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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사랑하기 위한 수필쓰기

Author
mimi
Date
2012-06-23 09:09
Views
15459

 



                      내 삶을 사랑하기 위한 수필쓰기

                                             -유 연 선-




 수필은 적극적인 삶의 표현이다.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보려는 자성(自省)의 소리이다. 수필을

쓰려면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내가 수필을 쓰는 이유도 내 삶을 적극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독특한 버릇이 있듯이 글을 쓰는 데도 남다른 버릇이 있다. 나의 글 쓰는 버릇을 얘기함으로써

‘나의 수필작법’을 대신한다.


를 쓰는 어떤 친구는 글이 정리될 때까지 손을 씻는다. 소설을 쓰는 어떤 친구는 글이 잘 써지지 않으면

주위에 있는 종이쪽지를 다
씹어버려 곤혹스러워하기도 한다. 나는 글을 쓰기 전에 잠부터 푹 잔다. 너무

자서 잠을 자는지 깨어 있는지 분별이 되지 않을
때쯤 되면 비몽사몽간에 글을 쓰고 있음을 의식한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글 쓰는 신명이 사라질까 봐 단숨에 쓴다. 어찌된 일인지 꿈
속의 얘기를 쓴 뒤에는

좋은 평까지 받는다.


얘기를 쓰지 못할 때가 더 많다. 대부분은 메모장을 뒤적이면서 어떤 것을 쓸까 하고 고심한다. 메모를

보다가 새로운 느낌이
감지되는 소재를 붙들고 늘어진다. 신명이 나지 않으면 쓰다가 처박아 두었다가를

반복한다. 초고가 완성되면 덮어 둔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때까지 다른 글감을 찾아다니거나 딴전을

피운다.

진력나는 싸움은 퇴고를 시작하면서부터다. 문장력이 뛰어나지 못하고 감성조차 둔해졌다고 자책하면서

자꾸 고친다. 열 번 읽으면 열 번
고치고 스무 번 읽으면 스무 번 고친다. 읽을 때마다 고치다보면 주제와

제목까지 바뀌기도 한다. 농익은 술이 맛을 더 내듯
오랫동안 고친 글과 단숨에 써서 발표한 글을 뒤에

비교해 보면 오랫동안 다듬고 고친 글이 좋아 보인다. 퇴고를 하는데 컴퓨터가
없었다면 나는 글 쓰는

일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 표현하려고 했던 내용이 180도 달라져도 괜찮다. 버리기 아까운
얘깃

거리는 다른 메모장으로 퍼 옮기면서 퇴고를 한다. 수필쓰기가 소설이나 시쓰기보다 어렵다는 말을

수없이 되뇐다. 퇴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수필을 쓰는 자부심을 갖는다. 너무 고쳐서 걸레가 되어 버리면

글재주 없음을 탓하면서 또 딴전을 피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글감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곤 놀라서 묻어 두었던 원고를 다시 다듬는다. 몇 년째 매닥질 쳐도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 수두룩

하다. 언제 마음에 드는 글로 다시 태어날지 모르는 글들이 쌓여간다.


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글감이다. 어떤 일을 체험하고 나면 ‘글감이 되겠구나’하는 예감을 중요시

한다. 글감을 메모하고
일상생활을 통해 글감과 연계되는 사연들을 다 떠올려본다. 관련 자료도 찾아보고

전문가를 찾아 얘기도 듣는다.

글감 이야기가 나왔으니 내가 연작 형태로 쓰는 《금자라 이야기》는 사전에도 없는 이름을 복원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쓴 글이다.


필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쓴 글이고 글을 쓰는 신명을 얻은 글이다. 대여섯 살 무렵에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앓아누웠는데
어머니가 이상한 벌레를 잡아 먹이던 기억을 되살렸다. 내 딴에는 신선한

소재를 찾았다고 쾌재를 부르고 썼지만 작품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충분한 자료조사나 고증을 못한 채

유년의 기억을 더듬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조명하면서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으려고 했다.

아무리 좋은 소재라도 구성력과 문장력이 뒷받침을 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감했다.

《금자라 이야기》가 발표되자 학질에 먹었다는 사람도 나타나고 보는 것만으로도 재수가 좋다고 행운의

벌레란 얘기도 들려왔다. ‘금자라’라는 벌레가 실존했음을 확인하자 신바람이 났다.

《금
자라 이야기·그 이후》란 글을 또 썼다. 개작하여 《금자라를 찾아서》란 제목으로 책까지 냈다. 어느

문우의 부인이 그 글을 읽고
‘금자라’를 붙들었다고 알려왔다. 곤충도감에 나오는 코딱지 같은 그림 한

장만 입수한 채 사람들의 얘기로만 듣던 벌레를 만나는
기쁨은 컸다. 그토록 찾고 싶던 ‘금자라’를 60년

만에 재회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단숨에 달려가 기억 속의
‘금자라’임을 확인하고 집으로

가져와 사진을 찍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 재회의 기쁨을 <황금날개>란 제목으로 또
썼다.


자라가 ‘금자라남생이잎벌레’란 긴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글을 쓰는 일은 기쁨을
맛본다. 금자라를 또 만나게 되면 그 얘기를 또 쓸 생각이다. 생소한 벌레

이야기를 쓴다고 주변에서 ‘금자라 작가'라고 닉네임을
붙여주는 것도 즐겁다. 그까짓 벌레 한 마리를

가지고 호들갑을 떠느냐고 하는 이도 있겠지만 나는 금자라를 통해서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하고 교감하는

즐거움으로 글을 쓰고 싶다.

흔히 글감을 찾는 일이 수석을 탐석하는 일과 닮은 점이 많다고 한다. 좋은 소재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탐석하듯 여행도 한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생소한 체험을 통해 기억 저 편에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학은 작자와 독자가 교감하면서 감동을 준다고 한다. 감동을 주는 글은 재미있다. 재미있는 글은 독자가

모르는 세계를 체험하는
생소함이 있어야 한다. 생소함은 문학에서 전문성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남이

체험하지 못한 일, 남이 모르는 일을 찾아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려고 애쓴다. 관련 서적도 찾아보고, 몰두

하여 관찰도 하고, 몸으로 부딪혀 체험하는 일들이 전문성을 나타내기 위한
몸짓이다.

글을 통해 전통양식을 복원하는 일도 중요하다. 선인들의 슬기를 되찾고 잊혀져가는 언어를 되찾는 일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글 쓰는 이들의 책임이란 사명감도 있어야 한다.

            좋은 수필이라면 읽는 재미를 통해 지적인 쾌감을 줘야한다. 짧은 얘기로 긴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수필이

            좋은  수필이란 생각으로 오늘도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 고심한다. 내 삶을 보다 적극적으로 사랑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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