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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모더니즘 시의 특징

Author
mimi
Date
2012-02-17 14:21
Views
17903



1990년대 이후 모더니즘 시의 특징 / 문혜원


 

1. 도시성, 인공성, 반자연성



더니즘 문학의 대전제는 도시의 문학이라는 것이다. 모더니즘은 기술문명의 발당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응하며 변화해
왔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연의 질서에 순종하고 그것으로부터 의식주에

필요한 물적 자원을 조달받아온 농경공동체적 사고와는
구별된다. 도시에서 탄생한 모더니즘은 그 자체가

반자연적이며 인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술이 발당하면서 인간은 보다 효율적인 인공물을 만들기 위해 자연을 갈취하고 파괴해 왔다. 문명의 발달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부여받은 바 그대로인 상태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편리함>을 제공했고,

그것이 인간의 파괴행위를 정당화했다. 그러니 이
<편리함>은 인간을 육체적인 노동에서 자유롭게 하는 한편,

인간 소외를 불러왔다. 월등하게 효율적인 기계가 들어서면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분업으로

인해 생산량은 배가된 대신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은 약화되었다. 힘을 합쳐서 노동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개인 간의

관계는 점차 느슨해졌고, 그들은 각각 단절된 자기만의 공간 속으로 되돌려졌다. 물신주의가 팽배하면서

인간 사이의 관계는 더욱 황폐해졌다. 모더니즘은 자연과 더불어 생활해 왔던 인간이 이러한 새로운 도시적 환경에

마주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을 반영한 것이다. 세계와의 불화는 모더니즘 문학의 고전적인 주

제이다.


는 우리의 모더니즘 문학을 설명하는 데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도시성은 1930년대의 정지용, 김기림 등의

시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더니즘 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의 모더니즘이

<도시성=새로움>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후의 모더니즘 시에서 도시성은 더 이상 새롭고 유니크한

경험이라고 할 수 없다. 그만큼 도시적인 삶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도시성에 대한 반응은 경이와 매혹/비판과

우울 이라는 상반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반응은
공존한다...

 


에 비할 때 1990년대 이후의 모더니즘 시는 도시 경험을 생래적인 것으로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세대의

시인들은 병원
분만실에서 내어타 아파트 단지에서 자라고 단지 내의 놀이터와 놀이방에서 성장한 <아파트 세대>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인공의 공간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그들은 도시의 인공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설령 젊은 시인들이 시에서 도시에
대한 환멸과 문명에 대한 비판의식이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주변 환경에 대한 감상일 뿐이지 자연친화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쁜 도시 대 좋은 자연>이란

도식도 물론 성립되지 않는다.

 

도로에는 신호증과 횡단보도와 노란 중앙선이 있고


로의 위에는 구획 정리가 끝나지 않은 하늘과 세계를 불쑥불쑥 가로지르는 그림자가 있다 도로의 밑으로 는

시간이 뿌리처럼 뻗어나가고
나도 그 배선의 일부여서 생산 목표가 있고 작동 조건이 있고 전원이 있다 나는

내 몸을 켜놓고 나를 전송해주는 휴대폰을 들고
지하철 순환선에 올라탄다 나를 태운 순환선이 움직 이기 시작한다

나는 지금 가벼운 것에 올라타 있다 날아가거나 녹지는 않는 것이다
나의 휘발성은 일시적 이다

 

엘리베이터


궁의 시간은 미끌거리고 깨질 듯이 환하다 소리는 천상에서 떨어진다 하늘의 자궁은 태양 뒤에 가려져 있다

사방의 미끄러운 벽에
두리번거리는 내가 복제된다 오른쪽 모니터에서는 쉴 새 없이 바뀌는 오늘의 증시가 표시되고

왼쪽 모니터에서는 습도와 온도가 있다
양쪽 눈에 모니터가 와 박힌다 모니터가 내 눈을 대체한다 내가 건너온

출렁거리는 강과 강을 가로지르는 은색 다리는 모니터 안에
저장되어 있던 것일까 7 층에 도착했다는 소리가

떨어지자 정확히 엘리베이터의 한가운데가 쫙 갈라진다 순간 세계는 급작스럽게 광폭이
된다 나도 기억 장치쯤은

확장할 수 있다

 

