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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의 창작의식

Author
mimi
Date
2012-11-14 15:41
Views
19391

 


피천득의 창작의식 1 


元亨甲(문학평론가. 전한성대 총장)



非社會的 非公認的 人間社會


금까지 필자의 수필론 내지 패관문학론(稗官文學論)을 읽어 오신 독자들은 무슨 수필론이 그렇게 현학적(衒學的)이냐고 나무라실
것이다. 분명히 수필은 문학이고 더구나 수필은 서구에 있어서의 에세이와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삶의 현실을 살아 있는 그대로, 될 수
있으면 아무런 사전 준비나 계획 없이 본대로 느끼는 대로 말하듯이 쓸 수 있는 문학이라고들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마치
철학에서도 감당할 수 없는 문제라도 풀어나가는 것처럼, 흡사 아리비아의 미궁(迷宮)이라도 헤매고 있듯이 인간의 의식(意識)이나
인식론(認識論)에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러나 장르적으로 추궁해 볼 때 신라설화(新羅說話)이래의 패관문학이나 고대 그리스 견유학파(犬儒學派)들 이래의 에세이들은 그
발생동기부터가 수상(殊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의 정상적인 사고능력이라고 흔히 생각하고 있는 인간의 합리적(合理的)인 사고나
이성적 판단에 관계없이 오히려 그것을 에돌거나 외면하고 무시하는 가운데 이뤄지고 있는 것이 패관문학의 세계이자 수이전(殊異傳)의
세계이며 또한 몽테뉴의 「에세이」의 세계이자 서구적 에세이의 문장들인 것이며 오늘날까지의 수필세계이기 때문이다.


실 동양적이든 서양적이든 수필세계에는 기존의 모든 문학장르에 대한 일종의 미묘한 도전(挑戰)의식이 숨어 있다고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미 장르로써 사회화(社會化) 되어 버린 시가(詩歌)나 연극(演劇) 등으로써는 만족할
수도 없고 믿고 맡겨버릴 수 없는 언어형식상(言語型式上)의 부족감 같은 것이 절실하게 실감됐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공인(公認)되지
않은 새로운 스타일의 문장활동, 언어활동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됐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외디프스 王


령 서양 사람들이 흔히 인류 역사상 이성적 사고(理性的 思考)와 반 이성적 사고(理性的 思考)의 경계선 내지 기점으로 생각하고
있는 외디프스의 비극이 그것인데 이 「외디프스 왕」은 본래 소포크레스(BC 496~406)가 그들의 국가적 행사였던 연극제에
출품하여 우승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소포크레스의 이 「외디프스 왕」이 「안티고네」와 더불어 오늘까지도 지식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인간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란 것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자연성(自然性)에서 비롯된 것이란 사실과 또한 그
자연성적 죄악을 발견하고 스스로 두 눈을 뽑아버리는 등 자학(自虐)을 하게 되는 것도 역시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외디프스 왕의 비극은 결국 인간의 사고법(思考法)에 자연법(自然法)이냐의 문제를 안겨줬고 신(神)의 명령으로까지
되어 버린 인위법은 마침내 죽은 오라비(포류네이케스)의 장례식마저 치를 수 없게 되는 꼴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안티고네」의 비극인 서로 증오하게 위해서 살고 있느냐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살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리하여 소포크레스의 「외디프스」는 언제부턴가 자연인간(自然人間)을 증오하고 감시 감독하는 이성(理性)의 대명사가 됐고 사랑을
부정하는 부정적(否定的) 눈이 되어 버렸다. 본래 「외디프스」의 비극성(悲劇性)은 작중 주인공인 외디프스 왕 스스로의 이성적
판단에서 비롯된다. 무엇보다도 외디프스 왕 스스로의 죄악성을 끝까지 찾아낸 것도 스스로의 이성적 추구력(理性的 追求力)이며
자신의 운명을 지옥으로 내몰아버린 것도 결국 진리와 정의가 아니면 아니되는 그 이성적 권위(理性的 權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자연성이 저지른 죄악을 끝까지 추적해서 파낸 것도 이성이라는 그 파라노이아적(편집광적) 광증에서인 것이며
그 파라노이아적 광증을 오뇌(懊惱)하며 두 눈을 뽑아내고 자학을 음미할 수밖에 없는 분열증(分裂症)도 역시 그 이성의
파라노이아적 광증의 연속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리하여 이렇게 되면 이성적 사고가 결코 자연 인간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그릇이 아님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디오니서스 축제 중 최대의 관심거리였던 비극제(悲劇際)도 더 이상 갈데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코로노스의
외디프스」까지 써 놓고 죽은 소포크레스의 작가적 운명이 말해 주고 있는 것처럼 자연 인간을 구출해 줄 구세주(救世主)의 가능성은
비극에서 발견해 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자각할 뿐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또 한편의 「시학」(詩學)을 쓰겠노라고 약속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끝내 그 싸튜로스(Satyros 諧謔)중심의 「시학」을 결국 쓰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비극 중심의 시학
솜씨로써는 마치 이성중심주의적 플라톤이 인간의 가정과 가족을 내버리는 「국가」론밖에 쓸 수밖에 없었듯이 쌰튜로스를 즐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理性主義의 운명과 에세이의 出現


