 종장 끝 음보를 [구름// // //] 로 행갈이 함으로서 정해진 음보율을 완전히 파괴한 변형시조가 되었다.

그 외 마하연의 [자마이카 혹은 사랑에 대한 미련], 김상아의 [섬마을 아이들], 김대룡의 [독도법], 송영일의 [꿈꾸는 교실], 박솔아의 [새만금 소묘], 김영희의 [개밥바라기] 등 6편은 정형의 음보율을 파괴하거나 종장 제2음보에 오류가 있는 파형 또는 변형시조이다.

더욱이 김대룡의 [독도법], 박솔아의 [새만금 소묘], 김영희의 [개밥바라기]등은 무슨 이유인지 수(首)를 붙여 놓기까지 하여 더욱 시조의 틀을 깨고 있다.

애써 갖춘 정형을 일부러 깨면서 읽도록 강요하는 배행은 정형을 무색하게 할 뿐만 아니라 맹목적으로 자유시를 흉내 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형은 자연스러운 발성법에 근거해서 형성된 것인데 이에 역행하는 억지 발성은 자유시가 아닌 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음보율과 자수율에 대한 이해와 아울러 수,장의 배행에 관한 올바른 이해도 따라야 할 것 같다.

신인들의 작품은 내용면에서도 괄목할만한 작품이 눈에 뜨이지 않는다. 통상적인 서술이나 흔히 보는 감정의 표현이 거의 전부이다. 시적 논리가 결여되고 결구력 없는 추상적인 진술이 많다. 과욕일지 모르지만 집중적인 관찰과 집착을 통하여 주제의 지배적인 인상을 찾아내거나 일반인이 보지 못하는 시적세계를 펼쳐 보인 작품이 거의 없다.

 

 

4. 문학상 수상작품

시조장르의 최고 문학상이라고 자처하는 가람시조문학상은 올해로 제 28회째를 맞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시상일: 08.5.13

수상자: 이우걸.

심사위원장 : 김제현 위원 : 전종수, 채규판, 한분순, 민병도

 

2편의 수상작품을 정밀 분석하여 본다.

 

 

       새벽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새벽은/ 새벽이 된다/

봉두난발/ 상처뿐인/ 제 가슴/ 쥐어 뜯으며/

유백의/ 찻잔을 만드는/

어느 도공의/ 기도처럼/

 

길은 아직/ 헝클린 채로/ 안개 속에/ 묻혀 있는데/

조간처럼/ 달려온/ 소중한/ 여백하나/

새로운/ 출발을 권하는/

아~/ 숨가쁜/초인종이여/

 

 

     부록, 부록같은

 

각주도/ 나보단/ 팔자가/ 낫다고/

뒷 페이지에/ 앉아서/ 투덜 거릴/ 때가 있다./

세상이/ 그런 투정을/

받아 주진/ 않지만./

서언처럼/ 유려하게/ 얼굴을/ 내밀 수 없고/

결론처럼/ 화끈하게/ 주장을/ 펼 수 없다는/

카니발/ 뒷좌석에 앉은/

부록들의/

불만을/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전셋집을/ 옮기고/

아들의/ 고집으로/ 전학을/ 시키면서/

김씨는/ 어쩌면 자기가/


부록 같은/ 생이라고?/

 

심사위원 심사평 :

수상작으로 선정된 [새벽]과 [부록, 부록같은]은 자기보신과 관념적 서정으로 기울고 있는 시조단에 .......이우걸식의 문명비판과 자성적 성찰이 돋보이는 작픔으로 평가되었다.

[새벽]은 자연인으로서의 삶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도식적이고 구태의연한 의식체계에 울리는 하나의 경종이자 메시지이다......누구나 맞이하는 ‘새벽’이지만 기다려서 맞는 정신의 건강성이 읽는 이의 마음을 여미게 하는 작품이다.

여기 ... 또 다른 한편의 사회진단성 리포트 [부록, 부록 같은]이 있다. 누구나 자연에 순응하는 지혜로운 삶이고자 하나 물질문명이라는 거센 물결에 떠밀려 내려가는 현대인의 삶은 우유부단하기 그지없다. 있으면 있는 대로 도움이 되지만 없어도 불편하지 않은 현대인의 삶을 ‘부록’이거나 ‘부록 같은’것으로 진단한 이우걸의 포커스는 예리하고 시사적이다.


 

필자의 작품평 :

우선 시조의 형식면에서 [새벽]은 정형을 일탈한 음보가 8개나 되고 둘째수 종장 둘째 구를 아~/ 숨가쁜/초인종이여/로 2음보의 자리에 3음보를 앉힌 변형시조이다, [부록, 부록같은]은 4개의 파형음보에 첫째수와 둘째수의 구별을 없애고 한 연으로 취급한 자유시에 가까운 변형시조이다.

[시조의 큰 상을 타는 수상작품까지도 정격이 아닌 파격작품을 즐겨 뽑고 있으니 그것 또한 큰 문제가 아닐수 없다](시조문학 08여름호 P218)는 이정자 시인의 말은 바로 가람문학상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내용을 보자.

작품[새벽]은 첫째 수에서 ‘새벽’은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새벽이 된다]고 진술을 하고 있으나 시적 논리가 결여된 자기주장에 불과하다. [...한 도공의 기도처럼]이 그 진술을 뒷받침하고 있으나 이것은 진술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근거 없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둘째수의 새벽도 [소중한 여백]과 [초인종]으로 형상화하고 있지만 [여백]이라는 이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므로 [소중한]과 상충되며 소중함을 강조해야 하는 새벽을 형상화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이 작품을 무슨 근거로 구태의연한 의식체계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라고 과대 평가했는지 알 수가 없다.

 

또 작품 [부록, 부록같은]은 (책의)부록들의 불만과 개인 김씨의 처지를 진술한 평범한 내용일 뿐, 사회진단성 리포트라고 평가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감이 있다.

첫째수와 둘째수를 묶어 놓은 제 1연은 ‘부록들의 불만을 세상이 받아주지 않는다’는 상상의 줄거리를 어렵게 도치법을 써서 표현하고 있다.

제 2연은 김씨의 독백에 대해서 시적화자가 의문을 표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의미 전달이 제대로 안됨은 물론, 문장이 현세어로만 쓰인 산문에 불과하다.

제 1연과 제 2연은 아무런 연관성 없이 제 각각 따로 논다. 제목 [부록, 부록같은]도 깔끔하게 시의 내용을 압축하지 못하고 애매모호하기만 하다. 제목도 2개, 내용도 2개인 2작품을 하나로 묶어 놓은 형상이다.

작품의 어디에도 이 시대 많은 남편들의 처지를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여 고발 또는 진단한 면이 보이지 않아 큰 아쉬움만 남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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