-이원, <실크 로드> 부분

 


자의 생활공간은 자동차와 지하철, 모니터와 엘리베이터로 이루어진 인공의 도시이다. 도로 위에서는 차들이,

도로 아래에서는 지하철이
쉴 새 없니 사람들을 실어나르고, 화자는 거대한 자궁과도 같은 도시의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디지털로 번쩍이는 숫자들을 본다.
마우스를 클릭하면 날씨와 세계 정세와 주가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웹 사이트에 접속이 되고, 화자는 그 안을 돌아다니면 하루 종일을
잘 논다. 스스로 <전자사막의 유목민>임을

자청하는 이들 세대는 더 이상 자연이 연연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주거 환경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시는 인공적이고 반자연적이다. 자연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기억이나 친화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자연이 이상적이고 화해로운 공간이라는 것은 학습을 통해

얻어진 관념일 뿐이다. 이들의 시에서 유기체적인 사고나 친자연적이 성향을 찾으려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도시의 인공성은 이제
가장 일상적인 삶의 환경이 된 것이다.

 

2. 주체의 과잉과 유희성


더니스트들은 객관적인 현실이 따로 존재하는가에 대해 회의를 표명한다. <현대성>이란 사실주의 문학기

표방하는
<실제적> 진실이나 플라톤식의 <이데아적> 진실과 같은 지상의 진실로부터 현실을 제시하거나

언표함으로써
현실을 창조하는
자아의 진실에로의 전이를 의미한다. 현실은 오직 개개인의 내면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모더니즘은 주체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는 문학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렇다고 해서 모더니즘 시에 객관적인 현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모더니즘 시에 나타나는

현실은 시인의 주관적인
시각에 의해 선택되고 재해석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보들레르가

<산책자>라고 명명한
<예술가(시인)>라는 존재는, 대도시의 거리를 배회하며 문명의 상징인 호화로운 건물들과

군중들을 본다.
<본다>는 것은 보이는 대상과 보는 주체의 심리적 거리를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비판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모더니즘 시인들은 현실을 <보고> 그려냄으로써 일그러진 문명의 자화상을 그려내고자 한다.

세계와 심각한 불화를 겪으면서
불화한 자리에 자신을 세워둠으로써 긴장과 갈등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주체가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면서도 현실에 대한
관심과 객관적인 거리감을 상실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

 


에 비하면 1990년대 이후의 모더니즘 시인들은 먼저 단절을 자청하고 닫아버린다는 특징이 있다. 그들은

객관적인 현실이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 투영된 이미지들을 <보고> 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무관심하며

타자와의 의사소통에도 관심이
없다. 독자의 이해나 동조를 희망하지도 않는다.


더니즘이 내면 회귀적인 성향과 사회비판적인 성격이 주기적으로 교차되며 진행되어 왔다고 할 때, 유희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최근의
모더니즘 시들은 내면회귀적인 성향의 변형 형태하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1960, 70년대의 모더니즘 시의 내면성과 구별되는
이유는, 주체의 과잉상태가 놀이 형태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각각 혼자만의 놀이에 열중해 있는데, 혼자 하는 놀이이므로
규칙 따위는 필요치 않다. 순간순간 자신의

마음에 따라 규칙을 바꾸기도 하고, 규칙 없이 마구 흩어놓기도 한다.

 

첫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번째는 전화기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박상순,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 부분

 


자를 가르치는 장난감에서 유추된 듯한 이 시에서, 숫자와 대응되는 사물간의 관계는 그야말로 우연적인 것이다.

설령 숫자들이
장난감에 있는 대응 관계를 따르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 사이에 필연적인 연결성은 없다. 2를 비행기,

8을 늑대라고 하더라도 시의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이 대응 관계는 시인의 입장에서는 특정한 기준에 의거한 것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의미 없는
우연적인 조합에 불과하다. 독자는 규칙을 발견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 규칙이 일부 바뀐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변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의 규칙은 시인에 따라 개별적인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그들은 자신의 놀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각각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고립된 주체들의 집합이다.