리고 그런 점에서 뒤늦게 발견된 것이 견유(犬儒 Cynics)풍의 이른바 에세이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유를
합리적으로 추궁해 들어가지 말고 짤막짧막하게 삶의 모습들을 드러냄으로써 자연존재를 먼 눈으로 내다보자는 것이다. 몽테느가 그
기독교적 이성중심주의의 가혹사상(苛酷思想) 속에서 인간의 삶을 새들이나 곤충들의 삶과 비교해 놓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인간정신의
여유를 갖고 싶어서가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핏하면 모세의 ‘간음녀는 돌로 쳐 죽여라’가 그러한 것처럼 가학(苛虐)으로 몰고 들어가는 이성적 판단의 파라노이아적 내달음을
피하자는 것이다. 사실 역사적인 파라노이아 현상(偏執狂現想)을 볼 때 인간의 죄악은 거의 인식론상(認識論上)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5세기 무렵부터 전 유럽에 편재(偏在)하고 있던 게또(유대인 制限居住區域)가 20세기의 제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 되어온 것을 볼 때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얼마나 편집광적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거의 2천년 간을 통해서 전
유럽의 서양세계가 유대인을 괴롭혀 왔으니 서구의 과학철학(科學哲學)사이에서 인식론적 절단(認識論的 絶斷)이니 단절(斷切)이니 하며
오히려 상상력을 강조하는 말이 나올만하며 1962년의 인류문화학자 레뷔 스트로스가 그「野生의 思考」를 예찬하는 가운데 이성적
사고를「溫床의 思考」「畜産의 思考」라고 규정한 것도 당연한 판단이다.


「野生의 思考」예찬자인 레뷔 스트로스가 마지막 책에서는 좀더 멀리 내다보는 눈을 갖자며 「아득한 視線」(Le Regard
Eloigne 86)이라는 책 제명을 붙여 놓고 있다. 그만큼 20세기가 끝날 때까지의 소위 인간적이라는 이성적 판단이란 것은
줄곧 절박하게 쫓기는 이성적 판단이었던 것이다. 온 국민을 굶주림 속에 몰아 넣고서도 이데올로기의 우위성을 주장해 온 소련 등
공산치하의 나라들을 생각하면 이성적 사고란 것이 얼마만큼 자기 기만에 빠지기 쉬운 자기 기만인가 깨닫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레뷔 스트로스의 마지막 에세이인 「아득한 視線」역시 이제 인간은 좀더 멀리까지 내다보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생각해보자는 인류문화 사학자의 염원이자 요청일 것이다.

마음의 여유와 수필


서양을 막론하고 인류는 더 이상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이성의 역사가 만들어 놓은 각종의 학설이나 이상(理想), 이념, 사상 등에
시달려 왔다. 그리고 그것들이 옛 할아버지의 뒷동산에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는 우리의 소박한 시선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새삼 절실하게 알게 됐다. 이성적 요구들은 항상 다급하게 멱살을 쥐고 서두는 것이 특색이지만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저런 것들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인 것이다.


음의 여유란 말은 우리의 조상 어른들이 다급할 때마다 가족이나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할 때 곧잘 쓰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그러나 수필에 맛들은 사람들은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 땅에 수필의 새바람을 불어 일으킨 피천득 그분 말이다. 단
한구절밖에 아니 되지만 최초의 수필론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수필」의 끝부분에 지나가는 말처럼 흘려 놓은 것이 바로 마음의
여유였던 것이다.


자는 행복스럽게도 언젠가 피 선생께서 보내주신 一朝閣版의 「琴兒文選」을 책상머리에 갖고 있지만 이 「琴兒文選」의 제일 앞에 나와
있는 것이 곧 피천득의 「수필」이다. 필자가 경주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있을 때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즐겨했던 바로 그 「수필」인
것이다.

균형 속의 파격


런데 필자는 피천득의 그 ‘마음의 여유’를 생각할 때마다 궁금하기 짝이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도대체 영문학을 전공했고 특히
영시를 즐겨 가르치며 스스로도 영시 이전인 30년대 초에 많은 시들을 발표했고 그의 첫 시집인 「서정시집」이 당시의 相至出版社에서
출판되기도(1947)했다. 우리나라의 작금까지의 풍조로 따진다면 마땅히 시인으로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으로 있어야
하는 그가 왕성하게 시작을 몰두하고 있을 때인 30년대 초부터 수필을 쓰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그의 첫 文選集인 「산호와
진주」(1969)에 이르면 그 서정시들과 수필들을 같이 어울려 엮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문단의 풍조로서는 그야말로 어처구니
없는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수필을 잡문으로 밖에 취급되지 않던 그때의 피천득은 그의 주옥 같은 시와 수필을 한문선집 속에 엮어
넣고 있는 것이다.


리고 그 문선집의 첫 수필인 「수필」속에 피력되어 있는 것이 바로 덕수궁에서 유심히 보아 두었던 청자연적(靑瓷硯滴)의 ‘정연히
달려 있는’ 연꽃잎들 중 하나만이 ‘옆으로 약간 꼬부라져 있는’ ‘그 균형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 이 바로
수필이요, 그렇게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곧 수필이란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쓰는 것은 슬픈 일’이란 것이다.

따라서 피천득이 생각하고 있는 수필의 가능성은 오직 ‘마음의 여유’에 달려 있다는 말이 된다. ‘마음의 여유’가 없고서는 아예 수필은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쓸 수 없다는 말은 수필을 잘 쓰고 잘못 쓰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대체 마음의 여유가 없고서는 수필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수필에 있어서의 ‘마음의 여유’는, 시인
작가들에 있어서의 특수한 언어기법(言語技法)이나 문장력과도 상관없이 필수적으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선재조건이란 말이기도 하고 또한
피천득에 있어서 수필은 어떤 문학적 재능이나 예술적기법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란 말이기도 하다. 물론 좋은 수필, 매력있는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그러한 작가적재능이나 작가적 의장(作家的 意匠)도 있어야겠지만 그러나 수필의 생명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렇다면 이제 우리가 파악하고 이해해야 될 것은 바로 피천득이 수필의 생명인 것처럼 강조하고 있는 그 마음의 여유를 우선 찾아나서야
하는데 그 마음의 여유 역시 피천득이요, 지극히 간명하게 제시하고 있어서 재미 있다. 피천득은 누구나 보아왔고 볼 수 있는
덕수궁의 청자연적 뚜껑의 무늬에서 기묘하게도 그 마음의 여유란 것을 찾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이 생긴 연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는데 다만 그중 한 꽃잎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져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균형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破格)이야말로 마음의 여유요, 수필의 생명이란 것이다. 참으로 수필론 치고는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든 똑
같아야 하고 정연히 한쪽으로만 달려 있어야 하는 것도 인간의 질서의식(秩序意識)이요, 이성(理性)의 뜻인데 이 청자연적의 옛사람은
정연히 달려 있는 꽃잎 중 한 꽃잎만을 약간 옆으로 꼬부려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았고 거슬리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 파격이야말로 더 자연스러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꼬부라진 꽃잎과 匠人의 視覺


자는 「수필」 속의 이 대목을 이 피천득의 대목이야말로 피천득의 살아있는 자연발견이요, 살아있는 인간적 삶의 발견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물론 청자연적의 옛 장인(匠人) 역시 인간적 삶의 자연을 마음에 두고 그와 같이 한 꽃잎만을 약간 옆으로 꼬부려 놓았을
것이며 또한 그것을 본 피천득 역시 그 옛 장인의 그러한 의장(意匠)의 뜻을 읽었기에 그 꼬부라진 한 꽃잎을 바로 마음의 여유라고
해석했을 것이다. 그 같은 꼬부라진 꽃잎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인간적인 자연존재의 삶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실 자연의 세계에는 약육강식(弱肉强食) 등 이성적 사고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 얽히고 설키며 공존하고 있고 그 점에서는 인간적
생활세계도 마찬가지다. 어떤 의미에서는 약육강식과 침략(侵掠) 쟁탈(爭奪) 등 모순이야 말로 자연현상이요, 인간의 생활현상인지
모른다.