유희적 성격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독자는
놀이를 이해하는 극소수 혹인 시인 자신으로 한정되는데, 그것은 결국

타자와의 단절을 불러온다. 그럼으로써 단절과 불화에서 시작된
유희는 결국 단절을 합리화하고 공고하게 하는

아이러니를 낳게 된다.

 

3. 닫힌 환상과 강박증


더니즘 시에서 환상은 주체의 고립된 내면과 자아 분열을 표현하는 방식으로서 사용된다. 그것은 실제적 현실에서 억압당하고 배제된
것들을 호출함으로써 현실의 불확정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주체의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환상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처럼 보이는데, 이는 영화와 애니메이션, 비디오 등 시각적

매체에 익숙해진 세대의 특징을 반영한다.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세계는 이미지가 현실을 지배하는 전도된 상황이다. 기호에 의해 산출된 시뮬라크르로 채워진 세계는, 환상이 피어날 수
있는 보다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


상은 현실과의 분리 여하에 따라 <열린 환상>과 <닫힌 환상>으로 나누어진다. <열린 환상>이
현실과 환상의

복합적으로 섞여 있어 경계가 모호한 것이라면, <닫힌 환상>은 현실과 환상이 철저히 분리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환상을 말한다. <열린 환상>이 환상과 현실을 끊임없이 중첩시키며 결국에는 현실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비해, <닫힌 환상>은 환상을 보여주기 위해 현실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닫힌 환상은 현실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 시는 <열린 환상>의 구조를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와 비교할 때, 1990년 이후 모더니즘 시에서 현실은 대부분 지워져 있다. 대신 자유롭게 출몰하는 이미지와 동화에

가까운
이야기, 의미가 포착되지 않는 언어의 조합들이 시를 만들고 있다. 현실과 환상의 절대적 분리를 지향하는

<닫힌 환상>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 시들에서 역시 환상은 은폐되어 있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상처들을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이들은
환상을 통하여 억눌려 있는 주체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트라우마에 얽어매고 그러한 강박상태를 시적인 원천으로
하려는 경향이 있다. 환상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처럼 보인다.

 


례식이 몇 시였지요 곧 가야 해요 겟 백 겟 백 미치겠군 그 노래 좀 꺼 주시겠어요 유리창의 무늬라도 가져갈래요

어땠든 오 년
넘게 이 방에서 당신과 딍굴었으니 시간이 흐른 뒤, 저 삐뚤삐뚤한 무늬들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만 죽고

싶겠죠 두시라고 했나요
그래요 그 손 좀 치워요 당신은 한 시도 내버려두지 않는군요

 


상 부르는 사람 방문을 열 줄만 알았지 닫을 줄 모르는 사람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내 눈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데 나는
여자에요 때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작은 불을 켜고 한 계단, 한 계단, 눈썹이 참 짙군요 달신 아 당신 듣기

좋은 멜로디에요 귀를
자를까요 자르겠어요 꿈이겠죠 너무 멀리 가지 말아요 물고기는 싫어요 기르기 힘들죠 당신을

핥고 싶군요 입술이 차갑군요 당신 참
무서운 사람이에요 사랑할까요 사랑할래요 당신 차라리 죽어버려요 아니 죽지

말아요, 계단을 내려서듯 더 많은 혼잣말을 통해서만 계단
끝의 당신에게로 하는, 그래요 나는 상처투성이 여자 좀

까다로운 여자입니다

 

-황병승, <그 여자의 장례식> 부분

 


근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새로운 시인의 시이다. 여기에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현실은 없다. 이 시에서 환상이

가지는 문학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비평가를 포함해서)은 많지 않다. 사실 이 시는 <의미적>으로 읽히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환상은 현실과의 긴장관계를 상실하고, 현실과 무관한 동화 속 이야기처럼 제시된다.