론 그러한 것들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가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이성적 사고는 그 이성적 사고가 세워 놓은
합리적, 이상적(理想的) 가치의식에서만 그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가치의식의 자(尺)대로 잴 수 있고 긍부(肯否)를 따질 수 있을
때에만 용서 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리하여 동서를 막론하고 인류의 이성적 사고는 사람이 살고 있는 곳마다 많은 가치의식과 도덕적 기준을 만들어 놓았으며 때에 따라서도
자연생존의 삶까지도 무시하고 위협하면서 인간의 자연생활을 외곡하기도 하고 뜯어 고치기도 하며 이성적 사고의 틀에 맞추어 오고
있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인류문화의 역사적 사실이다. 심지어 기독교 문화에서는 어느 절에 고대 그리스의 신화(神話)인
로고스(理性)가 창조신(創造神) 여호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됐고 막스 레닌 시대에 이르면 공산주의(共産主義)가 로고스를
사칭(詐稱)하며 군림하기에 이른다.

孔子의 시경과 유교


류문화사를 돌아볼 때 로고스가 그 자연선행(自然旋行)을 버리고 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꽤나 초기단계부터란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 그것(異性)은 분명히 인간의 자유로운 자연을 찬양하고 지켜보며 구가(謳歌)하는 시가(詩歌) 형식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시가가 무르익기도 무섭게 그것은 감시 감독하고 재판하는 칼로 변해버린 것이다. 동양문화사의 경우 그것은 공자의 70년간에 걸친
일생일대(一生一代)가 잘 말해준다. 분명히 공자가 제일 먼저 상고대 이래의 문자로 엮어낸 것은 시가집(詩經)이었다.


가야말로 상고대 이래 자연의 삶을 살아 있는 그대로 음미하고 표현할 자연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자가 그의 아들(鯉) 등
제자들에게 시를 공부하라고 애써 가르친 것(論語)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상고대 이래의 시가를 빼놓고서는 자연의 자유스런 삶을
가르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그 슬기롭다는 제자 중 단 한 명도 공자의 그 높은 뜻을 알아차린
제자는 없었다. 공자에 있어서는 그 시경이야 말로 이상국가(理想國家)의 토대였고 모델이었으며 인간적 삶의 기초였는데 그러한 공자의
시경은 공자의 일대가 채 끝나기도 전에 유교(儒敎)로 변해 버렸고 오히려 공자의 뜻인 자연의 삶을 무참하게 매질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時調의 운명과 고려인들의 슬기


리의 시가문학에 있어서 고려 말에 태동하기 비롯한 시조(時調)는 그대로 시절가요(詩節歌謠)로써 시경의 재현(再現)이라고 할만했다.
그러나 시절가요 역시 자연의 삶을 예찬하고 구가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유교의 칼날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변신해 갈
수밖에 없었다. 시절가요가 정치적관리의 놀이터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편 그러한 시절가요의 변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간의 자연 삶을 지켜나가자는 인간의 지혜는 소멸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바로 고려
초까지 왕성하게 살아 있던 신라설화요, 수이전(殊異傳)의 지혜요, 명운(命運)이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수이전의 지혜가
바로 자칭 패관잡기(稗官雜記)라고 자랑하고 내세운 재상 이제현(李齊賢)의 지혜로 이어졌고 또한 정면으로 유학타도를 외치고 출현한
박연암(朴燕岩)의 패설(稗說)로 발전하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든 자연의 인간적 삶을 지키고자 하는 자연에의
꿈과 지혜와 정열은 사라져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그 유혹이야 말로 자연 존재의 숙명적인 과제이기 때문이다.
제상자리를 내어 놓고 관직을 떠날 때의 이제현의 말씀처럼 도토리나무는 제목(材木)감이 되기 위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살고 싶어서 자연을 향수(享受)하고 싶어서 살고 있으니 그와 같은 도토리나무의 자연사랑을 끊어 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리가 이제 이와 같은 고려조 이제현의 역옹패설(擽翁稗說)을 피천득의 반세기전 수필인 「수필」속에서 다시 음미하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모든 나무들은 굵게 쭉쭉 뻗어 쓸모있는 재목감들인데 배배 꼬이고 비틀어진 도토리나무
할아버지(擽翁)고 그리고 똑같은 꽃잎들은 한쪽으로 정연히 피어 있는데 한 꽃잎만 약간 옆으로 꼬부라져 있다는 것과는 아무리 뜯어
보고 따져봐도 같은 뜻이며 결코 다른 입장이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와 같이 꼬부라져 있는 꽃잎을 인정하고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야말로 꼬이고 비틀어진 도토리나무를 인정하고 볼수 있는 마음의
여유에 틀림 없는 일인 것이다. 더구나 7,8백년 전 이제현의 경우는 그 쓸모 없는 도토리나무(擽)가 아호로까지 승격되고 있고,
5,6백 년 후의 영문학자 피천득의 경우는 일찍이 이 세상 어떤 시인 작가도 생각해보지 못한 못난 꽃으로 그 꼬부라진 꽃 한송이를
그려 놓고 있다. 한 편은 그렇게 꼬이고 비틀어져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도토리나무지만 아호(雅號)로 쓰고 있을 만큼 아끼고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에 마땅히 패설(稗說)감이 아닐 수없다는 뜻이고 또 한편은 이미 꼬부라져 버려서 감상(鑑賞)할 가치조차 없는
꽃이지만 그럴수록 옛날 우리 장인들이 그러했듯 수필에 있어는 중요한 소재요, 주세가 아닐 수 없다는 뜻이다. 볼품이 없든 쓸모가
없든 그것은 분명히 자연존재임에 틀림없고 살아 있는 자연존재야 말로 패설과 수필의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쓸모가 있다, 없다 또는 볼품이 있다, 없다를 따지는 것은 이성(理性)의 계산이 잣대(尺度)질 하는 것이고 자연존재의 세계를
생각하는 마음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고려조의 이제현과 20세기의 영문학자 피천득은 수필내지 패관문학의 관심영역을 분명히 밝혀 놓고 있는 것이다. 이 어찌 우연한 관심의 일치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서양의 存在論과 요순시대의 詩經


히 철학이라고 하면 으레히 고대 그리스 이후의 서양철학을 말하지만 자연존재의 문제가본격적으로 철학의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기이하게도 매우 늦다. 니체의 생철학(生哲學)이후 하이데거의 현상학(現象學)에 이르러 비로소 존재의 학(存在學)이니
존재론(存在論) 등의 용어가 등장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서 대체로 존재론의 근원을 말할 때는 겨우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形而上學)에 그 윤원을 찾게 되는 것이 상식이다. 말하자면 그 거의가 인식론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런 점에서 동양인의 경우는 좀 경이롭다. 시가(詩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요순의 나라(九洯國) 시가들인 시경의 이남(二南,
周南편과 召南편의 25수)외 시세계를 보면 그 시가들의 거의 모두가 시가를 주도(主導)하고 있는 것은 거의 반드시 동식물(動植物)
등 자연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남을 모델로하여 모방한 시들인 13개 국풍편(國風篇)의 모든 시가들 또한 거의 어김없이
시가를 끌고 가는 것은 자연존재들이다. 말하자면 동식물 등 자연 존재가 시가의 스승격이 되고 있는 것이다.


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인간생활의 모범(模範)이 될만한 동식물이 없을 때 그들은 상상적으로 동물을 만들어 내서라도 시가의 스승적인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자연존재가 사람의 생활을 가르치는 꼴이 되고 있는 것이다.


런 점에서 신라설화 이래의 우리 민족 패관문학들은 더 재미 있다. 가령 「호원」(虎願)에서는 인간과 호랑이가 사람들처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도 그 인간과 호랑이의 사랑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수로부인」(水路夫人)이나 「호질」(虎叱)은
더 재미 있다. 수로부인의 애정행각(愛情行脚)을 안내하고 있는 것은 수궁(水宮)으 거북이이며 또한 각각 姓이 다른 5명의 아드을
두고 있는 동리자(東里子)를 수절과부(守節寡婦)로 만들어 놓고 있는 재판관은 바로 호랑이이기 때문이다. 동리자의 문란한 성생활은
자연의 재판에서 제외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노골적인 정욕생활을 자연의 힘을 빌어 옹호하고 있는 셈이다.


리 민족의 거의 모든 패관문학들은 이와 같이 서양철학에 없는 특이한 자연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야 말로 서양철학이 뒤늦게
알게 된 존재론을 비록 패설(稗說) 등의 명칭으로이기는 하지만 선진문화적(先進文化的)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욕망(慾望) 역시
인간의 보편적인 자연현상(自然現象)임에 틀림없다고 할 때, 서양에서는 1960년대의 후반에 들어서야 인정하고 있는 소위
「욕망하는 思考」니 「안티 외디프스」니 하는 것을 이미 신라초부터 깨닫고 있는 것이다.

李齊賢과 皮千得의 유사성


려대의 우리 지식인들은 그러한 자연존재 현상을 깨달은 사람들이라고 할 만하다. 그중에도 이제현 같은 분은 그 대표적인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자연존재 현상의 자각이 아니고서는 몇 번의 재상까지 지낸 그가 자신을 쓸모없는 도토리나무로 자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30년대 이래 시(詩)에 집착하던 皮千得이 갑자기 수필을 쓰기 시작한 것도 수필만이 자연존재와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지위욕이나 명예욕, 물욕에 초연한 분이다.