시를 읽는 독자들 역시 이 시가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환상임을 알고 있으므로, 환상 이상의 다른 의미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독자들은 오히려 편하게 시를 읽고 별다른
부담 없이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다.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 같은 판타지를 볼 때, 현실과
별다른 연관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고 즐거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때 환상성은 현실의 억압과 부조리를 폭로하는 고유의 전복적인 기능을 상실한다. 환상의 두 가지 측면 - 낯설음과 불편함을
제공함으로써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측면과 대리만족을 통해 거짓 화해를 부추기는 측면 - 중에서

비판적인 기능이 사라지고,
현실의 고통을 잠시 망각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환상성에 기잰 적지 않은

시들이 의외로 뿌리가 빈약해 보이는 것은,
환상이 종종 인위적으로 조작된 테크닉을 사용되기 때문이다. 놀이를

위한 놀이가 금방 진역이 나듯이, 놀이를 위해 강박적으로
되풀이되는 환상은 지루하고 뻔한 것이 된다.

 

3. 갈등의 미해결성과 상호복제현상


부분의 환상이 어두움과 혼란스러움, 엽기적이거나 그로테스크하고 파괴적인 형태로 나타나며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모더니즘 시의
특징이다. 위악적인 포즈들은 김언희를 비롯하여 김민정, 이민하, 고현정 등

여성시인들의 시에서 더욱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들은
<여성>이라는 주변화된 성별에서 오는 억압과 상처들을

뒤틀린 가족 관계나 절단되고 훼손된 신체, 난무하는 폭력과 죽음 등
그로테스크하고 엽기적인 형태로 표현한다.

 

이리 온 내 딸아

네 두 눈이 어여쁘구나

먹음직스럽구나

 

요리 중엔

어린 양의 눈알요리가 일품이라더구나

잘 먹었다 착한 딸아

후벼 먹인 눈구멍엔 금작화를

피고름이 질컥여

물 줄 필요가 없으니, 거

좋잔니...

 

-김언희, <아버지의 자장가> 부분

 


언희의 시에서 아버지는 권위와 남근의 상징으로서, 화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딸의 눈알을

파먹고 딸과 섹스하는
아버지의 형상은, 규칙과 제도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온 이성의 폭력에 대항하는

도발적이고 정복적인 상상력의 발현이다. 이는 여성
일반으로서 겪는 불평등한 제도의 억압과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결합함으로써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통과 갈등, 불화는 계속해서
반복되고 확산될 뿐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같은 사건의 미해결성은 모더니즘의 본연의 성격인 <현재성>과도 연관이 있다. 모더니즘은 본질적으로

<현재>의
문학이다. 그것은 이상적인 과거와는 단절되고 미래는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불안과

고통으로 대변된다. 현재의
갈등은 과거의 유토피아로부터 분리된 데서 비롯되지만, 과거로 회귀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선조적인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며, 과거와 현대, 미래는 단절되어 있다. 이러한

불연속적성은 모더니즘을 존속시키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주체와 세계의 불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더니즘은 본래 비유기체적 세계관에 바탕하고 있다. 주체와 세계 사이에 교감은 성립되지 않고 유추와

상응
또한 불가능하다. 따라서 모더니즘 시가 주체와 세계와의 불화를 주제로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 화해가 가능하다면, 모더니즘
시는 과도적이고 한정된 것으로서 시효가 다하면 폐기되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것이 내세우고 자 하는 것은 고통과 갈등이
지속된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모더니즘 시를 의미 있게 한다.


제는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다거나 해결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증식을 하면서

점점 타성화된다는
점이다. 이같은 현상이 반복될 때 고통은 놀이의 방법이 되고 자기 연민과 현실 도피를

정당화하는 방어막이 된다. 이는 병증의
원인을 규면하는 것을 회피하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새디즘적인

기벽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또한 더욱 중요한 사실은, 고통이
서로 다른 시인들에게서 상호 복제되며

그럼으로써 확대 생산된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에는, 뒤틀린 화법과 자기
분열적 상황의

전시, 환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행과 엽기의 상상력이 유행처럼 만연해 있다. 그들의 시는 각각 개별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고 있지만,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서 보면 엇비슷한 문제의식과 그만그만한

언술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고통의 정체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들의 시는 기교의

모사와 복제에 그치고 말 것이고, 그것은 또
다른 기교주의를 낳을 것이다.




-<시와 반시> 2006 가을호, <현대시학> 2009. 9에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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