직 소박하고 진솔한 자연인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철저하게 모방을 싫어한다. 오직 소박한 자연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수필세계 역시 「금지(禁止)」라고 하는 이성적 사고는 그림자도 어른 거려서는 아니된다. 순수하게
자연존재현상이어야 하는 것이다.


런 점에서 皮千得이 50여 년 전에 고백처럼 스스럼없이 제시했던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고 한 그
마음의 여유는 수필을 쓰고 있는 사람에게나 못 쓰고 있는 사람에게나 어떤 학문 이상으로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현대인일 수록 필요에 따라서만 생각하게 되고 성취욕(成就欲)에 쫓겨서만 연구하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인데 그렇게 되면 마음의
여유는커녕 마음이라는 인간의 불가사의한 가능성마저 누려볼 기회를 갖지 못하고 영영 잃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사실 皮千得에 있어서
수필을 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란 마치 탐험가(探險家)나 등반가(登攀家) 같아서 험난하면 할수록 궂으면 궂을수록 더욱더 그
마음의 시야(視野)에 애정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본래 그 마음의 시야야말로 태어난 원초지(原初地)인 동시에 항상 새로운
처녀지(處女地)이기 때문이다.


러나 마음의 여유란 말이 생각날 때마다 언제나 皮千得과 더불어 생각해 둘 것이 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가 페르샤의
화교(火敎)에서 태어난 산물(産物)이듯이 마음의 여유는 언제나 원초지여야 하고 언제나 처녀지여야 하며 결코 편하게 올라갈 수
있도록 잘 닦아진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니체의 생철학(生哲學)이란 것도 생겨난 것이지만 항상 마음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은 결코 길이 되어버린 이데올로기를 좋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점에서 피천득이 펼쳐 놓은 마음의 여유(수필)는 매우 재미있다. 그것은 오직 피천득의 ‘마음의 여유’가 찾아가고 찾아 본 皮千得의
‘마음의 시야’였을 뿐 결코 누구나 찾아갈 수 있는 만인(萬人)의 길이요, 이데올로기는 아닌 것이다. 사실 皮千得의 수필이 항상
새롭게 음미되고 좋다고 하지만 그 皮千得의 수필을 추종하고 모방할 수 있도록 생각해 본 사람이 있는가?! 참으로 皮千得 수필의
기묘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마음의 여유만을 열어 놓았지 그가 터 놓은 마음의 여유가 마음의 길(이데올로기)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의 여유와 마음의 자유


데올로기를 좋아하는 서구의 문물은 우리 땅에도 들어왔고 휩쓸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서구의 문물을 좋아하고 즐겨한 것이 바로
皮千得이다. 그 皮千得의 수필 속에서 서양의 이데올로기를 발견한 사람은 없다. 그는 어디까지나 그 ‘마음의 여유’(수필) 그
‘마음의 자유’(수필)을 사랑할 따름인 것이다.


는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변의 권유도 있고 하여 종교를 선택했다. 종교는 물론 누구에게나 확신의 길이다. 신앙 없는 종교는
생각할 수도 없고 신앙 없이 종교는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것이며 그러나 皮千得에 있어서는 종교까지도 수필적이어야 했다. 항상 그의
마음은 열려있어야 했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사로 잡힐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일요일은 더욱 텅빈 공일(空日)이요 자유로운
산책의 기회였다. 자유롭게 산책하며 마음의 여유를 즐기는 시간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요일만 되면 새로운 교회를 찾아 산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교회는 이 동네 저 동네 많이 있고 어느 교회엘 가든 마음이 놓이는 곳이며 마음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마음의 휴식처이다. 그가 인간 본연의 마음이 마음껏 나래를 펼 수 있는 마음의 산책길인 것이다.

데카르트의 命題와 마음의 여유

물론 모든 신앙생활인들은 그러한 피천득의 신앙생활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皮千得은 그 ‘마음의 여유’(수필) 없는 신앙생활을 생각할 수가 없다. 어느 교회를 가든 神

은 ‘마음의 자유’를 허락하는 그 마음의 신이기 때문이다.


수한 마음의 여유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그 똑 같은 신을 믿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실 어떻게 말하든 어떻게 마음을 한군데에 묶어
놓고 있으란 말인가?! 신에의 신앙심이 깊은 신부일수록 신에 대한 회의심(懷疑心)이 가득 차 있다는 말도 있다. 절대(絶對)
유신론자(有神論者)로도 유명하고 이성지상주의자이기도 한 16세기 르네 다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의심) 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를 정면으로 뒤집어 보면 그러한 신부의 진실성을 오히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생각한다’라고 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는 의심한다’는 뜻인 것이며 그리고 신은 형상(形象)을 갖추고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과연 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존재하고 있지 않은지 항상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항상 신 앞에 대좌(對座)하고 있는 로고스적 사고까지도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러나 우리가 전통적으로 써오고 있고 皮千得이 내놓고 있는 그 마음이라는 말은 그러한 서양사람들이 말하는 로고스나
에스프리(esprit)와도 다르며 흔히 마음의 번역어로 쓰고 있는 마인드(mind)로도 만족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마인드 역시
서양사람들에 있어서는 줄곧 신(神)의 대행어(代行語)인 로고스나 에스프리의 지배하에서만 있어 왔기 때문이다.


적으로 서양의 문화사에 있어서는 언제나 인간의 인식능력을 절대자(絶對者)의 산하(傘下)에 두고자 애를 쓰고 있는 편이어서 만일
분명확실하게 절대자의 권력산하에 예속되고 순종하지 않을 때는 여지없이 타도되고 끊어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 사람들은
가이스트(Geist. 精神)란 말을 생각해 냈고 파시즘을 만들 수 있었는지 모른다.


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은 항상 분명확실하게 단정하는 것을 꺼려하고 근거(根據) 밝히기를 싫어하는 점에서 지극히 인간적이고
항상 신성(神聖)을 띄고 있는 의식의 주체로서 만족한다. 그러나 의식의 주체로서의 그 마음이 육신의 어디에서 발현(發現)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하늘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음이 신성을 띄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이야 말로 보이는 것(存在者)는 물론 보이지 않는 것(不在者)도 생각할 수 있으며 자연세계와도 영통(靈通)할 수
있고 적어도 인간의 마음인 이상 그러한 의식의 가능성은 인간 누구에게나 공통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신성하고 오묘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마음인 것이다.

수필은 마음 비우는 작업


리하여 우리의 마음은 우선 ‘욕망하는 동물’인 모든 인간에게 열려있어야 하고 자연존재 세계에 열려 있어야 하며 모든
부재세계(不在世界)에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나의 지(知)나 판단과는 아랑곳 없이
여기나 저기에 널려있고 또한 그럼으로써 나의 삶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皮千得은 우선 그의
의식의 주체(主體)이자 지향성(指向性)이기도 한 마음부터를 될 수 있는대로 순수하게 비워 놓고자 한다. 흔히 종교인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마음을 비우라’는 말을 皮千得은 이미 30년대 초부터 수필로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마디로 말해서 皮千得의 수필들 한 점 한 점이 우리를 사로잡게 되는 것은 그의 마음이 그러니까 그의 마음의 지향성이 그 한 점 한
점의 수필들마다 최상으로 맑고 순수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필이라도 문학 작품이야말로 순수한 마음의
지야성을 유지하고 일깨우기 위해서는 최상의 기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러나 이렇게 되면 이미 상식으로 되어 있는 수필의 일반적인 통설(通說)이라고 할 수 있는 수필관(隨筆觀) 내지 皮千得 수필설이
와그르르 무너져 버린다. 무엇보다도 수필은 붓 가는대로 느끼고 생각나는 대로 준비나 계획 없이 쓰여진다는 것이 수필의 작법이요
수필만이 갖고 있는 특이한 생리(生理)이자 성격인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이 정설(定設)인데, 수필을 문학작품인 것처럼 쓰고 있는
것이 皮千得의 수필제작현실이라면 또는 皮千得의 수필제작정신이라면 놀라운 이설(異說)이요 역설(逆說)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러나 필자가 皮千得의 수필의 정체를 밝히기 위하여 그 수필들의 실체를 여러 모로 뜯어 본 결과 아무리 생각해도 붓가는 대로 느끼고
생각나는 대로 쓸 수 있는 문장이 아니라는 것만은 여실하게 판단했고 오히려 어찌하여 그런 수필론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의 수필들은 거의 모두가 말의 뜻도 환하고 저자가 그의 수필들에서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취지들이 잘 드러나고 있으며 말의 선후나 순서같은 것이 흩트러지거나 들죽날죽하는 법이 없이 고르게 정연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때묻지 않은 눈빛, 때묻지 않은 액체


러나 皮千得의 수필들은 한 가지 특색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어떤 수필이든 처음에 시작된 그 눈빛 한 가지로만
수필이라는 자기의 작품을 빚어 놓을 따름인 것이다. 말하자면 皮千得이 수필을 빚을 때의 그 皮千得의 액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
눈빛, 그 액체 한 가지만 쓰지 결코 다른 액체, 다른 눈빛으로는 보지 않고 쓰지도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만은 우리가 확인해
두어야 한다. 그 한 가자 눈빛, 그 한 가지 액체가 皮千得의 특이한 수필세계를 이뤄놓고 있기 때문이다.


래서 필자는 皮千得의 대표적인 수필이라고 할까, 또는 우리 독자들이 감동적으로 읽었고 기억하고 있는 서너 가지 그의 수필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가령, 그의 「琴兒文選」속에 들어 있고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장난감」 이나 「인연」,「찰스
램」, 「아인슈타인」 등이 그런 것들이다. 사실 이러한 작품들을 살펴보는 것은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수필들이 어느 나라의 어떤 회사에서 만든 물감으로 만들어졌는가를 단번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皮千得과 찰스 램


령 皮千得은 찰스 램이 좋아서 「찰스 램」이라고 하는 한 편의 수필작품까지 써 놓고 있다. 그리하여 흔히 사람들은 영국의 에세이
문학사상 최고의 작가요 어쩌면 세계적인 에세이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찰스 램을 본따서 皮千得이 수필을 쓰게 되었느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皮千得의 「찰스 램」을 아무리 읽어보고 찾아봐도 찰스 램의 에세이들을 읽을 때의 그 문학적인
맛을 느낄 사람은 없을 것이다. 皮千得의 「찰스 램」에는 찰스 램의 특색이나 습관, 사랑하고 싶은 그 마음씨 등은 잘 살아 있고 잘
그려놓고 있지만, 그가 「찰스 램」의 서두에 제시해 놓고 있는 것처럼, 그의 「찰스 램」과 찰스 램의 에세이들과는 유사성이
너무나 없기 때문에 그의 수필들 물감이 찰스 램의 에세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러나 피천득이 그려낸 「찰스 램」을 읽으면서 우리는 때때로 피천득 선생을 만났을 때의 그 피천득의 성격과 마음씨를 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피천득의 수필 「찰스 램」은 그와 모든 다른 수필작품들처럼 찰스 램의 인품과 생활습관 그리고 실패한
인생살이를 마치 그의 초상화를 음미하고 있는 듯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 놓고 있는 우리 원고지 10매 정도의 수필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200자 원고지 채 10매도 아니되는 그의 「찰스 램」은 찰스 램을 사랑하는 그 어떤 영국의 찰스 램 소개나
초상화보다도 훌륭하고 사랑에 넘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의 초상이라도 그리고 있는 것처럼 찰스 램의
초상을 음미하며 그 ‘술을 잘 하고 담배를 많이 피우며 친구와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고 남에게서 정중하게 대접 받는 것을
싫어하며 자기를 뽐내는 일이 없고 어떤 역경속에서도 인생을 아름답게 보려고 한’ 찰스 램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술을 좋아하고 담배를 많이 피우는 찰스 램의 생활습관 같은 것은 피천득의 생활습관과 같을 수가 없다. 피천득은 그런 생활습관을 따를 수가 없는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러나 피천득은 결혼과 연애에 실패한 찰스 램을 사랑하였고 여자를 존중히 여긴 찰스 램을 사랑하였으며 그리고 자기 아이도 없으면서
모든 아이들을 사랑한 찰스 램을 사랑하였고 특히 어린 굴뚝 청소부를 사랑한 찰스 램을 사랑하였으며 또한 찰스 램(羊)이 그
램(羊)이라는 자기 이름을 사랑한 것처럼 피천득도 그 램(羊)이라고 하는 양과 같이 순결한 찰스 램을 좋아하였고 지극히
사랑하였다. 찰스 램의 양같이 순결한 마음이야말로 바로 피천득 자신의 마음이어야 하였으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순한 마음으로 보고
느끼며 받아들이는 피천득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피천득의 수필「찰스 램」이 언제 어디에 발표된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피천득이 수필을 쓰기 시작한 30년대 초에는 이미 피천득의 마음이 찰스 램의 마음에 홀딱 반하여 동화되고 있을 때란 걸 짐작 할 수 있다.


엇보다도 그와 같이 찰스 램의 마음에 홀딱 반하지 않고서는 서정시에서 수필로 하루아침에 장르를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찰스 램의 마음이 곧 피천득의 마음이요, 수필에 있어서의 마음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수필이 아직 우리 문단이나 지식 사회에
들어오기도 전에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쓰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라고 마음의 여유와 수필을 직결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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